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두면 잘난 척하기 딱 좋은 우리 역사문화사전
민병덕 지음 | 노마드
알아두면 잘난 척 하기 딱 좋은 우리 역사문화사전
민병덕 지음
노마드 / 2020년 04월 / 520쪽 / 28,000원
1장 의식주ㆍ풍속
쇠 금(金)자를 쓰는 김씨를 금씨라 하지 않는 이유우리나라 성씨 중에서 가장 많은 성씨는 김씨(金氏)이다. 김씨는 크게 나누어 가락국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수로왕계와 신라 왕실의 박ㆍ석ㆍ김 3성 중 하나인 김알지(金閼智)계로 나눌 수 있다. 김수로왕이나 김알지가 김씨 성을 가지게 된 연유는 다음과 같다.
가락에 본디 9간이 있어 각 지방을 다스렸는데, 서기 42년 9간들이 구지봉에 올라 가락을 다스릴 군장을 얻고자 신탁을 묻는 의식을 행했더니, 마침내 하늘에서 6개의 해만한 황금알을 담은 금합이 내려왔다. 이튿날 이 여섯 개의 알이 아이로 태어나, 그중 가장 먼저 나온 ‘수로’를 가락(본가야)의 임금으로 삼고, 금합에서 나왔다 하여 김씨 성을 부여했다고 한다.
신라의 4대 왕인 탈해왕(재위 57~80) 9년(65) 봄날 새벽에 경주의 계림에서 기이한 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에 가보니 울창한 소나무숲 높은 나뭇가지에 금빛 찬란한 작은 궤가 걸려 있고, 그 밑에 흰 수탉이 울고 있었다. 그 금궤를 열어보니 뜻밖에도 용모가 단정한 비범한 사내아이가 들어있는지라 이름을 ‘알지’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 수로왕이나 알지나 김씨가 아닌 금씨여야 할 것이다. 금합이나 금궤에서 나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금씨가 아니라 김씨라고 한다. 이것은 음양오행설에 따라 조선시대에 금씨가 김씨가 되었다는 속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즉 오행설에서 ‘금목수화토’는 상생일 때 ‘목-화-토-금-수-목’으로 순조로운 원인ㆍ결과가 성립된다고 본다. 나무에서 불이 생기고, 불이 꺼져 흙이 되며, 흙에서 쇠가 나고, 쇠에서 물이 나고, 물이 있어야 나무가 난다는 식이다. ‘목’은 ‘토’를 이기고, ‘토’는 ‘수’를 이기며, ‘수’는 ‘화’를, ‘화’는 ‘금’을, ‘금’은 ‘목’을 이기는 것이 상극의 원리이다.
그런데 조선을 건국한 성씨는 이(李)씨인데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목’에 해당이 된다. 한 시대를 이끌어갈 이씨이니, 이것을 이기는 상극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 전제 왕조의 권력이었다. 그러나 이씨를 이기는 성이 있으니 그것이 금(金)씨였다. 이에 ‘금씨’를 ‘김’씨로 읽게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 지명에 ‘金’과 관련된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한강을 경계로 하여 북쪽에서는 ‘金’자를 모두 ‘금’으로 읽는다. 즉 금곡, 금촌, 금천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한강 이남에서는 김해, 김포, 김천처럼 ‘김’으로 읽는다. 다만 금이 나는 곳만은 예외로 ‘금’으로 읽었으니 금구, 금오산 등이 그 예이다.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지인 천 명이 쓴 천자문을 선물 받은 첫돌김수온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세종 23년(1441)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선 이래 공조판서 등 여러 벼슬을 두루 거쳤다. 김수온은 세조 12년(1466) 발영시(단오절에 현직 중신과 문무 관료에게 실시한 임시 과거)에 이어 등준시(현직 관리, 종친, 부마 등을 대상으로 실시한 임시 과거)에서 장원을 하여 판중추부사에 오르고 쌀 20석을 하사받았는데, 문무과 장원에게 임금이 쌀을 내리는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불교와 제자백가에 능통하여 세조의 사랑을 받았으며, 시문에 뛰어나 명나라에까지 그 이름을 알렸다.
