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하게 떠나 명랑하게 돌아오는 독서 여행
서민 지음 | 인물과사상사
유쾌하게 떠나 명랑하게 돌아오는 독서 여행
서민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20년 2월 / 388쪽 / 16,000원
첫 번째 여행_ 이상한 나라에서 책 읽기
더 아픈 사람이 있는 이유 『아픔이 길이 되려면』 우리나라는 제왕절개 수술을 많이 하는 나라다. 2013년 통계에 의하면 전체 분만의 36퍼센트가 제왕절개 수술로 이루어졌다. 중국(47퍼센트)처럼 우리나라보다 높은 나라도 있긴 하지만, OECD 평균(25.8퍼센트)을 감안하면 높은 편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자연분만보다 제왕절개 수술이 비싸니 ‘의사가 돈을 더 벌기 위해서’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자연분만할 때 태아가 잘못된 확률은 제왕절개 수술을 할 때보다 훨씬 크다. 좁은 출구를 통해 태아가 나오다 보니 수술로 꺼내는 것보다 위험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아이가 잘못되면 아이의 가족은 의사를 상대로 소송을 건다. 법원은 대부분 제왕절개 수술을 했다면 의사의 과실이 없지만, 자연분만을 했다면 의사에게도 일부 책임이 있다고 판결한다. 이렇게 본다면 의사가 제왕절개 수술을 선호하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이다.
확률이 낮긴 하지만 제왕절개 수술을 해도 산모나 태아에게 안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 법적으로는 무죄가 나올지라도, 산모가 “내 아이를 살려내라!”라는 피켓을 들고 병원 앞에서 시위를 한다면 어떨까? 서울아산병원이나 서울대학교병원처럼 큰 병원이라면 그런 일이 생긴다고 병원 평판이 떨어지지는 않겠지만, 작은 병원에는 치명적이다. 그런 소문이 난 병원에 올 산모는 없을 테니, 합의금으로 거액을 지불하거나 병원 문을 닫는 것이 의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다. 이런 일이 잦아지면 작은 병원들은 분만 자체를 꺼리게 된다.
이는 실제 벌어지고 있는 일로, 지금 개인 병원 산부인과는 물론이고 중소 병원들도 웬만하면 분만을 하지 않는다. 이 현상이 가져온 결과는 참혹했다. 큰 병원이 몰려 있는 수도권과 달리 지방의 작은 산부인과는 분만을 잘 하지 않고, 그러다보니 분만 때 생기는 응급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다.
강원도 태백에 살던 여성이 분만 도중 자궁이 파열되었을 때, 그 상황을 해결해줄 병원이 근처에 없었다. 결국 여성은 130킬로미터를 달려 원주로 가다가 사망하고 만다. 출생아 10만 명당 아이를 낳다 숨지는 산모의 수를 모성사망비라고 하며, 이것은 한 나라의 건강 상태를 측정하는 중요한 지표다. 수명이나 병원 이용 횟수 등 의료에 관한 각종 지표가 톱클래스인 우리나라지만, 모성사망비만큼은 OECD 평균에 미치지 못한다. 2013년 OECD 평균 모성사망비는 7명인데, 우리나라는 11.5명이었다. 지역별로 나누면 심각성이 더 커진다.
이런 문제의식이 있던 터라, 김승섭이 쓴 『아픔이 길이 되려면』이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의대를 나와 현재 보건대학교 교수인 그는 이 책에서 질병은 의료 제도와 문화가 만들어낸 측면이 있으며, 개인을 치료하기보다 제도를 손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책에 나온 사례 중 낙태 이야기를 소개한다. 1966년 루마니아 대통령 차우셰스쿠는 출산율이 줄어드는 것에 위기감을 느끼고 강력한 낙태금지법을 시행한다. 아이가 4명 있거나 산모 나이가 45세를 넘지 않으면 낙태를 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무려 23년간 지속된 이 정책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우선 출산율이 높아지지 않았다. “아이를 키우는 데 충분한 경제적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법을 피하는 길을 찾아야 했으니까요.” 낙태를 하지 못한 여성들로 인해 고아원 등 시설에서 자라나는 아이 수가 증가했다. 가장 큰 비극은 모성사망비가 높아졌다는 점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성들은 의사의 도움 없이 유산하기 위해 위험한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낙태금지법이 시행되기 전인 1966년에 비해 1983년 루마니아의 모성사망비는 7배 높아졌고, 이는 경제 수준이 비슷한 불가리아나 체코보다 9배나 높은 수치였다. 이 수치는 결국 1989년 혁명과 더불어 낙태금지법이 철폐되면서 이전으로 돌아갔다.
