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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적 생활양식을 넘어서

울리히 브란트, 마르쿠스 비센 지음 | 에코리브르


제국적 생활양식을 넘어서

울리히 브란트, 마르쿠스 비센 지음

에코리브르 / 2020년 1월 / 280쪽 / 18,000원



생활양식의 한계에서



1994년 2월, 《애틀랜틱 먼슬리》에 미국 언론인 로버트 캐플런의 〈다가오는 아나키〉라는 제목의 글이 실렸다. 거기서 저자는 저개발 세계의 정치적ㆍ사회적 발전을 다루면서, 서아프리카의 예를 들며 그것의 지극히 어두운 이미지를 그려 보인다. 메시지는 명확하다. 지구 북반구가 냉전의 종식과 함께 지구 남반구에 대한 관심을 잃은 후, 남반구는 혼돈에 빠질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그 당시 기고문의 의도는 사람들의 고통을 보여주거나 북반구의 풍요와 남반구의 분쟁 간 연관성을 추적하는 것이 아니었다. 캐플런에게 문제되는 것은 오히려 국민국가들 사이의 손쉽게 개관할 수 있는 경쟁이 아나키적인 다수의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동기를 지닌 분쟁들로 대체되는 세계 질서를 묘사하는 것이었다. 그에 더해 남반구 아나키의 확산 및 북반구 자체의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사회들에 놓여 있는 긴장에서 비롯된 북반구의 국민국가적 질서의 위협에 대해서도 경고하려 했다.

캐플런의 글이 발표되고 약 20년 후, 유럽 정치인들은 생존의 어려움이나 더 나은 삶에 대한 욕구에 떠밀려 유럽연합(EU)에 정착하려는 사람들에 대한 위협과 봉쇄를 제안하며 구체적 조치를 취하고 있다. 깊은 이해관계 대립에 의해 분열된 유럽의 정치 엘리트들은 캐플런이 상상한 국민국가적-이 경우에는 또한 초국가적이기도 한-질서에 대한 위협에 한 마음으로 전력을 기울여 맞서기 위해 난민들에게서 본보기를 확립하려고 노력하는 데서 서로 접근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와 더불어 2016년 상황에서는 1994년 캐플런의 진단을 연상케 하는 두 번째 것도 나타난다. 거부당하거나 또는 거부당할 사람들 가운데 다수가 생태학적 이유 때문에도 도피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온 상승이나 농업과 광업에서 부족해지는 자원을 둘러싼 분쟁은 그들에게서 궁핍과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누릴 가능성을 빼앗기 때문이다. 시리아 내전도 이 이야기에 포함되는데, 물론 그 이유는 그 내전에 사회적 분쟁 잠재력을 증대시킨 오랜 가뭄이 선행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캐플런의 대재앙 시나리오는 2016년에 확증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뿐만이 아니다. 그것은 유럽의 봉쇄 정책에 곧바로 정당한 이유를 제공한다. 만약 ‘환경’이 국가 안보 문제라면, 그리고 ‘환경’이 특히 나쁘게 작용하는 곳이 어쨌든 남반구라면, 게다가 이 남반구가 국민국가적 특징 아래서 정치 안정과 경제 발전의 모든 전망을 생각할 수 없는 그러한 혼돈에 빠진다면, 북반구는 분명 자기의 문명적 성과를 방어하는 데 집중해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좀 더 고차원적인 목적을 위해서는 남반구에서 유입되는 사람들을 멀리 떼어놓아야 한다.

