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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영혼에게 물어라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당신의 영혼에게 물어라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20년 2월 / 248쪽 / 14,000원



아부는 민주주의의 엔진이 되었다


“아부의 친구는 자기만족이고 그 시녀는 자기기만이다.” 이탈리아 사상가 니콜라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한 말입니다. 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부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인다면 군주는 아부의 먹이가 되고 만다. 궁정에 아부꾼이 가득하다면 매우 위험한 사태가 초래될 수 있다. 사람이란 자신의 일에 몰입해서 만족하게 되면, 그것에 미혹되어 해충같은 아부에게 벗어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 저널리스트 리처드 스텐걸은 『아부의 기술』에서 “마키아벨리 자신은 전략적 아부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했다”고 비꼽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군주론』을 헌정했던 당대 권력자 로렌조 디 피에로 데 메디치에게 “최고의 인물이라고 말하지 않고(보통 아부꾼도 그 정도의 발언은 할 줄 안다), ‘시대가 위인을 찾고 있는데, 오직 로렌조만이 시대의 공백을 채울 수 있을 뿐’이라고 아부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아부를 하더라도 이렇게 전략적으로 해야 합니다. 마키아벨리 이후 많은 사람들이 전략적인 아부의 기술을 역설했지요. 미국 경영학자 제프리 페퍼는 『권력의 기술』에서 아예 ‘아부 예찬론’까지 폅니다. 그는 “사람들은 아첨의 효과를 과소평가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며 다음과 같이 주장합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본인에게 아첨하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고, 아첨을 받으면 자신과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기분이 좋아진다. 좋은 기분이 들면 자신의 영향력도 아울러 강화되기 때문에 아첨의 효과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또한 아첨은 호혜성을 바탕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효과가 있다. 아첨도 칭찬도 마찬가지로 일종의 선물이다. 자신을 칭찬해주는 사람에게 식사라도 대접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을 갖게 되듯 아첨도 그런 기분을 갖게 한다.”

그럼에도 아부에 대해 좋게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니, 아부를 맹렬하게 비난하는 사람이 많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건 아부를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의 권력 관계는 좀처럼 화제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강자는 아부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부는 주로 약자의 것입니다. 약자일지라도 든든한 ‘빽’을 갖고 있는 사람은 아부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부는 그런 ‘빽’이 없는 약자가 하지요.

아부의 기교는 매우 다양합니다. 겉으론 전혀 아부처럼 보이지 않는 ‘고난도 아부’는 아부라기보다는 슬기로운 처세술에 가깝습니다. 그런 처세술은 능력입니다. 신분과 ‘빽’의 한계를 넘어서 자신의 힘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를 간결하게 표현하자면, “아부는 민주주의의 엔진이 되었다”는 말이 가능해집니다. 이 말을 한 리처드 스텐걸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아부는 사람들이 출신이 아닌 자신의 특장점을 가지고 보다 높은 신분으로 상승하는 데, 그리고 이전에 닫혀 있던 문을 여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제 사람들은 어느 자리든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민주주의에서는 모든 사람이 왕이고 모두가 신하이기 때문이다.” 스텐걸은 이렇듯 민주주의를 내세워 “아부하고 싶은 욕망은 나쁘지 않다, 나빠 봐야 얼마나 나쁘겠는가?”라고 묻습니다.

아부는 칭찬받을 일은 아닐망정 그렇게 욕먹을 일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문제는 공적 영역에서 벌어지는 아부겠지요. 이는 결국 막중한 권한과 더불어 책임을 갖고 있는 지도자가 문제입니다. 지도자는 ‘아부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키아벨리도 지적했듯이, 이게 늘 우리의 고민이지요. 가장 고약한 건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자신의 잇속을 위해 아부를 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은 아부의 일환으로 반대편에서 하이에나처럼 사납게 굴지요. 한국의 역대 정권들이 한결같이 말로가 좋지 않았던 건 그런 아부꾼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적어도 공적 영역에서만큼은 아부가 ‘민주주의의 엔진’이라는 말을 거부하고 싶네요.



