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 경제사
권은중 지음 | 인물과사상사
음식 경제사
권은중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9년 9월 / 312쪽 / 15,000원
음식은 어떻게 역사를 움직였나
음식, 역사를 움직이다
인류의 역사는 상당 부분 음식과 연관되어 있다. 정보 통신이 발달했다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미국 식품 브랜드 코카콜라와 맥도날드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그리고 페이스북에 가장 많이 포스팅된 내용도 음식이다. 유튜브와 인스타그램도 비슷하다. 우리나라 방송도 ‘먹방’ 일색이다. 왜 음식이 인간의 역사를 움직였을까? 그것은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곡식과 고기 같은 음식이 인간이 소비할 만큼 충분하지 않은 재화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경제적 이유였다.
인류는 언제나 배가 고팠다. 과학과 인권 의식이 발달했다는 지금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2005년 기준, 인류의 7분의 1에 이르는 8억 5,000만 명이 굶주리고 있으며, 10세 미만 어린이가 5초에 1명씩 굶어 죽고 있다. 인류가 배가 고픈 것은 분배 탓도 있지만, 일차적으로 식생 탓이다. 태양에서 8분 만에 지구에 도달하는 빛은 공평하지 않다. 적도와 극지에 내리쬐는 햇빛의 양이 다르고, 당연히 각 지역에서 자라는 식물도 다르다. 매콤하고 시큼한 후추는 인도에서는 누가 키우지 않아도 자라지만, 유럽 농부는 정말 열심히 밭을 갈아도 키워낼 수 없었다. 인도가 근대까지 세계경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풍부한 식생에서 오는 향신료와 염색 기술 덕분이었다.
태양 에너지의 편차는 강수량 차이를 만들었다. 적도 부근 태평양과 인도양의 뜨거운 바다에서는 엄청난 양의 습기가 발생하고 이 습기 때문에 몬순기후가 생겼다. 인도와 중국과 동남아시아인들은 때가 되면 닥쳐오는 풍부한 강수량을 이용해 벼를 키웠다. 벼를 물속에서 키우면 잡초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이들은 이양법을 개발했고 생산량은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중국 남부의 쌀 생산량은 청동기시대 북방 민족에 견주어 출발이 늦었던 중국을 동아시아의 패권 국가를 넘어 세계의 패권 국가로 성장시키는 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이런 생산력은 중국의 절대왕권을 탄생시켰고, 분서갱유로 대표되는 비효율적인 정치 시스템은 청나라가 망한 1912년까지 지속되었다.
밀밭에서 길 잃은 서양, 바다로 나서다
기후와 토양을 가리는 밀의 속성 때문에 유럽의 먹거리는 동양처럼 풍족하지 않았다. 특히 밀의 씨앗을 가루로 만들기까지는 상당한 기술 발전이 필요했다. 완벽한 제분은 스위스인이 증기기관을 이용하기 시작한 1800년대에나 가능했다. 동양의 곡창지대에 견주어 북쪽에 있는 유럽은 편서풍의 영향으로 연중 비가 내리는 서안해양성기후를 보인다. 이런 기후에서는 풀이 잘 자라 유럽은 목축으로 곡식 부족을 충당했다. 그러나 밀은 단위면적당 생산력이 쌀에 견주어 낮기에 왕권 국가를 설립하기 어려웠고, 백성들의 국가 개념도 약했다. 국가란 유럽이 신대륙을 발견한 뒤 약탈과 학살로 이룬 자본축적을 통해 산업혁명이 시작되면서부터 생겨난 개념이다.
후추로 시작된 자본주의
유럽에서 낙후된 곳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이었는데, 포르투갈은 인도양을 통해 후추의 나라 인도로 가는 항로를 발견했고 스페인은 신대륙을 발견했다. 이들이 애초 신대륙에서 기대한 것은 후추와 설탕이었지만 도미니카에서 금이, 볼리비아에서 은광이 발견되면서 생각이 바뀐다. 두 나라는 신대륙에서 발견된 금은보화를 유럽으로 퍼 날랐지만 경제는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망가졌다. ‘부자의 저주’에 빠진 것이다. 금과 은이 쏟아져 들어오자 스페인의 물가는 폭등했다. 이렇다 할 경제적 성장을 이루지 못했던 스페인으로서는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고물가였다. 사람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없는 살림에 숱한 전쟁을 벌이다 보니 스페인 왕실은 군인에게 월급을 주지 못했다. 결국 스페인은 1588년 영국-네덜란드 연합군에게 패배한 뒤 유럽의 주류 대열에서 사라졌다.
