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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20년 4월 / 293쪽 / 15,000원



머리말 - “소비를 이념적으로 하나?” - 신세계 부회장 정용진의 항변


2010년 대형마트에서 판매하는 즉석 피자가 소비자들의 큰 인기를 얻자, 신세계 부회장 정용진과 네티즌 사이의 설전이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한 네티즌이 “신세계는 소상점들 죽이는 소형 상점 공략을 포기해주시기 바랍니다. 자영업자들 피 말리는 치졸한 짓입니다”라는 글을 썼고, 이에 정용진은 ‘소비자의 선택’을 강조하면서 “소비를 이념적으로 하나?”라고 대꾸했다. 정용진의 반론은 그간 오래된 상식이었다. 소비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는 것이지 소비를 이념적으로 한다는 건 낯선 일이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이념적ㆍ정치적ㆍ윤리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소비를 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지금 우리는 기존 정치의 패러다임이 바뀌는 격변의 시대에 살고 있는 건 아닐까? 성급한 질문일망정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변화의 한복판에 ‘정치적 소비자 운동(political consumerism)’이 자리 잡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소비 행위를 상품 자체의 문제를 떠나 소비자의 이념적ㆍ정치적ㆍ윤리적 신념과 결부시켜 특정 상품의 소비를 거부하는 보이콧팅(boycotting), 지지하는 바이콧팅(buycotting) 등의 정치적 행위를 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소비자 운동과 구별된다. 일반적 소비자 운동은 상품과 서비스에 초점을 두고 소비자들의 피해를 알리고 해결하는 데 주력하는 반면,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상품의 생산 과정에서부터 기업ㆍ경영자의 행태에 이르기까지 매우 포괄적인 범주에 걸쳐 이념적ㆍ정치적ㆍ윤리적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정치화’한다.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미국과 유럽에서 크게 발달되어 있다. 영국의 정치적 소비자 운동가들은 아예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는 슬로건마저 들고 나왔다. 정치가 불신과 혐오의 대상이 된 가운데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세상을 바꾸는 데에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한국에서는 일상적 삶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아직 미약한 편이지만, 젊은 층과 여성을 중심으로 이전에 비해 크게 늘고 있으며 앞으로 급격한 성장세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 소비자 운동의 발전을 위해선 넘어야 할 큰 벽이 있다. 그 벽은 바로 “소비자는 왕이다”는 근거 없는 미신이다. 중요한 건 이 미신적 슬로건이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사람들이 약자를 대상으로 ‘갑질’을 하는 심리적 근거로 활용되어왔다는 점이다. 소비자에겐 권리만 있는 게 아니라 의무도 있다는 의식이 널리 확산될 때에 비로소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나는 그 어떤 문제와 한계에도 한국에서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활성화되기를 바란다.

왜 1,528명이 죽는 동안 정부와 언론은 방관했는가? - 유치원과 가습기



‘사립유치원 비리 사건’과 ‘정치하는 엄마들’


2018년 가을 전국의 학부모들이 분노한 이른바 ‘사립유치원 비리 사건’이 일어났다. 10월 5일 유치원 비리 근절을 위한 정책 토론회, 12일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 25일 유치원 공공성 강화를 위한 정부 종합 대책 발표에 이르기까지의 20일간 이 문제는 우리 사회의 최대 관심사로 떠올랐다. 정부 대책의 주요 내용은 2020년까지 국공립유치원을 40퍼센트 확충하고, 국가교육회계시스템인 ‘에듀파인’을 모든 사립유치원에 적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여론에 쫓겨 서둘러 마련하느라 실천 가능성에 강한 의문이 제기되었지만, 이 정도나마의 대안이 나오게 된 것은 순전히 사립유치원 소비자인 엄마들의 단체, 즉 ‘정치하는 엄마들’이 ‘비리 유치원 명단 공개’ 요구 작업에 1년 넘게 끈질기게 매달려온 덕분이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여론의 비난 화살은 주로 사립유치원에 쏠렸지만, 정작 주된 비난을 받아야 할 대상은 정부와 정치권이었다. 전 국회의원이자 ‘정치하는 엄마들’의 공동대표 장하나는 “수십 년 동안 유아교육 현장을 이렇게 망쳐놓은 건 교육 당국”이라고 비판했는데, 이 비판엔 충분한 근거가 있었다.

