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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미래

로렌스 프리드먼 지음 | 비즈니스북스


전쟁의 미래

로렌스 프리드먼 지음

비즈니스북스 / 2020년 7월 / 560쪽 / 28,000원



전쟁의 기술 : 19세기 중반~냉전 종식



결정적 전투


1870년 9월 1일 프랑스의 어느 군대는 메스 지역에 갇혀 공격을 받는 다른 부대를 구출하러 가던 중 포위되어 스당 전투에서 궤멸했는데, 한 기사는 이렇게 묘사했다. “그 전투는 오전 5시에 시작되었고, 오후 5시에 스당의 흉벽 위에서 깃발을 흔드는 한 프랑스 장군의 모습이 독일군에게 그들의 놀라운 승리를 선언했다.” 그 기사는 뒤이어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에게 보낸 각서를 전했다. “형제여, 내 군대의 선두에 서서 죽지 못했으니 당신의 발치에 나의 검을 내려놓겠소.”

이 기사는 교과서에 나오는 고전적인 군사적 승리를 묘사한다. 하루 만에 결판난 전투에서 정점에 달한 무력 충돌로 유럽 내부의 세력 균형이 변했다. 패배한 쪽은 그 결말과 정치적 귀결을 수용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 3세는 곧 빌헬름과 한 약속을 실행하지 못한 채 폐위되고, 1870년 9월 4일 제3공화정이 선포되었다. 새로 들어선 정부는 전투의 평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싸우기로 결정했다. 독일이 파리를 포위하고 공격하자, 프랑스인들은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군대를 모았다. 그중에 포함된 저격병, 즉 프랑티뢰르는 적군에 침입해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보급선의 방어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프로이센 총리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끈질기게 저항하자 다른 나라가 프랑스 편에 설까 봐 점차 걱정되어 무자비한 처리를 요구했다. 그러나 1871년 1월 말 두 달에 걸친 포위공격 끝에 파리가 함락되자 그곳은 혁명적 봉기의 무대가 되었다. 프랑스 정규군이 파리코뮌을 진압했다. 그때 가서야 프로이센은 프랑스 공화정 정부와 협정을 체결할 수 있었다. 가혹한 협정이었다. 최초의 전투 결과가 수용되었다면 협정이 그렇게 가혹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당 전투는 모든 군사학자의 주목을 끌었다. 프로이센의 승리는 인상적인 병력 동원 덕분에 가능했으며, 병사들을 전선으로 수송한 철도의 역할이 높이 평가받았다. 반면 프랑스는 비스마르크의 부추김에 말려들어 전쟁을 선포했지만 이에 대한 대응은 지리멸렬했다. 이는 프랑스가 일찍 공세에 나설 기회를 잃었음을 뜻한다. 최신식 대포의 위력은 완전히 발휘되었다. 프로이센 육군원수 헬무트 폰 몰트케가 보여준 근대 군대의 기동방식은 후세대 군사전략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스당 전투에 뒤이은 혼란 속에서 질서가 회복되지 않았다면, 그 전쟁은 다르게 기억되었을 것이다. 독일인들은 두 가지 중대한 교훈을 끌어냈다. 첫째, 훌륭한 전략은 정규전의 신속한 승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 둘째, 무자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면, 패배한 국민이 비정규전 저항에 나서 승리를 방해했을지도 모른다.

저항은 실패했다. 그것은 또한 그 나라의 반란 전통을 반영하는, 프랑스의 특징으로 여겨졌다. 한동안 주된 결론은 프로이센이 강력한 국가이자 완성된 전투 국가로서 대담하게 움직이고, 적에 맞서 가차 없이 행동했다는 것이었다. 비록 독일의 장기적인 의도는 불분명했지만, 세력 균형이 독일에 유리하게 바뀌면서 유럽의 질서는 불안정해졌다. 폰 몰트케의 빛나는 승리는 전투의 한계를 암시하긴 했지만 고전적인 모델을 강화시켰다. 두려움이 만들어낸 전쟁관: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프랑스ㆍ프로이센 전쟁이 끝난 1871년 5월, 런던의 《블랙우즈 매거진》에 익명으로 짧은 소설 『도킹 전투』가 실렸다. 육군공병대 대령 조지 톰킨스 체스니가 쓴 이 소설은 큰 화제가 되어 곧 별도의 책으로 간행되었다. 소설은 8만 부 넘게 팔렸으며 영국의 전쟁 준비 태세에 관한 국민적 논쟁을 촉발했다. 이것이 저자의 의도였다. 체스니가 출판사에 제출한 원문에서 설명했듯이, 그는 영국이 어떻게 침공 당할지, 그리고 그 결과로 나타날 국력과 상업의 몰락을 입증함으로써 영국 군사제도의 재편을 권고하려 했다. 그의 주장이 얼마나 효과 있었는지는 당시 총리 윌리엄 글래드스턴이 그러한 이야기는 불안을 유발하여 불필요한 군사비 지출을 초래하고 공공재정을 파탄시킬 수 있다고 공개적으로 불평하도록 만들었다는 사실로 측정할 수 있다.

