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한국사
김상훈 지음 | 행복한작업실
B급 한국사
김상훈 지음
행복한작업실 / 2019년 7월 / 328쪽 / 15,800원
Chapter 1 삶의 궤적 그리고 전통 : 우리 조상은 어떻게 살았을까?
공무원 채용 시험은 과거 시험에서 유래했다? _ 과거 시험에 얽힌 이야기
공무원은 이 땅의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이다. 국가 기관을 ‘신의 직장’이라 부르는 게 전혀 어색하지 않다. 매년 공무원 채용 시험을 치를 때마다 수십만 명이 몰린다. 참고로 서양 국가들은 대체로 공무원 채용 방식이 우리와 많이 다르다. 미국을 예로 들면, 특정 날짜를 정해 일제히 공무원 채용 시험을 치르지 않는다. 서류 심사, 필기시험, 면접시험의 절차를 거친다. 면접시험 비중이 상당히 높다. 우리는 어떨까? 예전에는 5급 공무원 선발 시험을 행정고시라 불렀다. 지금은 5급 공개경쟁 채용 시험이라 부른다. 5급 시험에 통과하면 사무관이 된다. 요즘도 고위 공무원들은 동료와 선후배를 평가할 때 ‘행시’ 몇 기인지를 묻고는 한다. 행정고시라는 명칭이 주는 파괴력이 강하다.
굳이 따지자면 고려 시대에 시작된 과거 제도가 오늘날 공무원 채용 시험의 기원이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런 시험에 패스하면 가문의 영광이다. 또 하나 비슷한 점. 우리가 말하는 과거 시험은 보통 대과라 부르는 문과를 뜻한다. 기술직을 뽑는 잡과 시험도 있었지만 중인이 주로 응시한 터라 급제한다 한들 고위직에 오를 수는 없었다. 오늘날의 7급과 9급 공무원도 고위직으로 승진하기가 쉽지 않다. 군대 하사관 후보생과 장교 후보생이 다르고, 일반 순경과 경찰대학 졸업생의 계급이 다른 것과 같은 이치다. 애초에 출발점이 다르다.
현대까지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과거 시험은 고려 때 시작되었다. 4대 광종 통치기에 당시 중국 후주 출신인 쌍기가 귀화해 이 제도를 정착시켰다. 글을 짓는 제술, 유교 경전의 내용을 묻는 명경, 잡과 등으로 나뉘었다. 고려 때는 무과 시험이 없었다. 고려 전기에는 과거 시험보다 더 쉽게 관직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바로 음서라는 제도였다. 정5품 이상 관료의 아들들은 부모 잘 만난 덕분에 벼슬을 거저 얻었다. 떵떵거리는 문벌 귀족 가문에 태어나기만 하면 고위직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좀 달랐다. 음서와 비슷한 문음이란 제도가 있기는 했지만 명분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는 사대부들은 부모 덕분에 공짜 벼슬을 얻는 게 자존심이 상했을 터이고, 문음으로는 말단 벼슬밖에 얻지 못했다. 종9품에서 시작해 한 단계 올라가는 데 1~2년이 걸렸다. 정2품이나 정1품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이에 반해 과거 시험에 급제하면 보통 종6품 벼슬에 임명되었다. 문음과는 공직 생활의 출발선이 다른 셈이다. 고위직 관료가 될 자격은 과거 시험에 급제한 인물에게만 주어졌다. 이러니 과거 시험에 급제하지 못하면 가문도 일으키지 못했다.
조선 시대의 과거 시험 경쟁률은 오늘날의 공무원 채용 시험보다 더 높았다. 한 번에 수십 명만 뽑았는데 조선 전기에는 경쟁률이 10대 1에서 20대 1 정도였다. 하지만 조선 후기로 가면서 경쟁률은 1,000대 1을 훌쩍 넘어섰다. 양반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과거 시험을 매년 치르기라도 했다면 그나마 나았겠지만 과거 시험은 3년마다 정기적으로 치러졌다. 이를 식년시라 했다. 이와 별도로 증광시, 알성시 등 비정기적으로 치러지는 과거 시험도 있었다. 이 모든 걸 감안해서 평균을 내 보면 얼추 1년 3개월~1년 6개월마다 과거 시험이 치러졌다.수험생의 하루는 책 읽기로 시작해서 책 읽기로 끝났다. 외워야 할 한자가 40만 자를 넘었다. 문장을 통째로 암기하는 것은 당연한 일. 면학분위기 쇄신을 위해 산 속 절간에 들어가 공부하기도 하고, 시험에 임박해서는 기출 문제집을 구입해서 풀기도 했다. 또한 과거 시험을 치르는 데도 ‘부익부 빈익빈’이 적용되었다. 지방에서 한양까지 가려면 막대한 여비가 필요했다. 돈이 없으면 이불이며, 솥이며, 쌀이며, 반찬이며 모두 직접 싸 가지고 가야 한다. 부자라면 주막에서 호화판으로 해결했다. 주막이 발전하기 전에는 하인들이 모든 수발을 들었다. 부자들은 시험장에 하인을 보내 미리 좋은 자리를 맡아 놓게 하고 날이 더우면 차양과 양산을 드리우게 했다. 주인님의 기운이 빠질까 봐 시험을 치르는 내내 옆에 앉아 백숙을 고기도 했다. 나들이인지, 고시장인지 애매모호해진다.
