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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거짓말 두 번째 이야기

박홍규 지음 | 인물과사상사


인문학의 거짓말 두 번째 이야기

박홍규 지음

인물과 사상사 / 2020년 9월 / 349쪽 / 17,000원



중세 이야기




재조명되는 중세


중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단적으로 2016년 4월부터 2017년 2월까지 《한겨레》에 연재된「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를 들 수 있다. 철학 교수인 박승찬은 연재 시작 두 달 전에 사망한 움베르토 에코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에코가 4권, 4,000쪽에 이르는 『중세』시리즈 1권 서문에서 “중세는 어둠의 시대 혹은 암흑기가 아니다”라며 중세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박승찬 교수의 연재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고, 그 전후로 비슷한 내용의 책과 글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그런데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중세학자라고 하는 에코는 중세를 과연 긍정적으로만 보았을까? 에코는 그를 세계적 작가로 만들어준 『장미의 이름』에서 중세적 맹신을 비판한 것을 비롯해 중세의 문제점을 항상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가 유행시킨 ‘포스트모던인가, 새로운 중세인가’라는 명제도 포스트모던의 의의를 일정 부분 인정하면서도 그 보수성이 중세의 문제점과 연관된다고 비판한 것이었다. 1977년 쓴 글로, 국내에는 1993년 출간된 책에서 에코는 중세가 “페스트의 물결, 대량 학살, 불관용, 죽음으로 점철되었다”고 했다. 한마디로 개방과 관용을 거부한 폐쇄와 불관용의 시대였다고 비판한 것이다. 30여 년 뒤에 쓴 『중세』시리즈에서는 그런 비판의 칼날이 좀 무뎌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에코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라 무종교인으로서 특히 종교전쟁을 비판하는 태도는 평생 변하지 않았다. 굳이 에코를 들먹이지 않아도 중세의 십자군전쟁 이래 최근까지 무수한 종교전쟁과 종교 갈등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수 있음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종교 사이의 대화, 특히 세 일신교(기독교, 이슬람교, 유대교) 사이의 대화가 앞으로 긴요하다. 게다가 그 셋은 뿌리가 같지 않은가? 형제, 아무리 다르게 보아도 이복형제 정도의 관계가 아닌가? 그런 점에서 우리가 중세를 다시 보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세 종교 사이의 화해, 즉 개방과 관용에 있다. 물론 현대의 기독교권과 이슬람권의 대립은 종교보다 정치, 특히 제국주의 탓이므로 종교로 제국주의를 덮어서는 안 된다.

중세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논쟁은 끊이지 않을 것이고, 정답은 있을 수 없다. 최근의 언론이나 출판 경향처럼 학교에서도 중세를 암흑이라고 가르치지 않는 듯해서 다행이지만, 내가 방문한 기독교권이나 이슬람권에서는 각각의 종교를 더욱 강조하는 경향도 생겨나고 있어 걱정이다. 이슬람국가(IS)를 비롯한 과격파 원리주의자들의 소행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업 등으로 인한 세계적인 우경화 경향과도 무관하지 않다. 저마다 절대자를 내세운 중세적 폐쇄와 불관용이 부활하고 있어 걱정이다.

개방과 관용을 향한 새로운 중세관


우리가 흔히 중세라고 하는 6~16세기에 서양은 그 앞뒤의 시대에 비해 낙후된 반면, 비(非)서양은 그 어떤 시대보다 앞선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 중동에서는 이슬람 문명이 탄생했고, 중국에서는 수ㆍ당ㆍ송의 불교문화 등이 다양하게 꽃을 피웠으며,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서도 그 못지않은 찬란한 문명이 개화된 시대였다. 그야말로 개방과 관용의 문화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찬란한 문화가 나타났다. 조선시대보다 훨씬 자유롭고 개방적이며, 관용적이고 다양한 문화가 창조되었다. 굳이 비교한다면 조선시대가 더 서양 중세처럼 암흑으로 보인다. 최근 조선을 미화하려는 움직임이 영화나 텔레비전 드라마는 물론 학계에서도 나타나고 있지만, 과연 바람직한 현상인지 의심스럽다. 물론 그전 시대를 좋아한다고 해서, 에코가 서양 중세에 대한 편견을 깨트리려고 노력하면서도 그 시대의 문제점을 비판적으로 보려고 했듯이, 삼국시대나 고려시대로 ‘돌아가자’고 외쳐서는 안 되고, 당연히 그 시대의 문제점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어떤 과거로도 돌아갈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재조명은 필요하다.

