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는 아이의 놀라운 자존감
오여진 지음 | 북아지트
책아놀자: 책 읽는 아이의 놀라운 자존감
오여진 지음
북아지트 / 2019년 12월 / 279쪽 / 14,800원
제1장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낭비한 젊음만큼 채워진 지혜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나의 젊음도 끝없는 욕심의 연속이었다. 결혼을 잘해야 한다는 목표에 죽도록 다이어트에 매달리고, 감당하지 못할 스트레스를 겪기도 했다. 교사가 되고 나서는 돈과 승진을 중심에 두고 살게 되어 부수입을 위한 ‘교재 만들기’등에 돌입하고 빨리 교장이 되어야 한다는 욕심에 대학원에 들어가고, 외부 강의를 하는 등에 자부심을 느끼며 바쁘고 허덕이는 삶을 살았다.
욕심에 사로잡혔다고 해서 젊은 날 아이들 가르치는 일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나의 정체성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에 있다는 것은 잊지 않으려 했다. 아이들과 울고 웃으며 나의 모든 것을 걸었고, 심지어 주말에 학습이 부진한 친구의 집에 가서 과외를 해주기도 했으며 자취집에 아이들을 떼로 불러 노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내가 젊은 시절 더 깊이 고민했어야 하는 것은 내가 만나는 ‘초등학생’에 대한 공부였다. 수업 기술을 익히는 데는 부지런했지만, 아이들 하나하나를 자세히 보는 방법을 몰랐고, 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때는 아이들이 하나 되어 일사분란하게 과제를 잘 수행해 나가게 하는 것이 훌륭한 학급운영이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과제를 잘 수행하지 못하면 그 아이를 바로 잡으려 집요하게 노력했다.
사실 배운다는 것은 듣고 읽고 쓰고 말하는 단순한 과정의 반복이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아이들의 관심사와 능력이 존중되고 반영되며 그 안에서 가치를 찾고 의미 있는 것을 생산해낼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걸 교사가 도우려면 학생 개개인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고, 개개인을 이해하려면 많이 관찰하고 천천히 지켜보아야 한다. 젊은 시절에는 그 방법을 잘 알지 못했다.
우리 아이 영유아 사교육, 대실패하다! 큰 아이 서너 살 때부터 한글을 가르쳤다. 영어 사교육을 시켰고, 한자도 시켰다. 피아노, 태권도, 미술학원 등 남들 다니는 학원은 대여섯 살 때부터 다 보냈다. 꾸준히 해나가길 바랐지만 결국 아이가 싫어하고 틱 증상이 생기며 모두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은 안하는 것보다 훨씬 못했다. 피아노든 태권도든 미술이든 무엇을 배우는지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느리지만 꾸준히 배우면서 고비를 넘기고 해낼 수 있다는 힘을 기르는 것이 유초등 시절 경험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요소인데 나는 돈을 버려가며 그걸 망쳐놓았다. 결국 돈을 낸 건 스스로 깨닫기 위한 나의 수업료였지 아이를 위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유초등 시절에는 꾸준히 경험할 내용을 부모가 정해 놓고 따라오게 하기보다 스스로 다양한 시도를 해보며 관심거리를 찾도록 지켜보는 게 중요하다.
나를 비롯하여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을 키울 때 보이는 것만 보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경향이 있다. 욕심 때문이다. 전 세계 수많은 교육기관이 학교를 8세에 다니게 하고 그때 즈음 읽고 쓰게 하는 건 다 이유가 있다. 사람은 글로만 배우지 않는다. 특히 영유아기 시절에는 글로 배워지는 게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몸을 움직여서 배우고 주변 사람을 관찰, 모방하며 배우는 게 전부다.
삶의 가치를 깨우쳐준 책들 쉼 없이 노력했지만 내 인생은 이상하게도 좌절의 연속이었다. 대학원 공부에 이어 무언가 해 보고 싶었지만 육아를 놓을 수 없어 중단해야 했고, 그렇게 공들인 육아도 결코 내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심지어 늘 곁에서 손발이 되어주신 엄마마저 급작스레 병으로 돌아가시고 나서는 서 있기조차 힘이 들었다.
