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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세계사

모토무라 료지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천하무적 세계사

모토무라 료지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19년 11월 / 324쪽 / 17,000원





Tolerance 로마는 ‘관용’의 힘으로 세계제국을 건설했다: 로마는 어떻게 번영을 이루었으며 쇠퇴하고 멸망했는가

로마를 강대국으로 만든 두 가지, ‘관용’과 ‘패자부활전을 가능케 하는 문화’

고대 지중해 세계에 1,000개가 넘게 존재했던 수많은 도시국가 중에서 왜 유독 로마만 제국이 될 수 있었을까? 나는 로마인에게 모스 마이오룸(Mos maiorum) 개념이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모스는 ‘관습 혹은 전통’, 마이오룸은 ‘선조’라는 뜻이다. 즉, 선조의 훌륭한 가르침을 가슴에 새기는 동시에 스스로 선조의 명예가 부끄럽지 않도록 당당히 살아가겠다는 강한 다짐이다.

로마가 제국을 이루고 경영하던 시대에 자신의 이름을 널리 알리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는 일이었을 것이다. 로마인들은 자신이 참전한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자신이 남보다 좀 더 돋보이는 공을 세우기 위해 미친 듯이 노력했다. 명예욕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기본 욕구 중 하나다. 그러나 명예를 대하는 관점과 사고방식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게 뭘까? ‘관용’과 ‘패자 부활 가능성’의 유무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차이를 비교해서 살펴보자. 명예를 중요시한 고대 그리스에서 전쟁에 패한 장수는 두 번 다시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패하고 살아서 돌아갈 경우 운이 좋으면 추방, 운이 나쁘면 사형을 당했기 때문이다. 반면 로마는 전쟁에 패한 장수나 병사라도 조국에 귀환할 수 있었다. 당당히 적에 맞서 싸웠다면 설령 패배했더라도 로마인들은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이 차이는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그리스의 패전 장수는 죽을 때까지 싸우거나 패배하고 비루하게 목숨을 부지한 경우 다른 나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달리 로마의 패전 장수는 전쟁에서 맛본 쓰라린 치욕을 떨쳐내기 위해 다음 전쟁에서 그야말로 죽을 각오로 싸움에 임했다. 그런 로마인의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100~44년)를 꼽을 수 있다. 카이사르는 자신도 실패를 딛고 일어선 경험이 있어서인지 부하 장수나 병사들의 실수나 실패를 무조건 질책하지 않고 관대하게 대하며 스스로 만회할 기회를 주고자 항상 노력했다.

무자비함과 관용의 두 얼굴을 가진 영웅 카이사르

세계제국으로 불릴 정도로 성공을 일군 나라 중 처음부터 관용이 넘쳐나는 나라는 한 나라도 없었다. 로마 역시 이 점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나라나 세력을 얻고 강대해질수록 처음에는 자신이 굴복시키고 복속시킨 다른 나라를 군사력을 동원해 힘으로 제압하려 들기 쉽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의 통치는 처음에는 어느 정도 효과가 있겠지만 오래갈 수 없고 반드시 부작용이 생기게 마련이다.

지배당하는 나라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맞서 싸울 힘이 부족하므로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굴복하고 굴욕을 참고 견딘다. 그럴수록 점점 더 불만이 쌓여갈 수밖에 없다. 결국 불만과 저항정신이 한데 모여 거대한 저항의 불길로 번져간다. 그러므로 그런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 지배자들은 조금씩 관대해지면서 ‘이 정도는 너희에게 맡겨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하는 식으로 태도와 정책이 변하게 된다. 로마 역시 오랜 시간을 지나고 그 과정에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겪으며 패권을 이루고, 그 패권을 오래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관용’이라는 점을 체득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한한 관용만이 정답일까? 그렇지는 않다. 나라를 떠받치고 경영하는 자들이 매사에 지나치게 관용을 보이다가는 자칫 사회 통합을 해칠 우려가 있다. ‘관용’과 ‘규제(혹은 절제)’라는 두 가지 이질적인 가치관 사이에서 마치 줄타기하듯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으며 과연 어디까지 허용하고 관대해질지 가늠해야 한다.

