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
다마키 도시아키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세계사의 중심축이 이동한다
다마키 도시아키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20년 6월 / 280쪽 / 16,500원
인류 역사에서 ‘아시아 우위 시대’가 길게 이어진 이유
인류의 탄생인류의 탄생 과정: 현재 최초의 인류는 아프리카 중북부에서 발견된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로 700만~600만 년 전에 살았다고 추정된다. 이후 인류는 다른 생물과는 확연히 이질적인 진화 형태를 거쳤다. 어떤 생물이나 진화한다. 그러나 인류 진화의 속도는 다른 생물과 비교해 유독 빨랐다.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에서 호모사피엔스까지 불과 700만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출아프리카: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출발해 세계 각지로 진출했다. 이 책에서는 이를 성서의 ‘출애굽’에서 따온 ‘출아프리카’라는 용어로 설명하고자 한다. 호모에렉투스는 아프리카의 기후가 한랭해지자 아프리카를 벗어나기 시작해 유라시아 대륙의 몇몇 지역으로 이주했다고 추정된다. 이를 인류 최초의 글로벌리제이션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이 시기의 글로벌리제이션은 세계 각지에서 인류 진화로 발전하지도 않았고 후대에 영향을 미치지도 못했다. 유라시아 각지로 이주한 호모에렉투스는 서서히 멸종했으므로 현생 인류가 호모에렉투스에서 직접 탄생했다고는 볼 수 없다.
현생 인류인 호모사피엔스는 두 번에 걸쳐 출아프리카를 단행했다. 첫 번째는 15만~10만 년 전이고, 두 번째는 7만~5만 년 전이다. 이 출아프리카로 인류는 말 그대로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바로 인류의 두 번째 글로벌리제이션이다. 호모사피엔스가 주도한 글로벌리제이션이야말로 인류 역사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미쳤다. 인류의 인구는 출아프리카를 거쳐 현재 76억 명을 넘어섰다. 생물의 역사에서 예나 지금이나 이 정도로 급격하게 개체 수가 늘어난 종은 없다.
유럽인의 ‘재발견’: 15세기 대항해 시대부터 시작된 제3차 글로벌리제이션은 아프리카를 벗어나 세계 각지로 흩어진 인류를 유럽인이 ‘재발견’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제2차, 제3차 글로벌리제이션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처음 두 번의 글로벌리제이션은 주로 육로로 이루어졌고 세 번째 글로벌리제이션은 해로로 이동하며 발생했다. 제3차 글로벌리제이션을 주도한 유럽인의 세계 ‘재발견’은 가난한 유럽인이 부유해지기 위해 세계무대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던 데서 생긴 현상이다.
문명의 전파6대 문명: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흔히 ‘4대 문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을 말한다. 여기에 양자강 문명, 아메리카 대륙의 고대 문명인 메소아메리카 문명을 더해 6대 문명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 책에서는 6대 문명을 대상으로 삼았다. 6대 문명이 발전하는 동안에도 출아프리카 행렬은 이어졌다. 일반적으로 출아프리카 현상은 인류가 남미 대륙 남단에 도달하면서 끝났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으나, 태평양의 섬처럼 아직 인류의 발길이 닿지 않은 지역도 남아 있었다. 정착하는 사람들이 문명을 형성하는 한편, 출아프리카 현상이 계속되었고 끊임없이 이동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므로 문명의 전파는 출아프리카와 동시에 진행되었다.
농경 생활로 불거진 문제인류는 농경을 선택했다: 수렵 채집민이 6대 문명 같은 문명을 경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농민은 까마득한 세월에 걸쳐 수렵 채집민이 도달하지 못한 생활수준을 경험했을 것이다. 즉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농민의 생활수준은 수렵 채집민을 따라잡지 못했고, 질병이 큰 폭으로 늘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먹고살기 편한 수렵 채집을 포기하고 힘들게 일해야 하는 농경을 택했을까? 이는 인류사 최대의 수수께끼 중 하나다. 그 수수께끼를 풀 실마리가 출아프리카에 있다. 인류는 아프리카를 나와 여러 지역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만일 인류가 어느 한 곳에 터를 잡고 살지 않는다면 출아프리카는 영원히 계속되어야 했다. 그래서 아프리카를 떠난 현생 인류는 언젠가 한 곳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는데, 아프리카에서처럼 나무 열매를 따 먹고 동물을 사냥하던 생활이 더는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출아프리카야말로 정착 농경 생활을 하게 만든 원인이 아니었을까.