행복은 종교처럼 미스터리다


“행복은 쫓으면 손에 잡히지 않지만 가만히 앉아 있으면 살며시 내게 내려앉는 나비와 같다.” 미국 작가 너새니얼 호손의 말입니다. <사랑은 나비인가봐>라는 노래도 있지만, 사랑만 나비가 아닙니다. 행복도 나비입니다. 모른 척 외면할 때에 다가오는 것이지요. “행복은 다른 사람의 비참한 상태를 곰곰이 생각할 때에 생겨나는 흐뭇한 마음이다.” 미국 작가 앰브로즈 비어스의 말이다. 너무 독하네요. 영국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이 “행복의 비결은 이 세상이 끔찍할 정도로 무섭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다”고 말한 게 무난하지 않을까요?

하긴 그렇습니다. 우리는 TV 뉴스나 각종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끔찍한 전쟁, 테러, 재난이 일어난 나라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저곳에 있지 않다”는 안도감을 느낍니다. 그 느낌은 행복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행복감을 느끼기 위해 내가 살고 있는 곳마저 끔찍할 정도로 무섭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러셀도 우리가 추구하는 행복의 정체를 꼬집기 위해 한 말일 뿐이지요. 자신이 원하는 것 못지않게 이미 누리고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행복에 한 걸음 더 다가설 수 있지 않을까요?

“행복은 종교처럼 미스터리이므로,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해선 안 된다.” 영국 작가 G. K. 체스처턴의 말입니다. happiness(행복)의 본뜻은 “good fortune(행운)”입니다. happiness와 happening(우연한 사건)이 어원인 ‘hap’는 ‘우연’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요. 따라서 happiness라고 하는 말에는 외부에서 찾아오는 ‘행운’과 비슷한 울림이 있습니다. 그래서 행복은 미스터리라고 한 게 아닐까요?

“행복의 한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 그러나 우리는 닫힌 문만을 오랫동안 바라봄으로써 이미 우리에게 열려진 다른 문을 보지 못한다.” 장애인으로 큰 업적을 이룬 헬렌 켈러의 말입니다. 지금 당신이 열려고 애쓰는 문이 유일한 입구인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반드시 끝장을 보겠다”는 말을 하지만, 그게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다른 문은 없는지, 생각도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이따금 행복을 좇는 걸 멈추고 그냥 행복해하는 것도 좋지 않은가.” 프랑스 작가 기욤 아폴리네르의 말입니다. 말장난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행복은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을 멋지게 표현한 걸로 볼 수 있겠네요. 우리는 늘 행복을 ‘미래의 영역’에만 가둬둔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젠간’이라는 말을 수시로 되뇌지만, 사실 행복은 ‘지금, 여기에’ 있는 건지도 모르지요.

“내 인생은 목적도, 방향도, 목표도, 의미도 없지만 난 행복하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 나도 모르겠다.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미국 만화가 찰스 슐츠의 말입니다. “당신은 만화가로 성공했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라고 반박할 사람이 있을까요? 성공한 사람들에게만 발언권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행복은 계획과 의미의 영역을 벗어난 곳에 있다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정녕 나의 주인이 바로 나라면 말입니다.

“‘완벽’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행복은 실제로 존재 가능한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짧은 순간에만 나타난다.” 덴마크 극작가 니콜라인 베르델린의 말입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행복이 나타난 짧은 순간을 머릿속에 저장해두고 수시로 꺼내보는 것입니다. 기억의 힘이지요. 좋았던 순간을 기억하면서 그 힘으로 행복하지 않은 긴 시간들을 이겨내는 겁니다. 이게 좀 궁상맞게 보인다면, 좀더 적극적인 자세로 행복의 다른 문이 열려 있는 건 아닌지 탐색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친구가 성공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는다

시기심과 질투는 곧잘 같은 의미로 혼용되는데, 나라마다 차이가 있어 혼란을 불러일으킵니다. 독일 심리학자 롤프 하우블은 『시기심』이란 책에서 ‘질투’는 ‘시기심’ 대신 사용할 수 있는 반면에 그 반대는 불가능하다면서 시기심과 질투를 이렇게 구분합니다. “시기심은 시기하는 사람과 시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라는 두 명의 인물을 전제로 하는 반면에, 질투는 삼각관계를 내포하고 있다.” 질투의 형태 가운데 가장 잘 알려진 남녀 간의 질투는 질투심에 불타는 남자, 사랑을 받는 여자, 이 여자를 두고 경쟁하는 남자로 구성된다. 즉, “시기심은 2자 관계, 질투는 3자 관계다”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의 용법도 대체적으로 그렇지요.

