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 좌파 2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강남 좌파 2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9년 11월 / 188쪽 / 13,000원
제1장 왜 ‘1% 대 99% 사회’ 프레임은 위험한가 - ‘진영 논리’와 ‘진보 코스프레’의 오류 불평등을 은폐하는 ‘1% 대 99% 사회‘ 프레임
“1% 대 99% 사회”는 불평등 문제를 제기할 때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핵심 개념이 되었다. 그런데 과연 “1% 대 99% 사회”라는 프레임은 옳은 것일까? 이 프레임에 강한 의문을 가져온 나로선 최근 번역ㆍ출간된 리처드 리브스의 『20 vs 80의 사회』라는 책이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경제학자인 리브스는 영국 출신으로 신분 사회적 요소가 강한 영국 문화가 싫어 평등 지향적인 미국에 귀화해 미국인이 된 인물이다. 그런데 미국에서 살다보니, 실제로는 미국이 영국보다 더 심한 신분 사회라는 걸 절감하게 되었고, 그런 문제의식으로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그간 ‘20 대 80의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는 많이 있었지만, ‘1대 99의 사회’에 시비를 걸진 않았다. 상호 공존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20 vs 80의 사회』는 양자가 사실상 공존이 불가함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리브스는 2011년 5월 1일에 벌어진 ‘윌스트리스 점령 시위’에 참여한 사람 중 3분의 1 이상이 연 소득 10만 달러가 넘었다는 점, 2015년 1월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세제 개혁안이 당시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였던 낸시 펠로시 등의 강력한 반대로 폐기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펠로시가 누군가? 현재 하원의장인 펠로시는 ‘진보의 화신’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민주당 내에서 강경한 진보 노선을 걸어온 인물이다. 상위 1%를 향해 날카로운 비판과 독설도 불사했던 그가 상위 20%의 이익을 위해선 전혀 다른 자세를 취한 것이다. 20%의 기득권을 유지하면서 1%만 문제 삼는 것으로 극심한 불평등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529 대학 저축 플랜’으로 불린 그 세제 개혁안은 자녀의 대학 학비 용도로 돈을 붓는 장기저축 상품의 세제 혜택을 없애고, 그 재원을 공정한 세액 공제 시스템을 확충하는 데 쓰자는 것이었다. 펠로시를 비롯한 리무진 리버럴 정치인들의 지역구는 부유하고 교육 수준이 높으며 진보 성향 계층이 주로 사는 곳이었다.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부유하고, 당락을 좌우할 만큼 숫자도 많은” 소득 상위 20%의 중상류층이 개혁을 무산시킨 것이다.
미국 정치학자 래리 바텔스는 미국 상원의원들을 대상으로 그들이 누구를 대변하는가 하는 실증적 연구를 했다. 그는 상원의원들이 가난한 유권자들보다 부유한 유권자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걸 입증했다. 분석 결과 소득분포의 상위 3분의 1에 속하는 유권자들의 견해는 중간 3분의 1에 속하는 사람들보다 50% 더 높은 중요도를 부여받았으며. 하위 3분의 1에 속하는 유권자들의 견해는 거의 무시된 것으로 나타났다.
더욱 놀라운 건 부자들의 요구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향은 민주당 의원들과 공화당 의원들 사이에 차이가 없었다는 점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진 걸까? 부유한 유권자일수록 투표를 더 많이 하며 돈과 로비로 정치에 영향을 미치려고 애를 쓴다는 이유들이 그간 제시되었지만, 바텔스는 상원의원들이 부유층에 속한다는 점을 중시했다. 자신이 부유하기 때문에 부유층의 이익을 대변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과연 리브스의 생각처럼 미국이 영국보다 심한 신분 사회냐 하는 건 별도로 따져볼 문제겠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미국인들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바로 “1% 대 99% 사회”라는 프레임 때문이다. 1%를 불평등의 주범으로 몰아버리면, 나머지 99% 내부의 격차와 불평등은 비교적 작은 문제로 여겨지고, ‘1% 개혁’을 완수하는 그날까지 대동단결해야 할 공동체가 된다.
하지만 20%의 중상류층은 다수 대중과 같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1979년에서 2013년 사이 미국 상위 20% 가구 소득 총합은 4조 달러 늘었는데, 하위 80%는 3조 달러 정도 늘었다. 4조 달러 중 3분의 1을 상위 1%가 가져가긴 했지만, 바로 아래의 19%가 가져간 소득 증가분도 2조 7,000억 달러에 달했다. 중상류층은 최상류층을 공격하는 데 목소리를 높이지만, 1%와 20%는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최상류층은 상위 20%가 ‘들락날락하는 집단’이다.
