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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카 유지의 일본 뒤집기

호사카 유지 지음 | 북스코리아
일본 뒤집기

호사카 유지 지음

북스코리아 / 2019년 8월 / 272쪽 / 15,000원





일본 들여다보기



바람직한 한일 관계는 가능한가?

<한일 관계사> 요약으로 보기: 고고학적 연구에 의하면, 기원전 4세기쯤부터 한반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7세기에 백제가 망해 많은 백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갔을 때까지, 100만 명에서 200만 명에 달하는 한반도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기원전 4세기에 일본 선주민의 인구가 약 7만 명으로 추정되므로 고대 일본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민족들보다도 한국인과 일본인의 유전자 DNA는 가깝다고 한다.

이후 일본은 한반도와 중국으로부터 선진문화를 수용해 발전해 갔다. 그런데 일본과 한반도, 중국 대륙과의 관계가 920년경부터 1400년대 초까지 단절되었다. 그 사이에 일본은 무사 사회가 되었고, 한반도에는 문인을 중심으로 한 조선이라는 나라가 건국되었다. 그러다가 1404년(조선 태종 4년), 약 500년 만에 수교했다. 이후 조일 관계는 양호했으나, 일본이 군웅이 할거하는 전국시대로 접어들면서 조선과의 관계가 사실상 다시 단절되었다. 16세기 말,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0만 이상의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했고, 전쟁은 7년간 이어졌다. 일본의 침략으로 당시 조선의 인구는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약탈당한 조선의 문물이 일본으로 많이 유입되었다. 히데요시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 정권은 조선의 국교인 성리학을 수용했고, 270년간 조일 관계는 역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평화적이었고 양국은 우호적 선린 관계를 구축했다.

그런데 서양 세력이 중국을 침략하기 시작한 19세기 중반에 조일 관계가 격변했다. 1868년 도쿠가와 정권을 타도하고 일본을 근대화시킨 메이지 정권은 한반도 침략을 국책으로 삼았다. 그들은 한반도를 일본의 영향 하에 둠으로써 서양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일본을 지키고 한반도를 일본의 대륙 진출의 발판으로 삼아야 한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여기에다 러시아가 남하하여 한반도와 일본을 장악하고 태평양으로 나가는 것을 우려한 영국과 미국이 일본을 지원한 결과 1910년에 일본이 한반도를 강제로 병합했다. 이후 1945년까지 일제강점기가 이어졌고, 그때의 문제가 지금까지 청산되지 않고 있어 한일 관계는 우호와 대립을 되풀이해 왔다.

1965년 한일 협정과 국교 정상화: 1965년 한국과 일본은 일제강점기를 청산하여 한일 간 국교를 정상화하기 위해 한일기본조약과 4가지 한일 협정을 체결했다.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이들 중 한일 청구권 협정이다. 이 협정에 따라 일본은 한국에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를 경제 협력 명목으로 지급하면서, 이것으로 양국의 국가와 국민의 청구권 문제가 최종적으로 해결되었다고 합의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 내에서도 국민의 청구권이 해결되었다는 부분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는 1991년부터 일본 국회에서 수차례에 걸쳐 ‘소멸된 것은 국가가 개인을 보호하는 외교 보호권이며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그리고 ‘배상 문제는 1965년의 한일 청구권 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입장도 밝혔다. 일본 정부의 이러한 입장 표명을 토대로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일본에서 소송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1965년 시점에서는 일본 정부의 무성의로 강제동원의 기록 등 자료가 부족했으나, 국교 정상화 이후 많은 자료가 일본에서 발견되면서 한국인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소송하는 데 힘을 보태주었다. 그들 중 한국인 피해자들 일부가 전범 기업 ‘후지코시’를 상대로 재판을 제기하여 대법원에서 판결 없이 화해가 이루어졌다. 일본 대법원이 화해라는 방법으로 한국인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을 인정한 것이다. 관부 재판이라 불린 위안부 피해 여성들에 대한 재판도 1심에서는 피해자가 승소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일본 법원은 ‘개인 청구권은 남아 있으나 1965년의 청구권 협정이 있으므로 피해자들은 구제받을 수 없다’는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2000년대 들어서 일본에서는 한국인 피해자들의 패소가 계속 이어졌다. 여기에 일조한 것이 일본의 국내법 제114호이다. 이 법은 일본 국내에서 한국인의 개인 청구권을 소멸시킨 법이다.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한국인의 개인 청구권을 소멸시키지 못하자, 일본이 국내법을 만들어 소멸시킨 것이다. 한국인 피해자들은 할 수 없이 무대를 한국으로 옮겨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고,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은 ‘일제강점기는 불법이므로 이로 인한 배상으로 해당 기업은 피해자들에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내용의 확정 판결을 내렸다.

