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세의 세계사
오무라 오지로 지음 | 더봄
탈세의 세계사
오무라 오지로 지음
더봄 / 2019년 12월 / 271쪽 / 17,000원
고대 그리스와 고대 이집트의 탈세 이야기
고대 그리스의 독특한 탈세 밀고제도
탈세를 축으로 세계사를 바라볼 때 가장 먼저 고대 그리스를 거론해야 할 것이다. 유럽의 세금 체계의 기본적인 뼈대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는 자유시민(노예가 아닌 시민)에 대한 직접적인 과세가 거의 없었다. 단, 부유층에 대한 과세는 있었다. 그런데 이것도 법적으로 징수하는 것이 아니라, 부유층이 자발적으로 내는 기부금과 같은 것이었다. 전쟁 비용과 공적인 비용이 발생한 경우에는 자산가에 의한 공공봉사, 즉 자발적 납세로 충당했다. 그러나 이 공공봉사에는 사회로부터의 무언의 압력이 있었으며, 강제에 가까웠다.
이 공공봉사와 관련하여 ‘안티도시스(antidosis, 교환소송)’라는 독특한 제도가 있었다. 안티도시스란 재산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 공공봉사, 즉 기부를 명할 수 있는 제도이다. 만약 안티도시스를 명받아도 자신보다 자산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이 안티도시스를 명받지 않았다면 그 사람을 지명할 수 있다. 그리고 누가 더 많은 자산을 가지고 있는지를 판정하여 자산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쪽이 공공봉사를 하게 된다. 자산을 더 많이 가지고 있어도 요령껏 세금을 회피하는 사람들이 어디든 있는데, 그런 약은 사람을 자산가들끼리 고발하게 하여 밝혀냈던 것이다.
결국 안티도시스라는 제도는 부유층에 세금을 부과하는 동시에 세금을 부과해야 하는 부유층을 밀고하는 제도이기도 했다. 또 이 안티도시스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만 명한다는 점이다. 참고로 국가가 융성할 때에는 대체적으로 부유층이 제대로 세금을 낼 때이다. 그러나 국가가 오래 이어지면서 대부분의 부유층이 여러 가지 수법을 사용하여 세금을 회피하게 되면, 국가는 가난한 계층으로부터 더 많은 세금을 징수하게 되고, 결국 경제가 허약해져 붕괴하게 된다.
고대 이집트의 효율적인 조세 제도
고대 이집트는 해마다 범람하는 나일강을 제방과 관개 등으로 잘 다스려 발전한 국가이다. 즉 대형 프로젝트로 형성된 국가라고 말할 수 있다. 아마 이 제방 공사를 할 때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인물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파라오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국가의 경우 ‘중앙집권제도’와 ‘직접적인 세금 징수’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시민이 직접세를 내는 경우는 많지 않았으나, 고대 이집트에서는 시민들로부터 거둬들인 직접세가 주요 재원이 되었다. 이집트에서 국토는 파라오의 소유물이며, 시민은 그것을 빌려 경작을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임차료로 세금을 내야 했다. 그리고 수확으로 내는 세금 외에도 한 사람당 과세되는 인두세, 가축의 소유자에게 과세되는 가축세, 관세 등이 있었던 것 같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중앙집권사회였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국가의 모든 행정권, 징세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행정, 징세 업무는 ‘서기(書記)’라는 하급관료들이 담당했다. 서기는 읽고 쓸 수 있었는데, 당시에 문자를 읽고 쓸 수 있다는 것은 훌륭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징세 업무에도 뛰어났다. 당시 농작물에는 20%의 수확세가 부과되었는데, 이 수확세는 실제 수확물로부터 산출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 면적에서 수확량을 예상 산출해 정했고, 이런 어려운 계산들을 서기들이 모두 해냈다.
서기관과 징세관이 공무원이라는 것이 현대 사회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지만, 고대부터 중세에 걸친 사회에서는 서기관과 징세관은 ‘지방의 호족’인 경우가 많았다. 왜냐하면 전국적인 관료 조직을 만드는 것이 당시로서는 너무 힘들어, 지방의 호족을 회유하여 징세권을 부여하고, 상납금을 납부하게 하는 것이 정부 입장에서는 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징세인의 입장에서는 세금을 많이 거두면 거둘수록 자신의 수입이 늘어나기 때문에 최대한 세금을 많이 징수하려고 할 것이다.