체스니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 역시 소설을 통해 설명했다. 누가 승리할 것인지는 적어도 이야기를 지어낸 사람이 결정할 수 있음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미래에 관한 그러한 이야기들 덕분에 옛 군사 활동에 관한 깊이 있는 논증이나 해부를 통하지 않고도 더 생생하게 논점을 확인할 수 있다. 『도킹 전투』의 성공은 그것이 단지 1871년의 사건에 그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그때부터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기까지 애국적 염원을 자극하고 민주주의를 키우고 군사적 혁신을 설명하고 대비 태세를 평가하는 수단을 제공한 새로운 문학 장르가 탄생한 것이다. 전쟁의 미래에 관한 글은 정부가 작가의 메시지를 이해하고 그에 맞추어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보여주려 한 것이다.

『도킹 전투』와 뒤이어 나온 모방 작품은 학살극이나 연장된 고통스러운 충돌이 아니라 수치스러운 패배를 묘사한 것들이었다. 기습당한 국민은 최초의 좌절에서 회복될 가망이 없었다. 일단 패하면 자비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전쟁에서 패배한다는 것은 곧 주권과 생활방식, 교역의 상실을 의미했다. 이 멜로드라마 같은 전경 속에서 국제관계는 전투 결과에 따라 바뀐다. 글래드스턴은 체스니의 책은 분란을 일으키는 것이요 공격 재원을 허비하게 하려는 음모라고 비난하며 이렇게 말했다. “인류 전체로 보면 이처럼 우리를 증오 대상으로 만들려는 놀라운 성향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결국 보수당 의원이 된 체스니는 글래드스턴 같은 자유무역주의자들의 낙관론을 공유하지 않았다. 글래드스턴은 경제적 상호의존이 전쟁을 기피하게 만들어 평화를 촉진하리라고 기대했다. 반면 군부의 다수가 공유한 체스니의 세계에서는 한 번 잘못 판단한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었다. 체스니의 책과 비슷한 책자들에서 끌어낼 교훈은 강국들이 경제를 늦추지 말고 다가올 시험에 적절히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지, 전쟁의 성격이 전부 변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었다.

고전적인 전쟁 모델: 이것이 당대 정치인과 장군, 해군 제독, 평자가 공유한 고전적인 전쟁 모델이었다. 도대체 전쟁이 무엇인지, 어떻게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지에 관한 깊은 이해를 토대로 삼았기에 고전적이었다. 이러한 견해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이상형이기에 실제로 모든 전쟁이 그 모델에 들어맞지 않을 수 있고, 몇몇 경우는 그 모델에서 크게 벗어날 수 있다고 이해되었다. 그런데도 이 모델은 전쟁에 대비하는 최고의 지침이었다.

또한 이런 방식으로 전쟁을 수행할 경우 정부의 이익을 가장 잘 지킬 것이라는 점에서 규범적이었다. 전쟁을 짧게 끝낸 뒤 억제할 수 있다면, 그것은 파괴적인 사회적ㆍ경제적 효과의 폭넓은 확산을 제한하면서, 유익한 정책수단으로서 유지될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험상 그 유효함이 확증되었다. 독일의 스당 전투 승리로 그 모델의 지속적인 타당성이 돋보였으며, 당시 과학과 산업의 방식, 정치적 참여 형태, 대중 매체의 발전에서 진행된 엄청난 변화에 비추어 그 모델이 어떻게 조정될 것인지는 가볍게 다루어졌다. 한편 독일 통일 전쟁, 즉 1870년의 프랑스ㆍ프로이센 전쟁은 물론, 1864년 덴마크, 1866년 오스트리아와 벌인 전쟁도 폰 몰트케의 신속한 승리가 미래의 전쟁을 위한 전략적 선례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독일군 참모본부는 이 확신을 강력히 고수했으며, 미래의 전쟁은 적군을 궤멸하는 신속한 전투가 아니라 격렬한 소모전을 치른 후에야 승리를 얻을 가능성이 크므로,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경고한 자들에게 화를 냈다. 이러한 믿음은 유럽 다른 곳에서도 미래의 전쟁에 관한 시각을 지배했다. 전쟁이 필연적으로 그렇게 될 것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독일이 전쟁을 어떻게 수행할 수 있는지 증명했고, 따라서 이를 되풀이하는 것도 당연했기 때문이다.

