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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 탐나는책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탐나는책 / 2020년 10월 / 248쪽 / 16,000원



1장 술과의 행복한 만남



가장 오래된 술 봉밀주


다양한 풍토에서 얻을 수 있는 선물: 지금으로부터 약 500만 년 전에 동아프리카 대지구대에서 탄생한 인류는 오랜 세월을 거쳐 지구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기후, 지형, 식생이 복잡하게 조합된 다양한 풍토를 기반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그리고 온대의 평야, 삼림 지대, 대초원, 사막, 열대의 평야 등에서 쉽게 알코올 발효가 되는 포도, 사과, 살구 등의 과실, 야자나 버섯 등의 수액과 꿀, 말이나 염소, 소 등 가축의 젖을 이용한 다양한 양조주를 만들었다. 그 결과 각 문화와 문명에는 그들만의 술이 있는데, 직접 발견한 것도 있고 다른 지역으로부터 전파된 것도 있다. 술이 문화, 문명과 연결되는 과정은 다양하고, 양조법이 확립된 시기도 천차만별이다.

재생과 성화의 술: 인류는 자연계의 발효 현상에 익숙해지고 난 뒤, 드디어 인공적 발효에 성공하여 원하는 품질의 술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사실 효모는 특정한 조건만 맞는다면 발효를 시작하기 때문에 양조가 그렇게 어려운 작업은 아니었다. 인류는 포도, 사과, 꿀, 말 젖 등 당분이 많은 소재를 술의 원료로 찾아내어 생활 속으로 발효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양조 방법을 익혔고, 이윽고 술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온대를 대표하는 술인 미드는 물에 녹인 꿀을 발효시켜 만든 봉밀주이다. 색깔이나 향기의 종류가 다양한 꿀은 예부터 포도당 외에 각종 비타민, 미네랄을 함유한 영양원으로 알려졌다. 단, 봉밀주를 만들기에는 꿀의 당분 농도가 너무 진하기 때문에 물을 세 배 정도 넣어 희석시킨 뒤 일정 기간 방치해두기만 해도 봉밀주가 완성되므로 제조법은 정말 간단하다. 신대륙에서도 멕시코 인디오 등이 옛날부터 종교 의식에 봉밀주를 사용했다고 한다. 어쨌든 간단하게 만들 수 있는 봉밀주야말로 인류가 마신 가장 오래된 술이라고 할 수 있다.

허니문의 본래 의미: 신혼을 뜻하는 허니문은 원래 봉밀주에서 온 말이지만, 지금은 봉밀주보다 널리 알려진 일반 명사가 되었다. 고대에서 중세 초기까지 게르만 사회에서는 봉밀주를 맥주처럼 흔하게 마셨다. 그리고 결혼한 후에는 1개월 동안 외부 출입을 금하고 신부가 신랑에게 꿀을 마시게 하여 아이를 갖는 풍습이 있었는데, 여기서 허니문이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한다. 허니문은 꿀과 같은 한 달이라는 의미였다. 또한 젊은 꿀벌이 여왕벌이나 여왕벌의 유충에게 먹이려고 분비하는 로열젤리는, 여왕벌이 매일 2,000여 개의 알을 낳도록 하는 능력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허니문은 아무래도 신혼 생활이 꿀처럼 감미롭다는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과실주의 챔피언이 된 와인


복잡한 향기와 맛, 그리고 색: 과실을 원료로 하는 술의 대표는 아마도 와인일 것이다. 와인은 현재 60개국 이상에서 만들어지고 있으며, 연간 생산량은 3,000만 kL 이상에 달한다고 한다. 와인 생산량은 맥주와 비교하면 약 1/5정도이지만, 그래도 엄청난 양이며 술 문화의 주역 중 하나가 되었다. 와인 소비량이 가장 많은 나라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이고, 이 두 나라에서만 실제로 세계 포도의 약 40%가 소비된다고 한다. 포도로 만드는 과실주인 와인은 발효와 숙성 과정에서 풍기는 부케와 포도 자체로 인한 아로마 등으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향기가 난다. 한 모금 넘기면 신맛과 단맛 그리고 타닌 성분으로 인한 떫은맛까지 어우러진 복잡한 맛의 조화를 느낄 수 있다. 입 안에 퍼지는 풍부한 보디감에 아름다운 색이 조합된 와인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과거의 와인은 매우 지엽적인 술이었다. 이유는 원료인 포도 때문이었다. 포도는 부패가 빠르기 때문에 와인 산지가 한정될 수밖에 없다. 와인을 양조하려면 포도 열매를 파쇄한 뒤 신속하게 발효시켜야 한다. 포도의 장거리 운송은 어려운 일이었고, 와인은 산지에 밀착된 술이 될 수밖에 없었다. “와인은 풍토를 마시는 것이다”라는 속담은 이러한 와인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피와 부활의 이미지: 포도로 만드는 와인이 큰 인기를 끈 이유 중 하나는 선혈과도 같은 와인의 붉은색에 있다. 본래라면 썩어서 바짝 말라버릴 운명의 포도가 부글부글한 거품을 내며 빨간 액체로 다시 태어나는 모습을 보면서, 고대 사람들은 피와 생명, 불사 등의 이미지를 떠올렸을 것이다.