16세기 초 유럽의 패권 국가였던 스페인의 허망한 패망은 유럽 각국에 많은 시사점을 주었다. 금은ㆍ귀금속의 유입으로 스페인의 물가가 오른 점을 감안해 물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고, 자국의 산업을 키워 금은 보유량을 늘려나가는 경제정책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금과 은이 국가 부의 원천이라는 중금주의가 시작되었고, 각국의 군주는 금은을 획득하려고 금광과 은광을 개발하는 한편 식민지 경영에 나섰다. 그러나 이런 정책은 국내 화폐가치의 하락(물가 상승)을 가져와 국내 산업의 발달을 막았다. 이에 따라 수출을 늘려 금은을 확보하고 무역 흑자를 내려는 중상주의가 등장했다.
중상주의 정책에 따라 설탕과 면화를 중심으로 한 중계무역은 더욱 활발해졌고 식민지를 확대했으며, 왕족이 아닌 상인들의 자본축적이 시작되었고, 이들은 왕과 귀족을 견제하려고 은행을 설립했다. 국가는 이제 전쟁을 하려면 자본가에게 허락을 맡고 채권을 발행해야 했다. 이는 1694년 영국의 중앙은행인 영란은행이 설립된 배경이다. 자본가는 더 나은 생산물을 싸게 만들고 싶어졌고, 증기기관을 이용한 각종 기계를 고안하면서 산업혁명이 시작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지금까지 200여 년은 350만 년 인류사에서 보면 매우 짧은 시간이지만, 민주주의, 노예해방, 전기, IT 등 인류가 이룬 대부분의 위대한 성취는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24시간을 놓고 비유하면 23시 59분에 모든 일이 일어난 것이다.
음식의 역사는 혀로 배우는 경제사
이처럼 음식은 인류 역사를 끌어 움직이는 기관차 역할을 했다. 빛 에너지의 양이라는 물리적 차이에서 나온 식생의 차이는 서양과 동양의 차이를 가져왔다. 그 차이는 서양이 500년간 세계를 지배해온 주요한 이유가 되었으며 아직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옥수수와 감자를 먹던 중남미의 문명은 아예 멸망해 버렸으며 노예제도에 신음했던 아프리카는 지금도 고통에 갇혀 있다. 물론 인간의 역사가 전부 음식 탓은 아니다. 유목민이던 몽골이 대제국을 건설한 것이나 미국이 IT 산업으로 세계 정보 통신 플랫폼을 사실상 장악한 것은 음식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미국의 IT 기술은 세계의 두뇌를 빨아들이는 미국의 이민 정책에서 원인을 찾아야 한다. 애플의 설립자 스티브 잡스의 아버지는 시리아 출신이다. 그런데 미국 이민은 유럽 대륙에서 벌어진 세계대전으로 불이 붙었고, 세계대전은 식민지 쟁탈전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식민지 쟁탈전의 신호탄은 가난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쏘아 올렸다. 그들이 바다로 나선 단초는 후추였다. 음식 역사의 뒷면에는 이처럼 경제 논리가 빼곡하다. ‘밥이 하늘이다’라는 말에서 보듯 우리의 정신세계까지 지배하고 있는 쌀을 비롯한 곡식과 인류의 가장 오래된 기호품인 차와 커피 그리고 역사를 쥐락펴락했던 향신료와 같은 음식에 대한 역사는 사실상 경제사다. 태양 아래 모든 것이 경제로 설명될 수 있지만, 음식처럼 인간에게 피부로 느껴지는 경제 대상은 없다. 당장 김장철에 배춧값만 올라도 난리가 일어난다.
앞으로 쌀ㆍ밀ㆍ옥수수ㆍ보리 같은 곡식, 후추와 설탕, 육류(물고기와 소고기), 햄버거 같은 가공식품 등으로 인류의 경제사를 설명해보려고 한다. 이런 익숙한 음식이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를 움직여왔으며 지금도 인류 역사를 만들고 있다. 음식으로 경제사를 풀려는 이유는 간단하다. 음식의 역사는 잊을 수 없다. 누구도 끼니를 거르지는 않고, 자신이 먹은 끼니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이 글이 독자에게 통찰력이나 영감을 줄 것이라고 장담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혀로 배우는 경제사는 쉽게 잊히지 않는다는 점은 확실하게 약속한다. 음식으로 푸는 이야기는 머리가 아니라 몸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밀이 선물한 가난, 자본주의를 낳다
밀 vs 쌀
밀과 쌀은 같은 볏과 식물이지만 전혀 다른 얼굴을 가졌다. 쌀이 뜨겁고 감성적이라면 밀은 차갑고 이성적이다. 이런 차이는 두 곡식의 식물학적 성질에서 기초한다. 밀은 보리와 마찬가지로 겨울에도 잘 자란다. 반면 쌀은 뜨거운 여름의 산물이다. 밀은 보리에 견주어 물이 많이 필요하지만, 쌀처럼 장마 같은 집중호우가 필요하지 않다. 쌀과 밀은 이런 식물학적 특징보다 먹는 사람 때문에 대비되었다.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지만 두 곡식은 대체로 동양과 서양을 나누는 기준이 되어왔다. 인도에서부터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인 일본까지는 쌀을, 그 서쪽으로는 밀을 주식으로 해왔다.
