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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목격자

앙투아네트 메이 지음 | 생각의힘
전쟁의 목격자

앙투아네트 메이 지음

생각의힘 / 2019년 9월 / 436쪽 / 16,000원





매기를 달리게 하는 것



어린 시절

마거리트 히긴스(매기)는 1920년 9월 3일 홍콩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가정부에게서 중국어를 배웠고, 어머니에게서 격식을 갖춘 프랑스어를 배웠으며, 아버지에게서는 군인들이 쓰는 자유로운 프랑스어를 얼마간 배웠다. 일찌감치 국제적으로 활동할 운명이었던 것이다.

대학에 가다

이후 매기는 캘리포니아 대학교에 입학했고, 과학과 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대학신문 《데일리 캘리포니언》(이하 《데일리 캘》로 표기)에 기자로 합류했다. 그리고 1940년 말쯤 그녀는 자기가 《데일리 캘》에서 공을 세웠기 때문에 《데일리 캘》에서 고위직을 따낼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고대했던 발표는 참담한 실망을 안겨주었다. 매기는 편집부장, 편집국장, 도시 담당 부장이 되지 못했다. 그녀가 맡게 된 야간 편집부장 직책은 지위가 낮았다. 쓰디쓴 일격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야간 편집부장으로서 자기 임무를 유능하고 조용하게 완수했다.

한편 졸업반 마지막 학기 때 레이니 레이드가 그녀에게 청혼했지만 매기는 그를 유약하다고 느꼈다. 그는 그녀에게 어울릴 만큼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대학에서 매기가 만난 많은 남자들 중에서 여전히 그녀가 동경하는 사람은 스탠리 무어였다. 스탠리는 매기가 신입생 때 철학에 흥미를 갖도록 자극을 준 조교였다. 매기는 스탠리를 강연장과 진보 성향의 집회에서 종종 만났다. 매기가 보기에 무어는 성공할 것처럼 보였다. 그는 1년 전에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이제는 하버드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1941년 매기는 문학과 과학에서 우등으로 학위를 받으며 졸업했다.



여기자



뉴욕으로

1941년 8월, 대학을 막 졸업한 마거리트는 달랑 7달러와 슈트케이스 한 개를 들고 뉴욕에 도착했다. 그녀는 신문사에서 일자리를 구해 궁극적으로는 해외 특파원이 되겠다고 결심하고, 《뉴욕 헤럴드 트리뷴》(이하 《트리뷴》)에 지원했다. 《트리뷴》의 도시 담당부장 엥겔킹은 캘리포니아 그녀의 대담성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성사 가능성이 희박한 약속만을 던졌다. “나중에 봐서.” 언제인지 모르는 그때를 기다리며 그녀는 다시 한 번 학생이 되기로 하고 컬럼비아대학교 저널리즘학과의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이후 어느 날 《트리뷴》의 컬럼비아 대학교 출입 기자 자리를 차지했던 같은 학과 친구인 모건이 “엥겔킹이 그러는데 자기는 여자는 고용하지 않는대.”라고 경고해 주었다. 또 모건은 자신이 《타임》의 유급 일자리로 옮기기 때문에 그 자리가 공석이 된다고 알려 주었다.

마거리트는 학과의 다른 남자들이 그 자리가 났다는 소식을 듣기 전에 《트리뷴》으로 달려가 엥겔킹에게 말했다. “여자 기자를 고용하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셨던 걸 알아요. 하지만 전 시도해야만 했어요. 제가 일을 아주 잘할 수 있다는 걸 알거든요.” “그래?” “그래요.” 마거리트가 진심으로, 열의를 담아 그리고 사람을 홀리는 듯한 매력을 발산하며 말했다. 하지만 엥겔킹이 침묵을 지키고 있는 동안 매기는 속으로 벌벌 떨고 있었다. 마침내 엥겔킹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 시작할 수 있겠나?”

신입 기자

마거리트가 뉴욕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오랫동안 기다려 왔던 스탠리 무어의 전화가 걸려 왔다. 두 사람은 만났고 연인 사이가 되었다. 한편 마거리트는 도시 담당 보도국에서 기자로서 기량을 숙달시키며, 해외에 파견되기 위한 준비를 했다. 러시아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하는 것 외에도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할 줄 알았고 대학에서는 독일어 수업을 들었다. 그녀는 자기 얘기를 들어주기만 하는 사람이라면 그 어떤 상사에게든 이 사실을 거듭 강조해 이야기했다.