로마는 절묘한 방법으로 관용을 베풀고 정책으로 활용했다. 예로 로마는 속주에 라틴어 사용을 강요하지 않았다. 로마에 패배하고 복속 당한 나라와 민족에게 오랫동안 써왔던 자기 언어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어를 사용하라고 하면 반발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와는 반대로 자기 언어를 사용하며 자유롭게 생활하도록 허용하되 라틴어를 사용하는 것이 유리한 환경을 조성한다. 그로 인해 얻는 혜택이 많아지게 한다. 그렇게 하면 속주민들은 강요하지 않아도 알아서 라틴어를 배우고 사용하게 된다. 마치 오늘날 영어가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널리 퍼져 나가는 것처럼 말이다.

로마제국에서 관용 정책을 가장 탁월하게 활용한 지도자는 카이사르다. 라틴어에 ‘클레멘티아 카이사리스(카이사르의 관용)’라는 말이 널리 회자하고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그렇다면 카이사르는 과연 뼛속까지 관용으로 가득 채운 관용의 화신 같은 인물이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카이사르가 관용적인 사람인 것은 일면 맞지만 그가 관용을 베푼 대상은 어디까지나 로마 시민과 로마에 철저히 복종하는 사람뿐이었다. 반대로 그는 로마에 끝까지 맞서고 저항하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짓밟았다. 내 생각에 카이사르는 관용을 베풀 대상을 의식적으로 선별해 행동한 것 같다.



Simultaneity ‘동시대성’이 역사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킨다: 한제국과 로마제국, 공자와 소크라테스, 석가모니와 조로아스터의 탄생

일란성 쌍둥이 같은 두 세계제국, 한과 로마

세계사를 연구하다 보면 교류가 전혀 없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동일한 사건이 동일한 시간대에 발생하는 불가사의한 현상을 종종 접하곤 한다. 기원전 202년, 드넓은 바다를 사이에 둔 동양과 서양에서 각각 거대한 세계제국이 탄생했다. 바로 ‘한제국’과 ‘로마제국’이다. 두 제국은 마치 서로 약속이나 한 듯 거의 같은 시기에 탄생했다.

나는 로마제국이 제국으로서의 조건을 충족하게 된 시점을 카르타고를 상대로 펼친 제2차 포에니전쟁의 승패를 가른 자마전투 때라고 본다. 이 역사적인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상대로 대승을 거둔 기원전 202년에 로마가 비로소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마전투야말로 로마의 향후 방향을 송두리째 뒤바꿔놓았으며 운명을 결정지은 터닝포인트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원전 202년 유라시아 동쪽, 즉 오늘날 중국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해하전투가 벌어진 것이다. 이것은 항우와 유방 사이에 벌어진 세기의 결전으로 ‘사면초가’라는 고사성어로 잘 알려져 있다. 항우가 이끄는 초나라 군대와 유방이 이끄는 한나라 군대의 대결은 초반에는 항우 쪽이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항우의 독불장군 같은 성격이 화를 부르면서 부하의 배신과 하극상이 끊이지 않다 보니 차츰 유방의 군대가 바짝 숨통을 조여 왔다. 결국 유방의 계략에 말려든 항우는 겨우 몇몇 부하만 거느린 채 가까스로 포위망을 뚫고 피신했다. 그러나 끝내 도망치지 못하고 우장강에서 스스로 목을 베 생을 마감했다고 전해진다. 항우의 죽음은 한제국 탄생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 해가 바로 기원전 202년이다. 이처럼 기원전 202년은 한제국과 로마제국이라는 동서 유라시아 세계제국이 거의 동시에 출사표를 던진 역사적인 해다.