종래 서양에서 세계사를 고대-중세-현대로 구분한 점에는 문제가 많다. 특히 중세만 500년경에서 1500년경으로 획정하고 암흑이라고 한 뒤 그전은 고대, 후는 현대라고 하는 점도 문제다. 서양인들은 서양 중세는 1492년 스페인에서 무어인을 추방한 것으로 끝난 것으로 생각한다. 즉, 서양은 이슬람교도를 추방한 것으로 암흑의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를 맞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새로운 시대를 시작한 단테가 이슬람교의 시조인 무함마드를 연옥에 빠졌다고 묘사한『신곡』에서도 같게 표현되었다.

그러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갈등은 그 뒤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았고, 특히 최근에 그 갈등은 최고조에 이르고 있다. 그래서 지금 인류가 ‘새로운 중세’로 가는 것이 아닌지 우려하고 있다. 그런 우려는 이슬람과의 단절을 중시한 종래 서양의 역사관에 대한 반성으로 제거될 수 있을지 모른다. 서양이 암흑이라고 한 중세는 사실 서양이 중심이 아니라 이슬람과 인도와 중국이 중심이었던 시대였다.

나는 서양 중심의 아우구스티누스를 비롯한 가톨릭 신학자들, 중세 건축을 비롯한 예술, 봉건제나 대학 등에 대한 설명은 대폭 줄이고, 대신 그동안 거의 다루지 않은 『코란』과 이슬람 사상과 예술, 인도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문명에 대해 쓸 생각이다. 물론 중세에 대해 검토해야 할 점은 결코 적지 않지만, 세계사적 차원의 인문 이야기를 쓴다면 나는 중세에 대한 부분은 고대-중세-현대라는 3분법처럼 3분의 1이 아니라, 10분의 1 정도에 그친다고 본다. 그만큼 중세는 중요한 시대가 아니다. 적어도 미술을 제외하고는 그렇다. 그리고 종래 ‘중세 인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으로 다루어진 것들에 대해서도 가능한 한 간단하게 다룰 생각이다. 반면 종래 무시되었던 중세인이라도 지금 우리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사람은 재조명해야 한다. 가령 펠라기우스가 있다.

펠라기우스는 원죄설을 부정하고, 누구나 착하게 살면 영혼은 구제를 받는다고 가르쳤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를 반박해 바울의 편지에서 숙명론, 즉 예정조화설을 이끌어냈고, 이를 종교개혁 때 장 칼뱅이 채택했다. 나는 러셀처럼 가톨릭에서 그것을 폐기한 것을 매우 현명한 것이었다고 보고, 츠베탕 토도로프처럼 그 둘의 논쟁이 지금까지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고 있다고 본다. 이 책에서는 무엇보다도 『코란』을 중심으로 한 아랍의 이슬람문화를 비롯한 비서양의 중세 인문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할 것이다. 그 목표는 하나다. 새로운 개방과 관용의 문화를 창조하기 위해서다.



이슬람 중세 이야기




오리엔탈리즘과 이슬람


이슬람과 서양의 갈등은 십자군전쟁으로 시작되었다. 그전에는 갈등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근 200년 동안 지속된 그 전쟁은 이슬람과 서구의 중세를 끝장냈다. 그 시작은 이슬람의 예루살렘 장악이었다. 그 뒤 지금까지, 트럼프가 미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그곳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 후 예루살렘은 이슬람과 서구 사이 갈등의 핵이다. 최초의 십자군부터 유대인과 무슬림을 무참하게 학살했지만 결국은 실패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이슬람에 대한 서양인의 증오를 결정했다. 서양인에게 이슬람은 사악하고 폭력적인 종교라는 한 가지 이미지만 뿌리내렸다. 지금까지도 그것은 변함이 없다. 세계의 비극은 그렇게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십자군은 최초의 식민주의로 그 뒤 유럽 제국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그 뒤 새뮤얼 헌팅턴의『문명의 충돌』까지 서구인에게 그 이데올로기는 절대적인 것이 되었다. 그런데 유럽이 이슬람을 지배하게 된 것은 기술과 산업의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이슬람문명에서 받아들인 지식의 결과이며, 이미 이슬람이 구축한 방대한 세계 무역권에 서양을 받아들인 결과다. 그런데도 유럽은 일찍부터 이슬람문명을 퇴폐와 미신, 여성 차별의 종교로 비난하면서 이슬람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했지만, 그 침략은 산업혁명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했다. 유럽 경제를 철저히 보호하면서 식민지 산업은 파괴해 유럽의 자원 생산 기지로 전환하면서 이루어진 산업혁명으로 유럽은 세계를 지배했다. 그 뒤 이슬람권을 비롯한 비서양권은 모두 서양의 식민지나 준식민지로 타락했다. 그것이 소위 근현대 세계다.