이는 낙태금지법이 출산율을 높이는 수단이 되지 못함을 잘 보여주는 사례지만, 안타깝게도 우리나라는 여기서 교훈을 얻지 못했다. 낙태를 저출산의 주범으로 지목하고 낙태한 여성과 의사를 처벌하려 하니 말이다(2019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는 낙태죄에 대해 헌법불합치 판정을 내렸다. 낙태법은 2020년까지 수정되어야 하는데, 이를 두고도 많은 논란이 있다). 그 결과 불법적인 방법으로 낙태를 하려던 여성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태아도 생명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던 분들이 산모의 목숨이 위험해지는 현실에 눈감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정말 저출산이 문제라면 아이를 낳아 잘 기를 수 있도록 제도적인 뒷받침을 하는 것이 먼저 아닐까?
김승섭은 이 밖에도 가난이 사람을 병들게 한다면서 사회안전망 확충을 주장하고, 근무 중 부상당한 소방공무원이 평가에 불이익이 있을까봐 대부분 자기 돈으로 치료를 받는다는 슬픈 연구 결과도 알려준다. 좋은 책의 조건 중 하나는 깨달음을 주는 것이다. 병원에서 근무하는 전공의들이 제대로 잠도 못 자고 일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 “그렇게 고생하면 나중에 돈 많이 벌잖아”라고 말할 것이다. 나 또한 그렇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저자는 다음과 같이 묻는다. “전공의들이 지금처럼 일할 때, 과연 그들이 진료하는 환자는 안전할 수 있을까?” 실제로 연구 결과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전공의일수록 의료 과실의 위험이 커진다고 한다.
책을 읽다 보니 제도와 문화가 질병을 유발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십분 이해하게 되었는데, 저자가 하는 연구가 자본을 비롯해 소위 ‘가진 자’들에게 불편한 것이라 걱정이 된다. 저자는 삼성반도체의 작업환경과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의 건강을 이야기하고, 세월호 참사에 대한 국가의 2차 가해를 비판한다. 또한 비정규직 확대가 우리 사회의 자살률을 높이는 잔인한 짓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과연 그가 앞으로도 연구를 계속할 수 있을까?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그가 활발히 연구하면 할수록, 우리 사회가 더 좋아질 수 있으니까.
서번트 증후군을 원하는 사회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기억력이 아주 비상한 남자가 능력을 발휘해 사건을 해결하는 내용이 아닐까 싶었는데, 정말 그랬다. 최근 20년간 일어난 모든 것을 기억하고, 필요하면 그 장면을 불러내 머릿속에서 확인할 수 있는 비상한 능력을 지닌 데커라는 남자가 주인공이다. 얼핏 생각하면 ‘야, 그거 정말 좋겠다!’ 싶지만, 꼭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나만 해도 살면서 부끄러운 짓을 한 적이 수십, 아니 수백 번이다. 20대에는 술에 취해 버스 운전기사와 험한 말을 하면서 싸운 적도 있는데, 콕 찍어서 이 사례만 소개하는 이유는 이게 그나마 덜 부끄러운 짓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내가 마치 사회정의의 수호자인 양 신문에 칼럼을 쓰고 책을 낼 수 있는 비결은 내게 불리한 것은 죄다 잊어버리는 놀라운 망각 능력 덕분이다. 과거의 기억들이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날 압박한다면 머리를 깎고 산으로 올라가야지 않을까?
이 책의 주인공 데커는 경찰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한다. 그 뒤에도 그의 기억력은 빛을 발한다. 각종 단서를 토대로 범인을 추격하는 것이 경찰의 임무인데, 비상한 기억력이 있다면 훨씬 유리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데커에게 쓰라린 시련이 닥친다. 누군가 딸과 아내를 무참히 살해한 것이다. 비상한 기억력 탓에 그 당시 상황이 계속 떠오르니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결국 데커는 경찰을 그만두고 폐인 상태로 살고 있다. 그랬던 데커가 다시금 심기일전해 15개월 전 그의 가족을 죽인 범인을 쫓는다는 것이 이 책의 주요 내용이다.
