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문명으로 읽는 종교 이야기

홍익희 지음 | 행성B
문명으로 읽는 종교 이야기

홍익희 지음

행성비 / 2019년 8월 / 660쪽 / 28,000원





종교의 탄생



유대교의 탄생(기원전 2000년~기원전 1300년)

현대 주요 종교는 두 민족-셈족과 아리아인-에서 유래했다. 한 갈래는 셈족 아브라함으로부터 나온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이고, 다른 갈래는 인도유럽어족 일파인 아리아인으로부터 나온 ‘조로아스터교, 브라만교, 불교, 힌두교’이다. 이들 종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오늘날 세계종교로 커왔다.

히브리 성서 창세기에 보면, 아담으로부터 10대가 흐르자 세상이 타락했다. 이렇게 되자 신은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고 사람들을 물로 쓸어버리기로 했다. 하느님은 그 무렵 타락한 세상을 ‘물’로 씻어내면서 노아를 선택해 그 가족을 구했는데, 노아에게는 아들 셈, 함, 야벳이 있었다. 이후 첫째아들 셈의 후손은 동쪽으로 가 이들로부터 히브리, 시리아, 아시리아 등 아시아계가 나왔다. 둘째아들 함의 후손은 아프리카 쪽으로 갔고 그에게서 아프리카계와 가나안인이 나왔다. 막내 야벳의 후손은 유럽으로 가 그에게서 코카소이드 백인계가 나왔으며 이들에게서 바다 사람들이 갈라져 나왔다.

셈으로부터 10대가 지나자 세상은 다시 타락했다. 그 무렵 메소포타미아문명은 물질이 넘쳐났고 부작용도 심했다. 사람들이 타락하고 우상숭배가 만연하여 영적으로 회복되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아브라함은 그의 조상 노아가 타락한 세상에서 선택 받았듯이 하느님에게 선택받았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이 나이 99세 되던 해에 그와 계약을 맺는다.

성서적 관점에서 보면, 아브라함은 우상숭배를 거부하고 인류 최초로 유일신을 믿은 인물이다. 하느님은 그와 계약을 맺었다. 그 뒤 유대교가 민족 종교로 자리 잡은 것은 이집트 탈출(출애굽) 시기로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십계명과 율법을 받으면서부터다. 유대교의 특징은 ‘계약의 종교’라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되어 하느님과 직접 계약을 맺었다고 믿는다. 계약이란 두 당사자, 곧 창조주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 사이에 맺은 신성한 약속이다. 그 뒤 유대인들에게 계약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당위가 되었다. 그들이 상업상의 계약도 중시하는 이유다.

또 다른 유대교의 특징은 ‘배움의 종교’라는 것이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론 유수기에 성전이 없어 제물을 드리는 예배를 거행치 못하자, 선지자들은 “하느님은 성전에 바치는 천 가지 제물보다 한 시간의 배움을 더 기뻐하신다.”라고 가르쳤다.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하느님의 섭리를 하나라도 더 이해하여, 하느님에게 한 발짝이라도 더 다가갈 수 있다.”라고 가르쳤다. 그래서 유대교는 배움을 기도와 똑같은 신앙생활로 간주한다. 그들이 평생 공부하는 이유이다.

나아가 유대교는 ‘유대인은 모두 한 형제’라고 가르친다. 율법은 유대인들이 형제애로 단합하고 서로 도울 것을 명령한다. 바로 그들이 강한 이유다. 그리고 유대교는 ‘과거의 역사’를 중시한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수많은 고난과 뿔뿔이 흩어지는 이산의 아픔을 겪었다. 이러한 담금질을 통해 갈고 닦이며 그들은 더욱 강해졌다. 고난이 바로 은혜였다. 유대인은 과거의 역사를 반추하며 이를 현재의 스승이자 미래의 거울로 삼는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 모세가 현재 그들의 기억과 예배 속에 살아 숨 쉬는 이유이다. 유대인 역사의 굽이굽이에는 이러한 정신이 깊숙이 배어있다.