식민 권력은 정치ㆍ경제ㆍ사회만이 아니라 이슬람의 학문과 교육도 파괴했다. 서양보다 훨씬 빨리 시작된 대학을 비롯한 모든 학교를 폐쇄하고 이슬람 의료를 법으로 금지했으며 의사들을 처형했다. 이슬람 과학은 미신과 독단에 불과하다고 선전했다. 그 대신 식민 권력과 피지배층 사이에서 지배를 원활하게 할 중간 매체를 만들기 위한 식민지 교육체계를 수립했다.

그 중간 매체란 몸은 원주민이되 머리는 식민지인인 통역ㆍ경찰ㆍ군인ㆍ교사 등인데, 그들을 통해 소수의 식민 권력은 다수의 피지배자를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억압했다. 이는 당연히 전통 지배계급의 반발을 야기했다. 전통적인 법과 문화가 개인과 가정사로 축소되자 현대의 삶에 절박한 문제를 전통으로 해결할 힘은 더욱 축소되었다. 이에 전통적 지식인은 즉각 반발해 전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외쳤으나, 현실과 전통의 괴리를 더욱 촉진하고 결국은 전통의 화석화를 초래했을 뿐이다.

십자군시대 이래 식민지를 더욱 확고하게 굳히는 이데올로기로 오리엔탈리즘이 학문과 예술의 이름으로 군림했다. 이를 에드워드 사이드는 동양을 지배하고 개조하며 억압하는 특정한 서양의 양식으로 정의한다. 그것은 십자군전쟁 이전부터 나타났다. 가령 8세기의 다마스쿠스 존은 이슬람이 이단 종교이고, 그 선지자 무함마드는 타락하고 방탕한 인간이라고 했다. 그 후 수많은 문헌으로 무함마드는 사기꾼, 무슬림은 호전적이고 야만적인 미치광이이자 타락하고 나약한 색정광, 이슬람 땅은 오로지 서양인의 성적 모험의 안식처라는 스테레오타입의 이미지가 확고하게 굳어졌다. 이는 이슬람 연구자만이 아니라 볼테르ㆍ몽테스키외ㆍ파스칼ㆍ헤겔ㆍ랑케ㆍ르낭ㆍ마르크스ㆍ슈펭글러 등도 마찬가지였다.

무슬림이 싫어하는 『아라비안나이트』를 번역한 리처드 버턴을 비롯한 근대 이슬람학자들이 만들어낸 이슬람 이미지도 마술과 비술로 가득 찬 보물의 나라, 초자연적 신앙과 천문학과 연금술의 신비가 가득한 곳, 대마초와 아편과 코브라, 곡예사와 매춘부, 댄서와 동성애자와 범죄인의 천국 등이었다. 그것을 앵그르와 들라크 루아는 그림으로, 모차르트와 베르디는 음악으로 표현했다. 게다가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로 영웅화된 영국 스파이는 그런 이미지를 정책에 반영했다.

이처럼 오리엔탈리즘은 중세부터 지금까지 식민지 삶의 모든 부분에 침투했고, 식민지가 해방된 뒤에도 여전히 깊게 박혀 있다. 식민지를 지배하는 제국을 정당화하고 피식민지 사람들의 무능과 불법 등을 내세워 합리화한 오리엔탈리즘은 식민지 해방 이후에도 그대로 남았다. 특히 많은 할리우드 영화는 무슬림을 테러리스트를 넘어 인간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악당으로 묘사해 오리엔탈리즘을 더욱더 강화했다. 나아가 이스라엘을 비롯한 서양은 선량한 반면 이슬람은 폭력적인 악당이라고 보도하는 뉴스부터 살만 루슈디의 『악마의 시』같은 소설에 이르기까지 오리엔탈리즘은 끝없이 반복된다.

나의 슬픈 이슬람 이야기


유럽의 중세가 몽매의 암흑기고 그것이 끝나면서 계몽의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이야기와는 반대로, 이슬람의 중세는 유럽의 계몽 이상의 계몽으로 유럽의 근대를 시작하도록 자극했을 정도로 근대적이었는데, 이슬람의 근대는 도리어 암흑기가 되어 지금까지 무지몽매에 빠져 있다는 게 이슬람에 대한 내 생각이다. 그것이 슬픈 이유는 이슬람의 근대가 서구 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으로 타락한 점도 있지만, 그 못지않게 이슬람 근본주의에도 몽매의 원인이 있다. 나는 어떤 이유에서도 지금의 동양을 찬양할 생각이 없다. 세계에서 가장 긴 왕조였다는 500년 조선을 찬양할 생각도 없다. 왕들 중에서도 최고였다는 세종조차 찬양할 생각이 없다. 왕조나 왕은 다 독재다. 어떤 독재도 찬양할 생각이 없다.

