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 표류기
헨드릭 하멜 지음 | 스타북스
하멜표류기
헨드릭 하멜 지음
스타북스 / 2020년 2월 / 175쪽 / 10,000원
하멜 일지
1653
저희들은 1653년 1월 10일, 텍셀(네덜란드 섬의 하나)의 정박지를 출발하여 여러 차례의 역풍과 폭우를 겪으면서도, 6월 1일 바타비아(인도네시아의 자카르타)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수일간 휴식을 취한 뒤, 총독 각하 및 동인도 평의원들로부터 포르모사(지금의 타이완)의 타이요완으로, 당지에 주재중인 장관과 교대하실 신임 코르넬리스 카세르 씨와 그 가족을 모시고 가라는 명령을 받아, 1653년 6월 18일 스페르베르호로 바타비아를 떠났고, 7월 16일 무사히 타이요완에 도착했습니다.
장관 각하는 당지에 내리시고 또 저희들은 짐을 풀었습니다. 그리고 또 저희들은 장관 각하 및 평의원 여러 사람들로부터 다시 일본으로 가라는 명령을 받고 적하를 새로 하고, 각하에게 인사한 뒤 같은 달 30일 타이요완 항을 출발, 신의 이름으로 빨리 항해가 끝나기를 빌며 항해를 재촉했습니다. 7월 31일은 일기가 좋았지만 저녁부터 타이요완 쪽으로부터 심한 폭풍우가 불기 시작했습니다.
[8월 1일] 먼동 속에 저희들은 우리 배가 어떤 작은 섬 가까이에 있음을 알았습니다. 저희들은 그 섬 닻을 내려 비바람과 파도를 조금이라도 피해 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커다란 모험 끝에 닻을 내리기는 했지만, 바로 뒤에는 커다란 암초가 있고 파도가 사나웠기 때문에 마음 놓고 닻줄을 풀 수는 없었습니다. 날이 밝자 저희들은 저희가 중국 해안 근방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날은 바람이 더욱 사나웠기 때문에 저희들은 배의 닻을 내린 채로 온 밤을 새웠습니다. [8월 2일] 아침이 되자 바람은 멎었습니다. 저희들은 닻을 올리고 해안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 날의 바다는 종일 고요했습니다.
[8월 15일] 바람이 강하게 불기 때문에 돛을 거의 올리지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물은 자꾸만 새어 들어와 모든 펌프를 총동원해야만 했습니다. 저녁이 되자 배의 뒤 갑판의 일부와 뱃머리의 전망대가 파도에 떨어져 나갔고, 또 제1돛대가 건들거리기 시작했으며, 그 때문에 배의 뒤 갑판이 떨어져나가 위기에 부딪쳤습니다. 저희들은 앞 돛대의 돛을 좀 올림으로써 심한 파도를 조금이라도 더 피할 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앞 돛대의 돛을 올리려는 순간, 배의 앞 갑판 쪽으로 파도가 덮쳐와 이 작업을 하던 선원들은 파도에 휩쓸려 떨어질 뻔했습니다. 배도 온통 물바다가 되자 결국 선장은 소리쳤습니다. “다들 들어라. 마스트를 끊어 버리고 하느님께 기도하라. 이제는 별 도리가 없다!”
시간이 흘러 오전 1시 무렵 파수꾼이 고함을 질렀습니다. “육지다! 육지가 머스킷 총 사정거리에 있다.” 저희들은 곧 닻을 내렸습니다만, 파도가 심하고 바람이 강해 제대로 닻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배는 그 자리에서 좌초당하고, 순식간에 세 번 크게 충돌하는 바람에 배는 완전히 부서졌습니다. 그리고 생사의 갈림길에서 악전고투하여 육지로 기어오른 사람은 저를 포함하여 15명이었습니다.