브라만교의 탄생(기원전 1500년~기원전 1000년)

기원전 20세기 무렵에 우랄산맥 자락 우랄 강변 초원에서 살던 인도유럽어족의 일파인 아리아인이 그간 동쪽 초원으로 진출하던 방향을 바꾸어 아랄해 근처에서 이란고원 쪽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아마 동쪽 초원에는 그들보다 더 강한 몽골로이드계 유목민족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리아인들이 이주한 이란고원 역시 생존이 쉽지 않은 곳이었다.

아리아인들이 이란고원에 도착해 만든 종교가 조로아스터교의 전신인 고대 페르시아의 다신교이다. 그 뒤 기원전 15세기경 아리아인의 일부가 험준한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인도 북부로 쳐들어갔다. 그들은 현지 원주민을 정복하고 노예로 삼은 후 이를 영속적인 통치 체제로 구축하기 위해 카스트제도를 만들었다. 이와 동시에 이 제도를 영구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아리아인들이 믿었던 고대 페르시아 다신교를 조금 변형시켜 만든 종교가 브라만교이다. 초기브라만교는 다양한 신을 숭배하면서 복을 비는 단순한 형태였다. 자연현상에 지배력을 행사하는 신들을 인격화해 섬겼다. 이후 브라만교는 제식 위주의 베다경전시대를 거쳐 우파니샤드경전시대에 이르렀고, ‘범아일여(梵我一如)’ 사상이 중심이 된다.

이러한 브라만 중심의 지배질서에 맞선 신흥 크샤트리아 세력들이 갠지스강 유역에서 새로운 사상을 발흥시킨다. 그중 하나가 붓다이다. 이렇게 카스트제도와 브라만교에 반발해 태어난 종교가 불교다. 불교는 만민평등 사상을 뿌리로 삼고 있다. 하지만 불교는 우파니샤드의 많은 사상을 그대로 흡수했다. 인도에서는 1세기부터 3세기까지가 불교의 전성기였다. 그러다 5세기경부터 불교가 서민들의 호응을 잃고 쇠퇴하면서 인도인 성향에 맞는 새로운 종교가 필요했다.

이때 브라만교가 변신을 시도해 동물희생제를 꽃과 과일로 간소화했다. 그리고 일생의 중요한 시기마다 의미를 부여해 작명식, 돌잔치, 결혼식, 장례의식을 철저히 챙겼다. 서민들의 곁으로 다가간 것이다. 이렇게 브라만교가 토착종교와 결합하고 불교를 포용하면서 힌두교로 발전했다. 브라만교와 힌두교의 차이점은 브라만교가 베다에 근거해 희생제의를 중심으로 신전이나 신상 없이 자연신을 숭배한 반면, 힌두교는 신전과 신상을 갖고 인격신을 받들어 모신 것에 있다. 또한 산 제물을 바치는 공희를 반대하여 육식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브라만교와 불교, 힌두교는 외형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가치와 교리를 공유하며 연속된 흐름을 갖고 발전해왔다. 한 뿌리의 세 종교인 셈이다.



축의 시대



조로아스터교와 유대교와의 만남(기원전 700년~기원전 500년)

조로아스터교는 어떻게 탄생되었나: <조로아스터교의 탄생> 조로아스터교의 창건 시기에 대해서 기원전 1800년에서 기원전 640년경까지 의견이 다양하다. 이란의 조로아스터교 교단은 기원전 1768년에 창시되었다고 주장한다. 조로아스터는 니체 저서에 등장하는 ‘자라투스트라’인데, 자라투스트라는 ‘낙타를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당시는 낙타를 가진 사람이 존경받는 유목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는 계급사회였다. 족장과 사제계급, 전사계급, 농부와 목축업자 계급 등 3계급으로 구분되었는데, 조로아스터는 사제계급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사제교육을 받았다. 그는 다신교에 대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많은 선생을 찾아다니며 토론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점차 자신만의 종교관을 발전시켰다.

