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적 한마디가 삶의 철학이 된다
한수운 지음 | 아이템하우스
결정적 한마디가 삶의 철학이 된다
한수운 엮음
아이템하우스 / 2020년 4월 / 496쪽 / 19,800원
고대사의 결정적 한마디
알렉산더의 동방 정벌 고대 소아시아의 프리지아라는 도시국가에는 왕이 없었는데, 신탁에 따르면 이륜마차를 타고 오는 첫 번째 사람이 왕이 될 거라는 예시가 있었다. 어느 날 농부의 아들이었던 고르디우스가 이륜마차를 타고 나타나자 사람들은 그가 바로 신탁이 말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왕으로 추대했다. 왕이 된 고르디우스는 자신이 타고 온 마차를 신전에 바치고 복잡하게 매듭을 지어 신전 기둥에 묶어 두었다. 그것을 본 사제가 신탁을 받아 예언하였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푸는 자가 아시아 전역을 통치하는 지배자가 되라라.” 나중에 알렉산더 대왕이 아시아 원정길에 그곳을 지나다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에 관한 예기를 듣고는 자신이 풀어보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단칼에 매듭을 베어버렸다.
리더는 때론 과감한 능력 발휘를 통해 진정한 리더로 자리매김한다. 알렉산더 대왕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과감하게 단칼에 끊어냄으로 진정한 리더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중국에도 이와 비슷한 고사가 있다. 남북조시대 북제의 창시자 고환은 아들을 여럿 두고 있었는데, 이 아들들의 재주를 시험해 보고자 한 자리에 불러서 뒤얽힌 삼실 한 뭉치씩을 나눠주고 풀어보라고 하였다. 다른 아들들은 모두 엉킨 실타래를 풀어보려고 진땀을 흘리고 있는데, 양이라는 아들은 잘 드는 칼 한 자루를 들고 와서는 헝클어진 삼실을 싹둑 잘라버렸다. 쾌도난마(快刀亂麻)란 고사성어가 생겨난 유래다.
다모클레스의 칼 기원전 4세기 전반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시라쿠사는 디오니시오스 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복종했고, 그의 궁전은 아름답고 값진 물건들로 가득했다. 디오니시오스의 신하인 다모클레스는 이런 왕의 권력과 부를 부러워했다. 하루는 다모클레스가 왕에게 말했다. “폐하, 얼마나 행복하시겠습니까! 폐하께서는 누구나 바라는 것을 모두 가지고 계시니 말입니다. 단 하루만이라도 폐하의 부와 쾌락을 누려보는 것이 제 평생의 소원입니다.” “재미있군, 내일은 그대가 왕이네. 자네 뜻대로 이 자리에 앉아 마음대로 해보게나.”
다음날 다모클레스에게 왕을 체험할 기회가 주어졌다. 향기로운 술과 아름다운 여인, 흥겨운 음악으로 그는 푹신한 왕좌에 기대어 오늘만큼은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중 그는 우연히 왕좌의 천장을 바라보고 깜짝 놀랐다. 날카로운 칼이 단 한 가닥의 말총에 매달려 그의 머리 위에 있는 것이 아닌가! 순간 그의 표정은 잿빛으로 변했다. 더 이상 술도 음식도 즐길 수 없었다. 음악도 즐겁지가 않았다. 그때 그의 당황해 하는 모습을 보고 디오니시오스 왕이 말했다. “뭐가 잘못되었나?” “저 칼….” “그게 뭐가 그리 대수인가? 나는 매 순간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산다네. 나의 권력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칼처럼 항상 위기와 불안 속에 유지되고 있는 거지.”
한니발, 알프스를 넘다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불굴의 의지와 지략을 갖춘 뛰어난 명장이었다. 그는 누미디아 기병과 코끼리 부대를 이끌고 누구도 생각지 못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를 공략하기로 했다. 이때 알프스 산맥을 눈앞에 두고 병사들이 낙담할 때 그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용기를 불어넣었다. “우리는 길을 찾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길을 만들 것이다!” 더욱이 진군 도중에 눈병으로 한 쪽 눈을 실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격하여 위엄을 떨쳤다. 알프스를 넘어 칸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한니발은 로마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 갔다. 그러나 전쟁은 장기화되고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패함으로써 카르타고의 운명은 점차 기울어진다.
