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세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요시미 슌야 지음 |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헤이세이(平成) 일본의 잃어버린 30년
요시미 슌야 지음
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20년 7월 / 348쪽 / 13,800원
몰락하는 기업 국가 - 은행의 실패, 가전의 실패
벼랑 앞에서 우쭐거리던 일본 1980년대 말 시점에서 일본은 자신감이 절정에 달했다. 경제는 호조였고, 그 기반도 약하지 않았다. 내수도 상승하고 있고, 실업률은 최저수준, 학생의 취업전선도 공급자에게 대단히 유리한 시장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다. 투자자나 기업가뿐 아니라 생활에 다소 여유가 생긴 방대한 ‘보통 사람들’이 ‘재테크’에 매달렸고, 브랜드상품이나 고급차, 리조트 회원권을 사들였다. 은행과 언론, 상업자본도 내수확대를 명목으로 이런 움직임을 뒷받침했다. 젊은이들은 아직 1990년대 이후 등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없었고, 미래는 과거와 다름없이 밝고 풍요로울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2년 반 지연된 금리인상 물론 지나친 호조세의 경제에는 큰 리스크가 잠복해 있음을 전문가들이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은 아니다. 1985년 9월 선진 5개국 재무장관ㆍ중앙은행 총재회의(G5)에서 체결된 플라자합의가 모든 것의 출발점이었다. 당시 미국의 대일 무역적자가 비대화했던 만큼 미ㆍ일이 협조해 엔화강세 달러약세 노선을 취하는 것에 합의했는데, 이 합의를 거치며 엔ㆍ달러 환율은 불과 1년 만에 달러당 235엔에서 150엔대로 하락하는 등 급격한 엔화강세로 치달았다. 당연히 이로써 일본의 수출산업은 대타격을 입을 터였기 때문에 정부의 재정투입이나 금융완화 같은 경기부양책이 기대됐다. 이에 따라 일본은행은 이듬해인 1986년 1월에 기준금리를 5.0%에서 4.5%로 내리고, 이후 4월에 3.5%, 11월에 3.0%로 잇따라 인하했다. 일본은행은 1987년 2월 기준금리를 2.5%로 역대 최저수준으로까지 끌어내린다.
이렇게 금리가 대폭 하락한 만큼, 시장에서는 보다 많은 자금이 쉽게 유통됐고, 반쯤 필연적으로 인플레이션이 우려됐다. 그러나 과거 금리인하의 영향과 달리 이번에는 넘쳐나는 돈이 주식과 부동산 투자로 몰렸다. 이리하여 1986년 4월 도쿄도심의 땅값이 1년 만에 53.6% 상승했다. 땅값 상승으로 도쿄도심을 중심으로 부동산업자들의 ‘땅투기’가 횡행했고, 각지에서 난개발이 성행했다. 한편 1987년 1월의 닛케이평균주가는 1984년 1월부터 3년 만에 2배인 2만대에 올라섰고, 1988년 12월에는 3만대에 도달했다. 이처럼 1988년 시점 일본 경제가 ‘버블’로 불릴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 것은 명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준금리는 1987년 2월에 또다시 0.5% 인하됐다. 일본은행 간부는 1986년 가을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금리인하가 아니라 금리인상이라고 판단했지만, 대장성과 대장상인 미야자와 기이치의 강경한 판단에 저항하지 못했다. 결국, 정부와 일본은행이 기준금리 인상에 나선 것은 버블이 제어불능 단계로 확대되어버린 1989년 5월부터였다.
1980년대 말의 일본경제를 되돌아보면 한편으로는 엄청난 기세의 엔화강세로 국내 제조업은 대타격을 입었고, 이는 특히 중소 제조업에서 심각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내수 확대를 위해 금리가 대폭 완화됐고, 시중에는 대량의 자금이 풀렸지만, 이들은 엔화강세로 이윤이 감소한 제조업을 활성화시키기보다는 부동산이나 주식 투자로 돈을 벌려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몰아갔다.
일본호, 모로 쓰러지다 결국, 1989년 리쿠르트 사건이 발생해 다케시타 노보루 정권이 붕괴되고 대장상도 미야자와 기이치에서 하시모토 류타로로 교체됐다. 이 과정에서 정부 방침도 엔고억제 중시에서 버블억제 중시로 전환이 꾀해졌다. 1989년 5월부터 12월에 걸친 금리인상도 그중 하나지만, 또 하나는 대장성 국장 명의 2건의 통달이었다. 하나는 1989년 12월 26일에 대장성 증권국장 명의로 나온 ‘가도타니 통달’(‘증권회사 영업자세의 적정화 및 증권사고 미연 방지에 대해’)이고, 다른 한 가지는 1990년 3월 27일 대장성 은행국장 이름으로 발표된, 총량규제 통달 ‘토지관련 융자의 억제에 대해’다. 전자는 버블경기 속에 흠뻑 빠져 있던 증권회사를 요동치게 했으며 야마이치 증권 파탄의 계기가 됐다. 후자는 부동산 매매에 대한 은행 융자를 재검토하도록 해 땅값거품이 장대 쓰러지듯 꺼지는 요인이 됐다.