조로아스터는 30세 되던 해에 진리를 받게 된다. 조로아스터는 초원의 질서가 약탈과 폭력으로 아수라장이 되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했다. 봄 축제를 하던 어느 날 동틀 무렵 조로아스터는 그날 희생제에 쓸 물을 길으러 강으로 갔다. 그리고 그는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강으로 걸어 들어가 물속에 몸을 담갔다. 신성한 물은 그를 태고의 순수함으로 되돌려놓았다. 그가 물 밖으로 나왔을 때 강둑에 빛나는 존재가 서 있었다. 그 존재는 자신의 이름이 ‘보후 마나(선한 목적)’라고 했다. 그는 여섯 천사장 중 하나로, 조로아스터를 데리고 아후라 가운데 가장 위대한 마즈다 앞으로 데려갔다. 마즈다는 지혜와 정의의 신으로, 광채를 발하는 일곱 신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마즈다는 조로아스터에게 그의 백성을 모아 폭압에 대항하는 성정을 펼치라고 말했다.

조로아스터는 아후라 마즈다가 단순히 위대한 신이 아니라 최고신임을 확신했다. 아후라 마즈다는 ‘지혜의 주님’이라는 뜻이다. 조로아스터는 영적 깨달음을 얻었다. 이후 아후라 마즈다로부터 포교자의 사명을 받은 그는 이렇게 외쳤다. “저의 온 마음을 당신의 신성한 영 보후마나와 연합하기로 결심합니다. 저는 당신을 향한 우리의 행동에 복을 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온 힘을 다해 당신의 가르침, 정의와 진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칠 것입니다.”(야스나 28장 4절)

그 뒤 8년 동안 나머지 다섯 천사장들이 하나씩 그에게 진리를 전해주었다. 조로아스터는 40세 때 이 진리를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 취급해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실망한 그에게 유혹의 시련이 닥쳤다. 그가 광야로 가서 기도할 때 악령 앙그라 마이뉴가 나타나 아후라 마즈다를 숭배하지 않겠다고 하면 세상권세를 다 주겠다고 유혹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다. 조로아스터는 그의 종족에게 거부당한 뒤 다른 종족들에게 선교하러 떠날 결심을 했다. 그때 마침 그의 사촌 중 하나가 그를 믿고 제자가 되어, 둘이 박트리아의 비스타스파 왕에게 진리를 전하러 갔다. 2년간 투옥되기도 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왕과 온 조정이 조로아스터의 가르침을 받아들였다. 비스타스파왕은 여러 신을 믿는 다신교 사회보다 조로아스터교라는 새로운 유일신 종교가 나라를 하나로 뭉치게 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보았다. 왕은 소 1만 2천 마리의 가죽을 무두질해 햇볕에 말린 후 그 위에 경전 아베스타를 쓰도록 명했다. 그 뒤 조로아스터교는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조로아스터교 교리의 특징> 첫 번째 특징은 선과 악의 대결이라는 이원론이다. 그런데 선과 악의 갈등은 물질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마음에서 일어난다는 것이 이른바 조로아스터교가 말하는 ‘윤리적 이원론’이다. 나중에 이것이 와전되어 이 세상을 대결의 장으로 인식하는 이원론이 나오는데, 바로 ‘우주적 이원론’이다. 조로아스터교의 가르침은 본질상 윤리적 성격을 띤다. 두 번째 특징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적극적 역할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이 세상을 중립의 세계로 본다. 따라서 그는 인간의 의지로 이 세상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구세주 메시아론> 세 번째 특징은 메시아가 도래하는 종말론이다. 조로아스터교는 이 세상은 불행히도 악이 지배하기 때문에 필연코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사상을 지녔다. 이 교리에 따르면, 이 세상은 3천 년이 4번 반복되는 1만 2천 년 동안 지속되는데, 지금은 1만 2천 년 중 마지막 3천 년이다. 조로아스터교의 윤회사상은 같은 아리안계인 인도아리아인이 만든 브라만교와 불교, 힌두교의 윤회사상과 그 바탕이 같다. 조로아스터교 교리의 특징은 구세주의 구원 방법을 알려주고, 종말의 모습 곧 부활과 심판에 대해 알려준다는 데 있다. 세상 끝에 창조주는 불로 심판하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며, 처녀가 잉태한 구세주가 재림하면 선인들은 무덤에서 부활하여 지상천국에서 영생을 누린다고 했다.