“눈물 흘릴 눈이 하나뿐이라는 것이 원망스럽다.” 자마 전투에서 패한 한니발의 눈물의 명언이다.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가 한니발을 겨우 이기고 난 후에 한니발과 회담을 가졌다.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장수를 누구라 생각하시오?” “우리 시대에 가장 위대한 장수는 역시 알렉산더 대왕이오.” “그 다음은 누구라 생각하시오?” “그것은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요. 그는 처음으로 숙영지의 중요함을 깨달은 자요.” “그 다음은 누구라 생각하시오?” 한니발은 계속되는 스키피오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것은 바로 나 한니발이오.”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말에 조롱을 섞으며 말했다. “당신은 나에게 패한 장수란 걸 잊었소?” 그러자 한니발은 서슴없이 스키피오를 향해 말했다. “그래서 세 번째인 것이오. 당신에게 이겼으면 나는 첫 번째가 됐을 것이오.” 한니발은 전쟁에 패했음에도 자신감이 넘쳤으며 로마는 이러한 한니발을 두려워했다. 로마의 역사가는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로마는 카르타고를 두려워한 것이 아니다. 로마는 한니발을 두려워했을 뿐이다.”
스키피오의 절제 “로마인들은 졌을 때 주눅 들지 않았고, 이겼을 때 우쭐대지 않았다.” 이 말은 고대 로마공화국의 장군인 프블리우스 코넬리우스 스키피오가 카르타고를 불태우자고 격앙된 목소리로 외치는 로마인들의 분노를 누르고자 한 말이다. 스키피오는 아프리카의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무찌른 장군으로, 제3차 포에니 전쟁을 종결시켜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를 받은 인물이다. 역사가들은 만약 스키피오가 없었다면 지중해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라며 스키피오의 존재를 높이 샀다. 그가 없었다면 황제 아우구스투스 이후 꽃피운 대제국 로마는커녕, 거꾸로 카르타고가 로마를 속국으로 지배하면서 지중해 대제국의 패권을 차지했을 것이라고 평가한다.
고대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로마와 카르타고는 500년 동안이나 전쟁을 지속해왔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로마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동안 카르타고와 한니발에 대한 원한이 뿌리 깊게 밴 로마는 카르타고를 포위하고 불태우자는 의견으로 들끓었다. 로마는 관용의 국가이다. 그동안 주변 국가들과 수많은 전쟁을 했으나 적을 초토화시킨 예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에 대해서만큼은 분노를 억제하지 못해 카르타고를 불태우고자 했다. 스키피오는 끝까지 반대했으나 증오와 분노의 여론을 잠재울 수는 없었다. 결국 로마는 카르타고의 포위된 성을 불태웠고, 스키피오는 그 불타는 카르타고를 보며 울었다고 한다. “지금 우리는 한 제국의 멸망이라는 위대한 순간을 목격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가슴을 채우고 있는 것은 승리의 기쁨이 아니라, 언젠가는 우리 로마도 이와 똑같은 순간을 맞이할 거라는 비애감이다.” 스키피오는 실로 위대했다. 스키피오의 예견대로 로마는 결국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 붕괴로 스스로 무너지고 말았다. “저항이 사라지면, 생명력도 사라진다.”
중세사의 결정적 한마디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승인 “모든 사람들에게 원하는 대로 믿음을 가질 권리를 부여하노라.” 콘스탄티누스 1세가 313년에 모든 사람에게 기독교를 포함한 신앙의 자유를 선포한 리키니우스의 밀라노 칙령의 전문이다. 많은 역사가들은 기독교의 공인을 계기로 로마제국이 무너지기 시작했다고 하지만, 이는 또 다른 서양사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세계사에 명멸한 수많은 황제 중 역사상 가장 안정적으로 통일과 균형을 이룬 황제로 콘스탄티누스 1세만 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가 기독교를 공인한 것도 국가 안정을 위한 통치술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이름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사두정치체제에서 이뤄진 기독교 박해 이후이다. 아버지(콘스탄티우스 1세)가 영국의 에보라쿰에서 병사하자 그의 휘하의 장병들은 즉각 콘스탄티누스를 정제로 추대하였다. 병사들에 의한 콘스탄티누스의 정제 승계는 당시 사두정치체제 아래에서 적법성에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콘스탄티누스는 동방 정제인 갈레리우스에게 자신의 권좌 승계에 대한 확인을 요청하였고,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의 영토를 승계하도록 하되 부제로 인정하고 서방 정제로는 세베루스를 임명하였다.