그 당시 당장 죽을 수도 없는데 살 수도 없겠으니 집어든 게 책이었다. 아이를 재워 놓고 밤에 잠을 설치기도 하며 책을 읽기 시작했다. 나는 독서력이 뛰어나지 않았고 종일 아이들과 씨름해야 했기에 처음부터 어려운 책을 읽을 수 없었지만 꾸준한 독서는 나를 조금씩 변화하게 했다.
처음에 가장 ‘도끼’처럼 느껴졌던 책은 권정생 선생님의 『우리들의 하느님』이란 수필집이다. 안동 조탑리의 허름한 오두막에서 멍하니 앞을 응시하는 듯한 그의 사진에서 한참을 눈을 떼지 못했다. ‘대체 무엇 때문에 저렇게 살까?’라는 답이 수필 곳곳에 잠잠히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질문할 수 없었지만, ‘난 왜 저렇게 살지 못할까?’라는 질문은 너무 괴로웠다. 그러면서 권정생 선생님의 동화를 다시 찬찬히 보게 되었고, 이오덕 선생님에 대해서도 알게 되어 관련 책을 찾아보게 되었다.
그 후로 꾸준히 내가 읽는 책의 스펙트럼이 많이 바뀌었고 진정으로 아이를 위한다는 것, 사람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 것 같다. 당시 도끼 같았던 또 하나의 책은 도서관에서 우연히 접한 고미숙 작가의 책이었다. 고미숙 작가의 『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 『사랑의 달인 호모 에로스』, 『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 등은 내가 그동안 좇아오던 것의 본질을 되돌아보게 만들었다.
그렇게 깊은 암흑 속에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책만 들여다보며 제법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 수많은 책들은 나도 모르게 조금씩 내가 가진 방향성을 수정해 주었다.
제2장 부모와 교사, 냉정과 열정 사이
세상에 ‘평균적’인 아이란 없다 본격적으로 내 아이의 문제를 들여다보기 시작하면서 우리반 아이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부모의 양육 태도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아이 모습들이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이 성장에 부모의 양육 태도는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유치원, 초등학교 시절 아이의 모습에는 타고난 기질의 비중 또한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부모가 어린 자식에게 친구와 싸우라고 가르치며, 공부를 못하라고 하겠는가? 최근 우리 학교에서 도입하려는 발도르프 교육학에서는 기질론을 비중 있게 다룬다. 교육은 개별적으로 타고난 아이의 능력을 긍정적이고 선하며 온전하게 발현하도록 도와야 한다. 다만 모방의 영향력이 막강한 시기이므로 부모나 교사의 언행이나 습관 등은 분명 큰 어려움이 요인이 될 수 있으니 내 모습이 좋은 본이 되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토드 로즈의 『평균의 종말』을 보면 ‘평균’의 개념은 비교의 자료로 쓰일 때는 의미를 갖지만, 교육을 할 때 도달지점으로 사용하면 오류이고 폭력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표준화된 시스템에 대한 고정적 사고로 인해 학교도 병원도 국가도 평균의 데이터를 기준으로 그에 도달하지 않으면 문제가 있는 것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평균 수치에 근접한 인간은 거의 없다. 모두가 특별한 개인을 무시한 채 평균에 맞추어 교육을 하거나 인재를 선발하면 오류나 결함이 일어나므로 교육은 개개인에 초점을 맞춘 방식으로 변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소 획일적 보편화를 강조하는 우리 사회가 좀 더 개별적 특수성에 관심을 가지고 관대하게 기다리는 분위기가 되기를 희망한다.
혁신학교 교사로 살아가기 “자세하고 친절하게 잘 가르치려는 것이 문제다.” 혁신 학교에 와서 첫 자율장학 수업을 보신 교장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아이들을 그냥 내버려두란 말인가?’라는 생각을 하며 반감을 갖기도 했다. 우리는 중요한 한 구절을 깨닫기 위해서 수많은 시행착오와 아픔을 겪는다. 책을 많이 읽는 것보다 제대로 읽고 깨닫는 게 중요하다는 말이 그런 뜻일 게다. 이는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머리만 자꾸 키우는 것이 결국 그 말들의 진실한 의미를 깨닫는 것과 점점 멀어지게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늘 경계해야 한다.