무엇보다도 경계해야 할 점은 이슬람이 서양식 중세에 머물러 있다는 잘못된 비판이다. 민족주의와 인권의 부재가 서양 중세의 특징이라면 이슬람의 중세는 그 반대였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처음 정의와 평등, 인간 존엄성과 법의 지배를 옹호하는 세력으로 나타났다. 문화ㆍ부족ㆍ인종의 차이를 넘어선 형제애를 창출했고, 소외된 사람들을 예우하고 존중했다. 세습 통치가 아닌 선거 체제가 도입되기도 했고, 논쟁을 통해 합의에 도달하는 민주적 방식으로 사회를 운영하기도 했다. 관용과 정의와 공공선에 근거해 지식과 배움과 창조성을 강조했다. 그 결과 학문과 겸양을 갖춘 이슬람문명을 건설했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수준의 민주주의와 인권은 아니었지만, 서구의 중세 1,000년에 해당하는 시대에 이슬람은 서구보다는 훨씬 민주주의와 인권이 발달한 진보적인 모습이었다. 이슬람이 그 탄생 이래 세계 종교로 급속하게 성장한 배경에는 그런 진보성이 있었다. 단적으로 힌두교의 카스트와 달리 이슬람은 만민 평등을 주장했기에 인도에 쉽게 정착했다. 따라서 이슬람이 무력으로만 다른 민족들을 정복했다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슬람이 다른 나라에 『코란』이냐 항복이냐를 요구했다는 것은 서구 제국주의 침략 방식을 이슬람에 대입한 것일 뿐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중세 이슬람이 예술과 과학의 꽃을 피워 인류의 사상적 유산에 공헌을 했다는 점을 주목한다. 8세기부터 16세기까지 바그다드ㆍ다마스쿠스ㆍ카이로ㆍ사마르칸트(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 있음)ㆍ통북투(지금의 아프리카 말리에 있음) 등은 도서관ㆍ책방ㆍ공중목욕탕ㆍ병원들이 광대하고도 정교한 그물망을 형성한 도시로, 그 시대 세계의 어느 나라 도시보다도 선진적이었다. 한반도에는 그런 도시가 19세기 말까지도 거의 없었다. 중세 이슬람에서 과학과 실험적 방법이 시작되었고, 철학이 확장되고 진보했으며, 문학과 미술과 음악이 찬란하게 꽃피웠다. 물론 근대 이후 모든 것은 후퇴했다.

그러나 오늘날 이슬람의 모든 문제를 서구 제국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한반도의 모든 문제를 일본 제국주의나 친일파 탓으로 돌리는 것 이상으로 황당무계한 책임 전가다. 이슬람 사람들의 이슬람 최고성에 대한 이야기도 황당무계하기는 마찬가지다. 자기들은 다른 나라나 민족과는 다르다는 이야기는 어느 나라나 민족에서나 들을 수 있지만, 그것이 결국은 평화 공존을 해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문제인 것은 민주주의가 근대 이후 이슬람에서 쇠퇴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서구의 중세가 끝날 무렵 이슬람에서는 중세가 시작되었다. 그 결과 사상과 교육과 이성을 존중하던 이슬람의 전통은 파괴되었다. 그 단적인 증거가 기계적인 암기 교육과 편협한 사고방식이고, 광신만 가르치는 학교와 그곳에서 배출되는 로봇 같은 인간들이다. 나는 이처럼 이슬람의 슬픈 이야기를 한반도의 역사에서도 읽는다. 한반도에서도 조선 이전 시대에는 불교와 유교와 전통 종교가 공존하고 다양성이 존중되었지만, 조선에서는 유교, 그것도 성리학만이 강요되었다. 게다가 소중화주의라는 쇼비니즘(chauvinism)이 아큐식 정신 승리법으로 지배했다. 이슬람도 마찬가지였다.



중국 중세 이야기




중국의 중세


퍼트리샤 버클리 에브리가 쓴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케임브리지 중국사』가 있다. 이 책은 중국사를 11장으로 나누는데, 종래 서양식의 고대-중세-근대라는 3분법과 달리, 왕조 중심으로 보는 것이어서 그런 왕조사적 관점을 비판적으로 보아온 우리에게는 낯설다. 그러나 이 책은 왕을 중심으로 한 ‘왕조실록’류 드라마 역사와는 전혀 다르다. 즉, 시대를 왕조로 나눈다고 해서 왕의 역사를 쓴 것이 아니라, 생활과 문화를 중심으로 삼은 장점이 있다. 가령 한자가 표의문자라는 우연적 요소에 의해 중국이나 중화문화권이라는 통합이 가능했다고 설명하는 것과 같은 신선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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