반도체시장에서의 일본의 참패 1990년대 버블붕괴가 도달한 것은 야마이치증권, 홋카이도척식은행 등 거대 금융기업의 파탄이었다. 그런데 이런 파탄과 수많은 은행의 합병통합을 거쳤음에도 일본경제는 회복할 수 없었다. 2000년대 이후 파탄의 중심은 금융계에서 과거 ‘재팬 애즈 넘버원’의 주역이던 제조업의 붕괴로 향해갔다. 그중에서도 일본의 실패를 두드러지게 드러낸 것은 전기산업이다. 이 쇠퇴는 1990년대 반도체의 글로벌 경쟁에서 일본 기업이 미국과 한국, 대만 기업에 차례로 패배하던 시기를 기점으로 한다.
1990년대에 세계의 반도체 메이커의 매출에서 상위 10개사 중 6곳이 일본 기업이었다. 1위는 NEC, 2위는 도시바, 3위는 히타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사반세기 후인 2012년의 상위 10개사에 남은 것은 도시바뿐이다. 1위는 인텔(미국), 2위는 삼성(한국), 3위는 퀄컴(미국)이다. 이 시점에서 간신히 5위였던 도시바도 얼마 후 자취를 감췄다. 실패의 제1요인은, 일본의 주요 전기산업이 TV시대의 종언과 모바일형 네트워크 사회의 도래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했던 점이다. 다른 하나는 1990년대부터 글로벌한 규모로 전개된 수평 분업 구조에 일본기업이 적응하지 못했던 점이다.
‘가전’의 저주와 신화의 종말 2000년대 반도체 경쟁에서 한국, 미국, 대만에 패배한 일본의 전기 대기업은 설욕전을 기약하며 액정TV에 기대를 걸었는데, 그 대표가 샤프였다. 2001년 내놓은 액정TV의 히트로 상승기류를 단 샤프는 고품질 액정TV의 생산에 회사의 전력을 기울였다. 그들이 액정TV에서 대담한 승부에 나선 배경에는 반도체 경쟁에서의 쓰라린 경험 때문으로 여겨진다. 반도체에서는 각 기업이 소규모 투자를 계속한 탓에 거액투자로 일거에 승부에 나선 한국이나 대만의 기업에 패배했다. 때문에 일본기업은 “우물쭈물하다간 또 한국, 대만, 중국 기업에 추월당한다”며 사운을 건 대담한 투자로 승부를 건 것이다.
그러나 이 승부는 역효과가 났다. 2008년 리먼쇼크 후 그때까지 액정을 중심으로 한 박막형TV의 주전장이던 선진국 시장에서 TV 판매가 급감했다. 샤프는 자금회전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됐고, 사업부문을 매각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경제산업성은 산업혁신기구가 2000억 엔을 출자하도록 해 히타치, 도시바, 소니의 액정 디스플레이 사업을 통합한 조직에 샤프도 합병시키려 했지만, 샤프는 응하지 않았고, 결국 대만기업 홍하이에 매각됐다. 실은 샤프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은 의외로 단순했다. 요컨대 미래에 대한 비전이 잘못됐던 것이다. 그들은 TV시대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는 잘못된 전망을 의심치 않았다. 그들이 가메야마시에 최초의 액정TV 공장을 세웠을 때 이미 인터넷의 극적인 확대로 TV시대가 곧 끝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기 시작했는데도 말이다.
포스트 전후정치의 환멸 - ‘개혁’이라는 포퓰리즘
버블 속의 액상화 - 리쿠르트 사건 버블시대의 일본 정치에서 생겨난 것은 썩어 문드러져 가던 55년 체제의 액상화(液狀化)였는데, 헤이세이 직전인 1988년 발각된 리쿠르트 사건은 헤이세이 정치의 액상화를 가속화하는 쇼크로 작용했다. 리쿠르트 사건의 특징은 제공된 것이 미공개 주식이라는 종래 법적 규제의 바깥에 있던 금융상품이었을 뿐 아니라, 양도대상도 극히 넓었다. 주식을 건네받은 정치가로는 나카소네 야스히로, 다케시타 노보루, 아베 신타로, 오부치 게이조 등 자민당 실력자 대부분이 포함됐고, 야당에까지 미쳤다. 뇌물 목적도 그저 회사에 도움이 될 만한 사람들에게 미공개주식을 대량으로 건넨 것이어서, 그 일탈성 때문에 1988년부터 1989년에 걸쳐 여론과 언론, 정계 전체를 빨려들게 한 거대한 스캔들이 되었다.