어느 날 그녀는 야간 편집부장보인 글래처에게 “내가 좋은 종군기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라고 물어봤다. 글래처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억했다. “모두가 매기를 귀여워했어요. 대놓고 그녀를 노리기도 했고, 그렇지 않은 남자들은 적어도 아빠 같은 감정을 품었었죠. 정말 예뻤고 무척 엉성했거든요. 어쨌거나 나는 그녀를 격려했죠. ‘멋진 종군기자가 되고말고.’ 그런데 알고 보니 참모진은 마거리트에 대해 숙고해 보라는 이야기를 벌써 여러 차례 들었더라고요. 매기는 자기 사례를 사주(社主)의 부인이자 페미니스트로 알려진 헬렌 로저스 레이드에게 상신하라는 생각을 모두의 머릿속에 심어 놓았어요.” 그 이후 어느 날 엥겔킹이 “마거리트, 자네가 해외에 파견된다네.”라고 말했고, 마거리트는 종군기자 일곱 명과 함께 퀸메리 호에 올라 프랑스 파리로 갔다.



종군기자



실패로 끝난 결혼

마거리트는 배에서 내려 스탠리 무어의 품에 안겼다. 그 당시 스탠리는 러시아에서 햄턴코트 근처에 있는 유럽 공군 본부로 전출돼 있었다. 1년 이상 떨어져 있던 이 부부는 너덜너덜해져 있던 결혼의 헤진 조각들을 이어 붙여 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본부가 파리 외곽의 생제르망으로 옮기면서 스탠리도 따라간 11월쯤에 둘은 거의 완전히 헤어졌다.

드디어 전쟁터로

몇 주가 흘러 마거리트의 연줄 네트워크가 만들어지자 그녀의 노고는 국제적 반향을 일으킨 독점 기사로 보답을 받았다. 주목을 받는 것은 기뻤지만 바라던 최전선 활동 취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연합군이 라인 강을 따라 집결하는 동안, 마거리트는 자신이 파리에 갇혀 있다고 느꼈다. 교전을 목격하거나 그 내용을 보도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 같아 초조했다.

그런데 마침내 연합군이 라인 강을 건너자, 제8공군이 과거에 심하게 폭격을 퍼부은 독일 내의 지역을 살펴보기 위해 지프 두 대에 기자 여섯 명을 태워 보낼 것이라고 발표했다. 마거리트가 전쟁을 취재하려면 지금이 유일한 기회였다. 공식적인 대답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재정비된 파리판 《트리뷴》의 편집부장이자 마거리트의 상관인 조프리 파슨스는 그 기사를 자기 몫으로 배정했다.

기자 시찰단이 떠나기 전날 밤, 마거리트는 슬퍼하고 있었다. 와인을 한두 잔쯤 마신 그녀는 늦은 뉴스 송고를 마치기 위해 사무실로 돌아왔다. 밤 11시에 전화가 울렸다. 조프리 파슨스였다. 파리판 《트리뷴》에 위기가 발생했던 것이다. “아직도 가고 싶나?”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마거리트는 비행기에 올랐다. 1945년 3월, 그녀는 전쟁터로 향하고 있었다.

다하우 강제수용소 해방

마거리트와 특파원들을 태운 쌍발기는 다름슈타트에 착륙했고, 기자들은 바로 전투 지역으로 향했다. 취재 후 마거리트는 “제7육군과 함께” 혹은 “뮌헨으로 가는 길” 등을 송고했다. 평생 품어 온 야심이 실현된 것 같았다. 하지만 초기의 승리감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마거리트가 목격한 대혼란, 황량함, 절망은 감당하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마거리트가 전투 지역에서 연합군과 독일군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처음 목격했을 때,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1차 세계대전의 모험 이야기는 마음의 고통을 더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부상당한 군인 대다수가 그녀의 또래거나 더 어렸다. 총상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이 동상으로 손과 발을 잃었다. 프랑크푸르트로 들어가면서 그녀는 폭격에 의해 뒤틀린 강철 대들보도 보았고,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전쟁이 끝났다는 걸 믿을 수 없어 하며 멍하니 걸어 다닌 모습도 보았다.

이후 프랑크푸르트가 안정을 찾아가자 마거리트는 마지막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동쪽으로 옮겨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마침 빠르게 진격하는 패튼 장군의 탱크 부대에 휘발유를 보급하기 위한 화물 수송기를 얻어 타고, 그녀는 바이마르 활주로에 착륙했다. 그곳에서 마거리트는 제3군의 지프 운전사를 설득해 부헨발트 근처까지 갔다. 마거리트는 패튼 장군의 제3군이 강제수용소를 해방시킨 지 겨우 몇 시간 후에 그곳에 도착했다. 4월의 청명한 아침이었다. 회의를 품고 강제수용소로 접근하면서, 그녀는 당시에 파다하던 섬뜩한 소문에 영향 받지 않겠노라고 단단히 마음먹었다.