[8월 16일] 동이 트자 조금이라도 걸을 수 있는 사람들은 해안을 따라 걸으며 누군가 상륙한 사람이 없는지 찾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습니다. 곧이어 여기저기서 사람이 나타났는데, 모두 36명이 었고, 대부분은 아주 심하게 부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64명이던 승무원이 불과 15분 사이에 36명밖에 안 남았다는 것을 알게 되자, 서로 얼굴만 쳐다보며 비통에 잠겼습니다. 저희들은 최근 2, 3일 동안 심한 폭풍우 때문에 제대로 취사도 못하고 먹지도 못했기 때문에, 먹을 것이 다소나마 육지에 떠올라온 것이 없을까 하고 찾아봤지만 한 묶음의 고기와 나무통에 들어 있는 소량의 고기, 약간의 베이컨, 그리고 틴타주(스페인에서 생산되는 붉은 포도주)를 발견했을 뿐이었습니다. 정오쯤에 비가 그치기 시작하자 있는 힘을 다해서 돛을 가지고 천막을 친 다음 비를 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8월 17일] 정오가 조금 못되어 어떤 한 남자가 천막에서 카농(Canon) 포 사정거리 정도의 곳에까지 왔기 때문에 우리는 몸짓을 해 보았지만, 그는 저희들을 보자마자 도망쳤습니다. 정오가 좀 지나서 세 남자가 천막에서 버스킷 총 사정거리 정도 되는 곳까지 왔습니다. 저희들은 그들로부터 불을 얻으려고 노력을 다해 보았지만, 아무리 손짓을 해도 그들은 오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동료 중의 한 사람이 용기를 내어 그들에게 찾아가서 총을 들이댄 다음 겨우 불을 얻었습니다. 그들은 중국식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말총으로 짠 모자를 쓰고 있었기 때문에 꼭 해적이나 본토에서 추방된 중국인처럼 생각되어 모두가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저녁이 되자 1백 명 가량의 무장한 사람들이 천막 근처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들의 수를 세더니 그날 밤은 천막 주위를 경비했습니다.
[8월 18일] 저희들은 새벽부터 대형 천막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정오경이 되자 1, 2천 명이나 되는 기병과 보병들이 천막을 포위했습니다. 저희들 일동이 정열하고 있으니까 서기, 일등 항해사, 갑판장 등을 연행하여 그들의 사령관에게로 데리고 갔습니다. 사령관은 몇 가지 질문을 했는데,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사령관은 저희들에게 술을 한 잔씩 주게 하고는 천막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 한 시간쯤 뒤에 그들은 쌀로 만든 죽을 가지고 왔습니다. 저희들이 굶주렸기 때문에 많이 먹이면 오히려 탈이 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저녁이 되자 그들은 저희들에게 쌀밥을 조금씩 주었습니다. 정오에는 일등 항해사가 위도를 측정하여 이 켈파르트 섬이 33도 32분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8월 19일] 사관들은 그 섬에 주재해 있는 사령관과 제독을 방문하여 망원경을 증정하고 한 통의 틴타 주와 그것을 따를 술잔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들은 술맛을 보자 아주 맛이 좋다는 것을 알고는 아주 많이 마셨기 때문에 대단히 기분이 좋아져서 저희 동료들을 천막에 바래다주기까지 했습니다.
[8월 20일] 그들은 저희들에게 하루에 두 번 약간의 음식을 갖다 주었습니다. [8월 21일] 아침에 사령관은 저희들 중 몇 사람을 불러서는 천막 속에 있는 저희들 물건을 그 앞으로 갖다 놓더니 봉인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정오가 되니까 저희들보고 출발하라고 했습니다. 말을 탈 수 있는 사람은 말을 타고, 말을 탈 수 없는 사람은 사령관의 명령으로 해먹에 태워 주었습니다. 오후가 되자 저희들은 기병과 보병들에 의해 친절하게 호위되어 그곳을 떠나, 저녁에 대정이란 소읍에 숙박하게 되었습니다.
[8월 22일] 저희들은 이른 새벽, 다시 말을 타고 여행을 계속하여 어떤 성채 앞에서 식사를 했습니다. 정오에 목간이라는 마을에 도착했는데, 이곳은 목사라는 이 섬의 총독이 사는 고을이었습니다. 곧이어 서기(하멜 자신)가 전에 같이 끌려 나가 본 적이 있는 세 사람과 함께 총독 앞에 끌려 나가 꿇어앉혀졌습니다.
얼마 뒤에 총독은 저희들 보고 가까이 오라고 호령했습니다. 그는 저희들에게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손짓으로 물어 보았습니다. 저희들은 손짓발짓하여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는 길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말을 듣자 고개를 끄덕였으므로 분명히 무엇인가 이해한 거 같았습니다. 걸을 수 있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네 명씩 나가 차례차례 신문을 받았습니다. 이후 총독은 저희들을 다른 건물로 데려가도록 했습니다. 총독은 건물 주위를 엄중히 경계시키고, 식량으로는 저희들에게 매일 일인당 4분의 3폰드(1폰드는 494그램에 해당됨)의 쌀과 같은 분량의 밀가루를 지급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부식물은 거의 없고, 그나마 먹을 수 있는 것이 못되었기 때문에, 부식 대신으로 소금과 일정량의 물을 가지고 때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총독은 저희들에게 이렇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국왕에게 편지를 보내어 내가 취할 바를 문의중이다.”