리쿠르트 사건으로 다케시타 정권이 무너지자 후임 총리로 선택된 우노 소스케는 여성스캔들 등으로 2개월 만에 퇴진했고, 후계인 가이후 도시키도 걸프전 대응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소선구제 도입도 달성하지 못한 채 사임하고, 미야자와 기이치가 총리가 된다. 다케시타 정권 붕괴 후 일본의 총리가 어지러울 정도로 속속 교체된 것은 그들이 본래부터 권력의 실질적인 주체가 아니고, 형편에 맞아 총리 자리에 오른 ‘장식물’에 불과했음을 입증한다. 당시 정국을 움직이는 권력의 실질적인 중심은 구 다나카파 세력을 승계한 다케시타 노보루와 가네마루 신을 중심으로 한 게이세이카이(經世會)에 있었다.
정치극장의 시스템을 바꾸다 - 소선거구제 도입 리쿠르트 사건이 일본 정치에 던진 충격의 마이너스 효과가 이런 정치 혼란과 일탈이었다면, 플러스 효과는 여야 정치인들 사이에 ‘정치개혁’이 최대 과제라는 공통인식이 생겨난 것이었고, 정치개혁의 중심에 위치한 것이 중의원 선거제도의 소선거구제로의 전환이었다.
선거제도 개혁의 전말 - 개혁파와 수구파 오자와 호소카와 정권은 자민당 비판여론을 배경으로 선거제도 개혁을 최대목표로 내걸며 생각도 입장도 다른 여러 당파를 오자와가 솜씨 좋게 하나로 모아 성립한 정권이었다. 그런 만큼 권력기반은 극히 취약했다. 특히 최대의 불안정 요인은 사회당에 있었다. 사회당은 자민당 정권에 대항한다는 명분으로 신정권에 참가했지만, 정작 중요한 선거제도 개혁에는 부정적인 정치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복잡한 포진 속에서 호소카와는 선거제도 개혁법안의 연내 처리를 꾀했고, 1993년 11월에 중의원에서 법안을 여당만으로 통과시켰다. 그러나 이듬해 1월 참의원에서는 사회당의 조반(造反)으로 부결되고 만다. 그러자 호소카와는 자민당 내 개혁추진파 의원들까지 참여하는 궐기집회를 열었고, 1월 말에는 호소카와와 자민당 총재인 고노 요헤이와의 영수회담을 통해 양당이 법안처리에 합의했다. 이렇게 해서 정치개혁 관련 법안은 1994년 3월 성립하게 되었다. 이 법안이 성립하지 않았다면 그 후의 고이즈미 정치도, 민주당 정권의 탄생도 불가능했을 것인 만큼 엄청난 성과였다.
자민당을 때려부순다 - 고이즈미 극장의 작동 방식 사회당을 디딤돌로 되살아난 자민당 정권은, 하시모토 내각에서 주센 문제와 야마이치증권을 비롯한 금융위기에 대응하는 한편 오키나와 후텐마기지 반환에 관한 미국과의 합의를 마무리 지었다. 1996년 10월에는 소선거구비례대표병립제에 의한 첫 중의원선거에서 승리하며 제2차 하시모토 내각이 출범했다. 하시모토는 제2차 내각에서 행정개혁에 본격 착수해 성청(한국의 부처에 해당하는 중앙관청) 재편으로 나아갔다. 동시에 재정구조개혁법을 통과시키고, 적자국채를 삭감해 재정재건으로 향하는 길을 열려 했다. 그러나 1998년 7월 참의원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하면서 하시모토 내각은 2년 반 만에 막을 내렸다. 뒤이어 등장한 오부치, 모리 등 두 내각은 모두 인기가 없었고 자민당에 대한 불만은 커졌다. 이 변화에 대한 열망 속에 재등판을 꾀한 하시모토 튜타로와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대결에 나섰으나 언론의 관심과 대중적 인기를 거머쥔 고이즈미가 총리 자리를 차지했다.
고이즈미 정권은 과거의 어느 자민당 정권과도 다른 포퓰리즘형 정치를 전개했다. 고이즈미 정권에서 정책운영의 주축은 다케나카 헤이조를 좌장으로 한 경제재정자문회의였다. 기획의 주체인 경제재정자문회의에서 다케나카는 우선 일부 재무성, 경제산업성의 전 관료와 정무비서관 등 측근과의 ‘비밀회의’를 열어 전략목표를 가다듬었다. 이렇게 해서 2001년 6월에는 ‘경제재정에 관한 기본 방침 2001’이 각의 결정되는데, 여기에는 경제자산을 효율이 낮은 부문에서 성장분야로 돌리는 ‘구조개혁’ 단행과 우정 분야 3개 사업의 민영화, 국채발행 30조 엔 이하 억제, 공공투자의 대폭삭감, 사회보장제도와 지방재원의 전면 재검토 등 고이즈미 개혁의 주축이 될 정책 대부분이 담겼다.