동양과 서양이라는 진영을 대표하는 밀과 쌀은 세계 역사를 이끌어온 쌍두마차였다. 초기에는 서양의 인종주의 지식인들조차 인정하듯이 쌀이 앞섰다. 쌀을 주식으로 먹는 중국과 인도는 16세기까지 세계경제를 주름잡았다. 하지만 1492년 신대륙 발견 이후 무게중심은 밀로 급격하게 바뀐다. 서양은 옥수수를 먹는 아메리카인을 90퍼센트 이상 절멸시킨 뒤 대부분의 세계를 식민 지배했다. 그전까지 밀을 먹는 중세 유럽은 동양은 물론 아랍에도 경제적이나 문화적으로 한참 뒤처진 ‘문명의 변방’이었다.
밀이 설계한 문명
밀을 먹는 지역의 사람들은 이런 격차를 어떻게 극복해서 번영의 열쇠를 차지하게 되었을까? 역사를 움직이는 결정적인 열쇠는 신이나 ‘보이지 않는 손’ 같은 형이상학적 힘, 위대한 지도자의 영도력이 아니라, 개인의 사유재산에 대한 욕망이고 사회 시스템이 이런 욕망을 어떻게 수용하느냐였다. 서양은 동양보다 빠른 중세 때 이런 욕망의 필요성을 인정했다. 반면 동양의 지배층은 이 욕망을 인정하지 않았으며, 일부 이슬람 세력과 북한 등은 지금도 이를 인정하길 꺼리고 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신념이나 영도력은 초기 확산 속도는 빠르지만,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지속력이 떨어진다. 반면 자기 땅에 대한 농민의 집착과 경제활동에 대한 상공인의 자유의지는 꾸준한 방향성으로 역사를 움직였다. 왜냐하면 농민들은 늘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개인의 생각을 만드는 기초는 먹거리다. 곡식은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한다. 밀도 마찬가지다.
밀은 쌀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쌀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볏과 식물 가운데 가장 칼로리 높은 열매를 맺는, 부양 능력이 뛰어난 식물이다. 밀의 생산력은 쌀보다 한참 떨어진다. 쌀은 1헥타르 당 생산량이 밀에 견주어 1.7배나 많다. 거기에 쌀은 3모작까지 가능하며 수경 재배를 해서 논에 물고기를 함께 키운다. 심지어 공기 중의 질소를 고정해주는 녹조류까지 있다. 이는 유럽이 아무리 목축을 해도 중세까지 중국이나 인도의 상대가 되지 못했던 이유다. 결국 배고픈 유럽인의 살길은 땅을 떠나 바다로 나가는 것이었다. 물고기를 잡거나 무역을 해야 했다. 이렇게 살길을 찾은 대표적인 나라가 고대 그리스다. 그리스인의 주식은 보리였다. 보리에는 탄성을 만드는 단백질인 글루텐이 없어 빵을 만들 수 없기 때문에 죽으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보리죽을 먹던 그리스인에게 새의 얼굴을 한 이집트의 신과 종교는 우스꽝스러웠겠지만, 그들이 만드는 기기묘묘한 모양의 빵은 기적처럼 보였을 것이다.
슬픈 옥수수, 자본주의의 검은 피가 되다
우리는 모두 옥수수다
현대인의 혈관에는 옥수수가 흐른다. 한때 세계 최대 소비 곡식이던 쌀이나 밀은 옥수수에 밀린다. 중남미 안데스산맥이 원산지인 옥수수는 현대인과 끈적끈적한 관계다. 자본주의의 외양은 눈이 부실지 모르지만 현대인의 일상은 초라하다. 예를 들면 아침밥을 먹고 출근하는 사람이 점점 줄고 있다. 그런데 아침을 굶으면 과식이나 육식의 가능성이 높다. 고기를 먹어야 든든하다는 통념 탓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 사람의 고기 섭취량은 30년 동안 4배가 늘었다. 그런데 우리가 접하는 고기와 우유는 대부분 사료로 키운 가축의 살과 젖을 가공한 것이다. 그런데 가축의 사료는 대부분 옥수수로 만든다. 쌀이나 밀보다 싸기 때문이다. 덕분에 옥수수는 밀과 쌀을 따돌리고 지구상에서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곡식이다. 심지어 전체 생산 곡식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옥수수를 먹던 이들의 비극
옥수수가 인류의 역사 전면에 등장한 것은 1492년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인데, 두 대륙의 만남은 한쪽 대륙에는 완전한 비극이었다. 스페인 군인들에 의해 아메리카 대륙의 대표적인 국가인 아즈텍과 잉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반대로 서양인에게 신대륙은 기회의 땅이었다. 유럽인은 신대륙에서 가져온 귀금속과 노예무역으로 자본을 축적했고, 그 자본을 발판으로 산업화에 성공해 오늘날의 자본주의를 이루었다.