과거 시험장에서는 부정행위가 적잖았다. 손에 작은 쪽지를 감추는 것은 애교에 속했다. 책을 무더기로 가져와서 일일이 찾아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옆 사람과 의논하며 문제를 풀기도 했다. 특히 조선 후기에 부정행위가 심했다. 그때는 아예 대리로 시험을 치르는 경우도 많았다. 혹은 옆자리에 앉아서 답을 일러 주는 사람도 있었다. 망조도 이런 망조가 없다. 사실 조선 후기에는 벼슬을 사고파는 일이 너무도 흔했으니까, 그런 상황에서 과거 시험이란 게 큰 의미가 있겠는가. 실제로 과거 시험장에서 붓을 집에 던지고 나오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온 가족이 시험 뒷바라지를 하는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자신의 입신양명과 성공을 위해, 혹은 가문의 부흥을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시험이니까 모든 정성을 쏟는다. 물론 요즘 젊은 세대에 비하면 과거 시험 준비생은 비교적 여유만만이었다. 그들은 직업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 양반이니까! 보통 7~8세부터 과거 시험을 준비했지만 50대, 60대의 응시생도 적지 않았다. 합격만 하면 입신양명의 대박이 실현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랴. 조선 시대의 과거 시험 최고령 합격자는 85세다.
빨간 배추김치는 19세기 이전에 볼 수 없었다 _ 조선 시대의 음식 문화
한국 사람들은 ‘밥심(힘)’으로 산다는 말이 있다. 한 기록에 따르면 삼국 시대 고구려인의 밥그릇 용량이 대략 1,300g이었다 한다. 요즘 한 공기의 용량은 대략 300~350g 정도다. 와우! 고구려인들은 정말로 배가 터져라 밥을 먹었다. 밥심이란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닌가 보다. 조선 시대의 밥그릇 용량은 대략 650~700g이었다. 지금의 2배 크기다. 조선인들도 많이 먹었다는 이야기다. 이를 입증하는 자료가 많다. 『용재총화』에는 빚을 내서라도 실컷 먹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백성들이 너무 많이 먹어 대서 흉년에 대비하지 못한다는 상소문이 실려 있다. 『성호사설』에도 밥을 실컷 먹으니 가난할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 실렸다. 심지어 외국인 선교사들마저 조선인의 식사량이 엄청나게 많다는 기록을 남겼다.
우리 조상들은 왜 그렇게 밥을 많이 먹었을까? 우선 쌀보다 잡곡을 많이 먹었으니 빨리 소화되었을 것이고, 자연스럽게 일찍 허기가 졌을 것이다. 또 농사에 요역에 군역까지 소화하다 보면 노동량이 많았던 만큼 많이 먹어야 했을 것이다. 저장 기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버리느니 다 먹어 버리자는 심정으로 비장하게 먹었을 수도 있다. 또 반찬이 다양하지 않아서 밥으로만 배를 채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우리 민족에 대식가의 피가 흐르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그렇다면 우리 전통 음식이라는 김치에 대해서도 살펴보자. 우리는 언제부터 김치를 먹기 시작했을까? 김치는 원래 소금에 절인 야채를 뜻했다. 단순 절임으로 시작했지만 이후 발효 음식으로 발전했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고구려 사람들이 발효 식품을 만들어 먹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 시대 이후로 김치의 주재료는 무, 오이, 가지, 부추 등이었다. 마늘, 생강 등을 주 양념으로 썼고 나중에는 젓갈을 추가했다. 초기 김치는 빨갛지 않았다. 백김치였다. 고추가 한반도에 전래된 것은 임진왜란 때였다. 덕분에 17세기부터는 붉고 매운 김치를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배추는 김치의 주재료가 아니었다. 배추김치는 18세기 중반에 처음 만들었다. 배추 생산량이 적어 대중화하지는 못했다. 19세기 중반 중국에서 배추 종자를 들여왔고, 이 종자의 토착화에 성공함으로써 서민들까지 배추김치를 만들어 먹게 된 것이다. 지금과 같은 빨간 배추김치는 조선 후기에야 등장한 셈이다. 김치의 대명사인 빨간 배추김치의 역사는 길어야 200년을 넘지 못한다.