문제는 다만 캐플런의 진단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난민 정책도 그 정당성 또는 신뢰성을 2가지 결정적인 연관성에 대한 침묵으로부터 이끌어낸다는 점이다. 첫째, 사람들은 단순히 자연 자원의 ‘부족’과 ‘기후 변화’에 의해 내쫓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대신 자원을 부족하게 만들고 기후 변화를 많은 사람에게 생존의 위협으로 만드는 것은 토지와 물, 그리고 생산 수단에 대한 불평등한 접근 같은 불공정한 사회관계다. 둘째, 이런 관계는 우리가 직접적 인상에서 벗어나고 관련 지역의 경계를 넘어서 전 지구적 맥락에 눈길을 돌릴 때에만 파악할 수 있다. 가령 콩고의 이른바 적대적인 ‘종족’ 분쟁 배후에는 휴대전화나 노트북 생산에 쓰이는 콜탄(Coltan) 광석에 대한 북반구의 수요가 있다. 그리고 세계 많은 지역에서 물 분쟁은 기후 변화 과정에서 늘어나는 가뭄의 불가피한 결과로 보인다. 아울러 이러한 물 분쟁은 북반구의 농업 관련 기업들에 의해 남반구의 지역 및 국가 엘리트의 이해관계와 일치되어 가속화하는 소농 생산 양식 파괴의 결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캐플런의 분석이 신뢰성을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로 유럽연합의 정책도 정당성을 상실한다. 유럽연합의 정책은 다른 사람들의 희생 위에 이뤄진 복지를 바로 그 다른 사람들이 자기 몫을 요구하는 데 맞서 방어하려는 시도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이는 전 세계적으로 자연과 노동력을 이용하고, 거기서 생겨나는 사회적ㆍ생태학적 비용을 외부화 하는 데 기반하는 생활양식의 논리적 귀결이다. 그런 외부화는 북반구를 위한 소비재 생산 과정에서 배출되고, 남반구의 생태계에 흡수되는 (또는 대기 중에 집중되는) 이산화탄소의 형태로, 북반구의 디지털화와 ‘4차 산업혁명’의 불가결한 전제인 남반구에서 생산하는 금속 원료의 형태로, 또는 광물과 금속을 추출하고 폐전자제품을 재활용하며, 북반구에서 소비하는 ‘열대 과일’을 생산하는 농약으로 오염된 플랜테이션에서 뼈 빠지게 일함으로써 자신의 건강과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남반구의 노동력 형태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와 같은 전제에 기반하고 언제나 생산 양식도 함께 포함하는 생활양식을 제국적이라고 부른다. 이 개념을 가지고 우리는 첫째, 북반구 사람들 및 점점 더 많아지는 남반구 사람들의 생산과 소비 같은 일상을 가능케 하지만 대체로 의식적 지각이나 특히 비판적 반성의 문턱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을 가시화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정상 상태가 어떻게 그 근저에 놓여 있는 파괴를 드러내지 않고 형성되는가 하는 점이다. 둘째, 우리는 너무도 다양한 영역(사회적 재생산, 생태계, 경제, 금융, 지정학, 유럽 통합, 민주주의 등등)에서 문제와 위기가 축적되고 첨예화하고 중첩되는 시기에 어떻게, 그리고 왜 정상 상태와 같은 것이 만들어지는지 설명하려고 한다.

셋째, 우리는 현재의 위기와 분쟁을 제국적 생활양식의 모순성이 발현된 것으로서 파악하고자 한다. 오늘날 많은 문제가 그토록 위기적으로 첨예화한 것은 현재 승리를 쟁취한 제국적 생활양식이 사망 시점에 있다는 사실로도 환원할 수 있다. 이러한 진단이 옳다면, 넷째, 대안에 대한 요구는 생태학 논쟁의 주류에서 이루어지는 것보다 더 철저하게 정식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 경우 강력한 수사학에도 불구하고, 문제의 정치ㆍ경제 및 제국의 생활양식을 그대로 놔두는 것으로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그 대신 우선적 관건은 생태학적 위기를 바로 그 참된 모습으로서 인정하는 것이다. 즉 그것은 자본주의와 함께 생겨나고 마침내 보편화한 북반구의 생산 및 소비 규범이 생태학적으로 현대화한 그 변형들에서도 점점 더 많은 폭력과 생태학적 파괴 및 인간적 고통을 대가로만 유지될 수 있으며, 이마저도 세계의 작은 부분에서만 그럴 수 있다는 데 대한 분명한 경고인 것이다. 계속해서 자연의 가치화와 사회적 분열에 기대는 권위주의적 정책으로 인해 우리는 현재 유례없는 모순의 축적을 겪고 있다. 사회와 그것의 생물리학의 기초의 재생산은 자본주의적 성장 명령에 의해서는 점점 더 확보할 수 없다. 우리는 위기관리의 위기, 헤게모니와 국가위기를 겪고 있다. 이러한 통찰로부터 출발해 바로 문제 되는 것은 현재 지배적 발전에 반대해 실천되는 다양한 대안의 보편화 가능성과 사회적 작용력을 증대시키는 그것들의 결합 요소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다중적 위기와 사회적ㆍ생태학적 전환



우리는 역설적 상황에 살고 있다. 한편에서는 생태학적 위기, 특히 기후 변화에 관한 광범위한 사회ㆍ정치적 논의가 존재한다. 에너지 전환도 많은 나라에서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국가 정책과 행정 당국은 몇 년 전부터 지속 가능성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어왔으며, 많은 기업과 협회 및 점점 더 늘어나는 고용인과 노동조합에도 그 주제가 ‘도래’한 것으로 보인다. 학교 교육에서 환경과 지속 가능성은 그동안 교과 과정의 확고한 구성 요소가 되었고, 대학에는 해당 인구 과정 및 전통적 분과에서의 교수 모듈에 관한 광범위한 제안이 존재한다. 무언가가 행해지고 있다.