옥수수, 이보다 키우기 쉬울 수 없다
신대륙 사람들의 주식인 옥수수의 부양 능력은 쌀과 밀에 견주어 떨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안데스 지역에는 부양 능력이 가장 뛰어난 감자와 고구마까지 있었다. 농업생산력이 높은 옥수수를 먹던 아메리카인은 왜 유럽인과 맞서 싸울 만한 국가를 건설하지 못했을까? 신대륙 국가와 유라시아 국가의 가장 큰 차이는 신대륙 국가는 대부분 제정일치였다는 점이다. 비슷한 시기 유라시아 국가 대부분은 왕권이 신권을 누르고 있었다.
기원전 1400년, 중동의 히타이트가 최초로 도입한 철기는 유라시아 각지로 전파되었다. 유라시아는 청동기와 달리 싼 가격으로 많은 병사를 무장시킬 수 있는 ‘전쟁의 신’인 철기에 매료되었다. 한편 암흑의 시기인 중세가 끝나던 1300년대 유럽에서는 또 다른 신인 화약이 강림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백년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대포와 총이 전쟁에 등장하기 시작했고 직업군인인 용병이 나타났다. 총과 대포 같은 신무기는 페스트와 도시 발달로 중세 봉건제가 해체되는 상황에서 왕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귀족과 종교인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왕들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왕권을 강화했다.
옥수수를 위해 인간의 심장을 바치다
반면 신대륙의 지배 세력은 달랐다. 아즈텍제국과 잉카제국은 활발한 정복 사업으로 중남미의 넓은 지역을 차지했다. 대규모 정복 사업을 벌였지만 두 나라는 유라시아식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건설보다는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신 공양에 사로잡혀 있었다. 아즈텍은 1년에 2만 명가량의 사람을 제물로 바쳤고 이를 위해 전쟁을 벌였다. 유라시아인들이 쇠칼을 만들어 서로의 땅을 빼앗으려고 혈안일 때 농업생산력이 높은 아즈텍인과 잉카인은 왜 인신 공양에 빠져 있었을까? 학자들은 옥수수의 기적적인 생산 조건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옥수수는 밀이나 쌀처럼 노동 집약적 곡식이 아니다. 심지어 쟁기질도 타작도 도정도 필요 없다. 심는 법도 단순하다. 남자 농민이 큰 막대기로 땅에 구멍을 뚫으면 그 구멍에 부인이 씨앗을 심는다. 그리고 1년에 2번 씨앗을 심고, 심고 나서 50일 안에 열매가 열리는데, 1알을 심으면 보통 150알 이상을 거둘 수 있으며 심지어 800알을 얻기도 한다. 이것은 계절에 따라 7~8일 정도만 일하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약적 노동의 자유로움이 결국 지나치게 전체적인 신정국가에 이르게 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밑거름이 되다
콜럼버스에 의해 유럽으로 건너간 옥수수는 감자와 함께 근대적 자본주의를 태동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두 식물의 가장 큰 공은 빠른 식량화를 통한 인구 팽창이었다. 참고로 유럽에서 최초로 옥수수에 주목한 나라는 전쟁광 스페인이 아니라 전통의 부호 이탈리아였다. 베네치아를 비롯해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은 노동력 대비 높은 옥수수의 생산성에 매료되었고, 시칠리아에서 옥수수를 키워 식량으로 삼고 대신 옥수수에 견주어 2배 이상 비싼 밀을 시장에 팔았다. 그렇게 하여 옥수수는 자연스럽게 부국강병에 골몰하던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사유재산과 대의 민주주의라는 열망을 품고 미지의 땅인 미국으로 건너간 유럽인들의 주식 역시 옥수수였다. 아무튼 옥수수가 도입된 이후 서구에서는 소농의 경제력이 빠르게 향상되었고, 계몽주의 철학자 존 로크를 비롯한 사상가들이 등장하면서 사유재산 옹호론이 깊게 뿌리내렸다. 이후 개인의 재산권과 이를 토대로 한 시장 경제를 정부가 보장하면서 유럽에서는 각종 혁신이 들불처럼 번졌고, 이 혁신은 산업혁명의 핵심 동력이 되었다. 이처럼 같은 옥수수로 서양과 중남미는 전혀 다른 역사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