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최초의 것들
김대웅 지음 | 노마드
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최초의 것들
강대웅 지음
노마드 / 2020년 12월 / 552쪽 / 28,000원
제1부 衣_ 우리가 몸에 걸치는 것들의 유래와 에피소드
순백의 웨딩드레스와 장례식의 검은 옷 하얀색은 청정과 순결을 나타내는 색이다. 그러나 고대 로마 시대의 신부는 노란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는 노란 베일을 썼다. 사실 신부가 쓰는 베일은 웨딩드레스보다 역사가 오래되었다. 그리고 베일은 신부가 쓰기 훨씬 이전부터 있었다. 복식사들에 따르면 베일은 남자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한다. 즉, 여성을 종속적인 지위에 두고 다른 사내의 눈으로부터 숨겨두기 위해서 고안한 물건이다. 그 긴 역사 속에서 고상함과 아름다움의 상징이거나 비밀리에 정을 통한다든가 상을 당한 것을 뜻했던 베일은 여성의 몸에 걸치는 물건이면서도 여성이 만들지 않은 유일한 의상용품이다.
동양에서는 적어도 4000년 전에 이미 베일을 사용하고 있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얌전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결혼한 여자는 남편에 대한 순종을 나타내기 위해 베일로 얼굴을 가렸다. 이슬람 사회에서 여성은 집 밖으로 한 반짝이라도 나갈 때는 반드시 머리와 얼굴의 일부를 가려야 했다. 남자가 만든 이 계율은 더욱 엄격해져서 나중에는 눈을 제외한 모든 것을 가려야만 했다. 기원전 4세기에는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결혼식 때 얇고 환희 비치는 베일을 쓰는 것이 유행했다. 당시는 드레스와 베일 모두 노란색이 유행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 하얀 웨딩드레스가 처음 등장한 것은 16세기다. 그러나 이 하얀 웨딩드레스는 ‘하얀색은 신부의 순결을 나타낸다’는 노골적인 표현인지라 그리 환영받지 못했다. 반면에 목사들은 신부의 순결은 당연한 일이며 새삼스럽게 떠들썩하게 말할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후 150년 동안 영국의 신문과 잡지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둘러싸고 열띤 논쟁을 벌였다. 그러다 18세기 말에 와서야 하얀 웨딩드레스가 일반화되었다. 복식사가에 따르면, 그것은 당시 팔리고 있던 정장용 드레스가 거의 하얀색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쨌든 1813년 프랑스의 인기 있는 여성지 《주르날 데 담》에 순백의 웨딩드레스 삽화가 커다랗게 실린 이래 하얀색은 웨딩드레스의 색깔로 정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서양식 웨딩드레스를 입은 여성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과 결혼식을 올린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공주, 즉 이방자다. 이후 1965년 당시 최고 톱스타였던 신성일과 엄앵란의 결혼식에서 엄앵란이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만든 서양식 웨딩드레스를 입으면서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장례식은 서아시아 일대에 살고 있던 네안데르탈인에 의해 시작되었다. 네안데르탈인은 동료의 시체를 쓰레기처럼 버리지 않고 장례를 치르고 매장했다. 시간이 흘러 고대 로마에서는 장례식 때 횃불을 육체를 떠난 혼을 저승으로 인도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했다. ‘장례’를 뜻하는 영어 funeral은 ‘횃불’을 뜻하는 라틴어 funus에서 유래한다. 장례식 때 촛불을 켜놓게 된 것도 로마 시대부터다. 그들은 시신 주위에 촛불을 세워 한번 육체를 떠난 영혼이 다시 돌아와 시신을 되살아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했다. 로마인은 어둠을 집으로 삼는 영혼은 빛을 두려워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갖가지 장례 관습도 죽은 사람을 애도하는 마음에서라기보다 저승에 대한 공포에서 시작된 것이 많다. 고인을 애도해 입은 검은 옷도 원래는 공포 때문에 생긴 관습이다. 서양에서검은색이 상복의 색깔이 된 것은 친척이건 적이건 또는 타인이건 어쨌든 죽은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그 기원은 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옛날 사람들은 한순간이라도 경계를 늦추면 죽은 사람의 혼령이 언제 다시 날아 들어올지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인류학 자료에 따르면, 원시 시대의 백인은 장례식 때 영혼을 속이기 위해 온몸을 새까맣게 칠했다고 한다. 반대로 흑인의 대륙 아프리카에서는 같은 이유로 온몸을 새하얗게 칠하는 부족이 있었다고 한다. 인류학자들은 장례식 때 몸을 까맣게 칠한 것이나, 가족이나 친척이 죽으면 몇 주나 몇 달 동안 검은 상복을 입었던 것은 영혼의 눈을 멀게 하는 방법이었다고 추측하고 있다. 얼굴을 숨기는 베일도 물론 이 공포 때문에 생긴 것이다. 지중해 연안의 여러 나라에서는 미망인이 꼬박 1년 동안 검은 옷과 베일로 몸과 얼굴을 감싸 죽은 남편의 영혼을 피해 숨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상복이 검은색인 것은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얀 피부에 반대되는 색이었기 때문이다.
