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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의 덫

칼 베네딕트 프레이 지음 | 에코리브르
테크놀로지의 덫

칼 베네딕트 프레이 지음

에코리브르 / 2019년 9월 / 624쪽 / 35,000원





대침체



기록된 역사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과학?기술적 창의성의 결여가 경제 성장에 결정적 걸림돌은 아니었다. 몇 개만 예로 들면 풍차, 말을 이용한 기술, 인쇄술, 망원경, 기압계 그리고 괘종시계는 전부 18세기 이전에 발명됐다. 한편 우리가 유의미한 기술 변동의 시작을 흔히 산업혁명의 결과로 보는 이유는 결국에 가서는 평균 임금의 대폭 인상으로 풀이할 수 있는 발전이 그때 처음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 기록이 비균일한 기술 진보 중 하나이긴 하지만, 경제적 관점에서 봤을 때 약간 과장한다면, 인류 역사의 99퍼센트는 대침체로 여길 수 있다.

산업화 이전의 기술 발전이 18세기 과학기술적 성취에 뒤따랐던 안락과 번영 같은 것을 왜 이룩하지 못했는지 조명하는 이론 중 하나는 산업혁명 이전의 세계는 맬서스의 덫(기술 발전이 인구 증가를 초래하고 이것이 결국 질병과 전쟁 등을 일으켜 다시 인구 감소가 일어나는 무한 반복적인 악순환)에 갇혀 있었다는 것이다. 맬서스의 덫에서 더욱 큰 번영이라 함은 단순히 늘어난 인구를 의미하며, 실질적인 1인당 소득 증가로는 이어지지 않았다. 맬서스의 시각이 부적절한 것은 아니지만, 영국의 생활수준은 느리기는 해도 1500~1800년 이미 향상된 바 있다. 알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산업혁명과 연관 짓는 도구의 대부분이 18세기보다 한참 전에 개발되어 널리 사용할 수 있었음에도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증기 기관 말고는 18세기에 “아르키메데스를 경악하게” 만들 만한 획기적 발명은 없었다.

산업화 이전 테크놀로지의 역사는 중요한 요점을 잘 보여준다. 바로 노동자 대체 기술에 대한 저항이 예외가 아니라 표준이었다는 것이다. 혁신은 18세기 이전에도 꽃피웠지만, 노동을 대체할 자본의 형태를 취하지 않았다. 아울러 그랬을 때는 보통 맹렬한 반발이 따라왔다. 그렇다고 이것을 기술적 후진성을 시사하는 쪽으로 받아들이지는 말아야 한다. 오히려 이것은 산업혁명의 일자리 대체 기술이 왜 좀 더 일찍 도래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는 데 정말로 도움이 된다.

결론: 1750년 이전의 경제 발전 속도가 더뎠던 것은 창의력이나 호기심 부족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산업화 이전의 일부 발명품은 산업혁명을 가능케 한 ‘도구의 물결’보다 거의 틀림없이 더욱 정교했다. 하지만 그저 기술적으로 독창적인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해서 경제 발전의 충분조건이 되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테크놀로지에 경제적 목적과 광범위한 사용이 있어야 한다. 경제학자 프리츠 마흘루프가 지적했듯이 “고된 노동은 인센티브를 필요로 한다. 번뜩이는 천재성은 그렇지 않다.” 번뜩이는 천재성은 물론 산업화 이전 시대에도 있었지만, 기계에 투자할 인센티브는 거의 없었다.

산업혁명 이전에 정치권력은 지주 계급이 확고하게 쥐고 있었다. 권력 구조는 농업의 발명으로 형성됐는데, 처음으로 식량을 저장할 수 있고, 토지를 소유할 수 있고, 개인이 상당한 잉여를 축적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재산권 개념과 그 권리를 유지할 수 있는 정치 구조를 탄생시켰다. 기사의 보호와 소작 노동의 맞교환은 불평등한 세상을 만들어냈고, 거기서는 발전보다 지대 추구가 더욱 벌이가 쏠쏠했다. 노동 대체가 고통, 사회 불안, 그리고 최악의 경우 현 정치 체제에 대한 도전을 유발할 것이라는 지배 계급의 두려움은 노동자 대체 기술이 저항을 받거나 심지어 금지되는 일이 많았음을 의미했다. 정치계의 권력자들이 발전으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잃을 게 더 많았던 이러한 역학 때문에 서구 세계는 사람들의 기능을 위협하는 기술을 강력하게 거부하는 테크놀로지의 덫에 계속 갇혀 있었다. 그런데 많은 사건이 혁신가들에게 유리하도록 정세를 일변시켰다. 민족 국가의 부상과 군주 간 경쟁 심화는 기술 발전을 억압하는 대가가 대단히 커졌음을 의미했다. 퇴보하는 나라는 머지않아 진보하는 나라에 추월, 아니 최악의 경우는 정복당할 것이었고, 이는 현 정치 체제의 유지와 경제적 보수주의의 공조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바꿔 말하면, 외부의 위협이 아래로부터의 위협보다 더 커졌다. 그래서 대체 기술에 저항하기 위해 있는 힘을 다했던 동직(同職) 길드(Craftguild)는 도시 간 경쟁이 커지면서 약화했다. 그런데 그들의 약화는 길드에 해를 끼쳤지만, 정부가 기업가와 발명가 편에 서는 것을 더 용이하게 해줬다. 데스멧, 그라이프, 파렌테는 다음과 같이 쓴다.