중국의 융성중국 경제는 어떻게 융성했을까?: 6대 문명 가운데 메소아메리카 문명은 다른 문명과 고립되어 있을 뿐 아니라, 성립 시기도 비교적 늦다. 그리고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는 오리엔트라는 하나의 문명권을 형성했는데, 이 오리엔트에서는 다양한 국가가 난립했고 전쟁이 끊이지 않아 통일 국가가 생겼다 멸망하는 과정을 수없이 반복했다. 한편 인더스 문명 또는 인도 문명도 비슷한 상황에서 장기간에 걸쳐 하나의 통일 국가를 이루지 못했다. 반면 황하 유역에서는 일찍부터 통일 국가가 완성되었고, 통일 왕조는 중국 경제라는 무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할을 도맡았다. 다시 말해 근세나 근대 유럽과 마찬가지로 국가 주도로 경제 성장이 이루어졌다. 이때까지 양자강 유역은 그 권역에 편입되지 못했다.
하 왕조에서 전국 시대까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는 하(夏) 왕조였다. 하 왕조의 뒤를 이은 은(殷)은 서기전 1550년경~서기전 11세기에 존속한 왕조로 여겨진다. 은의 뒤를 이어 서기전 11세기에 주(周 또는 西周) 왕조가 세워졌다. 서기전 770년에 주가 낙읍(洛邑) 천도를 계기로 춘추전국 시대에 접어들었고, 중국은 500년 이상 이어진 전란의 시대에 돌입했다. 그러나 춘추전국 시대를 단순히 전란의 시대로만 보면 중요한 경제 발전을 간과하게 된다. 이 시대에는 철제 무기가 보급되었고, 철제 농기구와 우경이 널리 퍼져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었다. 또한 농업과 수공업이 활발해지며 청동 화폐가 도입되었다. 아무튼 춘추전국시대 중국에서는 괄목할 만한 경제 발전이 이루어졌다.
춘추전국 시대를 통일한 나라는 진(秦)이다. 이미 중국 경제는 세계적 관점에서 봤을 때 수준이 높았으며 탄탄한 경제적 기반을 물려받은 진은 중국의 경제 수준을 한층 키워 놓았다. 진나라의 왕 정(政, 서기전 247~221년 재위)은 법가 사상에 바탕을 두고 중국을 통일했다. 이후 도량형과 문자, 화폐까지 통일했다. 그리고 중앙 집권적 군현제를 채용해 단순한 왕이 아닌 ‘황제’의 지위에 올라 우리가 아는 이름인 시황제(始皇帝, 서기전 221~서기전 210년 재위)라 칭하게 되었다.
당에서 원으로 - 더욱 발전하는 중국수나라 제도를 계승한 당: 618년 당나라 건국은 고종 이연(618~626년 재위), 태종 이세민(626~649년 재위) 부자가 이루어냈다. 당은 정치와 경제 체제 모두 수나라가 닦아놓은 토대를 그대로 이용하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위진 남북조,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당은 율령제를 채택했다. 쉽게 말해 ‘황제가 토지와 백성을 지배한다’는 사상을 체계적인 제도로 완성한 것이다. 세제는 조용조제와 균전제를, 병제로는 부병제를 택했다. 그리고 관리 등용 제도로 수와 마찬가지로 과거제를 실시했다. 이는 상당히 중앙 집권 국가의 모습을 갖춘 것으로, 같은 시대 유럽에서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당은 수가 건설한 대운하 덕분에 화북과 화남 경제권을 통합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대운하 변에 자리 잡은 변주의 지위가 상승했다. 당시 당나라 수도 장안은 인구 백만이 거주하는, 유라시아 대륙을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도시이자 수많은 외국인이 드나드는 국제 도시였다.