와인 양조법은 흑해와 카스피해 사이에 있는 코카서스 지방에서 시작되어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이후 와인은 기원전 6000년에서 기원전 4000년 사이에 메소포타미아와 고대 이집트로 전해졌다. 이집트의 나크트 분묘 벽화에는 포도 따기부터 와인 만들기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를 통해 4,000여 년 전에 이미 와인이 만들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황금 마스크로 유명한 투탕카멘 왕의 부장품 항아리에서도 와인이 검출되었다고 한다. 와인 제조 기술은 이집트를 거쳐 지중해 주변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그리스에서는 송진을 바른 큰 나무통에서 포도를 발효시키고 허브, 향신료, 진한 바닷물을 넣어 와인으로 만든 뒤 동물 가죽이나 암포라라는 항아리에 넣고 판매했다.

와인에 밀려난 빵: 지중해 중앙부에 위치한 이탈리아반도는 지중해 세계에서는 오랫동안 변방의 땅으로 취급되었다. 지중해 세계는 먼저 동쪽의 에게해부터 시작하여 카르타고를 중심으로 서지중해가 개척되었고, 중앙부에 위치한 이탈리아반도는 마지막까지 남겨졌다. 이 때문에 와인이 동방으로부터 로마로 전해지는 시기가 늦어졌고, 로마인은 와인을 외부 세계의 이국적인 음료로 인식하였다. 이로 인해 초기 로마에서 와인은 귀중품이었고, 서른 살 이하의 남성과 부인은 와인을 마시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카이사르(기원전 100~기원전 44) 시대에도 와인은 고가여서, 당시 상인들은 한 암포라에 담긴 와인값으로 노예 한 명을 칠 정도였다.

로마 제국이 지중해 세계를 제패하자, 향락에 빠진 로마인은 와인을 연회석에 없어서는 안 될 음료로 여겼다. 식도락가인 로마인에게 와서 와인은 풍미가 한층 증가한다. 와인이 보급됨에 따라, 이탈리아반도에서는 급격하게 곡물 밭에 포도원이 구축되어 곡물 부족이라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낳았다. 결국 로마인이 먹을 곡물을 이집트나 북아프리카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부자를 위한 와인이 가난한 자의 밀보다 우선시된 것이다. 마침내 서기 91년,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제국에 있는 포도나무의 수를 절반으로 줄이라는 명령을 내렸고 알프스 이남의 포도나무를 남김없이 뿌리째 뽑아버렸다. 부유층이 마시는 와인이 사회에 해악을 미치는 모습을 좌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상징: 기독교에서 와인은 ‘예수의 성스러운 피’, ‘신의 나라를 상징하는 음료’로 여긴다. 포도를 따서 압착한 후 발효시켜 와인으로 바꾸는 과정이 예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이미지와 연결된다.

7세기부터 8세기까지 이어진 이슬람교도의 ‘대정복 운동’으로 지중해가 ‘이슬람의 바다’로 바뀐 후에도 유럽 내륙의 수도원에서는 와인을 계속 만들었다. 와인은 추위가 극심해 곡물을 충분히 수확할 수 없던 알프스 이북의 유럽에서 곡물 부족을 메우는 식품이기도 했다. 서기 800년에 로마 교황으로부터 황제의 관을 부여받은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는 토지를 교회와 수도원에 기증하여 와인 생산을 장려하며, 서유럽에서 와인 문화의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기도 하다.

8세기 이후가 되자 수도원에서 사적인 미사를 드리는 것도 가능해졌다. 미사에는 ‘성체’를 상징하는 빵과 ‘예수의 성스러운 피’를 상징하는 최고급 와인이 필수였다. 수도원들이 앞다투어 고품질 와인 제조를 위해 노력한 배경에는 이러한 종교적 의미가 있었다. 또한 한랭한 기후인 서유럽에서 척박한 풍토와의 싸움이 오히려 양질의 와인을 만들어냈다. 유명한 부르고뉴 와인을 만드는 시트 수도회의 수도사들은 포도밭을 재배하는 데 일상을 바친다. 그로 인한 격렬한 노동은 수도사들의 생명을 단축시켰다. 당시 수도사의 평균 수명이 28세에 불과했다는 기록도 있다.