자크 랑시에르의 『무지한 스승』을 보면 ‘지능의 평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월한 지능과 열등한 지능으로 인해 불평등이 존재하는데 교육을 통해 이 문제를 어떻게 개선할까 하는 논쟁에서 랑시에르는 좀 다른 논리를 내놓는다. 그는 19세기 교육자인 자코토가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하는 내용을 학생들에게 성공적으로 가르쳐낸 사례를 통해 모든 인간의 지능이 평등하다는 데서 교육이 시작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지식적으로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평등한 상태에서 교사는 학생의 지능이 쉼없이 실행되도록 의지를 북돋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랑시에르는 교사의 의지가 학생의 의지와 관계 맺고, 학생의 지능이 책의 지능과 관계 맺는 것이 진정한 지적 해방의 출발점이라고 말한다. 이를 정치 사회 영역으로 넓혀 가진 자, 혹은 지배자가 우월한 것이 아니라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한 상태에서 피지배자들을 설득해 나가는 것이 더 합당한 사회라는 이야기로 연결한다.
우리 학교에서 모든 학년에 걸쳐 가장 강조하는 프로젝트 주제 중 하나가 ‘생태’이다. 그에 대한 실천으로 모든 학년이 학교 텃밭 또는 상자 텃밭에 작물을 가꾼다. 그 식물의 자람은 어찌나 인간의 삶을 닮아 있는지 식물, 동물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배움은 결과가 아니라 전적으로 과정이다. 대체 인간이 언제 결과적으로 완벽해지는가? 대학병원 의사가 되면 인간이 완벽해지는 것인가? 대통령이 되면? 어차피 죽을 때까지 완벽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그러므로 당장 한 달 동안, 1년 동안 매우 구체적인 목표를 정해서 거기에 도달하도록 하는 것이 교육에서는 큰 의미를 차지하지 않는다. 내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온전한 과정을 거치는지 연습을 하는 그 자체에 배움이 있어야 한다. 그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말들의 의미를 난 혁신학교에서 몸으로 호되게 깨달아 갔다.
큰 기대와 사명감을 가지고 혁신학교에 가서 6학년 담임을 하겠노라고 큰소리쳤지만 나의 어려움은 끝이 날 줄을 몰랐다. 가장 고민했던 부분은 아이들의 ‘무기력함’이었다. 불성실하지도 않고, 크게 반항적이거나 못된 행동을 하지 않는데 너무 많은 아이들이 무기력해 보였다. 오히려 시험을 잘 보는 학생이 자율성을 요구하는 활동에 더 무기력함을 보이기도 했다.
2년 연속 6학년 담임을 하면서 “10여 년간 난 교사로서 무엇을 했는가?”란 질문을 끊임없이 해야만 했다. 민주적인 회의 문화, 상벌과 임원이 없는 학교, 양질의 프로젝트를 함께 시도해볼 수 있는 학교, 놀이 시간이 확보된 학교였다. 내가 선생님들과 함께 밤낮 가리지 않고 매일 토론하며 새로운 시도를 하는 엄청나고 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데도 이를 알아주지 않는 아이들이 야속했다. 난 여전히 화가 많이 나 있었고, 아이들을 온전히 믿지 못했다.
결국 힘겹게 2년간 6학년 담임을 하고 나서 육아휴직을 했다. 쉬는 동안 특별히 무얼 한 건 아니고 모든 걸 내려놓고 좀 더 신앙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책을 많이 보고, 아이들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배움의 중심에 ‘소통과 이해’가 있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내 한계를 인정하고 함께 배워 가는 자로서 진심으로 배울 대상과 배울 내용과 소통하는 것이 먼저였다.
제3장 책과 함께 놀기 시작한 아이들
누구든, 하지만 반드시 친구를 데리고 와! “집이 당신을 위해 존재하는 거지, 당신이 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의 상상력을 키워주려면 너무 쓸고 닦지 마십시오.” -박혜란,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
큰 아이 3학년 때 육아휴직을 해 놓고 집에 있으니 아들이 자세히 눈에 들어 왔다. 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나뭇가지를 들고 학교를 돌아다니기를 선택했을까? 왜 그렇게 학원 생활을 어려워할까? 내가 열심히 읽어주는데 왜 책을 좋아하지 않으며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할까?
고민 끝에 3월이 되면서 모든 학원을 그만두고 하교 후 바로 집으로 오게 했다. 아이는 하교 후 집에 들어오는 것을 정말로 즐거워했다. 처음에는 근처 미술관, 연극 공연 등에 데리고 다니기도 했지만 비용 및 생활리듬 문제로 자주 할 수는 없었고 무엇보다 아이가 집을 가장 좋아했다.