‘세월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건이었음에도


‘사립유치원 비리 사건’은 정치적 소비자 운동의 성공 사례로 기록될 수 있겠지만, 이와는 정반대로 ‘잔인한 국가’의 끝장을 보여준 사건임에도 이렇다 할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일어나지 않은 사건도 있다. 그건 바로 ‘가습기 살균제 참사’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로 숨진 사람은 1,528명이나 된다(2020년 2월 19일 기준). 가습기 살균제 전체 피해 가구인 4,953가구 가운데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피해 인정율은 8.2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피해자들이 바라는 건 많지 않다. 단지 피해 인정 범위를 넓히고 구제에 차등을 없애달라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가해 기업과 정부는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문제가 드러난 건 2011년이었음에도 왜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진실을 파헤치면 엄청난 비용이 든다는 이유로 사건을 축소하기에 급급했던 박근혜 정권의 책임이 크나, 그것만으론 다 설명할 수 없다. 정권이 바뀐 후 문재인 대통령이 피해자들을 불러 사과를 했지만, 단지 말뿐이었다. 정부는 여전히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어떤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 피해를 당한 소비자들의 억울함과 분노로 말하자면, “대한민국이 사실상 무정부 상태”라고 한 어느 피해자의 절규처럼 그 어떤 사건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클 텐데, 왜 이런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었던 걸까?

이 사건은 ‘안방의 세월호 사건’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실은 ‘잔인한 국가’라고 하는 점에서 보자면 세월호 사건보다 훨씬 더 중요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두 사건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를 놓고 보자면, 세월호 사건은 국가적 수준의 사건이었던 반면 ‘안방의 세월호 사건’은 말 그대로 ‘안방’에만 머무른 수준이었다. 정치적 사건으로서 가치가 약했기 때문이었을까?

“가습기 살균제 사건은 ‘재난’이 아니라 ‘악행’이다


1,528명의 사망자, 피해자 수천 명의 ‘만성 울분’의 고통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구연상은 「가습기 살균제 사건, 재난(참사)인가 악행인가」라는 철학적 논문에서 기존 시각은 이 사건을 대체로 재난이나 참사로 규정하거나, ‘제조물에 따른 피해 사건’ 정도로 보고 있지만, 악행으로 규정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살균제 기업들의 악행의 질은 그들이 살균제 제품에 쓰인 화학 물질의 위험성을 ‘이미’ 알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것의 안전성을 검사해야 할 자신들의 의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 검사 결과를 ‘거짓’으로 조작하기까지 했으며, 소비자의 안전을 철저히 무시해왔다는 점에서 매우 악질적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어떻게 볼 것인가? 『미디어스』기자 장영은 이런 총평을 내렸다. “독성물질 천만 병이 판매되는 동안 정부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다. SK케미칼을 무죄로 만들어주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는 것 외에 정부가 한 일은 가습기 피해자를 인정하지 않는 것뿐이었다. 정부가 국민을 먼저 생각했다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피해자를 찾고, 연구를 통해 가습기 살균제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질병은 철저하게 피해자로 인정해 구제를 해야만 했다.……”

왜 언론은 ‘가습기 살인’을 외면했는가?


이런 악행을 방관한 언론과 시민사회는 면책될 수 있을까? 유가족 연대 대표 최승운이 말했듯이, “언론에서 처음부터 추적 보도를 해줬으면 (상황이) 이렇게까진 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지고 보도하지 않았다.” 언론은 왜 그랬을까? 《중앙일보》 논설위원 권석천은 2016년 5월 17일 「나는 왜 ‘가습기 살인’을 놓쳤나」라는 칼럼에서 양심선언을 하고 나섰는데, 그는 후배 기자 H가 자신에게 한 말을 소개했다. “요즘 신문ㆍTV에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 보면 죄책감이 들어요. 2014년 서울중앙지검에 들어갈 때마다 거의 매일 그분들을 봤거든요. 피켓 들고 수사를 촉구하던 그분들 앞을 그냥 지나치곤 했어요. 검찰이 나서지 않는데 내가 어떻게? 그런 마음이었던 것 같아요.”