19세기 전쟁 이론: 당대의 유력한 전쟁 이론들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비롯되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는 나폴레옹이 구현한 전투 원리를 가장 명민하게 설명했다고 인정받은 앙투안 드 조미니 남작이었다. 프리드리히 대왕과 나폴레옹의 군사 활동을 탐구한 초기 저작에 이어, 1838년에 발표된 『전쟁학 개론』은 유럽 군대에서 가장 널리 채택된 교과서였으며, 미국에서도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생전의 조미니는 오늘날 가장 위대한 이론가로 여겨지는 프로이센의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보다 훨씬 더 유명했다. 조미니는 자신의 책에서 전쟁의 동력을 그 정치적 배경과 분리하여 탐구했다. 그의 조언은 장군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약한 적군을 겨냥해 병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음을 설명하는 데 맞춰졌다.

독일에서 영향력이 더 컸던 클라우제비츠는 계획이 실패하는 이유와 전투가 띨 수 있는 다양한 형태를 더 예리하게 이해했지만, 그의 조언은 본질적으로 전투의 이론이요 전투가 결정적일 수 있는 상황에 관한 이론이었다. 나폴레옹에서 시작해 조미니를 거쳐 클라우제비츠가 확증하고 이어 폰 몰트케가 증명한 핵심 가정은 위대한 지휘관이라면 전투에서 적군을 궤멸하고, 승전국이 적국에 적절하다고 판단하는 굴욕과 처벌을 모조리 안겨주리라는 것이었다. 한편 고전적 형태의 전투는 동이 트자마자 시작해 날이 저물 때 끝나는 것이었다. 그때는 전장을 점유한 쪽이 승자가 된다. 진정으로 결정적인 승리는 패한 군대가 많은 사상자와 포로로 병력이 심하게 고갈되어 더는 실전을 치를 여력을 갖지 못하는 상황을 의미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패전국이 협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851년에 에드워드 크리시가 발표한『15개의 결정적인 세계 전투: 마라톤에서 워털루까지』는 제목과 전제에서 몇몇 전투는 군사학의 걸작일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 세계사에 중대한 영향을 끼친 원천이라는 견해를 확인했다. 크리시는 “단련된 용기의 부정할 수 없는 위대함과 전투원들이 고통과 파멸에 맞서게 한 명예의 흠모”라 하며, 최고로 유능한 지휘관들의 지적 능력과 담대함에 주목했다. 그에 따르면 불운하게도 이러한 자질은 인류의 가장 고귀한 자들뿐만 아니라, 가장 비열한 자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크리시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전투가 인과 사슬의 일부인가 여부였다.

역사의 전환점은 종종 전쟁에 의해 매듭지어졌다. 이러한 유형이 미래에도 계속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전투가 매력적인 것은 두 개의 육군이나 해군 사이 획기적인 충돌이 수십 년 동안 축적한 재원을 소비해 불과 몇 시간 만에 역사의 진로를 바꿔 놓을 수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문명의 운명이 무기와 용맹함, 몇몇 사람의 전술적 예지에 좌우되면서 전투는 모질고 격한 드라마를 낳았다.

역사의 전환점이 된 것처럼 보이는 특정한 전투가 있었다. 1805년 나폴레옹이 아우스터리츠에서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에 거둔 눈부신 승리가 다른 결말을 맞았고 그 후 일어난 거의 모든 일이 다르게 보였다고 가정해보라. 또는 게티즈버그 전투가 북부연방의 패배로 끝났다고 가정하고 북부연방이 회복할 수 있었을지 생각해보라. 그러나 진정으로 결정적인 전투는 예사롭지 않았다. 한 번의 충돌로 결정되는 드문 전쟁이었다. 개별 전투 간의 차이는 흔히 더 폭넓은 전쟁 수행 노력을 배경으로 볼 때만 이해할 수 있다. 매우 중요한 몇몇 전투는 신속하게 끝날 수도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방어 전투여서 시간을 질질 끌었다. 다른 전투들은 누적 효과를 가져왔다. 어느 한 편이 연이어 패배하면서 그들의 자원과 예비 병력, 사기가 꾸준히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어떤 전투는 포위공격이나(잠재적으로는 실제 전투만큼이나 전쟁의 형태를 결정하는 데 중요했다) 비정규 유격전과 관련지어 영향력을 얻었다. 전투는 군사적 우위를 결정한다고 인정된 다른 모든 요인을 드러내는 수단이 된다. 언제나 존재했던 능력을 입증하는 방법이 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몇몇 전투는 ‘이정표’가 될 만했다. 역사에 특별한 것을 남겼기 때문이 아니다. 폭넓은 문화적ㆍ물질적 우위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다음 전투는 다른 것을, 아마도 패배한 자가 동맹을 찾거나 국민의 사기를 되살릴 능력을 증명할지도 모른다. 핵심 질문은 개별 전투가 만들어내는 차이가 아니라 전쟁을 빨리 끝낼 수 있는가 여부였다. 전쟁을 빨리 끝낸다는 것은 전쟁을 시작하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희망사항이었고, 몇몇 경우에는 예상하는 바였다. 적군의 회복력이 좋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비군사적 요인들이 점점 더 중요해질 것이다.