‘부의 세습’을 정당화하는 ‘능력주의 신화‘
‘1대 99의 사회’라는 프레임을 유지시키는 이념적 방어 메커니즘은 바로 능력주의 신화다. 이른바 ‘개천에서 용 나는 모델’이다. 이 모델은 고성장 시대엔 제법 잘 작동했다. 가난한 집 아이들도 명문 대학에 들어가 신분 상승을 꾀하는 ‘코리언 드림’의 실현이 꽤 이루어졌다. 그러나 저성장 시대를 맞아 이 모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고, 많은 사람이 그걸 잘 알고 있음에도 이 모델은 여전히 건재하다.
지능과 노력이라는 능력에 의해 부와 사회적 지위가 부여되는 ‘사회인 능력주의(meritocracy)’는 출신과 배경에 의해 부와 사회적 지위가 부여되는 ‘사회적 귀족주의(aristocracy)’의 반대 개념으로 등장해 처음엔 진보적 이념으로 간주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실상 귀족주의와 다를 바 없는 것임이 드러났다. 이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최초의 학자들 중 한 명인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프랑스를 사례로 들어 분석한 내용을 살펴보자. 부르디외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이런 내용이다.
교육은 사회적 불평등 유지와 강화에 기여한다. 특히, 고등 교육 시스템은 특권을 부여하고, 지위를 할당하고, 기존 사회제도에 대한 존경을 배양시키는 기능을 수행한다. 형식적인 평등에 대한 광범위한 신념은 지배계급이 그 지위를 공개적으로 자식에게 물려주는 걸 어렵게 한다. 따라서 새롭고 더욱 신중한 사회통제와 지위 상속 수단이 있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고등교육의 ‘능력주의 시스템’이다. 그래서 지배계급의 이해관계는 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원칙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보존될 수 있게 되었다. 계급적 이해관계를 교육적 위계질서에 떠넘김으로써 사회적 위계질서를 재생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실제로 부르디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대부분의 대학 졸업장은 상류계급 출신에게 돌아가고, 농민ㆍ노동계급 자식들에겐 거의 가지 않는다. 그가 실시한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회사 간부 자녀들의 58%가 대학에 진학하는 반면 농민의 자녀는 1.4%만이 대학에 진학한다. 돈뿐만 아니라 교육도 ‘상속’되고 ‘유전’되는 것이다.
능력주의 신화는 미국에서도 각종 통계 수치로 입증되었다. 2004년 워싱턴의 정책연구소인 센추리재단 조사를 보면, 미국 가정을 사회경제적인 등급에 따라 4등분했을 때 전국 146개 명문대 학생들 중 3%만이 가장 낮은 등급에 속해 있으며 최상위 등급에 속하는 학생은 74%인 것으로 나타났다. 고등교육을 받은 미국의 엘리트는 겉으론 능력에 의해 성장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세습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는 새로운 ‘세습된 능력 계급’인 것이다.
요컨대, 능력주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인해 신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능력을 이겨버리는 비능력적 요인들, 즉 차별적 교육 기회, 불평등한 사회적 자본과 문화적 자본, 특권의 상속과 부의 세습, 개인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손쓸 방법이 없는 불가항력적인 요인들, 자영업자의 자수성가를 방해하는 대기업, 편견에 의한 차별 등은 모두 능력주의 시스템을 방해하는 요인들이다.
‘조국 사태’에서 선악 이분법은 잔인하다
한국 사회의 최대 문제는 승자독식 체제하의 ‘밥그릇 전쟁’으로 인한 ‘분열 구조’에 있는 것이지, 어떤 진영이 승리하느냐는 부차적인 문제다. 어느 한 진영이 상대 진영을 완전히 압도해버린다면 ‘분열의 사회적 비용’은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겠지만, 그게 불가능한 이상 그 어떤 정치와 개혁도 분열 비용을 넘어서지 못하는 비극이 발생하고 만다. 이걸 직시하는 게 진정한 ‘애국’이다.
‘조국 사태’의 와중에서 나타난 선악 이분법은 보기에 끔찍했다. 어느 문인은 10월 5일 열린 ‘검찰 개혁 촛불문화제’에 다녀온 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나라가 두 쪽이 났다고 한다.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저들은 적폐이고 우리는 혁명”이라고 했다. 그는 “저들은 폐기된 과거이고 우리는 미래다. 저들은 몰락하는 시대의 잔재이고 우리는 어둠을 비추는 영원한 빛”이라며 “(나라가) 두 쪽이 난 게 아니라 누가 이기고 지는지 판가름이 나는 것”이라고 했다.