로마제국과 한제국을 동시에 덮친 3세기의 치명적 위기

로마제국과 한제국은 존망의 기로도 같은 시기에 겪었다. 로마제국은 자마전투로부터 400년이 지난 뒤 ‘3세기의 위기’라고 부르는 극심한 혼돈의 시기를 맞이했다. 한제국도 2세기 말에 일어난 황건의 난(184년) 이후 군웅할거 하는 ‘삼국지 시대’로 돌입했다. 참고로 3세기 거의 동시에 찾아온 절체절명의 위기를 로마제국은 위태위태하게 넘어간 반면 한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그렇지만 같은 해에 등장한 동양과 서양의 세계제국이 거의 같은 시기에 존망의 기로를 맞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흥미롭고 주목할 만한 ‘역사의 동시대성’이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왜 ‘역사의 동시대성’에 주목해야 할까

‘역사의 동시대성’을 얘기하면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비슷한 사건이 동시에 일어났다고 굳이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나요?”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린 지적이다. 실증사학의 관점에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우연의 일치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세계사를 통찰하는 안목’을 기르고 싶다면 얘기가 다르다. 관점을 달리 하면 역사의 동시대성은 충분히 깊이 궁리하고 탐구할 만한 주제다. 무릇 사람은 자신과 직접 관계가 있는 대상에만 관심을 보이기 쉬운 존재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중동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뭘까?

‘석유’ 때문이다. 이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석유는 현대인에게 중요한 연료이자 도구다. 그런 석유가 대부분 중동 지역에서 생산되고 우리는 비싼 비용을 치르고 그걸 수입해다 쓴다. 그러다 보니 국가나 개인 모두 중동 관련 이슈에 무관심해질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리고 우리는 미국 뉴욕이나 프랑스 파리, 혹은 영국 런던처럼 귀에 익숙한 도시에서 테러가 일어나면 역시 관심을 기울인다. 이유가 뭘까? 그 나라나 도시 역시 중동의 ‘석유’처럼 나의 삶에 직ㆍ간접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뭔가 중요한 요소가 있다고 본능적으로 믿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역사를 대하는 관점과 태도를 바꿔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나’를 기준으로 시간과 공간이 멀어질수록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무관심해지거나 흥미를 잃기 쉽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고대 이야기조차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는 각각 그 나라의 지나간 시간 위에 세워진다. 마치 벽돌 위에 새로운 벽돌을 차곡차곡 쌓아가며 튼튼한 집을 짓듯 역사라는 건축물도 시간 위에 시간이, 사건 위에 사건이 쌓여가며 완성된다.

그렇게 지어진 각 나라와 민족의 역사라는 건축물들은 ‘교집합’이 생겨나고 마치 도시의 광장처럼 누구도 독점할 수 없는 공공의 영역이 만들어진다. 예컨대 로마사는 이탈리아반도가 중심이기는 해도 유럽, 북아프리카, 중동 여러 나라의 역사가 뒤얽혀 있으며 공통분모를 가진 수많은 사건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수많은 교집합을 갖는다. 우리가 로마사를 제대로 공부하면 유럽사는 물론이고 아프리카사와 중동사까지 두루 꿰고 통찰할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다.

한편 오늘날 세계는 국경이 큰 의미를 갖지 않는 세상이 되었다. 국가의 틀을 벗어나 국제사회라는 무대에서 다른 나라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고 어울리며 살아가자면 그들의 역사를 기꺼이 배우려는 적극적인 자세와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또한 우리와 접점이 거의 없어 약간 생경하게 느껴지는 타국의 역사, 그중에서도 먼 과거의 역사에 흥미를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Deficiency ‘결핍(건조화)’이 문명을 탄생시켰다: 문명 태동부터 도시국가를 거쳐 민주정 탄생에 이르기까지

문명은 도시, 문화는 농촌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문명(Civilization)과 자주 혼동하는 단어가 있다. ‘문화(Culture)’가 그것이다. Culture은 라틴어 Colere에서 유래한 단어로 ‘경작하다’라는 의미다. 이로써 문화는 특정 지역의 자연과 풍토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반면 문명은 지역적 영향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전파된다. 즉, 지역성을 초월해 보편성을 획득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문화는 자연과 풍토의 영향을 받아 그 땅에서는 효력을 발휘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통용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문명은 농촌보다 도시와 관련이 깊다. 왜 그럴까? 인구가 밀집한 지역이 도시다. 이런 곳에 사는 사람들은 편의성을 추구한다. 한데 다른 도시에 사는 사람에게도 똑같이 쓸모 있지 않는 한 진정한 편의성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명이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대규모 ‘건조화’는 어떻게 문명 태동으로 이어졌나