하지만 집단 처형의 희생자들과 간수들의 이름과 날짜와 세부사항들을 수집하고 나서, 그녀는 예전에 들었던 경악스러운 이야기들이 부헨발트에서 실제로 저질러진 범죄의 규모에 비하면 별것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마거리트는 이렇게 기록했다. “시체들이 트럭과 카트에서 쏟아져 나왔다. 또 다른 시체들이 모퉁이마다 혹은 건물에 기대어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들은 죽음에 이를 때 겪었던 고통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자세를 가릴 만한 옷가지도 없이 내팽개쳐졌다. 그 공포를 강조하기라도 하듯, 봄밤에 내린 서리가 두들겨 맞거나 그게 아니면 죽을 때까지 고문당한 희생자들의 눈과 코에서 흘러내린 피와 노란 점액 방울까지 섬뜩한 종유석 모양으로 얼려 버렸다.” 마거리트는 다하우 강제수용소 해방에 의도치 않게 참여하고서 쓴 기사로 기자로서 첫 상을 받게 되었다.

스물여섯 살의 베를린 지국장

1947년은 마거리트에게 끝이자 시작의 해였다. 그녀는 3년 동안 해외 특파원으로 있었다. 여전히 모험에 열광하고 기회를 노리느라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지만, 옛 친구들과 친숙한 장소들에 대한 예상치 못한 갈망도 느꼈다. 향수병 때문에 감각이 거의 마비될 지경에 이르자, 마거리트는 항복했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요청했고 그 요청은 받아들여졌다.

이후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 마거리트에게 《트리뷴》의 베를린 지국장으로의 승진 명령이 났다. 그녀는 당시 스물여섯 살이었다. 베를린에서는 처음에 프레스클럽에 숙소를 얻었던 다른 특파원들이 이제 군대가 그들을 위해 징발한 빌라에 빠르게 배정되고 있었고, 마거리트도 원래 독일 화학기업연합 간부의 일본인 정부를 위해 지어진 집이 배정됐다. 친한 친구이자 당시 《뉴스위크》 베를린 지국장이었던 짐 오도넬과 《뉴스위크》 지국의 이인자 토니 하워드가 옆집에 살았다.

마거리트의 최대 라이벌인 《뉴욕타임스》의 지국장인 드루 미들턴은 《트리뷴》이 더 강력한 경쟁 상대를 보내지 않았다며 대놓고 즐거워했는데, 이 사실은 당연히 마거리트의 귀에도 들어갔다. 미들턴은 신문판에서 그녀보다 훨씬 대단한 경력의 소유자였고 직원도 아홉 명이나 거느리고 있었다. 반면 마거리트에게는 비서 한 명이 전부였다. 맞수가 되기 위해 마거리트는 12시간, 14시간, 때로는 18시간을 쉬지 않고 일했고, 완전히 지쳐서 타자기 앞에서 잠들기도 했다. 한편 마거리트는 미들턴의 조수 에드워드 A. 모로와 로맨틱한 관계가 되었다. 이 관계는 많은 면에서 마거리트에게 이득이었다. 무엇보다 이들의 관계가 미들턴에게 불안감을 불러왔다는 점이 특히 이로웠다. 하지만 이들의 관계가 그저 편의에 의한 것이었다고 치부하는 것은 마거리트와 모로 둘 다에게 불공정한 일이다. 모로는 아주 잘생겼고 마거리트가 끌렸던 수많은 남자들처럼 모험가였다. 마거리트는 폭동, 총격, 유괴가 난무했던 베를린에서는 중요한 자질이었던 그의 담력을 존경했고, 그가 이 업계에서 가장 뛰어난 탐사기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드루 미들턴이 모로를 바르샤바로 전출시켰을 때 갑작스레 끝났다. 야심만만한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이 마거리트는 잠자리에서 나누는 대화가 대단한 이점이 될 수 있음을 알았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외모와 매력은 틀림없는 자산이었다. 달콤하기 그지없는 접근법은 마거리트의 세련된 집이 이상적인 무대를 제공했던 “목적성 파티”에서 자주 표출되었다. 손님들은 정치ㆍ군대ㆍ외교ㆍ언론의 고위 인사부터 점령국들의 공직자까지 아울렀다. 이후 그녀는 도쿄로 발령받았다. 마거리트는 그곳에 새로운 시각이, 그녀의 시각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다.