저희들은 총독에게 국왕의 편지를 기다리는 동안 쌀과 소금만으로는 살 수 없기 때문에 때로는 약간의 고기와 다른 부식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과 매일 여섯 명씩 교대로 외출하게 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그것을 허락하고, 저희들에게 부식물과 필요한 물건들을 지급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는 또한 때때로 저희들을 불러 저희들 말과 그들의 말로 서로 질문을 주고받기도 하고, 그 말을 적어 두기도 했습니다. 그 결과 서툴지만 어느 정도는 서로 말을 주고받고 하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10월 29일] 오후, 나와 일등 항해사 등이 총독에게 불려가니 거기에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잠시 후 그가 서투른 네덜란드 말로 물어 보았습니다.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암스테르담 출신의 네덜란드입니다.” “어디로 가는 길입니까?” “타이요완에서 왔으며, 일본으로 가려고 했지만 이 섬에 난파되었습니다.” 저희가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이며, 어떻게 왔는가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레이프 출신의 얀 얀세 벨테브레라는 사람으로서 1626년 홀란디아호를 타고 고국을 떠나, 1627년 오웰케르크호를 타고 일본에 가던 중 역풍을 만나 조선의 해안에 표착되어 체포되었습니다. 나는 서울에 살고 있으며, 국왕으로부터 식량과 의복을 지급받고 있으며, 이곳에는 여러분이 어떻게 이곳에 왔는가를 알아보기 위해서 왔습니다. 그리고 여러 번 국왕이나 다른 고관들에게 일본으로 보내 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되었으며, 그들은 ‘우리들은 외국 사람을 국외로 내보내지 않기로 하고 있으니, 당신은 식량과 의복을 지급받고 이 나라에서 일생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아무튼 이상 말씀드린 여러 가지 사실과 선박 및 저희들에 관한 보고서는 총독의 명령에 의하여 적절히 작성되었고, 이 보고서는 다음 배편으로 국왕에게 보내질 것입니다. 한편 12월 초에 새로운 총독이 부임해 왔습니다. 신임 총독은 직무를 맡게 되자 즉시 저희들로부터 모든 부식물을 빼앗아 갔기 때문에, 식사는 거의 쌀밥과 소금, 그리고 물만 가지고 해야 했습니다.
1654
저희들은 대우가 나빠지고 또 국왕으로부터의 소식이 너무 늦기 때문에 섬에 갇힌 채로 일생을 죄수 같은 생활을 해야 되지 않을까 걱정하게 되자, 적당한 시기와 바람을 만나게 되면 도망치자고 모든 궁리를 다 했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해안에 머물러 있는 배가 없을까 하고 찾아 헤매던 중, 그런 배를 하나 찾아내 드디어 탈출하기로 했습니다. 이 탈출 계획은 4월 그믐께쯤 일등 항해사 이하 여섯 명이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배와 조수 관계를 알아보려고 울타리를 넘다가 개에게 들켜 짖어 대는 바람에 감시원이 눈치를 채고 경비를 엄히 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5월 초에, 항해사는 다른 5명의 승무원과 같이 외출했다가 마을을 벗어난 곳에 장비가 제대로 되어 있는 빈 배 한 척을 발견하고 다시 탈출을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총독은 한 사람 한 사람 허리를 벗게 하더니 몽둥이로 스물다섯 번씩 때렸고, 그들은 그것 때문에 약 한 달은 누워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 때문에 저희들의 외출은 금지되고 밤낮을 가리지 않은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되었습니다.
5월 말이 되어서야 국왕으로부터의 통지가 왔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은 슬프게도 서울로 가야 했습니다. 저희들은 서울에 도착하여 한 채의 건물에 전원 수용되어 있었으나, 2, 3일 뒤에는 중국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에 두서너 명씩 나뉘어 수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배속된 다음 곧 저희들은 국왕 앞으로 끌려갔습니다. 왕은 저희들에 대해서 벨테브레를 통해 여러 가지를 물어 보았는데, 저희들은 온갖 수단을 다해 대답했고, 왕에게 일본으로 보내달라고 탄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왕은 벨테브레를 통해서 이렇게 통역시켰습니다. “외국인을 국외로 내보낸다는 것은 이 나라 관습에는 없는 것이므로 외국인은 여기서 일생을 보내야 한다. 그 때문에 너희들의 식량이 배당되는 것이다.”