12세기 들어 상업이 부활하자, 와인 생산에 특화된 지역도 나타나 와인의 대량 수송이 시작되었다. 현재 무거운 화물을 측정하는 중량 단위인 ‘톤(ton)’은 와인 한 통의 무게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보르도 지방에서부터 영국으로 대량의 와인이 운반되면서, 배에 몇 개의 와인 통을 실을 수 있는지를 적어 선적 능력을 표시했다. 속이 빈 와인통을 두드릴 때 탕 하는 소리가 났는데, 이 소리에서 ‘톤’이 생겨났다고도 한다. 와인 산지인 보르도는 가론강과 도르도뉴강의 수운을 활용한 와인 산지로 두각을 나타내게 되었다.

2장 열심히 술을 빚은 문명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럽으로 전해진 맥주


액체 빵이었던 최초의 맥주: 맥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양조주로 연간 생산량이 1억 kL를 가뿐히 넘는다. 세계 인구를 60억 명이라고 했을 때, 전 세계 사람이 연간 17L 이상의 맥주를 마신다는 계산이 나오니, 실로 엄청난 양이 아닐 수 없다.

맥주는 문명이 탄생한 5,000년 전에 이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소비되고 있었다. 당시의 맥주는 상당히 걸쭉해서 ‘마시는 빵’, ‘액체 빵’으로 불리며 대중적으로 흔하게 접할 수 있었는데, 원료인 보리를 손쉽게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의 맥주는 특유의 쓴맛이 나지 않고 알코올 농도도 낮았기 때문에 술이라고 부르기에는 싱거운 음료였다. 그래도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일으킨 수메르인은 술을 매우 좋아하는 민족이어서 수확한 보리의 40%를 맥주 양조에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수메르인 사회에서는 여성이 양조를 담당했는데, 여덟 종류의 보리(대맥)와 여덟 종류의 밀(소맥)을 혼합한 곡물로 세 종류의 맥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신전 건조에 종사하는 노동자에게 하루 1L, 고위 신관에게는 그 다섯 배에 달하는 양의 맥주를 보수로 지급하였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도 5,000년 전부터 ‘헥토’라는 맥주를 만들었다. 맥아를 구운 빵을 짓이겨 물에 녹인 후, 길고 가느다란 항아리에 넣어 발효시켰다. 항아리 입구는 마개로 단단히 막아 깊은 맛이 나도록 하고 항아리를 어둡고 서늘한 곳에 두고 숙성시켰다. 맥주에 점토를 넣어 투명도를 높이는 기술이 개발되었으며, 대추야자 등의 재료를 추가해 알코올 농도를 높이는 연구도 이루어졌다. 허브로 풍미를 더한 다양한 맥주도 만들어, ‘즐거움을 주는 음료’, ‘천국과 같은 음료’ 같은 멋진 이름도 붙였다. 화폐가 보급되지 않았던 이집트에서는 신관이나 관사의 봉급 일부를 맥주로 지급하기도 했다. 이런 관습 때문에 음주 습관이 지배층 사이에 퍼져 풍기문란도 만연했다고 한다.

맥주는 이윽고 이집트에서 그리스로 전해졌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무슨 의미에서인지 “와인을 먹고 취한 사람은 앞으로 넘어지고, 맥주를 먹고 취한 사람은 뒤로 넘어진다”고 기록했다. ‘뒤로 넘어진다’라는 말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곡물이 부족했기 때문에 귀중한 보리로 술을 만드는 행위를 이기적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로마 제국에서 미식가인 로마인은 맥주보다 식사와 잘 어울리는 와인을 선호했다. 게르만인이 좋아하던 맥주는 야만인이 마시는 술이라며 천시를 받았던 것 같다. 그렇게 맥주 문화는 지중해를 넘어 알프스 이북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맥주 양조는 결국 유럽의 보리 재배 지역에서 진화를 거듭했다. 봉밀주를 마셨던 게르만인, 켈트인은 대량으로 양조할 수 있는 맥주의 존재를 알게 되자 즉시 매료되었다. 중세 유럽의 역사는 맥주를 빼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녹색 황금’ 홉의 등장: 중세 유럽에서 맥주 제조가 발전한 이유는 와인과 마찬가지로 수도원 때문이었다. 벨기에에서는 현재도 수도원에서 양조되는 맥주나 수도원의 제조법을 계승한 진한 맥주를 선호한다. 7~8세기가 되자 독일에서 ‘홉’이 등장했다. 홉 암꽃의 밑동에서 노란색 분말을 채취해 이를 맥주에 첨가하여 ‘쓴맛’을 내고, 가스가 빠져 나오지 않도록 연구하여 맥주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쓴맛뿐 아니라, 맥주에 독특한 향미를 더하고 거품을 잘 일어나게 하는 홉은 ‘맥주의 영혼’, ‘녹색의 황금’이라고 일컬어진다.