고기 이야기도 해 보자.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고급으로 치는 육류는 아마도 소고기일 것이다. 그중에서 한우가 가장 비싸다. 솔직히 대중이 즐겨 먹기에는 부담이 된다. 서민들은 주로 돼지고기와 닭고기를 먹는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상황이 달랐다. 돼지고기보다 소고기를 더 즐겼다. 돼지 가격이 비쌌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식용 돼지를 농장에서 대규모로 사육하기 때문에 돼지 값이 소 값보다 싸다. 그러나 조선 시대에는 소는 풀밭에 풀어 놓으면 됐지만 돼지는 따로 먹을 것을 주어야 했다. 사람이 먹을 것을 아껴서 돼지를 먹여야 했으니 돼지가 비쌌다. 그러니 덜 먹었던 것이다.
모든 백성이 소고기를 즐겼지만 특히 양반님들의 소고기 사랑이 극진했다. 오늘날의 각종 기념일처럼 조선에도 소고기를 먹는 기념일이 있었다. 10월이 되면 소고기를 구워 먹거나 요리를 해서 먹었는데, 이를 난로회라 했다. 물론 일반 백성들은 이렇게 소고기를 먹지는 못했다. 아무리 돼지고기보다 가격이 싸다 한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에 불과했다. 백성들은 소고기를 먹더라도 주로 국이나 탕으로 먹었다. 소고기 소비량이 많아지니 돌림병이라도 돌면 큰일이 났다. 그럴 때는 정부가 소 도축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입에 짝짝 달라붙는 고기 맛을 어찌 잊겠는가. 사대부들은 대놓고 난로회 모임을 가졌다. 그러다 걸리면 벌금을 내고 또 먹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배불리 먹는 게 소원인 서민들이 많았다. 가을에 풍작이라면 그나마 좀 나았지만 그래도 늘 음식은 부족했다. 매년 5월과 6월이 되면 보릿고개란 말을 자주 썼다. 가을에 수확한 양식은 3~4월에 바닥이 난다. 그나마 보리라도 풍족하면 괜찮으련만,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은 시점. 그러니 보리를 기다린다 해서 보릿고개라 불렀다. 이 시기에는 식량이 부족해 굶는 이들이 속출했다. 요즘은 어떤가. 음식 쓰레기가 넘쳐나 걱정이다. 영양 결핍보다는 과잉을 걱정해야 할 상황이다. 많이 먹기보다는 소식이 해법이다. 100년 후 우리의 후세대는 우리의 식사 문화를 어떻게 평가할까.
마을 이름에 슬픈 역사가 담겼다 _ 서울 지명의 유래
전국 어느 도시, 어느 마을이든 사연 없고 유래 없는 곳이 없다. 그중에서도 으뜸 도시를 치자면 한 왕조의 도성이 있었던 경주, 부여, 서울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조선의 도읍지였기에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 꽤 많다. 우리는 서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선 왜 왕십리는 왕십리일까? 여기에는 조선 건국의 역사가 숨어 있다. 어쩌면 역사라기보다는 전설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
조선 건국 당시 도성 설계의 지휘봉을 잡았던 무학대사와 정도전은 처음에는 왕십리에 궁궐을 지으려 했다. 그런데 범상치 않은 노인이 나타나 “십 리를 더 가라.”고 하는 게 아닌가. 왕십리란 지명이 생긴 연원이다. 그래서 노인의 조언에 따라 십 리를 더 가서 궁궐을 지었다. 그게 경복궁이다. 경복궁에서 왕십리까지? 진짜로 10리다.
서울 종로는 현재도 대한민국의 중심이지만 조선 시대에도 중심이었다. 당시 정부 기관이 모두 종로에 있었다. 그 흔적이 현재까지 각 동의 지명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종로의 지명 몇 군데만 콕 찍어 살펴보자. 사극을 보면 왕실 인사들이나 대신들이 이런 대사를 종종 한다. “종묘사직을 보존해야 합니다.” 종묘는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곳, 사직은 토지와 곡식의 신을 모신 곳이다. 종묘가 있었던 곳이 묘동, 사직단이 있었던 곳이 사직동이다.
관청에서 비롯된 지명도 상당히 많다. 일부만 살펴보자. 사간원이 있었기에 사간동, 궁궐에 음식을 공급하던 내자시가 있었기에 내자동이다. 소격동은 도교 제사를 지내는 소격서가 있던 곳이었고, 계동은 왕실 농원과 관청이 있던 곳이었다. 차의 예법을 담당하던 관청이 사옹원이었다. 사옹원의 다방이 있던 자리가 오늘날 다동이다. 대동미를 관할하던 선혜청은 창고를 각각 북쪽과 남쪽에 두었다. 북쪽 창고가 있던 곳이 북창동, 남쪽 창고가 있던 곳이 남창동이다. 다동, 북창동, 남창동이 종로구에 인접했지만 중구에 속해 있다.