김수온에게는 미워할 수 없는 버릇이 있었다. 바로 책을 찢어서 외우는 버릇이었다. 그는 찢어진 책을 모두 외우면 버렸으므로 한 권을 모두 외우면 곧 책 한 권이 없어지곤 했다. 그러나 김수온도 찢을 수 없는 책이 있었으니 바로 『천자문』이다. 김수온이 찢을 수 없는 『천자문』은 할아버지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책이었다. 김수온의 학문적인 발전과 장수를 비는 뜻에서 할아버지가 지인 1000명의 도움을 받아 한 사람이 한 자씩 써서 완성한 『천자문』인 것이다.
이러한 『천자문』은 대개 아이가 첫돌을 맞거나 『천자문』을 배울 나이가 되면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향시 이상의 과거에 급제한 사람을 이 고을 저 고을 찾아다니며 한두자씩 써달라고 청하여 만들었다. 1000명의 사람이 제각각으로 한두자씩 썼으니, 세상 사람들의 다양한 성격을 일찍이 깨닫게 하면서 된 사람들의 성격과 난 사람들의 재능을 이어받기를 바라는 소망을 담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천자문』을 받은 이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노력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하여 이 책을 볼 때마다 마음을 다잡았고, 누워있는 어른을 함부로 넘지 않는 것처럼 이 책도 함부로 넘지 못할 정도로 아끼고 소중히 여겼다. 이 『천자문』은 자손 대대로 이어지면서 앞서 이 책을 뗀 사람의 이름과 일시를 기록하여 전통으로 남기는 관습도 있었다.
열두 달 열두 가지 떡떡타령이 있다. “왔더니 가래떡 / 울려놓고 웃기떡 / 정들라 두텁떡 / 수절과부 정절떡 / 색시 속살 백설기 / 오이서리 기자떡 / 주눅 드나 오그랑떡 / 초승달이 달떡이지”
예부터 우리나라는 다달이 명절이 있었고 명절마다 먹는 떡이 있엇다. 정월 보름에는 달떡, 이월 한식에는 송편, 삼월 삼짇날에는 쑥떡, 사월 초파일에는 느티떡, 오월 단오에는 수리치떡, 유월 유두에는 밀전병, 칠월 칠석에는 수단, 팔월 한가위에는 송편, 구월 중양절에는 국화떡, 시월상달에는 무시루떡, 동짓달 동지에는 새알심, 섣달그믐에는 골무떡을 먹었다.
이 열두 가지 떡을 포함해 적어도 36가지가 넘는 떡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명문가에 시집가려면 180가지의 음식을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그중에서 36가지 떡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 떡은 한국인에게 한마음이라는 의식을 심어주기도 했다. 연변에서는 손님 밥상 복판에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떡 한 무더기를 올리고 주인과 손님이 각각 손으로 그것을 떼어 먹음으로써 식사가 시작된다. 인절미(引切米)라는 이름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떡의 찰기가 서로의 마음을 가깝게 하고, 떡을 함께 먹음으로써 마음을 나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제사상에 반드시 떡을 올리는 것은 오랫동안 헤어져 있던 조상신이나 신령과 가까이하기 위함이요, 마을사람들이 떡을 나누어 먹는 것은 한마음을 다지기 위함이었다. 시월상달에 집집마다 만든 고사떡을 마을 사람들과 나누어 먹는 것은 한 해 동안 농사일을 하는 데 도움을 주어 고맙다는 뜻과 함께, 같은 마을 사람으로서 한마음을 갖자는 뜻이 있다.
떡은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과도 관련이 있다.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은 찹쌀떡을 먹거나 마을 입구 서낭당 나무에 붙이면 합격한다고 믿었다. 수학능력시험이나 고등학교 입학시험에서 합격을 기원하며 찹쌀떡을 주거나 교문에 붙이는 것도 여기에서 비롯된 풍속이다. 결혼하고 신행을 온 딸이 시댁으로 돌아갈 때도 떡을 만들어 보냈다. 시집가면 ‘입 막고 3년’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말조심하라는 뜻도 있지만, 시댁 식구들과 한마음을 가지라는 뜻도 담겨 있다.
2장 종교ㆍ예술ㆍ교육
당나귀 바람치맛바람이란 여자의 극성스러운 활동을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말로, 글자대로 풀이하면 치마를 입고 움직여서 생기는 서슬 또는 옷을 정식으로 갖춰 입지 않고 치마저고리 정도만 걸치고 나서는 여인의 차림새를 뜻한다. 이는 여인이 치맛바람을 일으키며 설친다는 평범한 어원에서 비롯한 것이지만, 일종의 유행어가 됨으로써 주목의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바람직하지 못한 여성들의 극성맞은 행위로 지목받은 치맛바람으로는 초ㆍ중등학교에서의 자모회를 중심으로 일으키는 치맛바람, 계모임이나 각종 투기의 치맛바람, 향락 행위와 관련된 치맛바람이 있다. 이러한 양상은 6ㆍ25 전쟁과 휴전 후의 혼란한 사회환경 속에서 서양 문물의 직수입에 자극받아 싹트기 시작했으며, ‘치맛바람’이 유행어가 된 것은 1960년대 이후 1970년대에 이르는 고도 경제성장기와 궤를 같이한다.