전선에서 홀로



전화위복

1950년 4월 마거리트는 도쿄에 도착했다. 당시 나이는 스물아홉이었다. 도쿄에 온 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을 때, 그녀는 한국이 5월 30일에 총선을 치른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 나라의 4,000년 역사 이래 최초의 총선거가 될 터였다. 그녀는 알려진 게 거의 없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호기심이 동했고, 이 나라에 대해 감을 잡으려고 선거 며칠 전에 한국에 도착하도록 스케줄을 짰다. 마거리트가 극동아시아에서 쓴 첫 번째 기사를 한국에서 송고한 것은 앞날을 예고하는 듯했다. 그 기사가 1면에 실린 것은 잘 알려지지 않은 나라, 한국에 대한 그 당시 미국의 관심보다는 마거리트의 추종자들이 늘어나고 있었다는 걸 나타낸다. 기사가 실린 날짜는 1950년 5월 29일이고 헤드라인은 다음과 같다. ‘기자, 한국을 갈라놓은 국경으로 가다: 빨갱이들이 말과 포탄으로 싸우는 현장을 발견’

마거리트는 38도선 바로 아래 있는 외떨어진 산골마을 개성이 어떻게 공산주의 북한의 지속적인 공격 목표가 되었는지에 대해 썼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요 며칠 동안 공격 활동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전날 밤 공산주의자들이 포탄 11개를 마을로 탈취해 갔고, 이어서 산꼭대기에 설치한 확성기로 위협적인 장광설을 쏟아 냈다. 개성 사람들은 선거가 북한이 위도선을 따라 공격을 퍼부을 신호가 될 것이며 공산당 공군이 모든 투표소를 폭격할 거라는 경고를 들었다.

마거리트는 이 지역을 관장하는 남한의 연대장 전성호 대령을 인터뷰했다. 그는 게릴라들의 위협보다 경계 설정 조건을 더 염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개성을 굽어보는 전략적 산봉우리들 대부분이 북한으로 이양되어서, 개성에는 유리한 위치가 위도선 이남으로 딱 한군데밖에 없었다. 마거리트는 가장 가까운 공산당의 사격 진지가 겨우 70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험준한 요새까지 그와 동행했다. 모래주머니로 주의 깊게 방호벽을 쌓은 남한 군인들은 공산주의자 형제들을 불러내고 있었다. “38선 보초들아, 이리 나와 우리 얘기 좀 들어 봐라. 이기는 편에 붙는 게 최선이라는 걸 납득시켜주마.”

이후 키스 비치와 함께 쓰는 일본 사무실로 돌아온 마거리트는 동료의 인사가 떨떠름한 것을 알아챘다. 비치는 예전에 그녀의 전임자인 사람 좋은 앨런 레이먼드와 사무실을 함께 썼었다. 비치가 회상했다. “레이먼드와 나는 서로를 칭찬했어요. 매기는 좀 달랐죠. 내가 전화를 들 때마다 그녀는 그 자리에 그대로 버티고 앉아 내가 정확히 누구와 통화를 하는지, 무슨 일에 관한 것인지, 자기가 따라갈 수 있는지 등을 시시콜콜 알아내려고 했어요. 견디다 못해 사무실을 그녀에게 줘 버리기로 결정하고 나 혼자 쓸 다른 공간을 찾고 있었어요. 그러다 우리 둘이 함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내던져진 거죠. 나와 마거리트가 서로 으르렁대는 사이였을지는 몰라도, 굉장히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있었어요. 바로 전쟁을 취재하겠다는 열정적이고 욕망이었죠. 그런 취재 임무는 아무 때나 찾아오는 게 아니니까요.” 그런데 그들에게 큰 기회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찾아왔다. 미국이 이 충돌 상황에 뛰어들어야 할 의무는 없었다. 대한민국과 공식적인 동맹을 맺지 않았던 것이다. 군 파병에 관한 결정은 마거리트가 교전 지역으로 들어간 이틀 뒤까지도 계류 중이었다. 마거리트는 마지막으로 남은 미국 민간인들을 대피시키기 위한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갔다. 함께 탄 사람은 키스 비치, 《타임》의 프랭크 기브니, 《뉴욕타임스》의 버튼 크레인이었다.

한국전쟁을 취재하다

한국에 착륙한 비행기에 미국인 피난자들을 가득 채우고 난 후, 조종사가 마거리트와 다른 특파원들에게 물었다. “정말로 여기에 남고 싶습니까?” 대답은 만장일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세계적인 특종을 공유하게 됐다는 것을 잘 알았다. 그들은 남한에 발을 들인 최초의 특파원들이었고 수도로 향하기만을 바랐다. 이번만큼은 교통수단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남한을 떠나는 미국인들이 차량을 버려두었기 때문이다. 비치와 마거리트는 반짝거리는 빨간색 스튜드베이커를 골랐고, 기브니와 크레인은 지프를 타고 뒤따랐다. 해질녘이었고 그들이 서울을 향해 가자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멀리서 기관총 소리가 들렸다. 길은 반대 방향을 향해 움직이던 피난민으로 꽉 막혀 있었다. 갑자기 다가오는 미국인들을 알아보고는 곧 구출될 것이라 믿은 피난민들이 환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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