또한 서울에는 말과 관련된 지명이 의외로 많다. 당시 국가가 나서서 말을 관리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마장동은 서울 최대의 소 도축 지역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는 말 목장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말 목장은 광진구 자양동과 화양동에도 있었다. 서초구 양재역 사거리는 과거에 말죽거리라 불렀다. 한양과 지방을 오가는 이들이 이곳에서 말을 쉬게 하고 자신도 피곤한 몸을 뉘었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전쟁만큼 고통스러운 시기가 또 있을까? 조선 시대만 해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치렀다. 아픈 역사이니만큼 두 전쟁과 관련된 지명도 여럿 남아 있다. 용산구 이태원은 서울에서 외국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곳이며, 동시에 가장 이색적인 풍물이 많은 곳이다. 하지만 임진왜란의 슬픈 역사가 이태원에 숨어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이 지역에는 운종사라는 절이 있었다. 한양을 점령한 왜군들이 이 절의 여승들을 겁탈했다. 여승들은 원하지 않는 아이를 잉태했다. 이 얼마나 큰 치욕인가. 이 사연이 지명에 담겼다. 이태원(異胎院). 다른 민족의 아이를 임신한 여자들이 사는 마을이란 뜻이다. 이후 일본에서 귀환한 조선인 포로 중에 임신한 여자들이 추가로 들어와 살았다. 이 마을은 모든 사람들의 멸시를 받아야 했다. 이 이야기는 민간에서 전해져 내려온 것이라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이 지역에 배나무가 많아서 임진왜란 이전부터 이태원이라 불렀다는 주장도 있다. 현재 용산구는 이태원(梨泰院)의 어원을 이 ‘배나무 마을’에 두고 있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 배나무 마을이 진실이기를 바란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임진왜란 때 민중이 겪어야 했던 고통까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송파구에는 병자호란에 얽힌 지명이 많다. 인조는 송파를 거쳐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송파구에서 남한산성까지는 15킬로미터 남짓. 승용차로 30분이면 도착한다. 문씨가 많이 사는 마을에서 인조가 휴식을 취했다. 시종이 길어다준 우물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물맛이 기가 막혔다. 인조의 이 일화가 겹쳐져 새로운 마을 이름이 탄생했다. 문씨의 성인 문과 우물 정이 합쳐진 문정동이다. 오금동은 오동나무 가야금 마을이란 뜻이다. 이와 별도로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가던 중 ‘오금’이 아파 이 마을 백토고개에서 쉬었다는 전설도 전혀 내려온다. 청군이 송파에 이르자 장정들은 목숨을 걸고 막아냈다. 청군은 혀를 내두르며 우회로를 택했다. 이 일은 장정들이 오랑캐를 막았다는 뜻의 방이동(防夷洞)이라는 이름으로 남았다가 20세기 초반에 방이(芳荑)로 바뀌었다. 꽃다운 마을이란 뜻이다. 지명은 아름다워졌지만 아픈 역사까지 잊힐까? 석촌동은 돌이 많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청군이 진을 세우기 위해 돌을 날랐기 때문이다.
끝으로 하나만 더 알아 두자. 이런 변란 후에 좋지 않은 신조어가 생겼다는 점. 그 말이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다. 여자들 심하게 비하하는 용어 중 ‘화냥년’이 있는데 병자호란 후에 생겨난 말이다. ‘환향(還鄕)년’에서 비롯되었다. 병자호란 때 청국으로 끌려갔다가 돈을 지불한 후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여성들은 죄가 없었지만 손가락질을 받으며 살았다. 스님이 되거나 목을 매고 죽었다. 막돼먹은 사람을 두고 후레자식이라 부를 때가 있다. 이 말은 호로자식에서 비롯되었다. 이 말의 근원이 병자호란이란 주장이 있다. 청국에서 돌아온 여성 중 일부가 아기를 낳으면 사람들은 오랑캐의 아기를 출산했다고 수군거렸다. 오랑캐의 아기란 뜻의 호로자식이라 부르면서 말이다. 반면 국어학자들은 호로자식을 ‘홀로된 어미가 키운 자식’으로 더 많이 해석한다. 엄한 아버지가 없어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한 이들을 지칭할 때 썼다는 것이다. 무심코 쓰는 말에도 역사가 숨어 있다. 그것이 전쟁이든 여성에 대한 차별이든 아프고 슬픈 역사인 것이다. 말 하나하나에 조심해야 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