핵폭탄과 비키니 수영복 수영복이 하나의 특별한 의상으로 탄생한 것은 1800년대 중반이다. 그때까지 수영이나 물놀이는 그다지 인기 있는 레크리에이션이 아니었다. 그래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수영을 할 때는 속옷 차림이나 알몸으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로 수영이 환영받게 되었고 수영복의 필요성이 생겨났을까? 1800년대 유럽의 의사들은 ‘마음의 우울함’을 고치는 레크리에이션으로 수영이 효과적이라고 권유하기 시작했다. ‘마음의 우울함’이라는 말에는 상사병 같은 한때의 감정부터 결핵성 수막염처럼 죽음이 확실한 증세까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고치는 것이 광천수, 샘물, 바닷물 등의 ‘물’이라는 것이었다. 이로써 몇 세기에 걸쳐 온몸을 물에 적시는 일은 죽음과 같다고 생각하던 유럽인이 수천 명씩 호수나 냇가나 해변으로 몰려가 물놀이를 즐기게 되었다.
이러한 수요에 발맞춰 등장한 수영복은 외출복의 디자인을 모방했다. 예를 들어 여성용 수영복은 플란넬이나 알파카 또는 서지 등으로 몸에 딱 맞는 정도로 만들었는데 다 갖춰 입으면 하이넥 칼라에 팔꿈치까지 오는 소매, 무릎까지 내려가는 스커트 밑으로 블루머, 검은 스타킹, 아마포로 만든 낮은 운동화를 신은 모습이었다. 이렇게 두꺼운 천으로 만든 수영복은 물에 젖으면 사람의 몸무게만큼 무거워져서 익사 사고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나중에 나온 좀 더 가벼운 ‘수영용 수영복’과 비교하면 초기의 수영복은 실로 ‘목욕용 수영복’인 셈이었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개입하기 얼마 전부터 몸에 딱 맞는 원피스식 수영복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1930년대에 들어서자 수영복은 노출 부분이 더욱 많아졌다. 여성 수영복은 어깨끈이 가늘고 등이 없는 디자인이 되었다가 곧이어 상의와 팬티로 이루어진 투피스 수영복으로 바뀌었다. 그 뒤에 등장한 것이 비키니다. 이 이름 때문에 비키니 패션은 불안정한 시대의 도래와 영원히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1946년 7월 1일 미국은 비키니 환초로 알려진 태평양의 마셜 제도 해역에서 원자폭탄을 투하해 핵실험을 시작했다. 원자폭탄은 그보다 1년 전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파괴한 것과 똑같은 것으로 전 세계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다.
그 무렵 파리에서는 루이 레아르라는 디자이너가 지극히 작은 면적의 천을 사용한 대담한 투피스 수영복을 발표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 수영복 이름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였다. 신문은 온통 원자폭탄 실험 기사로 메워져 있었다. 레아르는 자신이 만든 수영복이 매스컴의 주목을 받기를 원했고, 그 디자인의 위력도 폭발적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시 화제의 중심이었던 ‘비키니’를 수영복 이름으로 정했다. 그리고 원자폭탄 투하 실험 나흘 뒤인 7월 5일, 누드 댄서였던 레아르의 톱 모델 미슐린 베르나르디니가 역사상 처음으로 비키니를 입고 파리의 도로를 행진했다. 1946년은 수영복이 원자폭탄 실험 못지않게 숱한 논쟁과 관심 그리고 비난을 불러일으킨 해라고 할 수 있다.
제2부 食_ 주식과 먹거리, 그에 얽힌 이야기들
세계를 바꾼 다섯 개의 사과 사과에 얽힌 이야기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에덴동산의 사과지만, 그것은 분명히 허구다. 물론 성서에는 사과에 관한 이야기가 꽤 많이 나온다. 그러나 에덴동산의 이야기가 나오는 <창세기>에는 사과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창세기>에는 단지 아담과 이브가 지식과 선악을 알게 하는 금지된 과일(선악과)을 따 먹었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라틴어에서 사과와 악을 뜻하는 단어는 비슷해서, 사과는 malus, 악은 malum이다.
