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심의 시대
알렉산더 버트야니 지음 | 나무생각
무관심의 시대
알렉산더 버트야니 지음
나무생각 / 2019년 11월 / 264쪽 / 14,800원
1장 가치를 상실한 시대 >
우리에게 닥친 존재적 위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가치 위기가 찾아왔다고 한탄한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 설계를 의심하거나 최소한 비판적으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누구도 확실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사회는 풍요롭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침반을 잃어버렸다. 삶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태도에 대한 통찰력을 상실했으며, 이상과 희망에 대해서도 침묵하고 있다.
심리학 연구에서도 부유한 산업국가에서의 탈도덕화 현상과 삶에 대한 회의, 체념, 불안이 만연해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사람들은 절망하지 않기 위해 예전에는 많은 것을 기대했던 그 세상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더 이상 기대를 품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물질적으로 풍족하고 안정된 곳에서 이런 실존적 황폐화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우리는 지금 풍요의 한가운데에 있다. 그런데 지난 수십 년에 걸쳐 이뤄진 연구들에 따르면, 빅터 프랭클(의미치료와 실존분석을 주장한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이자 신경학자)이 말한 ‘실존적 공허’가 오늘날 전 세계에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고 한다.
체념적 삶의 자세가 확산되면 개인의 삶을 암울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사회 발전적 관점에서도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사람들이 체념에 빠지면 자신의 행복에만 눈이 먼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과 곤경에도 똑같이 눈이 멀게 된다. 체념은 삶에 실망한 사람들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들은 애초부터 높은 이상을 품은 뒤 그것을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여기고 포기해버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겨난 빈자리에 무관심이 스며든다. 무관심이란 모든 자발성과 이상, 책임감으로 만들어지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모든 믿음을 파괴한다. 또 우리의 삶이 어떤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우리가 한탄하며 외면하고 싶어 하는 암담한 일상으로 우리를 되돌려놓는다. 실존적 공허를 유발하는 몇 가지 심리적, 사회적 원인에 대해서는 이 책에서 앞으로 더 심도 있게 분석하고 그로부터 벗어나 삶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2장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
가치 상실인가, 가치 위기인가 가치 상실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첫째, 우리의 자아상 안에서,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믿고 기대하는 것 안에서 나타난다. 둘째, 우리의 인간상 안에서 나타난다. 다른 사람에 대해, 그들과 우리 자신의 관계, 그들의 행동의 동기에 대해 가정하고 믿는 것(그들에게 부여하는 것) 안에서 가치 상실이 나타나는 것이다. 셋째, 우리의 세계상 안에서 나타난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이 세상의 부분이자 동조자로서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 그리고 세상에 대한 기대 속에서 나타난다. 가치를 잃어버렸을 때는 우리가 세상에 무언가를 요구하고 세상도 우리의 기여와 노력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가치 있는 것에 대한 믿음이나 신뢰, 그 연결고리가 결여되거나 축소될 때 사람들은 개인적 혹은 사회적으로 ‘가치 위기’라고 말한다. 가치 위기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삶에 대한 체념적 감정 속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체념은 다른 사람이나 이 세상에 어떤 선한 것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다. 가치 위기는 종종 합리적이지 않은 불신에서 발생한다. 삶의 가치와 진실, 선과 아름다움을 의미 없고, 가치 없고, 나쁘고, 추하고, 거짓인 것처럼 느끼게 한다. 희망이나 믿음보다 불신이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도록 만드는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이런 맥락에서 현대사회의 병리현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현대사회에서는 인간의 존재 의미를 찾으려는 욕구를 성숙함의 상징이 아니라 영혼의 탈선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인간적인 것뿐만 아니라 정말로 존재할지도 모르는 가장 인간적인 것도 병적인 것과 혼동하는 병리현상이다. 말하자면 가장 인간적인 것을 지나치게 인간적인 것으로만, 즉 약점과 콤플렉스로만 간주하는 인간 존재의 의미 실현에 대한 의심이다.”
인간 존재의 의미에 대한 의구심으로 동요하는 사람에게 병리학적 의심이 가져오는 결과는 매우 참혹하다. 그는 존재에 대한 실망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마음이 무겁다. 그리고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자신의 노력이 실존적 소망이 아니라, 심리적 기형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순간 우리는 병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둘은 객관적인 방식으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단지 충족되지 않은 리비도를 비축하고 있음을 인정할 뿐이다. 리비도와 함께 생겨나는 것은 슬픔과 우울함으로 이끄는 일종의 흥분이다.”
가장 인간적인 질문은 실존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인간 존재에 대한 실존적 질문을 정신적 결함의 징후라고 한다면, 그 결과는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이 세상이 정상적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리도 거기에 어울리지 않은 것처럼 여겨진다. 이러한 ‘의미 모형’을 바탕으로 죽음을 앞둔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했던 미국의 심리분석가 크루트 아이슬러는 다음과 같은 예화를 통해 이를 설명한다.