일본의 경제 보복 원인: 이 판결에 대해 일본 정부는 ‘한국이 1965년의 청구권 협정을 어겨, 국제법 위반 상태가 되었다’고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18년 11월, 일본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의 질의응답 중 고노 다로 외상과 일본 정부 측 위원들은 야당의 예리한 질문 공세에 ‘개인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고,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배상 문제가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이후 말을 바꿔 ‘한국은 국가 대 국가의 약속을 어겼다’고 하면서, 그들이 주장하는 소위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하라고 줄곧 한국 측에 요구했다. 이후 일본 정부는 현재 소멸되었다고 스스로 말한 국가의 ‘외교 보호권’을 부당하게 발동하는 상황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 정부는 ‘이번 판결은 개인이 개인(기업)에 소송을 제기한 민사 사건이므로 국가가 재판 결과에 개입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하며 3권 분립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이처럼 외교 보호권을 부당하게 계속 발동하자, 2019년 6월 한국 정부는 일본 측에 일본 기업과 한국 기업이 참여하는 기금을 조성하여 한국인 피해자들을 구제하자는 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이 제안을 거부하고 한국을 무시하는 정책으로 돌입했다. 지난 6월 말에 개최된 G20 정상회담 때도 한국 측은 한일 정상회담을 요청했으나 일본 측은 이를 거부했다. 이후 일본 측은 외교적 해법을 계속 거부하면서 ‘한국이 국제법 위반 상태를 시정해야 한다’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는 상황이다.

2019년 7월 1일, 일본 정부는 갑자기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소재 3품목에 대해 한국에 수출 규제를 강화한다고 발표하더니 7월 4일부터 시행하기 시작했다. 수출 규제의 이유로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강제징용자 판결 문제 등으로 한국과의 신뢰 관계가 훼손되었기 때문’이라면서 수출 규제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자 판결에 대한 보복 조치임을 밝혔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도 같은 입장을 표명했고, 세코 히로시게 경제산업상도 보복 조치라고 자신의 트위터에 남겼다. 일본이 강제징용자 판결 문제를 풀기 위해 한국에 경제적 보복을 가했음을 여실히 드러났다.

그러나 국내외 여론이 악화되자 아베 정권은 말 바꾸기를 시작했다. 그들은 한국의 수출 관리에 문제가 있고, 일부 품목이 북한으로 유출될 가능성이 있어서 수출 규제에 들어갔다는 가짜 정보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 측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한국이 오히려 일본에서 북한으로 밀수출된 품목을 다수 폭로해 일본 정부를 난처하게 만들었다. 이후 일본 측은 다시 말을 바꾸고 한국의 수출 관리 시스템이 미흡하여 관리되지 않는 품목들이 많기 때문에 한국을 ‘백색 국가’에서 제외하겠다고 하면서 8월 2일 실행에 옮겼다. 이제 일본의 약 1100개 품목이 한국으로 수출될 때 심사가 강화된다. 이처럼 일본은 한국에 대한 부당한 이유를 들어 경제 전쟁을 감행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어떻게 볼 것인가?