콘스탄티누스는 이듬해 공동 황제이던 막시미아누스로 하여금 자신을 황제로 인정해달라고 하고 그의 딸 파우스타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311년 동방의 황제이자 기독교 박해의 원흉이던 갈레리우스가 죽자 처남 리키니우스와 동맹을 맺고 막시미아누스의 아들인 막센티우스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312년 초 콘스탄티누스는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했고 투린과 베로나에서 막센티우스군을 차례로 무찔렀다. 이후 벌어진 유명한 밀리우스 다리 전투로 결국 막센티우스군은 콘스탄티누스에게 대패하고 막센티우스는 전사했다. 이 전투로 인해 제국 서방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유일한 강자이자 정제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밀리우스 다리의 전투를 앞둔 하루 전날 밤 콘스탄티누스는 꿈을 꾸었다. 그의 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 내일의 전투에서 이긴다고 하였고 기독교도를 나타내는 문자 가운데 X와 P를 합친 문자 라바룸을 병사들의 방패에 그리게 하라고 조언하였다고 한다. 이를 충실히 따른 콘스탄티누스가 결국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이후 수석 황제가 된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초에 밀라노에서 리키니우스와 공동으로 칙령을 선포하였다. 이것이 바로 자유롭게 기독교를 믿을 수 있도록 한 밀라노 칙령이다.
이후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가 막시미아누스를 제거한 뒤 동방의 황제로 등극하자 또다시 그와 전쟁을 벌였다. 전쟁에서 패한 리키니우스는 사형당하고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타이누스 황제의 4인 통치를 종식시키고 유일한 황제로 올랐다.
칭기스 칸의 대제국 “행동의 가치는 그 행동을 끝까지 이루는 데 있다.” 세계 대제국을 이룬 칭기즈 칸이 세계 제패를 위해 초원을 누비며 병사들의 용맹을 독려하며 한 말이다. 칭기즈 칸은 1155년 몽골 고원이 온통 전쟁의 광풍이 휘몰아칠 때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예수게이는 자신이 죽인 적장의 이름을 따서 아이에게 ‘테무친’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몽골의 유목부족들을 통일하려던 예수게이가 부하들에게 독살당하면서 이때부터 어머니 오에른과 테무친을 비롯한 자녀들의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나무 열매와 풀뿌리로 굶주림을 달랬고, 물고기를 잡고 사냥을 하여 그럭저럭 살아나갔다.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말꼬리 말고는 채찍도 없다.” 테무친의 어머니는 이렇게 탄식하면서도 아이들에게 위대한 카불 칸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몽골 귀족으로서의 긍지를 갖도록 교육하였다. 테무친은 17세 때 아버지와 동맹관계에 있던 케레이트 부족의 족장 완 칸의 신뢰를 얻었다. 그는 완 칸의 원조를 힘입어 뿔뿔이 흩어져 있던 아버지의 부하들을 다시 모으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메르키트 부족의 습격을 받아 갓 결혼한 신부 보르테가 납치당했다. 테무친은 메르키트 부족에 대한 복수전을 펼쳐 아내를 구출하고, 메르키트 부족을 복속시켜 그들을 노예로 만들었다. 이에 더해 장차 자신을 반역할 기미가 있는 부족은 초토화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그는 결코 배후에 적을 남겨놓는 경우가 없었다. 이때부터 몽골 부족의 지도자들이 테무친의 주위에 몰려들기 시작했고, 12세기 말에 이르자 지도자 가운데 일부는 테무친을 몽골족의 칸으로 옹립하고자 제의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전쟁과 수렵에서 테무친에게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했다.
1206년은 몽골과 세계의 역사에 일대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몽골족은 스텝지역 밖으로 출정할 준비가 되어 있었고, 나라의 체제도 새로운 조직으로 재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은 세계 정복의 원대한 야망을 실현시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새로운 몽골국은 무엇보다도 전쟁을 치르기 위한 조직으로 정비되었다. 칭기즈 칸의 군대는 10진법체제로 나뉘어 엄격한 기강을 유지했고, 보급품과 군비를 갖추었다. 부장들은 칭기즈 칸의 아들이거나 그에게 절대충성을 바치는, 선발된 자들이었다. “능수능란하고 용감한 자들은 군지휘관으로 길렀다. 민첩하고 유연한 자들은 말을 다루도록 했다. 능숙하지 않은 자들은 작은 채찍을 주어 양치기가 되게 하였다.”
