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와 고흐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 스타북스
니체와 고흐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스타북스 / 2020년 2월 / 312쪽 / 16,000원
아름다움에 대하여
별들의 존재 목적은 생명의 잉태가 아닐까 하늘에 떠 있는 수없이 많은 별들이 지구와 마찬가지로 생명을 잉태할 유사한 조건을 갖고 있지만, 이러한 별들은 애초부터 생명체를 가지고 있지 않거나 생명을 한때 가졌다 해도 이미 오래전에 사라진 별들에 비하면 그 수가 너무나 작다. ……(생명체를 가지고 있는) 모든 별들에 있어서도 그 존재했던 시기를 측정해 보면 생명이란 한순간에 확 타오르고 만 존재였다는 것. 그리고 그 후에도 오랜 시간이 흘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야말로 생명이라는 것이 별들의 존재 목적이나 궁극적 의도가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게 아닌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빛을 사랑하는 만큼 그림자를 사랑한다 나의 친애하는 그림자여, 내가 너를 얼마나 무례하게 대했는지 이제야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너를 얼마나 기쁘게 생각했는지. 얼마나 감사했는지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지만 빛을 사랑하는 만큼 나는 그대를 사랑하고 있다.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가 떠오르듯, 언어에 간결함이 전해지듯, 성격에 선량함과 견고함이 존재하려면 그림자가 있어야 한다. 빛과 그림자는 적이 아니다. 빛과 그림자는 늘 정답게 손을 잡고 있다. 빛이 사라질 때 슬며시 그림자도 어디론가 사라지는 것은 빛을 따라간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이성이 없다면 서로에게 관대할 것이다 우리의 이성이 멈춰 버리면 우리들은 서로에게 관대해질 것이다. 상대방에게 아무 말이나 해도 상관없고, 상대방이 아무 말이나 해도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상대방이 대답할 수 없을 때를 골라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이것이 유일한 규칙이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길어지면 한 번은 바보가 되고, 세 번은 멍청이가 되겠지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우리가 뒤집어쓴 가면 안에 숨겨진 환희의 절정 디오니소스적인 음악은 그리스 인들에게 공포와 전율을 일깨워주었다. 호메로스적인 아폴론의 리라에 익숙했던 그리스 인들은 음악을 리듬의 물결이라고 생각했으며, 상태를 표현하는 데 필요한 조형으로 여겨 왔다. 아폴론의 리라는 한마디로 암시적인 음조에 불과했다. 하지만 디오니소스가 전파한 새로운 음악은 영혼을 흔드는 멜로디였다. 그는 여러 음을 한 가지 주제로 통합시키는 화음을 발명했는데, 이 디오니소스가 전파한 새로운 음악은 영혼을 흔드는 멜로디였다. 그는 여러 음을 한 가지 주제로 통합시키는 화음을 발명했는데, 이 디오니소스적인 화음을 처음 접한 그리스인들은 그동안 억제해 왔던 본능을 뛰어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한번도 느껴 보지 못한 이 황홀한 감정에 그들은 순간적으로 미쳐 버린 것이다. 인습적인 한 가지 음에 길들여진 그리스 인들은 디오니소스적 음악에서 자연이 처음 잉태되던 순간을 떠올렸고, 아폴론의 리듬이 지배하던 이성에서 해방되어 마침내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다음 날 아침, 이 모든 꿈에서 깨어난 그리스 인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고 얼마나 놀랐던가! 그 놀라움은 디오니소스가 보여 준 환희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뒤집어쓴 가면 속에 이토록 환희의 절정이 숨겨져 있었다는 두려움 때문에 비롯된 것이었다.- 『비극의 탄생』
침묵은 잔인하게 상대의 가치를 훼손한다 침묵은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침묵은 가장 잔인한 위선이다. 침묵은 자신의 불평을 삼켜 버림으로써 상대방의 가치를 훼손한다. 오히려 예의에서 벗어난 따끔한 충고나 불평이 훨씬 인간적이고 솔직한 미덕이다.- 『이 사람을 보라』
모든 아름다움은 생식을 자극한다 쇼펜하우어는 아름다움을 향한 우울한 정열을 갖고 있다. 그는 늘 이렇게 말한다. “무엇을 위해서인가.” 아름다움은 그에게 ‘의지’로부터의 해방이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아름다움이 우리를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는 아름다움이 ‘의지’의 성역에서 우리를 구출한다고 주장한다. 아름다움에 넋이 나간 인간은 생식의 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다. 그는 한마디로 기묘한 성자다! 하지만 누군가 그의 주장에 항의하고 있다. 항의의 주체는 아마도 자연일 것이다.