“질투야말로 정말 어리석은 죄악이다.” 미국 투자가 찰스 멍거의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일하게 재미를 느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만 많을 뿐 재미는 전혀 없다.” 스위스 작가 롤프 도벨리도 이 말에 맞장구를 칩니다. “모든 감정들 가운데 질투가 가장 어리석은 것이다. 왜냐하면 질투는 비교적 쉽게 통제할 수 있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내 의지로 바꿀 수 없는 상황 때문에 생기는 분노나 슬픔 혹은 불안과는 반대로 말이다.”

“친구가 성공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는다.” 미국 작가 고어 비달의 고백입니다. 미국 심리학자 리처드 스미스는 “이 말이 진실이라면 그 반대도 진실일 것이다. ‘친구가 실패하면 나는 조금씩 더 살아난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를 질투하면 당연히 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고, 따라서 상대방의 불행이 가져오는 결과가 더욱더 소중해진다. 결국 무시할 수 없는 특별 보너스가 하나 있는데, 그의 불행이 질투라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제기해준다는 것이다. 열등감과 불쾌감이 우월감과 그로 인한 기쁨으로 바뀐다.”

이상의 명언들에서 질투는 시기심이라는 말로 대체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질투라고 하면 역시 남녀관계에 적용할 때에 제맛이 살지요. “질투는 사랑이라는 나무를 휘감아서 가지를 마르게 하고 뿌리까지 못 쓰게 하는 독성의 덩굴과도 같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정신의학자 W. 베란 울프의 말입니다. “그것이 무성해지면 사랑과 사랑하는 사람은 죽임을 당하고, 사랑의 대상을 노예로 만들고, 그로 인해 사랑은 성립하지 못한다. 질투는 가장 비인간적이고 파괴적인 감정 중 하나다. 나약한 사람, 겁 많은 사람, 무지한 사람이 사용하는 도구이며 비극만 초래할 뿐 아무런 효과도 없다.”

그러나 어이할까요. 그 어떤 비극이 벌어지건 질투를 할 때에는 모든 게 눈에 보이질 않으니 말입니다. “질투에 눈이 먼 사람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 정신분석의인 정도언이 『프로이트의 의자』에서 한 말입니다. “이쪽에서는 한국어를 하지만 저쪽에서는 프랑스어를 하는 것처럼 단어와 문법이 전혀 다른 언어로 대화하기 때문이다. 설득이 불가능하다. 질투는 내 마음이 혼란함에 묶여 있는 상태다. 일종의 강박증이다. 질투라는 강박증이 심해지면 그 사람은 첩보 활동에 준하는 행동과 모략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는 자주 언론을 통해 그런 ‘첩보 활동에 준하는 행동과 모략’을 접합니다. 이런 첩보 활동가들은 ‘사랑 때문에’를 내세우지만, 영국의 의사이자 작가인 해블록 엘리스가 말했듯이, “질투는 사랑하는 대상을 지키는 것처럼 가장하면서 그 대상을 죽여버리는 용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질투가 전혀 없는 사랑은 존재할 수 없으니, 문제는 다시 과유불급의 원칙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질투를 하더라도 적당히 하자는 겁니다.



현명한 사람이 원하는 것은 고통이 없는 상태다


“현명한 사람이 원하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 없는 상태다. 현명한 사람은 고통이 없기를 바랄 뿐이지 쾌락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입니다. 이 말을 ‘처세에 관한 가장 큰 가르침’으로 여긴 독일 철학자 아루투어 쇼펜하우어는 이런 결론을 내렸지요. “우리가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가능한 한 괴롭지 않게, 간신히 견디면서 산다’는 뜻이다.”