원대의 중국 / 경제 성장과 역참제: 1206년 칭기즈칸이 건국한 몽골 제국은 급격히 판세를 키워나가 유라시아 대륙 중앙부를 차지한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몽골 제국은 수많은 전쟁을 치르는 한편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 제도를 마련하는 데에도 소홀함이 없었다. 경제를 발전시키려면 국가는 도로를 비롯한 교통망을 정비해야 한다. 교통망은 경제학에서 말하는 공공재인데, 몽골 제국은 공공재를 매우 효율적으로 공급했다. 쿠빌라이 칸 시절의 역참제를 잠시 살펴보자. 몽골에서는 수도를 중심으로 주요 도로를 따라 40킬로미터마다 민가를 참(站)으로 삼고 관령에 따라 여행하는 관리와 사절 등에게 말과 식량을 제공하게 했다. 참은 필요한 물자뿐 아니라 사람을 제공해 시중들 의무가 있었고, 토지세를 면제받았지만 말을 제공해야 했기에 경제적 부담이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역참제는 수도를 중심으로 유럽과 아시아를 아우르는 규모로 정비되었다. 제국 내의 교통이 안전하고 편리해지자 이슬람 상인이 대상(隊商)을 이루어 육로 무역이 활발해졌다. 마르코 폴로도 역참제가 없었더라면 대도까지 찾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튼 역참제는 20세기에 시베리아 철도가 개통할 때까지 유럽과 아시아를 가장 빠르게 오가는 정보 전달 통로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몽골 제국의 지배자들이 상업 활동, 나아가 정보 전달을 얼마나 중요하게 인식했는지 가늠할 수 있다.
팍스 몽골리카와 유라시아 상업 발전: 1246년 쿠빌라이 칸은 대도를 수도로 정하고 1271년에 국호를 원으로 고쳤다. 1266년에는 카이두의 난이 발생했는데, 이 반란은 1301년까지 이어지다 카이두가 이끄는 대군이 패배하며 카이두가 사망해 종말을 맞았다. 카이두의 반란을 끝으로 팍스 몽골리카(Pax Mongolica, 몽골의 평화)가 찾아왔다. 유라시아 대륙의 상당 부분이 원의 지배 하에서 안정을 찾았고, 동서 교류가 활발해지며 상업이 발전했다. 그리고 몽골 제국이 만든 평화는 지중해 무역의 증가로 이어졌고, 지중해 무역은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무역으로 이어졌다. 유라시아 대륙의 상업이 아시아 바다(인도양ㆍ동남아시아)와 통합되어 더욱 큰 상업 네트워크를 실현한 것이다.
유럽은 어떻게 세계를 제패했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이 아시리아 제국에 통합되며 오리엔트 세계가 탄생했고, 유럽은 독자적인 문명을 보유하게 되었다. 유럽 문명은 지중해에서 태동했고, 지중해 세계의 주역은 고대 그리스인, 페니키아인, 고대 로마인이었다. 그런데 지금껏 페니키아인의 중요성이 과소평가되곤 했는데, 지중해 세계를 하나의 상업권으로 통합한 이가 바로 페니키아인이다. 한편 7세기 무렵 이슬람이 지중해 세계를 침입했다. 이슬람이 유럽에 들어옴으로써 지중해는 더 큰 이슬람 세계의 일부로 기능했다. 중세 유럽의 세계는 이슬람 세력에 둘러싸인 보잘것없는 변방에 지나지 않았다.
한편 바이킹의 활약으로 유럽의 북구와 남부, 즉 북해와 발트해와 지중해가 하나의 상업권으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유럽의 경제 수준은 아시아에 비해 한참 뒤처졌다. 그러던 유럽에 상승 기운이 형성되며 바야흐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해갔다. 포르투갈이 희망봉을 돌아 아시아로 향하는 경로를 개척하면서부터 유럽은 맹렬하게 아시아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 이탈리아가 향신료를 수입했다고 해도 동남아시아의 말루쿠 제도에서 아시아 상인, 이슬람 상인의 손으로 홍해까지 운송된 제품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이탈리아로 운송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포르투갈 신항로 개척 이후 유럽은 유럽 선박에 상품을 싣고 아시아로 운송하게 되었다. 유럽은 해로를 통한 물류를 야금야금 장악했고 대서양 경제 형성에 성공했다. 예로 서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를 신세계로 데려와 그들이 플랜테이션 농업으로 사탕수수를 재배해 생산한 설탕을 내다 팔았다. 그렇게 대서양 경제 개발로 유럽에 설탕과 커피 등의 소비재가 수입되었고 유럽인의 생활은 한층 풍요로워졌다. 또한 유럽은 정보의 비대칭성이 적고 시장 진입 장벽을 낮춘 사회를 만들었다. 유럽은 대외 진출과 함께 유럽의 상업 체제를 수출했다. 즉 유럽은 세계의 구조를 유럽에 유리한 방향으로 재편성했다.