자연이 발휘하는 음조, 색채, 향기, 율동적인 운동 속에서 왜 아름다움이 숨겨져 있는 것일까. 자연은 왜 우리에게 아름다움을 제시하는 것일까. 다행히 인간을 대표해 어느 한 사람의 철학자가 그에게 조용히 항의했다. 성스러운 플라톤(쇼펜하우어 자신이 그렇게 부르고 있다)의 권위는 쇼펜하우어에 반대되는 명제를 지지하고 있다. “모든 아름다움은 생식을 자극한다. 가장 관능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정신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이것이야말로 아름다움이 작용하는 고유성이다.”- 『우상의 황혼』
삶에 대하여
고통은 정신 최후의 해방자이다 비로소 나는 병에서 나의 더 높은 건강을 얻었다. 이 건강이란 병이 말살시켜 버리지 못한 모든 것들에 의하여 오히려 더 강해지는 건강을 말한다. 나는 병에서 하나의 철학도 얻었다. 고통이야말로 정신 최후의 해방자다. ……그런 고통이 우리를 개선시키는지에 대해 의심스러울 때도 있으나 나는 고통이 우리를 심오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 『니체 대 바그너』
병약한 사람과 건강한 사람
전형적으로 병약한 사람은 건강해지지 않으며 애써 자기 자신을 건강하게 만들 수도 없다. 반대로 전형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그 병을 인생을 사는 데, 아니 풍요로운 생을 살기 위한 활동적인 자극으로 수용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오랜 세월 동안의 병이 내게 많은 활동적인 자극이 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 사람을 보라』
인생의 여름, 봄 그리고 가을
20대는 열정적이고 지루하며, 언제 소나기가 내릴지 알 수 없는 시기이다. 20대는 늘 이마에 땀이 맺혀 있고 삶이 고된 노동이라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지만, 그것을 필연으로 받아들이는 연령이다. 따라서 20대는 여름이다.
반면에 30대는 인생의 봄이다. 어떤 날은 공기가 너무 따사롭고 또 어떤 날은 지나치게 춥다. 언제나 불안정하고 자극적이다. 끓어오르는 수액이 잎을 무성하게 만들고 모든 꽃의 향기를 구별할 수 있는 나이다. 30대는 지저귀는 새소리만으로도 잠에서 깨어난다. 그리고 처음으로 향수와 추억을 구별하는 시기이다.
40대는 모든 것이 정지된 연령이다. 바람은 더 이상 그를 움직일 수 없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그의 수확을 돕는다. 40대는 한마디로 인생의 가을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노동을 그리워하게 만들려는 술책
영국인이 일요일을 신성하게 여긴 까닭은 월요일의 노동을 그리워하게 만들려는 하나의 술책이었다. 신성한 일요일의 무료함이야말로 가장 영국적인 본능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아주 교묘한 단식과도 같다. 폭식과 폭식을 연결해 주는 다리로써 활용되는 단식이 바로 영국인들의 일요일이 갖는 위상이다.- 『선악의 저편』
불필요한 순간에 독립을 시도하는 자
삶에 있어서 독립이란 소수의 인간들에게만 허용되는, 다시 말해 강자만의 특권이다. 하지만 불필요한 순간에 독립을 시도하는 자가 있다면, 물론 그가 그럴 만한 충분한 자격과 이유가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방종이다. 그는 자신이 인간 사회로부터 독립된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저 무시무시한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에 스스로 뛰어든다.