데커가 범인을 잡느냐 마느냐보다 여기서 집중할 것은 ‘서번트 증후군’이다. 의대를 나왔는데도 나는 서번트 증후군에 대해 잘 몰랐다. 심지어 그 단어조차 모르고 있어서, 언젠가 어느 분이 “혹시 서번트 아닌가요?”라고 물었을 때, “저는 서민인데요”라고 대답하기도 했다. 그분이 더 답변을 안 하기에 혹시나 싶어 검색해보니 자폐증과 관련된 단어가 나와서, ‘아, 이분은 내가 대인 관계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구나’라고 정리하고 말았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 의하면 서번트 증후군은 뇌 기능 장애가 있는 사람이 의사소통 등 일상생활은 정상적으로 영위하지만 특정 분야에 있어서는 일반인이 도달할 수 없는 천재성을 보이는 경우를 지칭한다. 내게 “혹시 서번트 아닌가요?”라고 물었던 분은, 내 글을 칭찬한 것이었지만, 칭찬도 아는 사람에게 해야 의미가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서번트’는 프랑스어로, ‘박학다식한 바보’라는 뜻이다. 1887년 존 랭던 다운이 지능은 낮지만 기억력이 유난히 뛰어난 사람을 기술하려고 이 단어를 처음 사용했다. 우리나라에 서번트 증후군이 알려진 것은 더스틴 호프먼이 주연한 <레인 맨>이라는 영화가 개봉하면서다. 호프먼은 천재적인 기억력을 지닌 자폐증 환자로 나왔는데, 도박장에서 카드의 순서를 외워 큰돈을 번다.
<레인 맨>은 서번트 증후군에 대해 알려주긴 했지만, 자폐증 환자에 대한 왜곡된 견해를 심어주었다. 자폐성 장애 중 아주 극소수만이 이런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자폐증 환자가 서번트 증후군은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 탓에 자폐증 환자의 부모는 “우리 아이가 혹시 비상한 기억력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기대를 하고, 그로 인해 더 큰 실망을 하기도 했다.
내가 몰랐던 또 하나는 후천적 장애로 서번트 증후군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책의 주인공 데커는 미식축구 도중 상대 선수와 충돌해 나가떨어졌고, 그 이후 서번트 증후군이 되었다. 책에는 후천적으로 서번트 증후군이 된 실제 사례를 소개하고 있다.
“올랜도 서렐도 후천적 서번트 증후군이었다. 열 살 때 농구공에 머리를 맞은 후 탁월한 시간 계산 능력이 생겼고 모든 날의 날씨와 특정한 날 어디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완벽한 기억을 갖게 되었다. 대니얼 타멧은 어릴 때 간질 발작으로 죽을 고비를 넘긴 뒤 세기의 천재가 되었다. 원주율을 2만 2,000자릿수까지 나열할 수 있었고, 일주일 만에 여러 언어를 완벽하게 익혔다.”
대체 어떤 원리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책에는 이렇게 나와 있다. “그는 두뇌가 두 가지 변화를 일으켰다고 결론지었다. 첫째, 그의 머리에는 배수관 같은 경로가 뚫렸고 그 경로로 정보가 훨씬 더 원활히 흐르게 되었다. 둘째, 그의 머리를 가로지르는 새로운 전기회로망이 열려 채색된 숫자들을 보는 능력이 생겼다.”
채색된 숫자라는 것은 서번트 증후군 중 일부가 공감각이 있기 때문인데, 데커 역시 그랬다. “감각신경의 통로들이 교차했는지 숫자와 색깔이 연결되었고 시간도 그림처럼 보인다. 색깔들이 불쑥불쑥 생각 속으로 끼어든다. 나 같은 사람들을 공감각자라고 부른다. 나는 숫자와 색깔을 연결 지어 생각하고 시간을 본다. 사람이나 사물을 색깔로 인식한다.”
여기까지 읽고 나면 서번트 증후군이 과연 좋은 것인지 회의가 들지도 모르겠다. 완벽한 기억력도 숨이 막힐 텐데, 거기에 색깔까지 끼어든다고? 그런데도 막상 서번트 증후군으로 만들어주는 수술법이 나온다면 그 수술을 받을 이가 한둘이 아닐 것이다. 부끄러운 기억이 남는 단점보다 각종 시험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둘 수 있다는 장점이 훨씬 크게 보일 테니 말이다. 취업이 어려워 구직을 포기하는 청년이 늘어나는 시대를 감안하면, 아무리 비싸도 수술을 받겠다는 사람이 줄을 서지 않을까? 서번트 증후군으로 가득 채워진 사회를 상상하니 왠지 좀 오싹해진다. 서번트 증후군의 비밀이 차라리 밝혀지지 않기를 바라는 이유다.