학교에서의 치맛바람은 자모들의 학교 출입, 교사 초대, 돈봉투 주기 등의 행위로 교육자를 부패시키는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고, 자녀에게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오만하며 과대망상이 되거나, 반대로 나약하고 의존적이며 열등감에 시달리게 만드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옛날에는 여성들의 외부 출입이 엄격히 제한되었으므로 치맛바람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대신 남자들이 일으키는 당나귀 바람이 있었다. 당나귀가 행세깨나 하는 사람의 중요한 교통수단이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즉 학생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형들이 당나귀를 타고 서당으로 찾아가 훈장과 여러 문제를 상담하고 대접도 했던 것이다.
형벌에서 나온 말인 ‘도무지’‘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는’이라는 뜻을 가진 ‘도무지’는 조선시대에 사사로이 행해졌던 형벌인 도모지(塗貌紙)에서 비롯되었다. 물을 묻힌 한지를 얼굴에 여러 겹으로 착착 발라놓으면 종이의 물기가 말라감에 따라 서서히 숨을 못 쉬어 죽게 되는 형벌이다.
기록을 살펴보자. 1860년 경신박해 때 체포된 오치문이란 사람이 울산 장대로 압송된 뒤 도무지형으로 죽었다. 천주교 기록에 따르면 “순교 당시 그는 얼굴을 한지로 덮은 채 물을 뿌림으로써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형(도모지형)을 받았는데, 무의식 중에 혀를 내밀어 물 묻은 한지를 뚫자 군사들이 그 구멍을 막아 질식시켰다고 전한다.”고 한다. 이보다 늦은 기록으로는 1866년 12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천주교인들에게 광주유수가 도배형 또는 도모지라고 부르던 백지사형을 집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황현이 고종 1년(1864)부터 융희 4년(1910)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매천야록』에 “대원군 시대에 포도청의 형졸들이 살인하기에 염증을 느껴 백지 한 장을 죄수의 얼굴에 붙이고 물을 뿌리면 죄수의 숨이 막혀 죽곤 했는데 이를 ‘도모지’라 한다.”는 기록이 있다. 얼굴에 물을 묻힌 종이를 붙여 숨을 쉴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죽음을 맞이하였으므로 ‘도저히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이라는 뜻이 된 듯하다.
3장 과학ㆍ기술ㆍ천문ㆍ의학
태아의 성 감별예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혼인을 한 후에 조상들에게 자신의 의무를 표시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자손을 낳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가계를 계승해줄 아들을 낳는 것을 조상들에게 보은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조선 중기 이후에는 성리학이 정착되면서 아들에게 가계의 계승이나 제사 등이 우선적으로 이어지면서 아들을 선호하는 사상은 더욱 심해져만 갔다.
그리하여 며느리나 아내를 고를 때 ‘삼십무자상(三十無子像)’이라는 기준을 적용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허리가 가늘어 자궁이 좁은 여자, 머리칼이 검지 않고 노랗거나 붉은 여자, 미간을 찡그렸을 때 도장무늬가 새겨지는 여자 등은 아들을 낳지 못한다고 여겨서 꺼렸다.
혼인을 한 후에도 귀숙일을 정하여 남편과 잠자리를 하는 날을 가렸다. 이를테면 정월은 ‘1일, 6일, 9일, 10일, 11일, 12일, 14일, 21일, 24일, 29일’이 좋은 날이었다. 나이가 홀수인 여자는 아들을 낳고 싶으면 홀수 달에, 짝수인 여자가 딸을 낳고 싶으면 짝수 달에 합방을 해야만 했다. 또 자궁에 좌우로 구멍이 나 있는데, 좌혈로 정자가 들어가면 아들이 되고, 우혈로 들어가면 딸이 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왼쪽을 아래로 하여 눕는 습관을 들어야 했다.