한참 뒤에 예술가들이 그 이야기를 작품화하면서 그것이 무슨 과일인가를 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몇몇 사람이 그것을 과일의 왕이라고 할 수 있는 사과로 정하자는 의견을 제시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원죄의 사과’다. 그리하여 선악과가 사과였다는 얘기는 근거도 없이 퍼져나갔으며, 일부 성서학자들은 석류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기독교가 인도로 전파되었을 당시에는 바나나로 둔갑하기도 했다. 이것은 아마 이슬람교의 영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파리스의 사과’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격분하여 신들 사이로 던진 황금 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자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 이 세 여신은 각자 자신이 그 사과의 주인이라고 주장한다. 해결책을 찾지 못하자, 제우스는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불길한 신탁 때문에 버려져 양치기의 손에서 자란 파리스에게 판결을 부탁한다. 젊은 파리스는 아름다운 여인을 얻게 해주겠다는 아프로디테를 사과의 주인으로 선택했고 그로 인해 트로이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파리스의 사과는 ‘분쟁의 씨앗’으로 자주 인용된다.
세 번째는 ‘빌헬름 텔의 사과’다. 14세기의 스위스 사람들은 폭군 헤르만 게슬러 공작의 학정 밑에서 무척이나 힘들게 살아갔다. 어느 날 게슬러는 광장에 모자를 걸어놓은 긴 장대를 세워놓고, 마을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모두 그 앞에서 절을 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빌헬름 텔은 그 명을 따르지 않았다. 골칫거리인 빌헬름 텔을 없애야겠다고 생각한 게슬러는 그의 어린 아들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놓고 단 한 발로 사과를 명중시키라고 명령했고, 빌헬름 텔은 사과를 명중시켰다. 독재자에 의연히 맞선 빌헬름 텔의 이야기는 스위스 독립운동의 시발점이 된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약소국의 독립운동을 확산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그리하여 빌헬름 텔의 사과는 ‘자유의 사과’로 불렸다.
네 번째는 ‘뉴턴의 사과’다. 1665년경 유럽 일대에 흑사병이 만연해 대학이 휴교하자 뉴턴은 고향에 내려와 있었다. 어느 날 정원의 나무에서 우연히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지구와 사과 사이에 어떤 힘이 존재한다는 것을 순간적으로 깨달았다. 즉, 지구가 사과를 당기는 힘이 있다는 것에 착안해 모든 물체 사이에는 만유인력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것이다. 만유인력의 발견은 근대 과학을 발전시키는 획기적인 사건이었으므로 이 사과는 ‘과학의 사과’가 되었다.
다섯 번째 사과는 좁은 차고에서 피어난 혁신의 사과, 바로 애플사의 로고인 ‘베어 먹다 만 사과’다. 이 사과에 대한 일화가 있다. 승승장구하며 자신들의 아성까지 침범한 애플에 심기가 불편했던 IBM은 한 입 베어 먹은 사과 로고를 보고 ‘애플은 썩은 사과’라며 빈정댔다. 그러자 스티브 잡스는 “애플은 썩은 부분을 완전히 도려냈기 때문에 이제는 아주 깨끗하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소고기가 Beef인 까닭은 소는 뛰어난 노동력 때문에 그 자체가 재산이나 다름없어서, 옛날에는 화폐를 대신하기도 했다. 이처럼 서양에서는 소를 화폐 대신 사용하면서 소에서 여러 가지 단어가 파생되었다. chattel(동산)이나 capital(자본)도 바로 소(cattle)에서 파생된 단어들이다. fee(수수료)도 고(古)노르드어 fe(소)에서 나온 말이다. 오늘날 영어에서 소의 ‘머리와 꼬리’를 이르는 heads and tails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뜻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1066년 잉글랜드 왕이었던 에드워드 참회왕이 죽은 뒤 웨섹스 백작 고드윈의 아들 해럴드 2세가 왕위에 오르자 노르망디 공 기욤 2세가 왕위계승권을 주장하며 영국으로 진격해왔다. 영국을 정복한 기욤 2세는 잉글랜드 윌리엄 1세로서 영국의 노르만 왕조를 열었다. 이 사건을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이라고 한다. 이로 인해 윌리엄 1세는 정복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후 영국은 백년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300여 년간 프랑스의 식민지 처지가 되었다. 그 결과 상류층은 프랑스 문화를 동경하게 되었으며, 귀족들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평민들은 영어를 사용했다.