칭기즈 칸은 군사적으로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어서 급속하게 변하는 외부환경에 잘 적응했다. 처음에 그의 군대는 사료가 필요없는 튼튼한 초식동물인 몽골 조랑말을 타는 기병으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군대로는 다른 유목민들은 굴복시킬 수 있었지만 도시들을 함락시킬 수는 없었다. 몽골족들은 곧 조랑말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는 다양한 군사 전략을 갖추었다. 유목민족의 특성에 강력한 군사기술을 더해 재무장한 몽골군은 규모가 큰 성읍은 투석기ㆍ쇠뇌ㆍ사다리와 끓는 기름 등을 사용하여 함락시켰고, 흐르는 강물을 다른 데로 돌려놓아 홍수를 일으키는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항복하는 자는 목숨을 구할 것이다.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는 이들은 전멸시킬 것이다.”
칭기즈 칸은 중국 북서쪽 변방지역의 국가인 서하와 싸움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1211년 중국 북부에 자리 잡고 있던 금나라를 향해 진격했다. 1214년 금으로부터 막대한 금액의 보상금을 받고 철수했다가 1215년 전쟁을 재개하여 연경을 함락시켰다. 칭기즈 칸은 중국에서 더 나아가 호라즘 샤의 정벌에 나섰다. 몽골족은 가는 곳마다 도시를 불태웠고, 주민들은 몰살되거나 몽골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강요되었다. 칭기즈 칸은 주변국을 확장해나가면서 자신에게 협력할 경우 자치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여러 가지 혜택을 부여했다. 그러나 반항하면 그 지역 전체를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모조리 멸족시켰는데, 전멸시킨 사람들의 해골을 모아서 탑을 쌓았다.
“하늘의 도움으로 너를 위해 거대한 제국을 세웠노라. 그러나 세계정복을 달성하기에는 내 생이 너무 짧구나. 이 일은 이제 네게 맡기노라.” 1226년 가을, 서하 원정에 나선 칭기즈 칸은 사고로 말에서 낙마한 뒤 열병을 앓았지만 원정을 강행했다. 칭기즈 칸은 우선 서하에 사신을 파견해 서정에 동반하지 않고 그 자신을 모욕한 것을 책망하며 항복을 제의했으나, 서하는 이를 거부했다. 칭기즈 칸은 서하의 도시 대부분을 점령했고, 1226년 여름에는 서하 군대를 격파했다. 이후 몽골군은 서하의 수도 흥경을 포위했다. 그러자 서하는 칭기즈 칸에게 사신을 보내 한 달 뒤 주민들을 이끌고 도시 밖으로 나와 항복하겠다고 제의했고, 칭기즈 칸은 이를 허락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은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적이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절대로 곡을 하거나 애도하지 말라. 탕구트의 군주와 백성들이 기간에 맞추어 밖으로 나오면 그들을 모두 없애 버려라!” 칭기즈 칸은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1227년 8월 18일 또는 8월 25일, 칭기즈 칸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서하의 수도 흥경은 함락되고 그 주민들을 학살당했다. 칭기즈 칸은 죽어가면서 자신의 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금나라의 성들이 단단하니 남송에게 길을 빌려달라고 해서 남쪽으로 공략하라.”
칭기즈 칸의 유언을 충실히 받든 아들들은 황하 이남의 개봉에서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던 금나라를 남송과 함께 공격하였다. 결국 금나라와 남송은 멸망하고 중국 대륙에는 칭기즈 칸의 원나라가 들어선다. 또한 칭기즈 칸의 후예들은 유럽까지 진출하여 역사상 최강의 정복자의 명성을 떨쳤다.
“집안이 가난하다고 탓하지 말자. 나는 9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도 쫓겨났다.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하였으며, 전쟁이 나의 직업이요 내 일이었다.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 따져도 10만, 백성은 어린아이에게 노인까지 200만이 되지 않았다. 배운 게 없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며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너무 막막하다고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도 살아날 수 있었다.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나에게 거추장스러운 것들을 모두 쓸어버렸다. 나를 극복하는 순간 나는 칭기즈 칸이 되었다.” - 칭기즈 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