고대에서 중세에 걸쳐 이 ‘징세 청부 제도’라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세금 시스템이었다. 그런데 고대 이집트에서는 세금을 거둘 때 ‘징세 청부 시스템’이 아니라 ‘중앙관료 시스템’을 채택했다. 서기는 국가에서 급여를 받고 관료의 업무로서 정해진 대로만 세금을 징수했으며, 국가는 징세 효율이 좋았고, 민중도 불필요한 세금을 부과 받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런 ‘징세인=공무원’의 제도를 유지하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징세인은 세금의 액수를 정하는 업무를 하기 때문에 뇌물의 유혹도 많았고, 또한 정해진 금액보다 더 징수해서 차액으로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탐관오리’적인 유혹도 있다. 이러한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정부는 서기를 엄격하게 감독하고, 또 적절한 보수를 줘야 한다.
고대 이집트는 이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고안했던 것 같다. 국가를 통치하는 파라오들은 징세인이 탐관오리가 되지 않도록 서기에 대해 ‘자비로운 행동을 하라’고 항상 강조했다. 또한 징세 관리인 서기를 감시하는 기관도 있었다. 어쨌든 이 서기 덕분에 고대 이집트는 효율적인 징세가 이루어졌고, 그것이 안정된 중앙집권제도의 초석이 되었다.
유럽 시민혁명은 탈세에서 시작되었다
영국 국왕이 부과한 세금을 당당하게 거부한 인물은?
영국이라는 나라는 세계에서 처음으로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미국이 대두하기 전까지 세계의 패권을 주도했던 초거대국가였다. 왜 영국이 세계에 앞서 근대 국가를 만들 수 있었을까? 이는 세금과 크게 연관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영국은 조세 제도 근대화가 매우 빨리 이루어졌으며, 이는 1215년에 시작되었는데, 그 유명한 ‘마그나 카르타’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존왕의 거듭되는 전쟁 비용 징수에 속을 끓이던 영국 시민과 귀족들이 국왕에게 폐위를 요구했고, 이에 대해 존왕은 “두 번 다시 마음대로 세금 징수를 하지 않겠다.”고 국민에게 약속했는데, 그 약속의 조문이 마그나 카르타이다. 그런데 이 마그나 카르타도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지켜지지 않게 된다.
특히 16세기 엘리자베스 여왕 이후의 영국 국왕들은 마그나 카르타를 거의 지키지 않았다. 심지어 전쟁 비용이 모자라 가끔 증세와 신규 세금을 신설하기도 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17세기 초에 만들어진 ‘선박세’이다. 이 선박세는 해상의 안전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고, 목적은 해군 정비와 해상 감시 비용을 충당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에서는 세금을 신설할 때 의회의 승인이 필요했다. 그러나 이 선박세는 의회의 승인 없이 국왕이 마음대로 만든 것이었다. 국왕은 ‘해군력 보강을 위한 세금이며, 국민들을 위한 세금이므로 괜찮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러나 국민 입장에서는 역시 새로운 세금은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납세를 하지 않는 자가 속출했고, 미납자의 대부분은 ‘과세평가액이 너무 높다’라는 이유를 들었다.
그때 존 함덴이라는 인물이 아무런 핑계도 대지 않고 납세를 거부했고, 결국 재판에 회부되었다. 함덴의 주장은 “영국 국민은 왕실에 대한 세금 의무가 없고, 마그나 카르타에서 국왕은 의회의 승인 없이는 세금을 과세할 수 없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이 세금은 무효다.”라고 주장했다. 이 재판에서 근소한 차이로 함덴에게 유죄 판결이 났는데, 곧 영국에서 판결이 이상하다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이 때문에 재판이 있었던 4년 후에 의회의 주장으로 다시 재판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선박세는 위법이라는 판결이 나고 함덴에게 유죄를 선고한 재판관은 탄핵을 당했다. 곧 선박세는 폐지되었고, 이에 대해 국왕은 맹렬히 반발하고 의회와의 대결구도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다음 해인 1642년에는 의회파와 국왕파의 무력충돌로 이어져 ‘청교도 혁명’이 일어난다.