그리고 이미 위험해진 인생을 더욱 위험한 곳으로 내던져 버린다. 그는 자신이 어디서 길을 잃었으며, 어떻게 고독해졌는지, 또 양심이라는 미노타우로스의 이빨과 마주쳐 산산이 찢겨져 버린 과정을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지만, 그는 이미 사람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아무런 말도 해 줄 수가 없다.- 『선악의 저편』
숨는 것으로 만족하던 시대는 사라진다
인생에서 최고의 기쁨을 수확하는 비결, 그것은 삶이 안고 있는 고통에 스스로를 노출시키는 것이다. 그대들의 도시를 베수비오 화산의 산허리에 건설하라. 그대들의 배를 아무도 알지 못하는 바다 한 가운데에 띄워라.
그대들의 벗, 그리고 그대 자신과의 영속적인 투쟁에 헌신하라. 그대들, 인식하는 자여, 지배하고 소유할 수 없다면 약탈과 정복을 일삼는 자가 되어라. 겁을 집어먹는 사슴처럼 숲 속에 숨는 것으로 만족하던 시대는 머지않아 사라진다.- 『즐거운 학문』
신은 죽었다
우리 모두가 신을 죽였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너희들과 내가! 우리 모두가 신을 죽였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이 일을 저질렀을까? 어떻게 우리는 바다가 마르도록 마셔 버릴 수 있었을까? 누가 우리에게 지평선을 모조리 훔칠 수 있는 해면을 주었을까? 우리가 이 지구를 그의 태양으로부터 떼어 버렸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였던가? 지구는 지금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로 움직이고 있는가?
모든 태양으로부터 멀어져 가는가? 우리는 자꾸 떨어져 가는 것이 아닌가? 뒤로 옆으로 앞으로, 온갖 방향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위니 아래니 하는 상하가 있을까? 우리는 끝없는 무(無) 속에서 헤매는 것 같지 않는가? 텅 빈 공간이 그윽이 느껴지지 않는가? 점점 추워지지 않는가? 더욱 더 밤이 짙어져 오는 것이 아닌가? 대낮에 초롱불을 켜야 할 지경이 아닌가?
신을 매장하는 인부들의 떠들어 대는 소리를 우리는 아직도 못 듣는가? 우리는 아직 신이 썩는 냄새를 조금도 못 맡아 보았는가? 신들도 썩는다! 신은 죽었다! 신은 죽어 있다! 사실 우리가 그를 죽였다! 모든 살해자 중에서도 살해자인 우리가 어떻게 위안을 받을 것인가?- 『즐거운 학문』
잔인한 형태로 덕을 지닌 자들과의 싸움
덕을 지니기 위해선 가장 잔인한 형태로 덕을 지니려 해야 하는가? 기독교 성자들은 이를 원하고 필요로 했다. 성자들은 그들의 덕행을 보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에 대한 경멸감을 느끼리라 생각하면서 삶을 견뎌 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작용을 하는 덕을 잔혹하다고 부른다.
부처의 사후 수 세기 동안 사람들은 동굴 안에서 그의 그림자를 보여 주었다. 엄청나게 크고 소름 끼치는 그림자를. 신은 죽었다. 그러나 인간의 방식이 그렇듯이, 그의 그림자를 보여 주는 동굴은 수천 년 동안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부처의 그림자와도 싸워 이겨야 한다. - 『즐거운 학문』
웃다가 죽은 낡은 신들
낡은 신들은 이미 오래전에 최후를 고했다. 그리고 정말로 낡은 신들은 선하고 즐겁게 신적인 종말을 맞지 않았던가! 그 신들이 죽음을 맞아 ‘으스름 속으로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오히려 그 신들은 너무 웃다가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그 죽음은 신을 가장 부정한 말, 즉 “하나의 신만 존재한다. 나 말고 다른 신은 섬겨서는 안 된다!”는 말이 어떤 신에게서 나왔을 때 일어났다. 신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깊은 속내의 바탕을, 은폐된 치욕과 추함을 남김없이 보고 말았으니, 호기심 많고 주제넘은 자, 동정하는 마음이 너무 깊었던 자는 죽어 마땅하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야만적인 짓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야만적인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을 희생해서 행해지기 때문이다. 신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니라 직관하도록 자신의 운명이 정해져 있다고 느끼는 자가 볼 때 모든 신자들은 너무 시끄럽고 뻔뻔스럽다. 그는 그들로부터 자신을 방어한다.- 『선악의 저편』
너무나 동양적인, 너무나 유대적인