이 말을 듣고 자신이 사회2부장으로 있던 2014년 하반기부터 2015년 말까지 가습기 살균제 사건을 뒤돌아본 권석천은 “지난 5년간 피해자들을 투명인간으로 만든 건 언론이었다. 아무리 절규하고 발버둥 쳐도 언론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보인 건 수사가 본격화되고 시민들의 분노가 불붙은 뒤였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나 자신을 포함해 한국 기자들은 ‘악마의 관성’에 갇혀 있다. 위험을 감수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탐사’하기보다는 발표 내용, 발설 내용을 그럴듯하게 포장해 ‘퍼 나르기’ 하는 데 급급하다. 나태하게 방관하다 사냥의 방아쇠가 당겨지면 그제야 달려들어 과잉 취재를 한다. 사자가 먹다 남긴 고기에 코를 처박는 하이에나와 다른 게 무엇인가.”

1,528명을 ‘통계’로만 여기는 냉담과 결별해야 한다


전반적인 시민의식의 문제는 없었던 걸까? 일반 시민들이 자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역지사지의 정신으로 좀 더 일찍 분노하고 나섰더라면 사태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왜 움직이지 않았던 걸까? 미셸 미셸레티는 정치적 소비자 운동의 메시지는 ‘개인화(personalization)’의 방식으로 접근해야 소비자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했는데, 혹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참고로 소련 독재자 스탈린은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100만 명의 죽음은 통계다.” 라고 했다. 이는 좋은 말이라고 소개한 게 아니다. 우리 인간의 맹점을 알자는 뜻이다. 각기 말한 취지는 다르지만, 테레사 수녀도 인간 본성에 대해 “다수를 보면 행동하지 않고, 한 명만 본다면 행동한다”고 했다.

큰 맥락에서 보자면, 혹 ‘의도적 눈감기’는 아니었을까? 한국 사회는 ‘의도적 눈감기’가 상시적으로 일어나는 ‘불감사회’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왜 어떤 경우엔 ‘의도적 눈감기’가 일어나고, 또 어떤 경우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적극 개입해 국민적 분노의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가? 이 물음에 답해야 하는 건 학자들의 몫이다. 이는 소통의 문제이므로, 언론ㆍ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이 우선적으로 답해야 한다. 그럼에도 언론ㆍ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은 이 문제를 자신과는 무관한 주제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누가 누구를 향해 손가락질하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 사회 전체가 ‘사일로(silo)’의 수렁에 빠져 의도하지 않은 불감사회로 나아가고 있는 건 아닌지 국민적 성찰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기업, 정부, 정치권, 언론이 악행을 저지르거나 방관하는 상황에서 정치적 소비자 운동은 마지막 자구책일 수밖에 없다. “쇼핑은 투표보다 중요하다”는 행동 강령을 철저히 실천하되, “나도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역지사지의 수준까지 나아가야 한다. 우리 는 사망한 1,528명을 ‘통계’로만 여기는 냉담과 결별해야 한다.

왜 진보 언론은 자주 ‘불매 위협’에 시달리는가? - ‘어용 언론’ 사건



진보 언론을 위협한 ‘『시사IN』구독 해지 사태’


미국에선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정치판의 이전투구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공화당에 정치자금을 기부한 기업에 대해 민주당이 보이콧 운동을 벌이면, 공화당이 그 기업에 대해 바이콧 운동을 벌이는 식이다. 기업이 권력 눈치 보기에 바쁜 한국에선 그런 유형의 질 낮은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벌어지긴 어렵지만, 다른 유형의 이색적인 정치적 소비자 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온라인에선 페미니즘이나 정치적 당파성과 관련해 진보 언론 불매 위협이 자주 일어나는데, 이는 정치적 반대편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크게 봐서는 같은 진보 진영 내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진보 언론 불매 위협은 진보 언론의 등장 이후 늘 산발적으로 일어난 것이긴 하지만, 성공 사례의 원조는 유시민이다. 그는 2010년 해학과 풍자를 담는「한홍구-서해성의 직설」난에 쓰인 ‘놈현 관장사’라는 표현을 문제 삼아 ‘《한겨레》절독’으로 압박하면서 《한겨레》1면에 사과문을 게재케 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와 관련, 당시 《한겨레》 기획위원이었던 홍세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흥미로운 일은 스스로 진보라고 말하는 사람의 《경향신문》이나 《한겨레》를 절독하겠다는 소리는 종종 듣는 데 반해, 스스로 보수라고 말하는 사람의 ‘조중동’을 절독하겠다는 소리는 듣기 어렵다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이 적용될 듯싶지만, 나는 그보다 한국의 이른바 진보 의식이 성찰과 회의, 고민어린 토론 과정을 통해 성숙하거나 단련되지 않고, 기존에 주입 형성된 의식을 뒤집으면 가질 수 있는 데서 오는 경박성, 또는 섬세함을 통한 품격의 상실에 방점을 찍는다.”