오늘날 맥주의 원형은 1516년 남독일 바이에른 공국의 빌헬름 4세가 제정한 ‘맥주순수령’에서 찾을 수 있는데, 맥주는 보리와 홉, 물로만 제조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때까지는 착색하는 데 숯을 사용하거나 맥아의 사용 비율이 낮아 품질이 조악한 맥주가 많았는데, 맥주순수령으로 균질화되었다. 빌헬름 4세는 이 법령을 통해 양질의 맥주를 보급하여 시민의 건강을 보호하고, 맥주 양조에서 밀의 사용을 배제하여 식량난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 법령은 맥주의 기본형을 완성한 것으로 평가된다.

홉은 목 넘김을 상쾌하게 하고 깊은 맛을 낼 뿐 아니라, 잡균의 번식을 막는 힘도 가지고 있다. 살균 및 항균 작용이 있는 것이다. 또한 홉에 함유된 떫은맛을 내는 타닌 성분은 맥주의 과잉 단백질을 제거할 뿐 아니라, 맛을 깔끔하게 하고 투명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3장 이슬람 세계에서 동서로 전해진 증류주



페스트의 공포가 키운 브랜디와 위스키


절망과 공포가 낳은 ‘스피릿’: 증류란 알코올 성분을 함유한 액체를 가열하여 알코올 등의 휘발성 성분을 증발, 기화시킨 후 이것을 냉각기로 식혀 액체로 바꾸어 회수하는 과정이다. 이러한 순서로 만들어지는 알코올음료가 증류주이다. 이슬람 세계에서 탄생한 증류기 알렘빅은 이집트로 전해졌고, 북아프리카를 지나 이슬람교가 지배한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다.

유럽에서 증류기를 이용한 새로운 종류의 술, 증류주가 탄생한 계기는 14세기 중반에 전 유럽인을 중음의 공포로 떨게 한 페스트(흑사병)의 유행이었다. 중앙아시아를 거쳐 유럽으로 전해진 페스트에 대한 공포로 사람들이 생명수를 찾아 헤매게 된 것이다. 페스트는 쥐에 기생하는 벼룩을 매개로 중국 운남 지방의 풍토병이었는데, 몽골 제국의 확장과 함께 유럽으로 건너갔다. 1347년부터 70년 동안 페스트가 크게 창궐하여 당시 유럽 총인구의 거의 1/3에 해당하는 2,500만 ~ 3,00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페스트의 대유행은 인류의 멸망을 생각하게 할 정도로 끔찍했다. 그런 와중에 ‘불사의 영이 깃든 술’인 생명수를 마시면 절대 페스트에 걸리지 않는다는 근거 없는 낭설이 유포되었고, 절망적인 분위기 속에서 생명수가 확산되었다.

14세기 중반, 백년전쟁(1339~1453)이 발발한 와중에 페스트까지 유행한 프랑스에서 알렘빅으로 증류한 새로운 종류의 술이 출현했다. 당시 사람들은 증류주의 알코올 도수가 높아 불을 붙이면 불꽃이 이는 모습을 보고, 술 속에 있는 불의 정기가 신체에 활기와 정력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독한 증류주는 ‘스피릿(영혼)’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생명을 지키는 마법의 물을 제조하는 방법은 비정상적인 사회 상황을 배경으로 유럽 각지로 전파되었다. 가령 ‘위스키’의 어원은 켈트어로 생명수를 의미하는 ‘어스퀴보’이고, 이 말이 나중에 위스키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맹위를 떨치던 페스트가 증류수라는 새로운 음주 문화를 널리 보급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수도원에서는 생명수에 약초를 넣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비약을 활발하게 만들었는데 이것이 많은 리큐어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아일랜드에서 탄생한 위스키: 아일랜드에 알렘빅이 전해져 아콰 비타이(생명수)의 양조가 시작된 때는 14세기에 페스트가 유행하기 이전이었다. 1172년, 잉글랜드의 헨리 2세가 통솔하는 대군이 아일랜드를 침공했을 때, 그들은 이미 보리로 만든 맥주를 증류한 술을 마시고 있더라는 기록이 있다. 아일랜드에서는 5세기에 기독교 포교에 열심이었던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세인트 패트릭이 증류 방법을 전파하고 위스키의 전신인 어스퀴보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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