전쟁에 앞서 이론적 가능성이나 계획의 지침으로서 결정적인 전투가 고려되었을 때, 염두에 둔 것은 첫 번째 전투, 정교하게 설계하고 신중하게 계획한 전투이자 열심히 의무를 다하려는 두려움 없고 기운찬 병사들이 수행하는 전투였지, 지치고 겁 많은 병사들, 최후의 충돌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걱정하는 병사들이 수행하는 전투가 아니었다. 첫 번째 전투에서 적을 기습적으로 타격해 회복 불능 상태로 만들면 장기전을 피하는 데 도움이 된다. 바로 이런 ‘전투의 유혹’ 때문에 여러 나라가 공격해 모든 것을 내건다. 장기적 소모전이 될 것을 알면서 전쟁에 뛰어드는 나라는 없다. 그렇지만 장기적 소모전은 종종 일어나고, 따라서 그런 나라들은 고초를 겪었다.

핵무기 시대에 빠지다


초강대국 체제에서의 군축 문제: 이 세상 지도자들이 엄중한 선택에, 즉 국제적 행동을 통해 원자폭탄을 통제할 것인가 완전한 비극을 맞이할 것인가 하는 선택에 직면해 있다는 확신은 핵무기 시대가 시작될 때부터 있었다. 원자폭탄을 제조한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기획이 분명코 나치 독일이 이 가공할 무기를 먼저 획득하지 못하게 하며, 국제사회에 충격을 주어 세계 정부라는 절박한 명령을 수용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합리화했다. 일단 전쟁이 끝나자, 이들은 이 문제를 강력하게 제기했다. 1946년 웰스에게서 착상을 얻어 제목을 붙인 책 『하나의 세계 아니면 전무』에 그 목적이 드러나 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절망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1946년 6월 미국은 국제연합에 핵에너지를 오로지 민간 용도로만 개발하고 군사적 사용을 금지하자는 계획을 제안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의 관계가 나빠지는 상황에서 소련은 음모를 탐지했다. 소련 정부는 자신들은 역량을 키울 기회를 얻지 못하고 미국이 교묘히 빠져나가 핵에너지를 독점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하는 꼴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미국 편에서는 강력한 이행 강제 장치가 없으면 소련이 다른 모든 나라가 무장을 해제한 뒤 숨어 있는 병기고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속임수를 쓸 거라고 걱정했다. 이 단계에서 더 나은 제안이 있었다면 핵무기 경쟁을 방지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어쨌든 그 노력은 곧 사라졌다. 최근의 끔찍한 전쟁 경험과 무서운 신무기의 갑작스러운 출현으로 각국 정부는 서로 차이를 극복하고 공동의 이익을 위해 협력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정말로 하나의 세계 아니면 전무를 선택해야 할 때, 세계정부와 진지한 군축이 아닌 다른 암울한 미래가 서서히 거대한 모습을 드러냈다. 선제타격에 대한 환상: 핵전쟁에서 확실하게 승리할 유일한 방법은 선제타격으로 적의 보복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막는 방법은 두 번째 타격 능력을 개발하는 것인데, 그러려면 많은 병력이 선제타격을 극복하고 살아남아 받은 대로 되갚아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양측 다 선제타격 능력을 추구한다면, 오판에 따라 전쟁이 일어나는 위험천만한 위기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 따라서 선제타격에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점을 확실히 밝히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위기에 직면했을 때 양측이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하며 외교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셸링이 오판으로 인한 전쟁을 피하는 열쇠로 확인한 것이 바로 핵무기 관계의 이 측면이었다.

선제타격 방안을 쓸 수 있는가 여부가 당시 긴급한 문제였다. 1954년 앨버트 월스테터가 이끄는 랜드 연구소의 한 연구팀은 미국 전략폭격기 전력을 위한 최적의 기지 배치를 연구해보라는 요청을 받았다. 이들은 기습공격의 취약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꼽았고, 그로써 미국이 어떻게 빈틈없는 소련에 선제타격을 당하는지 증명했다. 보고서는 등장인물과 서사적 긴장이 없다는 점만 제외하면 현대판 전쟁소설이었다. 연구팀은 가용한 자료를 최대한 수집해 엄밀하게 분석하는 방식을 취했다(소련의 능력에 관해 알려진 것이 불충분하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러나 줄거리는 악랄한 외적이 어떻게 미국을 불시에 습격하는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보고서는 강력한 힘을 지녀 안전해 보이는 나라가 왜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것보다 훨씬 더 취약했는지를 가정에 가정을 더해 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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