뭐라고? 인간이 신의 존재를 믿는 경우에만 인간을 사랑하는 신이라니! 이런 사랑을 믿지 않는 자에겐 무서운 눈길을 보내고 위협을 가하는 신이라니! 뭐라고? 전능한 신이 이처럼 사랑에 단서를 붙이다니! 명예심과 복수심조차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니! 이 모든 것은 얼마나 동양적인가!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해도,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이것만으로도 기독교 전체를 비판하기에 충분하다. 신이 사랑의 대상이 되려 했다면 먼저 심판과 정의를 포기했어야 했다. 심판을 내리는 자는 아무리 자비로운 재판관이라 해도 사랑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기독교는 이 점에서 충분히 섬세하지 못했다, 유대인으로서.- 『즐거운 학문』
더없이 괴로운 사람만이 경험하는 행복
고뇌와 무능력, 이것이 저편의 세계를 믿는 사람들을 만들어 냈고, 더없이 괴로운 사람만이 경험하는 행복이라는 저 짧은 망상이 그런 세계를 만들어 냈다. 목숨을 걸고 뛰어올라 단숨에 궁극적인 것에 이르려는 데서 오는 피로감, 이제 더 이상 바라려고 하지도 못하는 가련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피로함, 이것이 온갖 신들과 저편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모든 존재는 증명하기 어렵고, 말하게 하기도 힘들다. 그대 형제들이여, 나에게 말해다오. 가장 증명이 잘된 것은 모든 사물들 중에서 가장 불가사의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 이러한 자아, 자아의 모순과 혼란이야말로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가장 솔직하게 말해 주고 있다. 창조하고 의욕하고 평가하는 이러한 자아야말로 사물들의 척도이자 가치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지혜에 대하여
인간은 타인의 배타적 이미지를 찾으려 한다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는 정신 자체를 사색할 줄 안다. 또 정신에 수반되는 원칙이나 방향의 진상을 은폐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그를 위험한 적으로 간주하며, 경멸과 공포의 감정으로 ‘비관주의자’라는 꼬리표를 달아 줄 것이다. 원래 인간은 한 개인을 정의 내릴 때 그만이 소유한 탁월한 재능과 감각 대신 가장 배타적인 이미지를 찾아내 덧씌우는 재주를 타고났기 때문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누군가를 동정하며 스스로를 고귀하다고 느낀다
내가 동정을 비난하는 까닭은 그것이 수치에 대한 감정을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타인을 동정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무례한 짓이다. 동정은 운명을 파괴하고, 치명적인 고독에 특권을 부여하며, 거리낌 없이 죄를 용서한다. 인간은 자신이 누군가를 동정할 때 느껴지는 고귀한 감상 때문에 이 무례한 괴물에게 도덕의 관념을 덧씌웠다.- 『이 사람을 보라』
하루의 반도 자신을 위해 사용하지 못한다면 노예일 뿐이다
활동가는 보다 높은 수준의 활동에 거부감을 드러낸다. 여기서 말하는 좀 더 높은 수준의 활동이란 개성적인 활동을 뜻한다. 그들은 관리, 상인, 학자로서 활동하며 많은 장르를 개척했지만 특정한 덕목을 갖춘 개인으로 활동하지는 못한다. 이런 점에서 비춰볼 때 한마디로 그들은 나태하다. 어느 시대나 그렇듯이 오늘날에도 인간은 노예와 자유인으로 분리된다. 만약 하루의 3분의 2 정도를 자신을 위해 사용할 수 없는 인간이라면, 그가 정치가이든 상인이든 혹은 관리나 학자이든 그저 노예일 뿐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인간에 대하여
인간은 세계의 심판자인가?
만물이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인간은 모든 생물의 심판자인가? ‘세계 대 인간’의 모든 태도, ……사물의 가치척도로서의 인간, 마침내는 존재 자체를 자기의 저울대 위에 올려놓고는 그것을 너무 가볍다고 생각하는 세계 심판자로서의 인간 - 이러한 태도의 정상을 벗어난 어처구니없음은 그 정체를 드러내어 우리에게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 우리는 ‘인간과 세계’가 서로 병립되어 있고, 따라서 ‘과’라는 귀여운 단어의 숭고한 뻔뻔함에 의해 분리되어져 있음을 발견할 때 웃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