민주당 정권의 탄생과 ‘정치주도’ 2009년 8월 30일 중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이 기존 115석에서 308석으로 의석수를 3배 가까이 늘리며 압승했다. 자민당은 고이즈미 정권 때 획득한 300석에서 119석으로 줄어들며 완패했다. 하토야마 유키오가 총리가 되고 정권교체가 실현됐다. 당시 하토야마는 이 선거를 ‘혁명적’이라고 형용했지만, 그 ‘혁명’은 혁명에 의해 탈취된 것이 아니라, 국민이 못난 꼴을 거듭 보이던 자민당에 정나미가 떨어지면서 거저 얻은 것이었다. 하토야마는 “메이지유신 이래 관저주도의 폐해를 제거하기 위해 정치주도로 바꾼다”고 선언했고 관저주도의 정치에서 시민주도 정치로의 전환을 정권의 축으로 내걸었다.
문제는 정치주도의 알맹이였다. 성청 관할주의 행정과 업계의 기득권익, 이를 정치의 장에서 수호하는 족의원 등을 타파하는 것만이 아니라, 이를 대체해 소통이 잘되고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는 동시에 국가의 장기적 운영이라는 관점에서도 지속가능한 정책결정 구조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고이즈미 정권이 내놓은 답은 다케나카 헤이조를 중핵으로 한 경제재정자문회의를 성청 관료시스템에 대항토록 하고, 중대 국면에서는 총리의 연기력을 전면에 내세운 퍼포먼스 정치가 떠받치는 구조였다.
반면 민주당 정권이 내세운 것은 국가전략국 구상과 매니페스토(종래의 선거공약과 달리, 구체적인 예산과 추진일정 등을 갖춘 정책목표) 정치였다. 즉 민주당은 고이즈미 시대 경제재정자문회의를 대신해 국가전략국을 창설하여 이를 정치주도의 기둥으로 하는 한편, 고이즈미 정권의 극장정치를 매니페스토에 의한 언론정치로 대체하려 했다. 확실히 방침은 고이즈미 정권보다 훨씬 진지했다. 고이즈미 정권의 전략에는 어딘지 모를 허세와 괴이함이 느껴졌지만, 민주당의 방침은 정공법이었다. 그러나 역사에서 증명된 성과는 외견상의 우열과는 정반대로 고이즈미 정권의 완승, 민주당 정치의 참패였다.
아베 정권 - 액상화하는 정ㆍ관계와 ‘관저(官邸)주도’ 2012년 12월에 실시된 중의원 선거에서는 자민당이 기존 118석에서 294석으로 3배 가까이 의석을 늘리며 압승했다. 민주당은 지난 중의원 선거에서 획득한 308석의 5분의 1 이하인 57석을 얻는 데 그쳤다. 3년간의 민주당 정권운영이 얼마나 국민을 실망시켰는지를 상징하는 결과다. 수차례 정치주도의 실패를 거치면서 아베 정권은 민주당이 내건 래디컬한 정치주도를 부정하고, 이를 교활한 관저주도로 대체했다. 실제로 관저가 성청의 관료들을 뜻대로 움직이고, 예산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내각인사국과 경제재정자문회의로 충분했다. 관방장관은 성청의 국장급 인사를 관리함으로써 성청 전체에 대한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고, 고이즈미 정권처럼 포퓰리즘과 경제재정자문회의의 민간인 활용을 솜씨 있게 조합하면 여론에 ‘정치주도’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다.
이른바 ‘아베노믹스’ 자체는 1990년대부터 추진된 구조개혁을 한층 앞으로 밀고 나가는 새로운 기축이라곤 할 수 없었다. 아마 아베의 본심은 헌법 개정을 포괄한 보다 이데올로기 색채가 강한 방향이었겠지만, 이는 국민들 사이에 폭넓은 반대여론이 존재한다. 그런 한편으로, 헤이세이 시대를 관통한 정치주도 조류에 휩쓸리면서 중앙성청 관료들 사이에는 관청의 전통이나 방침을 지키기보다, 관저의 의향을 촌탁(忖度)하는 태도가 침투했다. 정관의 긴장관계에 액상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이런 현상의 심각한 문제점이 드러난 것은 2017년부터 2019년에 걸쳐 관저 및 총리주변과 문부과학성, 재무성, 후생노동성이 주고받은 의사록과 공문서, 데이터 등 ‘기록’의 신빙성이 문제가 되면서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