영국은 청교도 혁명으로 인해 경제대국이 되었다
청교도 혁명은 ‘재정대혁명’이기도 했는데, 이는 영국을 경제대국으로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영국에서는 명예혁명 전후 징세 청부 제도가 폐지되고 징세 청부인 대신 세금 전문 관료를 채용했는데, 세무 관료로 채용되기 위해서는 어려운 시험에 합격해야 했다. 그리고 세무 관료들에게는 충분한 급여가 지급되고, 또 지역의 유력자와 유착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세무 관료들은 전근이 빈번했는데. 이 시스템은 세계 세무 관료의 모델이 되어 현재 대부분의 국가 세무서에서 채택되고 있다. 그리고 영국은 1721년부터 1742년 월폴(영국의 초대 총리)의 시대에 수출세를 폐지하고 관세를 대폭 낮추었다. 이로 인해 영국 무역이 활발해지고 그에 따라 경제도 급성장하게 된다.
귀족의 탈세를 저지하려다 처형된 루이 16세
역대 프랑스 국왕은 몇 번이나 파산을 하기도 했다. 왜 프랑스 국왕이 몇 번이나 파산할 지경에 이르렀을까? 그것은 바로 재정 기반이 약했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프랑스에서는 성직자(교회)와 귀족이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국가에 대한 세금을 면제 받았기 때문이다. 참고로 당시 프랑스 인구는 2300만 명이라고 추산되는데, 그중에 성직자는 10만 명이지만, 성직자가 소유한 토지는 전 국토의 10분의 1에 달했고, 그들에게는 세금이 부과되지 않았으며, 자신들이 정한 금액을 국가에 납부했다. 또한 귀족은 40만 명이 채 안 되면서 프랑스 부의 90%를 독점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당시 국왕 루이 16세는 많은 빚을 안고 있었다. 그런데 루이 16세는 국민을 생각하는 왕이었던 것 같다. 재정 위기를 맞아 더 이상 국민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하려 하지 않고, 귀족과 교회(성직자)에 세금을 부과하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튼 루이 16세는 1777년에 스위스 은행가 자크 네케르를 재무장관으로 발탁했고, 네케르는 국가재정 재건을 위해 가장 먼저 징세 청부 제도의 개혁에 나선다. 참고로 징세 청부인은 징세를 하는 권리를 국가로부터 구입하여 징세를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국가는 징세권을 팔아 우선 목돈을 수중에 넣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당연히 실제 징수 가능한 금액보다 적은 돈이다. 그리고 징세 청부인들은 정해진 세금보다 더 많이 징수함으로써 차익을 얻었다.
그런데 징세 청부인 자리는 당연히 ‘징세권을 구입할 수 있는’ 부유한 자들이 맡게 된다. 즉 부유한 자가 징세 특권을 얻어 더욱 부자가 되고 민중들은 더욱 고통스러워지는 치명적인 악순환이 일어난다. 아울러 이들 징세 청부인의 대부분은 귀족이었다. 네케르는 이 징세 청부 제도에 칼을 대, 정해진 금액만 징수하고 정해진 보수만을 받는 징세공무원 제도를 만들었다. 또한 엄격한 감사제도를 만들어 부정을 용납하지 못하게 했다. 여기에 프랑스 귀족과 특권계층의 사람들이 맹렬히 반발했다.
그들은 ‘스위스의 부유한 은행가가 프랑스의 국부를 가로채려 하고 있다’와 같은 내용의 팸플릿을 대량으로 발행하면서 네케르를 공격했다. 이에 대해 네케르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프랑스 국가의 세입과 세출의 내용을 시민들에게 공표했다. 이 국가재정 공표는 프랑스 시민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국가 세입 2억 6000만 리브르 중에서 왕가에 대한 지출이 2500만 리브르나 사용되고 있었다. 국민들 평균 연봉이 100리브르 전후인 시대에 2500만 리브르라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
결국 네케르의 회계공표는 의도치 않게 민중의 비판 화살을 왕실로 향하게 했고, 반면 회계공표로 인해 네케르는 프랑스 시민들의 강한 지지를 얻게 되었다. 이후 네케르의 회계공표에 의해 강한 비판을 받게 된 루이 16세는 1781년 네케르를 파면한다. 그러나 프랑스 시민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아 네케르는 7년 후인 1788년에 재무장관으로 다시 복직한다. 그리고 그 다음해인 1789년 루이 16세가 다시 네케르를 파면시키자 파리 시민들은 격노했고, 결국에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다.