그런데 아이는 자주 심심하다는 문제에 봉착했다. 그러던 어느 따뜻한 봄날, 집 앞 놀이터에 아들을 보내 너랑 비슷한 또래의 친구에게 말을 걸어 죄다 데리고 오라고 시켰다. 몇 주 후 아들은 놀이터에 오래 머무는 동갑내기 남자 아이 두 명을 정말 데려왔다. 그렇게 집에 온 아이들은 어딜 데려가도 무엇을 해도 즐거워했다. 간식 먹고 놀이터에서 놀고, 그림 그리고 함께 방방장, 도서관에도 갔다. 어차피 안 들어가는 학원비,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데 쓰기로 결심하니 비용이 그렇게 아까운 것 같지도 않았다. 컴퓨터, 게임, 텔레비전만 통제했음에도 아이들의 삶은 자연스레 프로젝트 학습이었다. 한 주제에 몰두할 때 관련 서적을 주면 외우도록 그 책만 보고 관련 활동들을 해내며 종일을 보낸다. 물론 놀이터에서 살기도 하고 한동안은 멍때리기도 하지만 모든 시간이 다음 프로젝트를 위한 준비인 것 같았다. 아이의 학교 생활은 좋아지고 아이와 나의 만족도 또한 높아졌다.
우리 집에서는 뭐든지 할 수 있어 우리 집에서는 뭐든지 할 수 있었다.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었고, 재미있는 보드게임도 많이 사놓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강하게 내건 조건이 있다. 우리 집에서는 컴퓨터, 텔레비전, 휴대폰을 만질 수 없다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여가 시간을 자극적인 컴퓨터와 길게 보내는 게 습관이 되면 별로 재미없지만 견뎌야 하는 삶의 기본적인 것들을 해보지도 못하고 안 하고 싶은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 함께 무언가 하면서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것, 책을 읽는 것, 몸을 다양하게 움직여 보는 것 등을 별로 해보지도 못하고 더 재미있는 게임에 빠져들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심심하니까 책 읽고 싶어요 두세 달쯤 지났을까? 우리 집에서 실컷 놀던 아이들 입에서 심심하다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얘들아, 책 읽어 볼래? 이번에는 그냥 아무 때나 읽어주는 게 아니라 어린 왕자가 여우를 기다리듯이 시간을 정해서 함께 만나 이야기를 하는 거야. 1주일에 한 번씩 시간을 정해 만나 읽고 싶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거지. 어때?” 심심한 아이들은 뜻밖에 매우 쿨하게 하고 싶다고 답해주었다.
그렇게 나의 책모임은 시작되었다. 백화현 선생님의 ‘책으로 크는 아이들’, ‘도란도란 책모임’을 만나며 본격적으로 가정 책모임의 형태를 고민해 오던 차에 김은하 선생님께서 ‘처음 시작하는 독서동아리’ 책을 소개해주신 자리에 참석했었다. 그 후 우리 책모임에서 아이들과 신나게 모임이름을 정하고 규칙을 정했다. 김은하 선생님의 ‘처음 시작하는 독서동아리’ 방식을 따랐지만, 중등 아이들 중심의 사례인 경향이 있어 초등에 맞는 형태를 고민해야 했다. 결국 특별한 틀을 만들기보다 중등 이후에도 책을 통해 삶의 지혜를 얻는 아이가 되려면 무조건 책이 좋아야한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고, 초등에서 해야 할 전부는 책모임을 가고 싶게 해주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말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책모임을 하는 게 절대 아니다. 우리 집에 오면 간식이 있고, 마음껏 수다 떨 수 있으며, 책을 한 시간 읽으면 두 시간 놀 수 있기 때문에 온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아이들은 자신들이 책을 매개로 놀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한 채 기쁘게 놀기 위해 우리 집에 왔다.
아들의 책모임은 3년 넘게 큰 즐거움으로 유지되고 있다. 최근의 딸 친구 책모임을 새로이 만들어 딸과 친구들도 아주 신이 났다. 3-4학년은 처음에는 원하는 책을 가져와서 자유롭게 소개하고 읽는 방식을 선택하다가 5-6학년 글의 양이 많아지면서 함께 읽어나가는 방식을 선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