“오, 나의 고통이여, 현명해져라. 좀더 평온하게 굴어라.” 프랑스 시인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의 유일한 시집 『악의 꽃』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나면서부터 저주를 받았다고 회고하면서 이 시집을 ‘세상의 모든 고통을 담아 놓는 사전’이라고 자평했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인생이 항상 빚을 지고, 어머니에게 돈을 달라고 조르고, 빚쟁이에게 쫓기고, 지병인 매독이 불청객이 되어 간헐적으로 온몸에 찾아들었습니다. 보들레르는 이러한 고통 속에서 시인으로 단련되었으니, ‘고통의 시인’이라 불러도 무방하겠습니다.

“사람은 어떤 고통을 온전히 경험했을 때만 그 고통에서 치유될 수 있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입니다. 프랑스 정신과 의사 카트린 방세의 해설을 들어볼까요? “고통을 정신의 한구석에 처박아두고, 그 존재를 고집스레 부인하면서 침묵하게 하며, 진통제와 진정제로 묵살하려 해도 소용없다. 고통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은밀하게 작용하는 것을 - 특히, 우리의 건강을 갉아먹는 것을 - 결코 막을 수는 없을 테니까.”

“고통 받아보지 않은 사람은 영적으로 성장할 수 없고, 참된 자아를 발견할 수도 없다.” 미국 흑인 작가 제임스 볼드윈의 말입니다. 반면 흑인 여성 작가 벨 훅스는 “반드시 고통이라는 관문을 통과해야만 성장하는 것일까. 꼭 그렇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합니다. “나는, 어린 시절에 불필요한 상처나 고통을 입은 적이 없고, 사랑의 부재 때문에 괴로워한 적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을 만나면 매우 고맙고 기쁘기 그지없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인생을 더 깊게 보기 위해 반드시 끔찍한 고통을 겪어야 하고 폭력이나 학대에 시달려야만 하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굳히게 된다.”

“고통 받는 비참한 신세를 축복으로 보는 것은 기괴한 일이지만, 고통 없는 사회라는 시각은 결코 실현될 수 없다.” 미국 사회학자로 영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리처드 세넷의 말입니다. “사회생활에서 어느 정도의 고통과 무질서를 의식적으로 회피하면 커다란 불의가 생겨나는 것으로 보인다.” 정녕 그렇다면, 고통을 예찬하지 않으면서 어느 정도의 고통을 불가피한 것으로 보는 걸 이해시키는 ‘고통학’이 필요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25퍼센트가 피할 수 없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나머지 75퍼센트는 우리 자신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미국 심리학자 프랭크 매컬리스터의 말입니다. 자동차 접촉 사고가 났다고 가정해보지요. 이건 피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하지만 이후 사람과의 관계에서 ‘자발적 고통’을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말도 안 돼.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지?”라는 식으로,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 때문에 고통을 받는’ 일이 벌어지는데, 이런 유형의 고통이 75퍼센트라는 겁니다.

“나는 아무 편도 아니다. 나는 다만 고통 받는 자들의 편이다.” 소설가 김훈이 『남한산성』의 서문에서 한 말입니다. 감동적인 말입니다만, 고통을 주고받는 관계와 고통의 이유가 선명하게 규명되기 어렵다는 문제가 있겠지요. 여기에 장기적ㆍ단기적 고통, 직접적ㆍ간접적 고통이라는 변수까지 끼어들면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은 게 삶의 현실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그런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고통의 가해와 피해가 분명할 때에도 힘이 센 쪽에 서려는 사람이 많은 게 현실 아닌가요?



양심은 끊임없이 방문하는 시어머니다


“현대 인권에서 말하는 양심(conscience)의 어원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바(scientia)’를 ‘함께 나누다(con)’라는 라틴어에서 왔다. 함께 나눈다는 말도 누구와 나눈다는 것인지 명확하진 않지만 ‘자기 자신과 나눈다’는 뜻으로 보통 해석합니다. 요컨대 양심의 원뜻은 ‘스스로와 나누는 도덕적 성찰’인 것이다.” 성공회대학교 교수 조효제의 말입니다. 그래서 “양심은 영혼의 음성이다”는 격언처럼 양심을 ‘스스로와 나누는 도덕적 성찰’로 표현한 명언이 많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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