두 번째 여행_ 책 한 권이 사람을 바꾸진 않겠지만
‘며느라기’를 아세요? 『며느라기』 10여 년 전, ‘페미니즘의 교과서’라고 알려진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읽었다. 상하권으로 나누어진 이 책은 상권이 528쪽, 하권은 ‘해설’을 제외하면 530쪽이다. 두꺼운 책이라고 다 읽기 힘든 건 아니지만, 이 책은 두께보다 엄청난 깊이로 나를 힘들게 했다. 다음 구절을 보자. “의식은 제각기 남을 노예 상태로 전락시킴으로써 자기완성을 시도한다. 그러나 노예도 또한 노동과 공포 속에서 자기를 비본질적인 것으로 느끼고 있다. 변증법적으로 뒤집어 생각해서 그에게는 주인이 비본질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 연극은 양쪽이 상대의 객체를 자유로이 인정하는…….”(상권 216쪽) 부끄럽지만 나는 지금도 이게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한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런 말이 책 전체에 걸쳐 등장한다. 결론에서도 변함이 없다. “남녀는 제각기 육체화된 실존의 이상한 애매성에서 살고 있다.”(하권 525쪽) 읽은 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책을 읽던 기억은 트라우마로 저장되어 있다.
아마도 저자는 이 책을 쓰려고 굉장히 많은 텍스트를 섭렵하고, 그것을 적확한 문장으로 뽑아내려고 애를 썼을 것이다. 아쉽게도 이 책은 나 같은 일반인에게는 전혀 친절하지 않았다. 깨달음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책을 통해 확인하는 순간 생긴다. ‘아, 내가 불쾌한 것이 당연하구나. 상대가 무례한 거였구나!’ 그 순간 페미니즘이 왜 필요한지 알게 된다. 하지만 『제2의 성』이 그 역할을 제대로 했는지는 의문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금 시대의 페미니즘 열풍은 페미니즘을 쉽게 이야기하는 책이 쏟아진 덕분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성차별 사례를 소설로 꾸며 수많은 페미니스트를 탄생시켰다.
『며느라기』는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웹툰으로 페미니즘을 이야기한다. 연재 당시 독자 수가 60만 명에 달했던 인기 웹툰은 곧 책으로 묶여 나왔고, 인터넷 서점 순위에서도 종합 10위 안에 들며 승승장구했다.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 여성의 대다수는 누군가의 며느리다. 며느리, 듣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지는 단어다. 노동의 전담자이자 억압의 상징이며, 그러면서도 좋은 소리를 듣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며느리 아니던가?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간단히 살펴보자. 직장에서 대리로 일하는 민사린은 결혼과 동시에 며느리가 된다. 결혼 초기, 민사린은 바쁜 와중에도 시어머니 생일 아침에 미역국을 끓여 드리려고 전날 시댁에 가서 잠을 자고, 새벽에 홀로 일어나 근사한 생일상을 차린다. 남편도, 마침 친정에 와 있던 시누이도 상을 차리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 다 먹은 그릇을 씻는 것도 당연히 며느리의 몫이다. 민사린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남은 식구들은 민사린이 깎아놓은 사과를 먹는다.
그날 저녁에도 민사린은 시댁 식구들과 모임을 가졌다. 하지만 곧 시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이 다가왔다. 점수를 따기 위해 다시 시댁에 갔고, 거기서 민사린이 폭탄선언을 한다. “참, 어머니, 다음다음 주 친척 결혼식은 못 갈 것 같아요. 제가 독일로 출장을 가야 해서요.”(113쪽) 그러자 시어머니의 잔소리가 시작된다. “유부녀가 일주일이나 집을 비우냐”, “그 출장은 꼭 가야 하는 것이냐”, “꼭 가야 하는 게 아니면 다음에 간다고 해라”, “결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벌써 집을 비우면 어떡하느냐”
하지만 시어머니는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맨 마지막에 나온다. 이 땅의 어머니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바로 그것. “새신랑이 밥도 못 얻어먹으면 어떡하니.”(114쪽) 직장인에게 해외 출장은 자기 능력을 발휘할 좋은 기회다. 그런데 시어머니는 아들 밥 때문에 포기하라고 한다. “어디 아프다고 해도 되고,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겼다고 해도 되고.”(115쪽)
갑자기 몇 년 전 일이 떠오른다. 아내가 갑자기 성당에 다니겠다며 교리 공부를 시작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는 크게 기뻐하셨다. ‘자식을 낳으면 신자로 만들겠다’라는 약속을 못 지킨 것이 마음에 걸리던 터에, 며느리라도 신자가 된다면 그 자체로도 좋은 일이고, 잘 하면 며느리가 아들을 꼬일 수도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