임신을 하고 난 뒤에도 아들을 낳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활줄을 석 달간 배에다 감고 자거나, 수탉의 깃털을 뽑아 임신한 여자가 깔고 자는 요 속에 넣거나, 금이나 은으로 작은 도끼를 만들어 임신한 여자의 베개 속에 넣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었다.
태아의 성을 감별하는 방법도 다양했다. 8월 한가위에 송편을 빚을 때 바늘을 넣고 빚어, 임신부가 그 송편을 씹어 바늘귀가 나오면 딸, 바늘 끝이 나오면 아들이라고도 했다. 미역을 사서 왼손으로 들면 아들, 오른손으로 들면 딸이라고 했다. 걸어가는 임신부를 뒤에서 불렀을 때 왼쪽으로 돌아보면 아들, 오른쪽으로 돌아보면 딸이라 했다. 임신한 지 석달 후에 왼쪽 배가 아프면 아들, 오른쪽 배가 아프면 딸이라고 했다. 임신부의 왼손이 부으면 아들, 오른손이 부으면 딸이라고 했다. 왼쪽은 아들이요 오른쪽은 딸이었던 것이다.
4장 제도ㆍ법률
기상 오보는 바로 처벌첨단과학이 매우 발달한 오늘날에도 기상청의 기상 예보는 종종 틀려 비난을 받기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날씨나 기상을 잘못 예측하면 비난 정도가 아니라 곧바로 처벌을 받았다. 이때는 일식(日食)을 천재지변으로 생각해, 날씨보다는 일식을 관찰하는 데 신경을 썼다.
일식은 태양을 상징하는 임금이 빛을 잃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임금이 빛을 잃는다는 것은 곧 백성들의 통치자로서의 권력을 잃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백성들은 임금이 정치를 잘못했거나 부정한 일을 저질렀으니, 이를 하늘이 경고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임금은 자신의 잘못을 하늘에 고하는 제천의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나라에서는 천문ㆍ지리ㆍ기후 관측 등을 맡아보는 관상감에 일월식 추산관이라는 관리를 두어 미리 일식을 관측하게 했다. 일식이 있을 것이라고 일월식 추산관이 말하면 나라에서는 그날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해 나랏일을 일시적으로 중단했다. 태양이 빛을 잃었으니 임금이 정상적으로 정치를 할 수 없다는 잘못된 믿음의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일식을 잘못 예보하면 그 관리는 처벌을 받았다. 『태조실록』 태조 7년(1398) 4월 17일 기사에 간관 박신(朴信) 등이 올린 상소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겸서운주부 김서가 월식을 예상하여 예조에 보고했으나 끝내 월식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서는 직책이 추보를 전문으로 하면서, 이제 하늘의 움직임을 보는 것을 혼동하여 나라 사람들을 속였사오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관상감에서는 해임하고 법에 의하여 죄를 묻게 하소서.”
그러나 세종은 일식 예보가 맞지 않는 것은 관상감 관리의 잘못이 아니라 명나라의 천문 관측을 그대로 따른 결과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세종 14년(1432) 1월 4일 사헌부에서 “관상감에서 원일에 일식이 있을 거라고 했으나 일식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이것은 관측이 정밀하지 않은 것입니다. 청컨대 죄를 내리십시오.”하니, 임금이 “중국에서도 또한 정월 원일에 마땅히 일식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니, 이것은 관측을 잘못한 죄는 아니다. 각 도의 보고서와 명나라 정부에 들어간 사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다시 의논하게 하라.”는 명을 내렸다.
세종은 조선의 역대 왕 중에 과학기술에 특히 관심을 두어, 천문대인 간의대를 설치하고 혼천의와 양부일구 등 천문 관측기구를 만들어 우리나라 천문 관측 기술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 그 결과 역서인 『칠정산』 내외편을 펴내어 세계적인 수준의 역법을 집대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천문을 잘못 관측한 관리는 처벌을 면치 못했다. 성종 19년(1488) 11월 17일에 우부승지 경준이 아뢰기를, “지난밤은 월식인데 때가 지나도 월식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관상감 추산관을 국문하게 하소서.”하니, 임금이 명령하기를 “그대로 따르라. 그리고 다시 자세히 따져보게 하라.” 했다.
이처럼 추산관은 천문을 잘못 관측할 경우 처벌을 받았지만 ‘하늘을 읽는 관리’인지라 그 권력은 막강했다. 천문을 미리 관측해 임금에게 보고해서 대책을 강구해야만 임금에 대한 백성들의 충성심을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