수출 규제에 관한 일본 내 목소리: 아베 정권의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를 보는 일본 내 반응은 어떠할까? 일본 정치권의 반응을 보면 여당인 자민당은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에 적극 찬성이고, 자민당과 연립여당을 구성하는 공명당도 자민당과 거의 같은 입장이다. 일본의 야당 측인 입헌민주당, 사민당, 공산당 등은 모두 수출 규제에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러나 야당이라고 해도 중도보수인 국민민주당과 보수 성향이 강한 ‘일본 유신회’는 아베 정권의 수출 규제 조치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한편 일본의 산업계는 이번 수출 규제 조치로 일본 기업들이 입게 될 피해를 우려해 일본 정부의 조치에 신중을 요구하거나 반대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각종 경제단체들은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조치 철회를 요구하고 나서기도 했다.

아베 정권은 7월 1일부터 24일까지 수출 규제 조치에 대한 국민들의 의견을 이메일과 우편으로 접수했는데, 3만 통 정도가 모였다고 보도되었다. 일본 정부는 그들 중 70% 정도가 수출 규제에 찬성 의견이었다고 공표했다. 산업계나 경제 단체들은 모두 반대 의견을 보냈지만, 이런 결과에 대한 아베 정권은 공청회를 열지도 않은 채 이메일과 우편으로 받은 국민의 의견만을 수렴하여 8월 2일에 한국을 백색 국가에서 제외시켰다. 이메일과 우편을 보낸 사람들이 마치 일본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국민들 중 50% 정도는 ‘지지 정당 없음’이고 정치에 무관심한 사람들이다. 나머지 50% 중 절반이 혐한적인 견해를 갖고 있고, 나머지는 친한적인 사람들이다. 일본의 정치 무관심파는 여론조사에도 대답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 실제로 혐한적인 일본인들은 별로 많지 않다. 한국의 일본 제품 불매운동과 일본 여행 중단 움직임으로 벌써 일본의 한국 진출 기업들과 일본의 여러 관광지가 피해를 입기 시작하여 지방의 지사들이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의 반도체 관련 기업들 중에는 한국에 수출하는 기업이 많아 기업의 존립 자체에 위기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손자병법’의 나라, 일본을 연구해라



적을 이기는 것이 최고의 선이다

‘손자병법’에서는 전쟁을 하는 데 있어서 장기전은 금물이며, 단기전으로 속전속결하라고 이르고 있다. 일본의 경우 청일, 러일전쟁까지는 단기전으로 승리하여 유리한 입장에서 강화조약을 맺는 패턴으로 정착되어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 후반부터의 큰 전쟁에서 일본은 이 철칙을 깼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은 어쩔 수 없이 장기전에 들어가야 했고, ‘손자병법’의 원칙을 깬 일본은 결국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손자병법’의 철칙이 무너지면 자원이 없는 일본으로서는 미국을 비롯한 열강들에게 질 게 뻔하다. 그러면 왜 일본은 이를 알면서도 ‘손자병법’의 철칙을 깼을까? 일본은 그전에 커다란 나라들과 치렀던 여러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다 보니 오만해졌던 것이다. 앞의 전쟁에서는 ‘손자병법’의 원칙을 제대로 지켰기 때문에 이겼었음을 깜박 잊고서, ‘신의 나라’라서 전쟁에 이겼다는 착각에 빠진 나머지 오판을 하고 만 것이다.

또한 ‘손자병법’은 전쟁을 할 때는 자신보다 약한 상대와 싸우라고 가르치고 있다. 요시다 쇼인도, 후쿠자와 유키치도 서양과 싸우기 전에 약한 상대인 조선을 먼저 침략하자고 강력히 주장했는데 바로 손자병법의 이와 같은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행동방식이 일상 생활에까지 파급되어, 지금 일본 사회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힘없는 사람을 야비하게 괴롭히는 ‘이지메’로 이어졌다.

그 외에도 ‘손자병법’은 침략을 악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다. 오히려 타국을 침략하여 영토를 늘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손자병법’이다. 그래서 제국주의 시대 일본의 지도자들은 조선을 비롯해 아시아를 침략했던 일을 결코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어서 ‘침략’이란 영토 확장을 위한 병학적 전략이 성공한 결과일 뿐이었다. 일본 내에서는 ‘손자병법’을 상당히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의 문제는 침략성을 무조건 긍정하는 병법의 논리들에 대해 거의 비판을 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생겨난 ‘주자학’은 한국에서 더 깊이 발전되어 한국의 국교까지 되었다. 한편, 중국에서 유교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손자병법’은 일본에서 더욱 발전되어 일본 사상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같은 곳에서 나온 두 사상이 나뉘어져, ‘손자병법’을 택했던 일본이 ‘주자학’을 택한 한국을 침략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역사는 냉혹하다. 병법에서는 종교와 윤리, 도덕은 가르치지 않는다. 다만 잘 싸우는 방법, 그리고 자국의 발전을 위해 상대를 누르는 각종 기술만 알려준다.