‘사법부와 행정부의 뒷받침이 줄어든 가운데 동직 길드는 신기술이 일자리를 위협하자 폭력적인 수단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폭동, 시위, 공공 기물 파손의 형태를 취한 이 격렬한 대응은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면서 더욱 빈번해졌고, 1811~1816년의 러다이트 폭동으로 최고조에 달했다. 이 폭력적인 대응은 위력의 징표가 아니라 약해져가는 길드 체제의 최후의 발악이었다. ……이것이 실제 일어난 사건이며, 노동 절감 기술의 도입을 차단하는 데 길드의 효과가 떨어짐에 따라, 영국이 주요 산업화를 거쳐 맬서스의 덫을 빠져나가는 것은 오직 시간문제였다.’ 영국 산업이 기계화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엘리트 지배 계급이 혁신가들 편에 서기 시작한 이후였다.



대분기



기계의 부상으로 노동자는 기술 발전에 반기를 들게 되었다. 산업혁명을 탄생시킨 테크놀로지는 주로 노동자를 대체하는 쪽이었고, 이것이 그것들에 대한 광범위한 저항의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치력이 전적으로 기계화로 득을 보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었다. 노동자는 대부분 정치력이 없었으므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한편 산업화는 공장제의 확립을 가능케 했으며 근대 세계를 탄생시킨 지속적 산업 팽창의 시대를 열었던, 현대인의 눈에는 소수의 사소한 발명품으로 보이는 것들로부터 시작됐다. 공장 이야기는 과학 이야기와 아주 흡사하다.

근대 과학을 갈릴레오 갈릴레이, 베이컨, 데카르트의 공적으로 돌리는 것은 터무니없겠지만, 그들은 마땅히 창시자로 여겨질 만하다. 이와 비슷하게 공장제의 과학기술적 기반이 출현한 것은 바로 리처드 아크라이트, 새뮤얼 크럼프턴, 제임스 와트의 시대에 가서였다. 공장은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한참 전에도 존재했지만 근대의 공장제-확연한 특징은 기계의 도입이었음-와는 구분해야 한다. 따라서 이 기계 발명가들은 동시에 근대 산업의 발명가들로도 여겨질 만하다.

과학의 진화처럼 공장제의 부상은 점진적이고도 순탄하지 않은 과정이었다. 산업혁명이 자립적 성장으로의 ‘도약’이었다는 경제학자 월트 로스토의 진술은 이후 실증적 분석을 통해 결정적으로 틀렸다는 것이 입증됐고, 이는 더 점진주의적인 해석을 내비친다. 산업혁명기에는 전반적인 성장이 느렸을 뿐 아니라 산업 생산량도 혁명이라고 할 만한 종류의 갑작스러운 급증을 겪지 않았다. 그리고 1750~1800년 1인당 소득 증가는 같은 세기의 상반기보다 빠르지 않았지만, 1870년 들어 영국의 1인당 소득은 1750년보다 82퍼센트가 더 높았다. 그에 해당하는 연성장률 0.53퍼센트는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느리다. 하지만 산업화 이전의 경제국들이 달성한 성장률보다는 상당히 빨랐다.

산업혁명의 거시경제적 영향은 경제적 혁명이라 부를 정도로 크지 않았지만, 1750년 이후 테크놀로지의 혁명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변인(變因)이 있다. 바로 1760년대에 연평균 특허 출원 수가 이전 10년에 비해 2배가 넘었고 이후로 계속해서 증가했다. 분명 일부 특허의 경제 관련성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이 있겠지만, 특허가 급증한 타이밍은 역사학자 애슈턴의 인상적인 다음 구절을 뒷받침한다. “1760년경 도구의 물결이 영국을 휩쓸었다.” 그때쯤 아크라이트의 수력 방적기와 와트의 증기 기관용 분리 콘덴서를 비롯한 산업혁명의 결정적 발명품이 다수 등장했고, 두 사람 모두 1769년에 특허를 냈다.