그 여성 환자는 의미가 충만했던 과거의 삶과 의미 없는 현재의 삶을 비교했다. 그녀는 더 이상 일을 할 수도 없고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 있어야 하는 지금은 삶이 무의미하다고 여겼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가 아이들을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 때만 자신의 존재가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집으로 다시 돌아갈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병원에 입원했다.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면 자신이 쓸모없이 썩어가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며 삶도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여전히 어떤 식으로든 의미가 있다면 모든 고통을 견뎌낼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중요한 오류를 범하게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병에 걸리기 이전에도 삶이 무의미하다고 말했지만 자신의 고통을 이겨냈기 때문이다. 나는 철학자들도 끊임없이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덧없는 노력을 했다는 점에서 볼 때, 그녀의 이전 삶과 현재 삶의 유일한 차이점은 그녀가 과거에는 삶의 의미를 믿었고 현재에는 그렇지 못하다는 데 있다고 지적했다. 나는 그녀에게 그런 차원이라면 과거의 삶과 현재의 삶이 모두 무의미하다고 단호하게 말해주었다. 내 말에 그녀는 당황했고,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는지 크게 울음을 터뜨렸다.
실존적 소망에 대한 이런 거부가 사람을 더욱 깊은 절망에 빠지게 만든다. 방어기제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주목할 점은 지나친 허무주의가 비교적 최근의 사회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시대적으로 이런 이념적 움직임이 대중화되면서 심리학자들이 만연해 있는 실존적 공허를 관찰하게 된 것도 우연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든 감정 중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희망이다. 그렇기 때문에 실존적 질문을 병리화하는 것에 대한 열린 대안은 실존적 존재에 대한 희망과 질문을 비정상적으로 보지 않고, 여러 가지 해결 전략이 과거에도 현재에도 목표를 제대로 겨냥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데 있다.
삶의 희망과 의미를 찾으려는 우리의 노력을 정신적 결함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의 본성이자 세상이 가진 본질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정신적 결함은 희망과 의미를 포기할 때 나타난다. 삶의 희망과 의미를 포기한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본질적 특성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며, 예술, 아름다움, 위안, 온기, 사랑, 학문적 발견의 기쁨, 감격, 유의미하고 참여적인 삶의 모험을 포기하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3장 현재는 열려 있다 >
현재는 열린 공간이다 현재는 우리의 삶의 역사를 함께 써나가는 장소다. 물론 우리가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운명적 요인들도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는 제한성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결정의 산물이다. 또한 현재는 제한성에 얼마나 많은 비중을 허용할지에 따른 결정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과적 접근의 근본적 오류는 ‘기브 앤 테이크’의 관계를 직선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인생의 페이지에 함께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권리를 놓치게 하는 데 있다. 이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한 우리의 기여가 요구됨에도 그에 대한 책임을 외면하게 된다.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 설명해보자. 우리가 미움이나 사랑을 받을 때 그 순간 누군가 우리를 미워했거나 사랑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 사실만으로 우리가 반드시 미워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경우에 무관심할 수도, 전혀 반응하지 않을 수도 있다. 또는 미움에는 친절함으로, 사랑에는 거부로 맞설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떻게 행동하든지 간에 우리가 받은 미움이나 사랑이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결정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이 결정은 우리가 과거에 미움이나 사랑을 받았다는 단순한 사실보다 우리의 정체성에 더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우리의 결정이 우리의 모습을 만든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할지를 선택할 수 없다. 더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면 운명이 우리에게 무엇을 쥐여줄지를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발산할지를 결정할 수는 있다. 우리의 기여, 바로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이 사실을 다양한 분야와 수많은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즉,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과 우리가 세상으로 발산하는 것 사이에 모든 것을 결정할 수 있는 선택과 자유의 순간이 존재한다. 빼앗긴 것과 선물 받은 것, 기만당한 것과 지지받은 것, 이 모든 것은 경험이다. 하지만 이 경험이 우리의 모습을 만들지 않는다. 또한 경험 자체는 어떤 행위를 하지 않는다. 인간이 반응도 하고 행동도 하는 것이다. 인간은 인과 사슬의 맨 마지막에서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존재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시작 지점에 서 있기도 하다. 그리고 자신의 결정과 행동이 가져올 모든 예측을 제쳐두고 예기치 못한 것을 세상에 내놓을 수도 있다. 또한 인간은 자신이 부정적으로 받아들인 것을 ‘정상적인 환경’에서 계속 마주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고통의 연쇄반응을 작동시킬 수 있는 장소에서 멈추게 할 수도 있다. 인간은 보다 성숙하고 의식적인 결정을 내림으로써 이기적인 행동으로부터 또는 영원히 지속되는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은 첫걸음을 내디뎌서 좋은 것을 발산할 수 있는 존재다.
이와 관련하여 빅터 프랭클은 자신이 수용소에서 나온 직후에 쓴 희곡 『비르켄발트를 위한 레퀴엠』에서 인상 깊은 장면을 그려냈다. 배경은 비르켄발트에 있는 가상의 수용소다.