역사적으로는 일본이 병학을 중심사상의 하나로 받아들인 그때부터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불행한 미래가 예고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병법에서 말하는 ‘선(善)’이란 전쟁에 나가면 이겨야 하는 것이고, 어떤 식으로든 이기기만 하면 그것이 바로 최고의 선인 것이다. 적의 인권 같은 건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기면 영웅, 지면 역적.” 일본인들이 자주 인용하는 이 말은 전쟁에 나가 이기기만 하면 잘못된 점까지도 모두 정당화되지만, 졌을 경우에는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역적이 된다는 말이다. 또한 “일본이 만약 태평양전쟁에서 이겼다면, 지금 세상은 전혀 다른 세상이 되었을 것이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일본인들이 태평양전쟁을 선악 관념으로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는 많은 일본인들이 갖고 있는 선의 기준이 아직도 ‘싸움에 이기는 것’에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전쟁 자체에는 선도 악도 없다는 것이 일본인들의 생각이다.

이처럼 일본인은 오랜 세월 동안 전쟁에서의 승패를 중심으로 한 선악의 기준을 윤리 기준에도 꿰어 맞춰왔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인도적이고 보편적인 선악의 기준이 매우 미약하다. 현실적으로 평화주의와 인권 존중 철학이 확립되지 않은 일본은 만약 국가주의가 다시 부활이라도 한다면, 국가 이익을 위한다는 미명 하에 언제라도 인권을 짓밟는 일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나라다. 위안부나 강제징용자 문제에 대한 일본 극우의 생각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 같은 나라를 곁에 두고 있는 한국이 일본에게 또다시 당하지 않으려면, 인권과 평화를 존중하는 철학을 바탕으로 선악의 기준을 확고히 세움과 동시에 일본에게 약점을 이용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일을 대충대충 끝내고 꼼꼼하게 하지 않는 모습, ‘이정도면 상대가 인정해 주겠지’ 하고 기대하 모습 등 한국인의 약점을 반드시 고쳐야 한다. 한국이 IMF 금융 위기를 겪었을 때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금 모으기 운동’을 전개하는 모습을 보고, 많은 일본인들이 한국인의 저력과 애국심에 깊이 감동하기도 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나라를 지키려고 일어서는 나라. 그 국민들이 작은 것까지 세세하게 챙길 수 있는 국민성을 갖게 된다면, 일본은 물론 어떤 나라도 충분히 추월할 수 있다. 자신의 단점을 이겨내는 것이 최고의 선이다.

일본의 극미와 한국의 극일

일본이 패전한 1945년 8월 15일부터 연합국 점령 하에 있던 1952년까지는 일왕이 신의 자리에서 인간으로 내려와, 광적인 황국사상이 일단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다면 전후 지금까지, 일본에 황국사상을 대신할 새로운 민족주의가 있었던가? 전후 일본을 경제대국으로 만든 중심사상은 무엇이었던가?

미국의 군사적 지배 아래에 있던 전후 일본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미국을 무조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심리적으로는 미국을 이겨야 한다는 극미 사상이 자연스레 민족주의를 대신하여 채워져 갔고, 미국에 졌다는 열등감이 일본인들의 마음 한구석에 알게 모르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인의 최대 과제는 어떻게 하면 서양을 이길 것인가에 있었다. 그런 정신이 메이지 시대 일본을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만들었고, 패전 후에는 미국을 따르면서도 언젠가는 이겨야 한다는 심리가 일본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패했던 일본은 미국에 대한 그러한 오기를 바탕으로 노력하여 눈부신 경제발전을 거듭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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