한편 경제적 혁명의 부재는 절대 수수께끼가 아니다. 단순히 더 나은 기술이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경제 성장이 더 빨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려면 폭넓은 채택이 필요한데, 산업혁명은 처음에는 집합적으로 전체 경제의 일부분을 차지하는 소수의 부문들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니까 초기의 산업혁명은 종합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경제사학자 마이클 플린이 설명했듯이 “통계로 얻을 수 있는 지식은 대단히 역동적인 소수의 부문들이 꾸준히 성장세에 있는 경제의 중첩 중 하나”일 듯하다.

통계학 상으로 이 부문들은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국민 생산에서 지극히 적은 비중을 차지할 뿐이었지만, 그것들의 성장은 기존의 전체 경제 성장률을 2배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참고로 산업혁명은 직물 공업에서 시작됐고, 그것은 노동자들이 가장 예민하게 기계화한 공장의 위력을 느꼈던 부분이다. 이 기계화는 경제사학자들이 서구가 나머지 세계보다 훨씬 더 부유해졌던 산업혁명 이후를 일컫는 대분기의 수레바퀴를 굴러가게 했다. 그런데 산업화 초기에 영국에서도 대분기가 일어났다. 임금은 정체하고, 수익은 급증하고, 소득 불평등은 하늘로 치솟았다.

결론: 초기 기계화에 영국 내부의 대분기가 수반되었다. 이 시기에 많은 시민의 생활수준은 정체되거나 악화하기까지 했고, 기술 발전의 혜택이 일반 국민의 주머니로 흘러 들어오는 것을 보기까지는 무려 70년이 걸렸다. 가령 수직 방직공들의 소득은 동력 직기의 확산에 맞춰 급속히 감소했고, 산업화 초기에 경제 성장에서 발생한 이득은 압도적으로 자본가들에게 돌아갔다.

산업화 이전 시대에는 창조적인 파괴로 인해 득은 거의 없고 실이 많았으므로 정치적 격변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군주들이 테크놀로지를 저지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러나 18세기가 되자 영국에서는 새로운 산업 계급이 강력한 정치 세력이 되었다. 기계는 영국 무역의 경쟁 우위에, 또 그에 따른 기업가들의 부에 중요했으므로 정치 지도자들은 기계 기술의 전파를 용이하게 만들기로 했다. 그것이 노동자들의 효용성을 희생시키며 이루어진다 해도 말이다. 더 중요한 것은 민족 국가 간의 경쟁 심화와 동직 길드의 정치력 약화였을 텐데, 이는 지배 계급이 기계화로 잃을 게 별로 없고 얻을 게 많아졌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정부는 성난 노동자보다는 산업의 혁신가와 선구자들 편에 서기 시작했다.

기계화한 공장이 가내공업제를 몰아내 장인 노동자들의 소득이 사라지면서 많은 사람이 기계에 반발했다. 러다이트들은 발전을 막아보려 최선을 다했으나 가망이 없었다. 정치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정치력은 그 밖의 다수에게는 불리하게도 발전에서 이득을 보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장악했다.

그러나 단기간은 장기간과 구분해야 한다.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끝나가던 몇 십 년 동안 새로운 성장 패턴이 등장했다. 생산성 증가가 증기의 채택과 더불어 가속화하자, 실질 임금도 동시에 증가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대부분 노동조합이나 정부의 임금을 인상하려는 중대한 개입이 전혀 없는 가운데 일어났다. 이유는 간단하다. 고전적인 산업화 시기 동안 테크놀로지는 기계화한 공장이 가내공업제를 몰아냄에 따라 기존 업무에서 숙련 노동자를 대체하는 자본의 형태를 취했다. 초기의 공장에 새로운 업무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거기에는 새로운 부류의 노동자가 필요했다. 방적기는 인건비가 거의 안 들고, 협상력이 전혀 없고, 통제하기도 비교적 쉬운 어린이들이 다룰 수 있게끔 설계되었다.

오늘날 발전한 로봇 공학이 그렇듯 기계를 다루는 아이들이 중간 소득 노동자를 대체했다. 반대로 이후 단계에서는 더 복잡한 기계를 도입하면서 공장에는 좀 더 숙련된 노동자들이 필요했고, 이들의 기능은 테크놀로지에 의해 증진됐다. 그리고 갈수록 규모가 커진 공장에는 더 많은 기술직과 좀 더 숙련된 관리 및 행정 인력이 필요했다. 테크놀로지의 변화는 대체 기술에서 활성화 기술로 바뀌었고, 노동자 숙련 기능의 가치가 높아짐에 따라 노동자의 협상력 증대에 기여했다. 근대적 성장 패턴의 도래가 기계에 대한 만연한 저항의 종식을 나타낸 것은 거의 우연이 아니다. 기술 변동에 대한 태도는 사람들이 거기서 혜택을 볼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지에 따라 형성된다.