이 문인만 그런 게 아니다. 여권의 기본적인 인식 구도가 바로 이런 선악 이분법이다. 좋다. ‘적폐’를 물리치고 ‘혁명’ 세력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둔다면 그것도 기대해볼 만한 일이긴 하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하다. 전혀 정의롭지도 않다. 2017년 5월 10일 대통령에 취임한 문재인의 지지율은 한동안 80%대 중반까지 치솟을 정도로 높았다.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며 지지를 보내는 국민이 80%를 넘은 것은 1993년 10월 김영삼 대통령 이후 24년 만이었다. 여권이 적폐로 몰아붙이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지난 국정 농단 촛불 혁명에 찬성했던 동지였음을 감안컨대, 이런 선악 이분법은 잔인하다.
그런데 불행 중 다행히도 이런 망국적인 선악 이분법에 비교적 오염되지 않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바로 20대다. 고성장 시대의 세대들은 ‘민주화’만 고민해도 무방했지만, 고성장 시대의 종언과 함께 닥친 ‘일자리 전쟁’은 공정의 문제를 부각시키면서 그걸 개인적 영역으로 끌어내렸다. 그래서 20대는 진영을 초월한 공정을 중시한다. 이 공정에 대해 구조를 보지 못한 ‘미시적 공정’이라거나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능력주의적 공정’이라는 비판이 적잖게 나왔지만, 이거야말로 적반하장이다. 누가 세상의 구조를 그렇게 만들었는가?
나는 20대가 이전 세대보다 대학 서열에 미쳐 있는 현실을 강하게 비판해왔지만, 그런 서열 구조를 심화시켜온 386세대를 비롯한 기성세대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 20대의 공정 개념에 그 어떤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이는 구조 개혁의 강력한 동력이 될 수 있다. ‘밑에서 위로’는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를 내포한 개념이다. 어쩌면 20대가 새로운 패러다임의 기수가 되리라는 희망을 키워가는 게 이 지긋지긋한 이분법 세상을 끝낼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이전 세대들과는 확연히 다른 20대들의 독특한 사고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할 순 없다 하더라도, 우리가 정녕 새로운 삶과 정치의 패러다임을 모색하고자 한다면 그들의 힘을 빌려야 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2019년 4월 어느 세미나에서 한국개발연구원장 최정표는 “기득권의 성이 너무나 단단하다. 불평등은 이미 구조적으로 고착화되었다”고 탄식했다고 한다. 이 고착 구조를 깨는 것은 새로운 사고의 틀을 가진 청년 세대가 힘을 갖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돈도 명성도 없는 청년들이 정치를 경유하지 않고선 힘을 갖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정치를 해야 할 청년들은 정치를 멀리 하고, 제발 정치를 그만두었으면 하는 기성세대는 정치에 목숨을 건다는 점이다. 그래서 정치는 바뀌지 않고, 그로 인한 정치적 불평등은 경제적 불평등을 악화시킨다.
제2장 왜 정치는 중ㆍ하층의 민생을 외면하는가 - 개혁과 진보의 ‘의제 설정’ 오류
개혁을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생각하는 사고방식
한국에서도 진보적 정치인들은 중ㆍ하층의 민생을 생각하는 것처럼 전투적인 말은 많이 하지만, 그것에 대해 직접 접촉하거나 생각할 기회가 거의 없다. 그들은 부지불식간에 자신의 계급적 기반과 동질적인 동료의 압력이나 교류로 인해 자신에게 중요한 게 사회적으로도 중요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여권의 정치적 실세인 운동권 386 출신의 그런 착각은 더욱 심해 개혁적 정책을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서만 생각하고, 실제로 그런 정책을 주요 의제로 삼는다.
노무현 정권이 가장 중요한 입법으로 내세웠던 ‘4대 개혁 입법’이 그 좋은 예다. 국가보안법, 사립학교법, 과거사진상규명법, 언론관계법이 중요하다는 데엔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중요한 건 이 입법이 민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이었다. 2004년 탄핵 역풍 속에서 원내 과반을 이룬 열린우리당은 17대 국회 첫 정기국회에서 공격적으로 4대 개혁 입법을 추진했지만, 한나라당이 이를 ‘4대 국론 분열법’으로 규정하고 격렬하게 저항하는 바람에 국회는 파행을 거듭했고, 결국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반면 민생은 어떠했던가? 노무현 정권만큼 부동산 문제에 대해 호전적인 말을 쏟아낸 정권은 없었지만, 부동산 정책은 대실패였다. 서울 강남 일부 아파트 평당 가격이 1,000만 원 돌파(2003년 4월), 2,000만 원 돌파(2003년 8월), 3,000만 원 돌파(2006년 1월) 기록을 세운 건 모두 노무현 정권 들어서였다. 서울과 지방의 집값 양극화는 더욱 벌어지고 말았다. 개혁에 반대하는 한나라당의 수구성을 비난하기는 쉬운 일이었지만, 문제는 집권 세력으로서 ‘책임 윤리’였다. 의도가 정의롭고 선하면 그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괜찮은 것인가? 절대로 괜찮지 않다는 게 민심이었고, 이 민심은 결국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이명박근혜 정권을 탄생시켰다.