다음날 저희들은 사령관 앞으로 불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벨테브레를 통역으로 해서 저희들이 국왕의 명령으로 사령관의 호위병이 되었으며, 1인당 매월 약 70근의 쌀을 지급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리고는, 각자에게 원향으로 된 명찰을 주었습니다. 사령관은 한 사람의 중국인과 벨테브레를 저희들의 대장으로 임명하여 모든 것을 그 나라 독특한 방법으로 지도시키고 또 감사시켰습니다. 8월에는 타타르인이 조공물을 받아 가려고 왔습니다. 저희들은 국왕의 명령에 따라 성채로 보내져서, 타타르인이 서울에 와 있는 동안에는 거기서 감시받았습니다. 그곳은 남한산성이라 하는 곳입니다.
12월 초에 사령관은 저희들이 심한 추위나 가난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국왕에게 보고했습니다. 국왕은 저희들에게 약간의 사슴 가죽을 주라고 명했습니다. 한편 그 당시 저희들은 아직은 건강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집주인이 매일 저희들보고 땔나무를 해 오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구조될 가망이 거의 없어진 이 마당에 밤낮 이 이교도들에게 괴로움을 당하기보다는 좀 춥더라도 두세 사람씩 공동으로 오두막집이라도 하나씩 사서 살아가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에게 은전 3, 4타일씩 걷어, 각각 8, 9타일 값이 나가는 오두막집을 장만했습니다.
1655 / 1656
3월 타타르인이 다시 찾아왔습니다. 타타르인이 출발하는 날 일등 항해사 헨드릭 얀세와 포수 얀세 보스는 땔나무가 필요하다는 핑계를 꾸며 숲속으로 들어가서 타타르인이 지나갈 것 같은 방향으로 갔습니다. 이윽고 타타르인의 사절이 행진해 오자, 그들은 호위병들을 헤치고 사절 단장이 탄 말의 고삐에 매달렸습니다. 이 때문에 순식간에 혼란이 벌어지고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타타르인은 그들에게 어느 나라 사람이냐고 물었지만, 서로 상대방의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절 단장은 호위하는 사람들에게 항해사와의 이야기를 통역해 줄 사람이 있는가 물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즉시 국왕의 귀에 들어갔고, 벨테브레가 사절의 뒤를 쫓아가 무마했습니다.
이로 인해 저희들 일행은 오두막집에서 왕궁으로 연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왕국 고문관 앞에 끌려 나갔는데, 그들은 저희들에게 왜 이러한 사건을 미리 알지 못했는지 물어왔습니다. 저희들은 대답했습니다. “이 일은 저희들이 모르는 사이에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희들에 대해서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볼기를 50대씩 때렸습니다. 한편 항해사와 포수는 서울의 감옥에 갇혀 있다가 얼마 뒤 그곳에서 죽었습니다.
이후 왕국 고문관들이나 그 밖의 고관들은 저희들을 죽이자고 말하게끔 되었습니다. 저희들이 다시 타타르인들 앞에 나가서 더 말썽을 부릴지도 모른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제에 관해서 3일 연속 회의가 벌어졌습니다. 국왕 및 국왕의 동생과 사령관 및 저희들과 관계있었던 고관들은 모두 이에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국왕은 저희들을 싫어하는 사람들의 건의에 따라 - 이것은 오히려 저희들에게는 행운을 가져왔습니다. - 저희들을 전라도에 유배하기로 했습니다. 3월초에 저희들은 상경할 때 지나간 고을들을 거꾸로 지나가 영암까지 갔습니다. 이후 작천 혹은 전라 병영이라 하는, 고을 옆의 산에 성채가 있는 큰 읍에 도착했고, 저희들은 국가 소유의 건물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1657
2월에 신임 총독이 부임했는데, 그는 자주 저희들을 부려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9월에 심장마비로 죽었습니다. 11월에 들어서 또 신임 총독이 부임했는데, 그에게 의복과 그 밖의 것을 부탁하자 거절하며 필요한 물건은 다른 수단을 써서 구하라고 말했습니다. 겨울이 닥쳐왔습니다. 저희들은 조선 사람이 호기심이 많고 진기한 이야기를 듣기 좋아한다는 것과 또 이 나라에서는 구걸하는 것이 하나도 수치스러운 것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우리가 겨우살이에 필요한 물건을 구걸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이러한 사실을 총독에게 호소했습니다. 그러자 허가해 주어, 이것으로 저희들은 다시 어느 정도의 의복을 얻어 겨우살이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