대평준화



유럽의 다른 국가들은 산업화에 저마다 다른 접근법을 택했지만, 공통점은 영국보다 산업화가 늦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영국에서 이미 발명한 기술을 채택해 영국을 산업적으로 따라잡으려 애썼고, 이것이 산업화로 가는 각기 다른 경로를 취하게 만들었다. 프랑스에서는 혁명 시대에 아래로부터의 일촉즉발의 위협 때문에 정부가 노동자들의 반기계 시위를 영국의 지배 엘리트처럼 진압하지 못했다. 제프 혼이 말한 것처럼 그 결과 프랑스의 산업화는 지연됐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개입 확대-노동과 자본 사이의 상이한 이해관계를 중재했다-로 특징지어지듯 근본적으로 달라졌다.

프러시아에서는 영국처럼 무역에 대한 길드의 제약을 제거한 제도적 개혁이 산업화를 가능케 한 핵심이었다. 하지만 영국과 달리 프러시아에서는 처음부터 교육이 산업화에서 훨씬 더 큰 역할을 했다. 반면 영국에서는 증기 동력처럼 좀 더 기술 집약적인 기술이 작동하기 시작한 후기 산업화 단계에 가서야 교육이 중요해졌다. 프러시아에서는 이미 영국에서 발명된 기술을 필요한 숙련도를 갖춰 활용하기만 하면 되었으므로 교육이 초반부터 산업화에 더 큰 역할을 했다.

1870년대 시작된 2차 산업혁명과 더불어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테크놀로지의 주도권을 인수했다. 테크놀로지의 국경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이제 미국의 경험에 중점을 둬야 한다는 뜻이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반기계 저항이 종식되었냐는 것이다. 복지 제도의 부상은 틀림없이 실직의 경험을 덜 가혹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930년 미국의 복지 지출(실업 수당, 연금, 건강 보험, 주택 보조금 포함)은 국내총생산의 고작 0.56퍼센트에 불과했다. 물론 러다이트 정서의 상대적 부재는 어쩌면 노동자들이 더 나은 급료 및 근로 환경을 위해 투쟁하려 노조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합원들의 기능을 위협한다고 인식된 기술에 격렬하게 반발했던 산업화 이전 시대의 동직 길드와 달리 노조원들은 자신의 분노를 기계로 집중시키지 않았다. 미국이 산업 국가 중에서 가장 폭력적인 노동사를 가졌을 수는 있지만, 1870년대 이후 노동자들은 좀처럼 기계를 표적으로 삼지 않았다. 왜일까? 그 이유는 기술이 자신들한테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사람들이 여기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20세기 내내 러다이트 정서의 상대적 부재를 유발했다고 입증하기는 어렵지만, 기술 발전의 결과로 노동자들에게 실제 일어난 상황과 이러한 부재를 떼어놓고 설명하는 게 훨씬 더 어렵다.

우리는 신기술이 일자리를 파괴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하거나, 서류상으로는 똑같아 보이는 직업들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기술적 변동이 노동을 대체하는 유형이라면 생산성 증가만으로는 고용과 임금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상쇄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활성화 기술은 생산성을 증대시킬 뿐 아니라 노동 인력을 완전히 새로운 업무, 직종, 더 넓게는 산업으로 복직시킬 것이다. 경제학자 미셸 알렉소풀로스와 존 코언은 중요한 연구에서 1909~1949년 미국의 가장 위대한 발명은 주로 활성화 기술 유형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어떤 직업은 확실히 새 직업이 등장하면서 사라졌지만, 전반적으로 신기술은 고용 기회를 엄청나게 신장시켰다. 실제로 자동차ㆍ항공기ㆍ트랙터ㆍ전력 기계ㆍ전화ㆍ가전제품 등은 풍부한 신규 일자리를 창출했다.

두 사람은 내연 기관과 전기가 그 밖의 기술보다 일자리 창출에 더 기여했음을 입증했다. 노동력 절감 기계도 생산성에 비슷한 영향을 미쳤지만 그것들만큼 고용을 신장시키지는 않았다. 이는 전기와 내연 기관이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직종에 노동자를 배치시켰음을 말해주기도 한다. 따라서 경제학자들은 이 시기를 테크놀로지가 노동자한테 유리하게 작용한 때라고 결론 내리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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