이젠 달라졌을까? 아니다. 진보세력의 386형 강남 좌파 마인드는 여전하다. 이들은 서울-지방 격차를 더 벌리기 위해 안달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이 다 서울이나 서울 근처에서 사니 눈에 보이는 게 서울뿐이다. 촛불 시위를 하는 정의로운 국민들 역시 서울이 대한민국인 줄 아는 건 마찬가지다. 문재인 정부는 수도권 신도시 정책처럼 지역균형발전을 완전히 무시하는 ‘철학의 빈곤’을 드러냈고, 최악의 반지역균형발전 정권이 되기 위해 작정한 것처럼 보이는데도, 이렇다 할 반발이나 저항이 없다.
이들은 여전히 개혁 정책을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상에서만 생각하고, 실제로 그런 정책을 최우선 의제로 삼고 있다. 검찰 개혁에 정권의 명운을 거는 게 그 좋은 예다. 이게 과연 민생 의제일까? 민생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법조 개혁을 하더라도 ‘유전무죄ㆍ무전유죄’부터 깨부수는 게 우선이 아니었을까?
2017년 1월 《동아일보》가 여론조사 회사인 엠브레인과 함께 20대 이상 남녀 1,000명에게 모바일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무려 91%가 한국은 ‘유전무죄ㆍ무전유죄’가 통하는 사회라고 응답했다. 과연 정부와 국회는 믿을 수 있는가? 공직은 그걸 차지한 사람들에게 단지 좋은 직장일 뿐이다. 자칭 엘리트라는 사람들은 전관예우에 미쳐 돌아가면서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위장전입’은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고위 공직 엘리트의 ‘필수’가 되어버렸다.
전관예우는 ‘사회 신뢰를 좀먹는 암 덩어리’임에도, 우리는 그 암 덩어리의 발호에 최소한의 분노마저 잃은 지 오래다. 당파 싸움엔 열을 올려도 당파를 초월해 작동하는 법칙에 대해선 별 말이 없다. 아니 정부는 오히려 전관예우의 브로커 역할까지 떠맡고 나선다. ‘공정거래’를 책임진다는 공정거래위원회는 매년 10여 명을 대기업에 재취업시켜주면서 고시ㆍ비고시 출신을 나눠 ‘억대 연봉 지침’까지 기업에 정해주었다. ‘행정고시 출신 퇴직자’는 2억 5,000만 원 안팎, ‘비행정고시 출신 퇴직자’는 1억 5,000만 원 안팎이라는 억대 연봉 가이드라인까지 책정해준 것이다. 《경향신문》 경제부장 오관철은 “공정위 고위직을 맡으려면 퇴직 후 로펌이나 대기업에 재취업하지 않겠다는 서약서 제출 제도라도 만들어졌으면 속이 시원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고 했지만, 전관예우를 방치하는 데엔 보수나 진보가 한 통속이어서 이 문제엔 별관심이 없다.
“정규직 안 해도 좋다. 더 이상 죽지만 않게 해달라.”
고용노동부가 산업재해 발생 현황을 집계한 통계자료를 보면, 2017년 산업재해로 사망한 노동자는 2,209명으로 2016년에 비해 10% 가까이 늘었다. 한국에서 산재 사망자들은 주로 떨어지고, 기계에 끼이고, 부딪혀 숨진다. 한국의 사고사망 만인율(1만 명 당 명)은 0.71(2013년 기준)인데 반해, 미국은 0.37, 독일 0.17, 영국 0.04(이상 2011년 기준) 수준이다. 한국이 영국의 18배인 셈이다. 주 5일 노동 기준 매일 9명이 산업재해로 죽어나간다는 것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건 이 통계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산업 재해 피해자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다. 산업재해로 인정을 받는 게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기업의 힘이 센 대기업일수록 더욱 그렇다. 정부가 대기업 편을 들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