탈세업자가 일으킨 미국 독립전쟁
미국은 원조 ‘조세피난처’였다! / 미국 독립전쟁은 탈세업자가 일으켰다
유럽의 식민지 중에서 왜 미국만이 선진국으로, 더 나아가 초강대국이 되었는지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는데, 그 답은 ‘경제활동의 자유’와 ‘세금 면제’에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로 미국은 영국의 식민지 시대부터 ‘경제활동의 자유’를 인정받아 세금이 거의 과세되지 않았다. 그런데 북미 식민지가 발전함에 따라 이 지역에 세금 면제를 해준 것이 영국으로서는 점점 부담이 되어 갔다. 왜냐하면 영국 본국은 북미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해야 했는데, 그에 따른 군비가 엄청났기 때문이다.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나기 20년 전인 1756년 영국은 프랑스, 러시아 등과 ‘7년 전쟁’을 치렀다. 이 전쟁으로 인해 영국의 재정은 매우 악화되었는데, 이 전쟁은 북미 지역에서도 발생했다. 이는 ‘프렌치-인디언 전쟁’이라고도 일컬어지는 것으로, 영국군과 프랑스군 사이에 발발한 전쟁이다. 영국은 북미 식민지를 지키기 위해 치른 전쟁이기 때문에 전쟁 비용을 북미 식민지에 부담시키려고 했다. 당시 북미 식민지에는 관세 이외에는 거의 세금이 없었다. 또 관세도 밀수 등으로 탈세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영국은 1756년 인지법을 만들어 북미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하려고 했다.
그러나 북미 식민지는 이 인지법을 지키지 않았다. 영국 본국에서 인지가 도착하면 그 인지를 태워버리기까지 했다. 영국은 북미 식민지를 지키기 위한 경비는 미국에 이주한 사람들이 부담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미국에 이주한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아가 북미 식민지에는 본국 의회 의석이 없었기 때문에 ‘대표 없이 과세 없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일체의 과세를 거부했다. 영국은 그렇다면 식민지인들에게 의회의 의석을 부여하려고 하였으나, 미국 주민은 이것조차 거부했다.
그래서 영국은 차를 저렴한 가격에 팔아 조금이라도 미국에 재정 부담을 씌우려고 했다. 당시 북미 식민지에서는 차 밀수가 성행해 영국으로는 관세가 거의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그에 대처하는 수단으로 영국 당국은 국책회사인 동인도회사에 북미 식민지에 무관세로 차를 판매할 특권을 부여했다. 영국 정부는 동인도회사의 경영을 도와줌으로써 간접적으로 북미 식민지에 세금을 부과하려고 했고, 그와 동시에 북미 식민지의 밀수업자 이익을 봉쇄하고자 했다.
이에 분노한 것이 북미 식민지의 밀수업자였다. 당시 밀수란 미국 주민들 사이에서는 당연한 행위로 인식되었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라는 논리로 말하자면, 북미 식민지는 관세를 내는 것도 이상하기 때문에 밀수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밀수업자라고 해도 ‘어둠의 조직’이 아니라 일반 무역업자들이 당당하게 밀수를 하고 주민들도 그 존재를 승인하는 분위기였다. 급기야 밀수업자들이 중심이 되어 보스턴에서 차를 적재했던 동인도회사의 배에 난입하여 차를 바다에 던져버리는 사건을 일으켰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보스턴 차 사건’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북미 식민지에는 독립의 기운이 고조되고 독립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로스차일드가(家)는 상속세 때문에 쇠퇴했다
19세기 최대 금융가문 로스차일드
로스차일드가의 시조 마이어 암셀은 1744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났고, 하노버 은행에 근무하면서 금융업 시스템을 배운 후 고향에 돌아가 동전 장사를 시작한다. 마이어는 보통 사람들로부터 매우 저렴한 값으로 낡은 동전을 사들여 귀족 집을 찾아다니며 팔기 시작한다. 그러다 프로이센의 군주인 프리드리히 대왕의 빌헬름 황태자가 그의 고객 중 한 사람이 된다. 이후 프리드리히 대왕 사후 그 자산을 빌헬름 황태자가 물려받게 되자 마이어의 사업도 확대되었는데, 그때부터 그는 마이어 로스차일드라고 말하고 다녔다. 로스차일드 가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한편 마이어는 5명의 아들들이 성인이 되자 각각 프랑크푸르트, 런던, 파리, 비엔나로 보냈는데, 이는 전형적인 유대인의 상업방식이라고 할 수 있고, 로스차일드가도 이 다섯 아들들의 네트워크에 의해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