수용소 가건물에는 파울과 프란츠라는 형제가 종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형제는 이상할 정도로 활기찼고 정신도 또렷했다. 이렇게 또렷한 정신은 가망 없는 상황에서 갑자기 엄청난 생명력과 인지 능력을 갖게 된 사람들한테서 종종 관찰될 수 있다. 파울은 대화를 하면서 자신이 만일 수용소에서 해방되면 무엇을 하게 될지를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린다. 그는 자신과 주변인들에게 고통을 준 사람들에게 똑같이 복수하겠다고 생각한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출애굽기 21장 24절)로 되갚는다는 것이다.
반면, 프란츠의 반응은 매우 놀라웠다. “파울, 네가 성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는 생각 안 해? 하나만 묻자. 하느님이 인류 최초의 살인자였던 카인에게 왜 ‘카인의 표적’을 찍어주었다고 생각해?” “그야 뻔하지! 카인이 살인자라는 것을 사람들이 바로 알아보게 하려는 거지. 그를 조심하라고….” “파울, 아니야! 카인에게 아무 일도 없게 하려고 주신 거야. 카인이 하느님한테 받은 벌 이상의 벌을 사람들이 주지 못하도록, 그리고 카인을 평온하게 내버려두기 위해서야.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한번 생각해봐. 살인이 계속 이어졌을 거야. 불의는 또 다른 불의를 낳을 뿐이지. 사람들이 계속해서 똑같은 식으로 보복 행위를 했다면 말이야. 그래서는 안 돼! 이제는 정말로 악의 사슬이 끊어져야 해! 불의에는 불의로, 증오에는 증오로, 폭력에는 폭력으로? 그렇게 갚아서는 안 돼! 파울, 이 사슬을 이제야 끊어야 해.”
여기서 사람들은 반론을 제시할 수도 있다. 즉, 프란츠의 생각이나 행동은 다분히 영웅적이고, 실제 일상에서는 심리적 모범으로 적절하지 않다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반론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이것이 모범이 되지 않는다면 어떤 것이 모범이 될까? 역사는 일회적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그러한 삶의 자세를 받아들인다면, 크고 작은 상처를 받을 때마다 더 높은 수위로 불평하거나 똑같은 행위로 보복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시 말해서 우리 자신이 아니면 누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겠는가? 우리 자신이 아니면 누가 선과 치유, 사랑, 격려의 연쇄반응을 시작할 수 있겠는가?
4장 삶의 한가운데 존재하는 자유 >
한 사람의 결정이 가져오는 놀라운 결과 감정을 발산하고 해소하는 일은 심리적으로나 실존적으로 계획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과거의 고통 때문에 더 가치 있고 유익한 경험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 경험한 것보다 훨씬 다채롭고 멋진 현실을 거부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에게도 마음을 닫음으로써 경험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자신이 경험한 것과 선하고 유익하고 의미 있는 것 사이에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해줄 수 있는 다양한 경험과 행동을 자신의 삶으로 유입시킬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배척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해온 세상을 적대적이고 나쁜 곳이라고 확신한다. 그 결과 결핍과 체념 속에서 아무도 원하지 않는 자기만의 ‘고향’을 스스로 만들어낸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가치 있고 선한 것에 대한 믿음을 상실하는 것은 매우 유혹적이다. 좋은 것을 외면하거나 스스로에게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좋은 것을 세상에 발산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이러한 방정식은 방어기제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어차피 좋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더 이상 실망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런 잘못된 확신과 믿음을 정당화하기에는 대가가 너무 크다. 왜냐하면 더 이상 좋은 것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어둠이 아니라 빛이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조차 거부하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젊은 빅터 프랭클이 청소년 상담 전문의로 일할 때 이야기다. 그 당시는 경제 불황으로 인해 청년 실업률이 매우 높았다. 많은 청년 실업자들이 우울증과 알코올중독, 무의미한 폭력에 빠져들었다. 그들의 일상에는 의미가 부재했고, 이러한 진공 상태에서 위태로운 현상들이 무성하게 생겨났다. 그 당시에 프랭클은 의미치료 요법을 창안했다. 말하자면 아무 의미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 변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 상황, 고통과 절망이 끝나는 상황에서부터 우리의 가능성과 자유가 시작된다는 내용이다. 상담사이자 심리분석가인 프랭클이 사회적 상황을 직접적으로 변화시킬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실업자에게 주어진 뜻하지 않은 자유를 어떻게 사용할지는 협상 가능한 부분이었다. 그래서 프랭클은 청년 실업자들이 가진 자유와 책임에 호소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 중 몇몇은 뜻하지 않게 획득한 그들의 자유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어떤 청년은 영어를 배웠고, 어떤 청년은 무료 급식 시설에서 봉사를 했으며, 또 다른 청년은 묘지의 비석을 관리하는 일을 했다. 이러한 가치 있는 과업을 수행함으로써 적어도 실업으로 인한 심리적 압박들을 떨쳐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