‘어용 지식인’과 ‘어용 시민’의 탄생


2017년 유시민은 한겨레TV 〈김어준의 파파이스〉에 출연해 “지식인이거나 언론인이면 권력과 거리를 둬야 하고 권력에 비판적이어야 하는 건 옳다고 생각한다”며 “그러나 대통령만 바뀌는 거지 대통령보다 더 오래 살아남고 바꿀 수 없는, 더 막강한 힘을 행사하는 기득권 권력이 사방에 포진해 또 괴롭힐 거기 때문에 내가 정의당 평당원이지만 범진보 정부에 대해 어용 지식인이 되려 한다”고 말했다.

유시민의 이 발언은 5월 9일 치러진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 후보 문재인이 제19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문재인 지지자들에게 하나의 절대적 좌표가 되었다. 문재인 정부와 페미니즘 가치가 충돌할 때에도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이론적 면죄부로까지 활용되었다. 손희정은 『페미니즘 리부트』에 쓴 <어용 시민의 탄생>이란 글에서 유시민의 ‘어용 지식인론’에 대해 “‘진보’와 ‘어용’과 ‘지식인’이 한자리에 설 수 있는 놀라운 광경은 반동적 반지성주의의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고 개탄했다. 유시민은 진보와 지식인이라는 말을 써온 역사적 맥락을 탈각해 맹목적인 당파성을 간단하게 ‘진보’의 자리에 올려놓고 ‘어용’이라는 말 안에 녹아 있어야 할 수치심을 지워버렸다는 것이다.

그렇게 수치심을 지워버린 효과 때문이었을까? 인터넷엔 자신을 ‘어용 시민’으로 칭하는 이들이 대거 등장했으며, 이들은 진보 언론마저 ‘어용’이 될 것을 요구했다. 이는 이미 대선 과정에서부터 나타났다. 공정 보도를 실천하려다 부당하게 해고된 해직 기자들이 모여 만든 독립 언론 《뉴스타파》는 문재인 후보 캠프 검증 보도를 했다는 이유로 월 2,000명가량의 후원자들이 이탈하는 등 불매운동의 직격탄을 맞았다. 이게 도대체 말이 되는 일이었을까? 진정한 언론인이 되고 싶어 큰 희생을 무릅쓴 언론인들에게 정부여당에 종속된 ‘기관 보도원’ 노릇이나 하라는 요구가 그 어떤 명분으로 정당화될 수 있단 말인가? ‘어용’을 철저히 실천하는 북한이나 중국의 언론 모델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었을까?

《뉴스타파》 후원자 3,000명이 사라진 ‘조국 코미디’


‘어용 저널리즘’을 요구하는 어용파들이 벌이는 코미디 같은 행태는 수시로 벌어지는데, 아마도 그 압권은 ‘윤석열 사건’일 게다. 2019년 7월 《뉴스타파》는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청문회 말미 후보자 ‘위증’과 관련된 통화 녹음 파일을 공개했다. 그런데 당시는 문재인 지지자들 사이에서 윤석열의 인기가 하늘을 찌르던 때였다. 문재인-윤석열 지지자들은 “ 《뉴스타파》와 자유한국당이 야합했다“고 비난하면서 《뉴스타파》후원을 끊거나 댓글로 보도를 비난했다.

논란이 확산하자 《뉴스타파》대표 김용진은 이례적으로 ‘대표 서한’을 통해 ”저희는 윤 후보자가 청문회에서 윤우진 관련 부분을 이런 식으로 넘겨버린다면 앞으로 본인이나 검찰 조직에 두고두고 부담이 될 수 있고, 국민과 임명권자에 대한 후보자의 도리가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며 취재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이런 해명은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광고 없이 후원으로 유지되는 《뉴스타파》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전체 후원자 8~9퍼센트에 달하는 3,000여 명이 후원을 끊어버렸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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