문명이란 무엇인가? 학자마다 다양한 기준과 방식으로 문명을 정의하는데, 나는 ‘문자’를 기준으로 문명을 정의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본다. 문명은 문화와는 달리 지역성을 초월해 보편성을 획득한 개념인데, 그 보편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에 문자가 수행하는 역할이 매우 크고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자 못지않게 중요한 문명 조건이 있다. 바로 ‘건조화’다.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세계 4대 문명이 태동한 기원전 5000년 무렵부터 전 세계적으로 대규모 ‘건조화’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아프리카 북부에서 중동, 고비사막을 거쳐 중국에 이르는 드넓은 지역에서 ‘건조화’가 진행되었다고 한다.

지구가 건조화해가는 열악한 환경에서 인류는 어떻게 고도로 발달한 문명을 이룩했을까? 먼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인 ‘물(강)’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한곳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크고 작은 마을이 만들어지고 그 마을들이 통합되며 차츰 도시라고 부를만한 규모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 마을과 마을, 집단과 집단 사이에 물을 둘러싸고 분쟁이 자주 벌어졌다. 도시나 국가의 통치자는 이런 물 분쟁 문제를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해결해야만 했다. 그런 필요에 따라 물 분쟁을 방지하는 ‘물 사용 시스템’이 개발되고 정교하게 다듬어졌으며, 통치자와 지배 계층은 이런 사실을 후세에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기록할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문자가 탄생했을 것이다.

제대로 역사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일이다. ‘왜 문명이 탄생했는가? / 왜 도시가 생겨났으며, 문명은 어떻게 도시의 발달로 이어졌는가? / 왜 사람들은 한곳에 모여 살았는가?’ 이런 식의 ‘왜’라는 질문에 답하는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문명 태동과 발전에 이르는 일련의 흐름의 본질이 ‘건조화’에 있음을 알 수 있다.



Huge Migration ‘대이동’하며 세계지도를 다시 그린 민족들: 게르만족ㆍ몽골제국의 드라마틱한 역사, 대교역시대부터 난민 문제까지

‘입력’과 ‘출력’ 개념으로 통찰하는 민족이동

민족이동은 인류사와 함께 시작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후 영토를 상실한 유대인의 방랑, 영국인ㆍ프랑스인을 비롯한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으로의 대이주, 노예무역, 전쟁 난민 등 다양한 형태로 오늘날까지 민족이동은 이어지고 있다. 민족이동은 왜 일어나는 걸까? ‘출력’과 ‘입력’ 개념으로 살펴보면 이해가 쉽다. 먼저 출력의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 민족이동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요인은 ‘식량 부족 문제’였다. 식량 부족은 왜 생기나? 여기에는 단 한 가지로 압축해서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원인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갑작스러운 인구 폭증과 한랭화나 건조화와 같은 이상기후가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기후 변동에 따른 이동은 처음에는 소규모 인원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건조화가 일어날 때는 물이 풍부한 곳을 찾아, 서서히 한랭화가 일어날 때는 따뜻한 곳을 찾아 소규모 집단 형태로 이동한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극심한 가뭄이 들고 기근이 찾아오면 한자리에 터를 잡고 살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그야말로 민족이동이라 부를 만한 대규모 이주를 하게 된다. ‘출력’에는 기후 변동 외에도 신앙의 자유를 찾아 떠나는 이동, 노예매매처럼 인위적인 강제 이동, 전쟁 난민 등이 있다.

다른 나라에서 온 난민을 받아들이는 쪽의 상황도 제각각 다르다. 그들을 수용할 충분한 공간이 있는지, 정치가 안정적인지, 종교적으로 관용성이 있는지 등 구체적인 환경에 따라 허용 범위는 크게 달라지는데, 대규모 이동은 많은 경우 분쟁으로 비화하곤 한다. 한편 다른 지역이나 나라에서 이주해온 사람 중에는 어디에서도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해 이리저리 떠도는 사람도 생긴다. 말하자면 그들은 정착민이 아니라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기원전 12세기 무렵 기승을 부린 바다 민족처럼 뭍을 벗어나 바다에서 주로 생활하며 그때그때 필요한 물자를 도시를 침범하여 약탈하는 민족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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