그러한 만큼 더욱더 역설적인 것은 계속해서 경보음을 울리는 연구와 보고가 보여주듯이 환경 파괴가 계속해서 더욱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구의 자원 소비는 급속한 가속화에 따라 세기 전환기에 1970년 이후 3배가 되었다. 사회의 필요한 사회적ㆍ생태학적 개편은 몇 안 되는 영역에서만 이뤄지고 있으며 전혀 충분하지 못하다. 나아가 그것은 대단히 역동적인 지속 불가능한 발전에 의해 좌절되고 있다. 자동차는 평균적으로 더 커지고 더 강력한 엔진을 장착하고 있으며, 항공 교통은 계속 증가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ㆍ스위스에서 육류 소비는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생태학적으로 거의 지속 불가능하게 생산한 스마트폰은 지난 몇 년 사이 사람들의 일상에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한편 지난 5년간의 학문적 논의를 추적하면 우리는 전환, 즉 거대한 또는 사회적ㆍ생태학적 전환, 지속 가능성을 향한 전환의 시대로 접어든 것처럼 보인다. SDGs에 대한 협정도 ‘우리의 세계 전환시키기-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2030 의제’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하지만 지속 가능한 발전 개념과 비슷하게 전환 개념도 그리 구체적이지 않다. 만약 우리가 사회적ㆍ생태학적 전환 프로젝트에 대해 생각하고 그것을 위한 현재의 조건을 탐색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사태를 분명히 해야 한다. 그것은 부르주아적ㆍ자본주의적 사회 자체에는 전환의 논리가 내재적이라는 점이다. 최근의 세계화 논쟁에서 자주 인용되는 자본주의 분석의 유명한 인용문 가운데 하나는 그 점을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한 구절이다.

“부르주아 계급은 생산 도구를, 따라서 생산 관계를, 따라서 전체 사회관계를 끊임없이 혁명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다. 이에 반해 낡은 생산 양식을 변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그 이전의 모든 산업 계급의 첫 번째 생존 조건이었다. 생산의 지속적 변혁, 모든 사회 상태의 부단한 동요, 영원한 불안정과 운동은 다른 모든 시대와 구별되는 부르주아 시대의 특징이다. 노후화하고 고정된 온갖 관계는 그에 따른 낡고 고루한 여러 관념이나 견해와 더불어 해소된다. 그리고 설령 그런 관계가 새로이 형성되더라도 그것들 모두는 골격을 갖추기도 전에 시대에 뒤떨어지게 된다. 신분적인 것이나 기존에 존립하던 일체의 것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일체의 신성한 것이 더럽혀지며, 인간은 마침내 자신들의 생활상 지위, 자신들 상호 간의 관계를 서로 냉담한 눈으로 보도록 강요받는다.”

그러므로 문제는 변화에 대한 긍정과 부정이 아니라 변화 또는 전환의 논리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전환 개념의 중요한 차이점을 규정할 수 있다. 오늘날 지배적 논리는 이윤 형성, 자본 축적, 팽창적 경제 활동, 자연 착취의 논리다. 이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문제, 즉 다면적으로 노동 압축과 번아웃(burnout)으로 이어지는 인간 노동력의 과도한 이용에 이르는 착취와 결부되어 있다.

여기서 전환 개념의 의미를 더 명확하게 발전시켜야만 한다. 부르주아 사회에서는 영구적 자기 혁명화라는 전환의 지배적 논리가 문제로 대두한다. 이런 논리는 더욱더 통제 불가능한 위기를 불러일으킨다. 또 이는 유력하고 압도적이며, 민주적 형성과 자기 결정, 해방과 모두를 위한 좋은 삶에 대한 어떤 전망도 열어주지 않는다. 따라서 사회적ㆍ생태학적 전환이나 거대한 전환은 이러한 다른 동역학, 즉 지속 가능하지 않고 종종 위기를 불러일으키지만 엄청나게 전환적인 동역학을 고려해야만 한다.

제국적 생활양식의 개념



이 개념의 핵심 사상은 자본주의 중심부에서의 일상생활이 다른 곳에서의 사회관계와 자연 관계의 형성에 의해, 자신이 자기 환경에 방출하는 것보다 더 많은 특정 물질을 받아들이는 생태계(이산화탄소의 경우에는 열대 우림이나 대양 같은)에 의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북반구 경제에 필요한, 남반구로부터의 노동과 자연의 이전이 보장되어 있는지 여부에 근본적으로 좌우되기 때문이다. 역으로 북반구에서의 제국적 생활양식은 다른 곳의 사회들을 결정적인 위계적 방식으로 구조화한다.