이탈리아에서 포르투갈로 - 유럽의 무역 변화선진 지역 이탈리아: 상업의 부활로 이탈리아는 유럽 경제를 앞에서 이끄는 선진 지역으로 거듭났다. 이탈리아는 금융업을 중심으로 상황에 따라 국왕에게까지 돈을 빌려주었다. 그리고 다른 나라보다 한발 앞서 은행 제도가 발전해 세계 최초의 은행인 산 조르조 은행이 1407년 제노바에 창설되었다. 다만 당시 이탈리아의 은행 제도는 오늘날과는 달랐다. 환전과 대출, 투자 기능은 크게 발전했지만, 금융 중개 기능(사람들이 맡긴 돈을 회사에 빌려주는 기능)은 발달하지 않았다. 또 이탈리아는 이른 시기에 해상 보험업이 발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확률 이론이 빠져 있어 발전에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은행법과 보험업 양쪽에서 이탈리아의 발전 자체에 결정적 한계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즉 중세와 근세 이탈리아의 경제 체제는 근대적 체제로 발전하지 못했다.
유럽의 향신료 수입: 향신료가 동남아시아의 말루쿠 제도에서 인도양, 홍해를 지나는 기나긴 항로를 거쳐 이집트에서 이탈리아 선박으로 운송되었는데, 중세 이탈리아 번영의 상당 부분은 이 향신료 무역에 의존했다. 하지만 향신료 시장으로서 유럽은 협소했고 더구나 유럽 내부에서만 운송을 담당한 이탈리아의 역할은 세계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꽤 미미한 것이었다. 그러다 1498년에 포르투갈인 바스쿠 다가마가 희망봉을 돌아 인도로 항해하는 경로를 발견하면서부터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이탈리아 대신 포르투갈이 유럽 향신료 운송의 주역으로 부상했다. 포르투갈인은 이탈리아인과 달리 향신료를 직접 자국 선박으로 말루쿠 제도에서 유럽까지 운송할 수 있었다. 포르투갈의 뒤를 이어 네덜란드, 영국, 덴마크 등이 후발 주자로 뛰어들어 자국 선박으로 아시아 상품을 수입했다. 이 부분에서 이탈리아는 눈에 띄게 뒤처졌다. 더욱이 유럽 각국은 점점 자국 선박을 이용해 자신의 제품을 아시아로 수출하는 길을 열었다. 아시아 해운업에 유럽이 참여하는 형세가 갖추어진 셈이다.
포르투갈 제국의 대두와 상인: 유럽과 아시아와의 접점을 만들어내는 역할은 이탈리아에서 포르투갈로 넘어갔다. 포르투갈은 인도를 비롯해 동남아시아에 식민지를 세웠다. 그러나 차츰 상당수의 식민지를 네덜란드와 영국에 빼앗겼고 아시아에서 포르투갈의 지위는 급격하게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상인이 직접 조직을 꾸려 포르투갈인은 상업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또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페르시아만에서부터 마카오에 걸친 지역에서는 포르투갈어를 공용어로 사용했다.
대서양 경제 형성과 유럽의 대두대서양 경제 형성의 초석: 유럽인은 유럽 내부에서 채굴되는 금만으로는 부족해 서아프리카에서 금을 수입해야 했다. 그런데 유럽인이 금을 얻는 데 있어서 이슬람교도인 베르베르인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사하라 종단 무역은 큰 걸림돌이었다. 강력한 이슬람 세력에 밀려 사하라 종단 무역에 참여할 수 없었던 유럽인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이슬람 세력에게서 금을 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아프리카산 금을 직수입하려면 해로를 이용해야 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아프리카산 금을 확보하기 위한 유럽인의 노력이 대항해 시대의 서막을 연 셈이다. 사하라 사막에서 이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유럽인이 직접 금을 수입한다는 목표 하나만 앞세워 포르투갈의 항해왕 엔히크는 바다로 나갔다.
1415년,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대륙 북부의 세우타를 획득했다. 최초로 획득한 유럽 밖의 식민지였으며, 이를 계기로 유럽의 제국주의가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은 1444년에 카보베르데, 이듬해인 1445년에 베르데곶에 도달했다. 포르투갈인이 서아프리카 일대를 포르투갈령 기니(기니비사우)로 삼은 때는 1446년이었다. 1480년에는 말리 제국 수도였던 통북투에 이르렀다. 이처럼 유럽은 바닷길을 통해 바깥 세계에 진출했고, 바야흐로 유럽이 아시아보다 경제력에서 앞서는 계기를 마련했다. 유럽인은 유럽의 배를 타고 아시아로 항해해 상품을 수입했으며 시간이 지나자 아시아에 상품을 수출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