이런 관습은 당연히 음식 문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리하여 영국의 농부는 소를 길렀지만, 그 고기는 프랑스어를 쓰는 상류층이 먹어치운 까닭에 프랑스어 viande de boeut(소고기)에서 나온 beef로 불렀으며, 송아지(calf) 고기도 프랑스어 veau에서 나온 veal이라 했다. 이는 소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양은 sheep 또는 lamb이지만 그 고기는 viande de mouton에서 나온 mutton으로 불렀으며, 돼지는 pig 또는 hog이지만 그 고기는 viande de porc에서 나온 pork로 불렀다.
소시지를 먹는 것은 죄악이다 프랑크 소시지의 기원은 3500년 전 바빌로니아인이 동물의 내장에 향신료로 맛을 낸 고기를 집어넣었을 때부터 시작된다. 그 후로 여러 문명이 이 요리에 변화를 주거나 새롭게 만들어 발전시킴으로써 오늘날에 이르렀다.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에서 소시지의 뛰어난 맛을 노래한 것이 문학에 나타난 최초의 기록이다. “이글거리는 모닥불 옆에서 한 사나이가 소시지에 비계와 피를 집어넣고, 이쪽저쪽 뒤집으면서 어떻게든 빨리 구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소시지는 로마제국이 멸망하기에 앞서 쇠퇴했다. 228년에 쓰인 로마의 가장 오래된 요리책에 따르면, 해마다 2월 15일 목양신 루페르쿠스를 모시는 이교도의 축제인 루페르칼리아에서 소시지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이 축제는 성적 통과의례도 겸했기 때문에 소시지는 단순한 음식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따라서 초기의 로마 가톨릭교회는 이 축제를 교회법으로 금지하고 소시지를 먹는 것이 죄악이라고 했다. 4세기 무렵 기독교를 신봉한 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 역시 소시지 먹는 것을 금지했다. 그러나 20세기에 미국에서 금주법이 시행되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고대 로마인도 소시지를 몰래 만드는 데 혈안이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황제가 마침내 금지령을 철회했다.
굵은 소시지에서 오늘날 볼 수 있는 가느다란 프랑크푸르트 소시지로 변한 것은 중세였다. 유럽의 여러 도시국가의 정육점 길드는 각기 지방의 특색을 지닌 소시지를 만들기 위해 노력한 결과 모양ㆍ굵기ㆍ맛이 독특한 소시지를 만들어 생산지를 나타내는 이름을 붙였다. 나라의 특색을 나타낸 것은 모양과 크기뿐만이 아니었다. 지중해의 나라들은 무더운 기후에도 썩지 않는 딱딱한 드라이 소시지를 만드는 데 힘을 기울였고, 스코틀랜드에서는 이 지역에 풍부한 오트밀을 사용해서 최초로 곡물이 들어간 소시지를 만들었다.
굵고 부드러우며 지방이 많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 소시지’는 1850년대에 태어났다. 1852년에 프랑크푸르트의 정육점 길드는 투명하고 얇은 창자에 향신료로 맛을 낸 고기를 넣어서 훈제한 소시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약간 구부러진 모양의 이 소시지 이름은 관습대로 도시 이름을 따서 ‘프랑크푸르트’라 붙였다.
미국에서는 프랑크푸르트 소시지를 핫도그라고도 불렀는데, 지금은 이 이름이 널리 쓰이고 있다. 1880년대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에서 이민 온 두 사람이 미국에 소시지를 전해주었다고 한다. 그 중 한 사람이 핫도그의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인 찰스 펠트만이라는 빵 가게 주인이다. 펠트만은 코니아일랜드의 시골길을 손수레를 끌고 다니며 파이를 팔았다. 그런데 코니아일랜드에 있는 레스토랑들이 1890년대 초부터 여러 종류의 따뜻한 요리를 내놓기 시작하자 펠트만이 팔던 파이는 매상이 점차 떨어졌다. 주변에서는 펠트만에게 따뜻한 샌드위치를 팔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했으나, 그의 작은 손수레에는 많은 종류의 재료나 조리도구를 실을 여유가 없었다. 생각 끝에 그는 고향에서 먹었던 프랑크푸르트 소시지를 팔기로 했다. 펠트만은 손수레에 작은 난로를 싣고 다니며 냄비에다 소시지를 삶아 팔면서 그 소시지를 ‘프랑크푸르트 샌드위치’라고 광고했다. 그리고 독일의 전통대로 소시지에 겨자와 발효 시킨 양배추 김치를 얹었다. 이 샌드위치의 성공으로 펠트만은 코니아일랜드에 ‘펠트만의 저먼 가든’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