우리는 철저히 의식적으로 애매모호한 ‘다른 곳’이라는 표현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가정용 제품, 의료 기기 또는 운송 및 물과 에너지 공급의 기반 시설에 들어가는 원료의 출처, 그 원료를 추출하거나 섬유와 식품을 생산하는 노동 조건,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에너지 소비는 수많은 필수 일상 용품의 구매와 소비 또는 이용에서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또한 인쇄 매체나 디지털 매체 같은 ‘문화적 식품’도 속한다. 구매와 이용의 자명성을 비로소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전제의 비가시성이다. 농촌사회학자 필립 맥마이클은 식품의 원산지와 생산을 모호하게 함으로써 시공간적으로 무제한적인 식품의 이용 가능성을 정상화하는 이 전략을 “어디에서도 오지 않은 먹거리”라고 명명했는데, 겨울에 독일의 학교 급식실에서 제공하는 중국산 딸기, 북반구 소비자를 위해 태국이나 에콰도르의 맹그로브 숲을 파괴해가며 양식하는 새우를 예로 들 수 있다.

우리가 제안한 ‘제국적 생활양식’ 개념은 북반구 주변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일상 구조와 실천에 깊이 자리하고 있으며, 점차적으로는 또한 남반구의 신흥 경제국에도 유입되고 있는 생산과 분배와 소비 규범을 가리킨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물질적 실천뿐만 아니라, 특히 그것을 가능케 하는 구조적 조건 및 그것과 결합한 사회적 이상과 담론이다. 이를 간단히 정식화하면 이렇다. 즉 다양한 제국적 생활양식으로 이루어지는 ‘좋은’ 그리고 ‘올바른’ 삶의 기준은 일상에 각인된다. 제국적 생활양식이 비록 포괄적인 사회관계와 특히 물질적이고 사회적인 하부 구조의 일부분일지라도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생활양식에 대한 우리의 구상은 우리가 자본주의 사회 구성체 같은 모순적인 사회 구성체는 일상적 실천과 상식에 자리 잡고, 그에 따라 이를테면 ‘자연적’인 것이 될 때에만 재생산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전통에 서 있다. ‘제국적’이라는 형용사를 가지고 우리는 그람시를 넘어서 생활양식의 전 지구적이고 생태학적인 차원을 강조하고자 한다.

제국적 생활양식은 자본주의 사회의 재생산에서 본질적인 계기다. 그것은 담론과 세계관에 근거해 세워지고, 실천과 제도 안에서 공고화하며, 시민 사회와 국가의 사회적 대결의 결과다. 그것은 불평등과 권력 및 지배에, 때로는 폭력에 토대하며, 동시에 이런 것들을 산출한다. 그것은 주체들로부터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주체들의 상식을 산출하고, 그들에게 규범을 제공하는 동시에 행위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여성과 남성으로서, 이익을 극대화하고 스스로를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고 느끼는 개인으로서, 특정한 형태의 좋은 삶을 추구하는 자로서 말이다.

제국적 생활양식 개념은 사람들의 일상을 사회 구조와 결합한다. 그것은 지배적인 생산과 소비 규범의 사회적이고 생태학적인 전제 및 이러한 전제에 내포된 지배 관계를 가시화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지배가 신식민지적인 남북 관계에서, 계급과 젠더 그리고 인종주의화한 관계에서, 소비와 생산의 일상적 실천에서 정상화함으로써 더 이상 그러한 지배로서 지각되지 않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따라서 생활양식 개념은 생산 양식 개념도 포함하며, 생산의 기술적 조건 및 기업과 노동 조직의 형식을 지배적인 소비 규범에 대한 그것들의 관계로 받아들인다.

제국적 생활양식의 전 지구적 보편화와 심화



지나간 기회 - 포디즘의 위기: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1970년대는 다양한 이유에서 제국적 생활양식에 의문을 제기한 역사적 창처럼 보인다. 1970년 미국에서의 옥수수 흉작은 다수확 품종과 단종 재배의 포디즘적 농업 모델이 엄청난 위험을 숨기고 있다는 의식을 증대시켰다. 그리고 로마클럽의 보고서『성장의 한계』같은 간행물은 광범위한 사회적 논쟁을 야기했다. 또 1972년 스톡홀름에서는 첫 번째 세계 환경 회의가 열렸고, 그 결과 유엔환경계획(UNEP)이 설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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