<유대교에 미친 영향 / 기독교에 미친 영향> 조로아스터교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불교 등 다른 종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기원전 6세기 바빌론으로 끌려온 유대인 포로들은 당시 바빌론을 정복한 페르시아의 국교인 조로아스터교를 접하면서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 선과 악, 천사와 사탄, 최후의 심판, 구세주, 부활, 낙원과 지옥, 종말’ 등의 개념은 유대인들이 그간 몰랐거나 희미하게 느꼈던 것들을 명확하게 해주었다. 조로아스터교의 ‘선과 악, 천사와 악마, 천국과 지옥’ 등 이분법 교리는 유대교보다 이후의 ‘나사렛 사람들’, 곧 서기 90년 유대교에서 쫓겨난 초기기독교 교리에 더욱 적극적으로 반영되었다.

<조로아스터교의 변형> 조로아스터가 죽은 뒤 그의 종교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남쪽으로 서서히 전파되었고, 서쪽으로는 메다이와 페르시아 영토로 전파되었다. 이런 동안 조로아스터교는 다신교를 숭배하던 고대종교와 혼합되었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조로아스터교의 유일신관이 흔들리면서, 이단종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고대 페르시아 신들이 들어와 아후라 마즈다의 힘을 나누어 가졌다. 일례로 미트라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심지어 아후라 마즈다, 미트라, 아나히타 여신을 삼위일체로 여기는 이단이 퍼져나가더니, 결국 미트라는 조로아스터교의 주요교리를 흡수해 독자종교가 되었다. 한편 실크로드 주도권을 놓고 동로마제국과 사산조 페르시아가 대립하던 당시 무함마드가 일으킨 새로운 세력이 급성장하고 있었다. 결국 사산왕조마저 붕괴되어 이슬람교의 영향권 아래에 놓이면서 조로아스터교는 급속히 몰락한다. 아랍 정복자들은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지만, 많은 신자가 인도로 이주했다. 현재 이란 남부에는 소수의 조로아스터교 교인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불교의 탄생(기원전 600년~기원전 200년)

<‘축의 시대’를 불러 온 ‘유목민 가설’> 기원전 6세기 유대교가 바빌론 유수기에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아 크게 바뀌고 있을 때, 인도에서는 지나치게 엄격한 브라만교의 계급사회와 제례의식에 반발해 새로운 사문들에 의한 새로운 사조가 자라나고 있었다. 이른바 불교와 자이나교 등 반브라만 세력의 태동이었다. 이즈음 중국에서는 공자, 묵자, 노자 등 유교와 도교를 비롯한 제자백가의 기운이 피어났고, 그리스에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철학자들이 출현했다. 거의 같은 시기에 지구촌 곳곳에 새로운 종교와 사상이 동시다발적으로 분출되었다. 기원전 900년에서 200년까지 약 7백 년간 세계 주요 종교와 사상이 일제히 출현한 이 시기를 ‘축의 시대’라 부른다. 이 시대를 ‘축의 시대’라고 부른 이유는 이때 등장한 사상과 철학이 오늘날까지도 인류 사상의 ‘중심축’ 노릇을 하기 때문이다.

‘축의 시대’를 처음 언급한 독일 철학자 야스퍼스는 축의 시대가 실제보다 더 짧은 기간이었다고 생각했다. 다시 말해 부처, 노자, 공자, 묵자, 조로아스터가 모두 비슷한 시기에 살았다고 생각했다. 실제 기원전 700년부터 500년까지가 ‘축의 시대’의 중심이었다. 현재 큰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 종교와 철학은 대부분 그때 만들어졌거나 큰 발전을 했다. 조로아스터교, 불교, 자이나교, 유대교, 유가 사상,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한 그리스 철학이 이 시기에 만들어지거나 성장했다.

새로운 종교들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도덕성, 자기수양, 금욕을 강조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불교, 도교, 유대교, 스토아교, 자이나교, 힌두교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어 등장한 기독교, 이슬람교, 마니교 등 신흥종교는 전 세계에 걸쳐 확산됐고 오늘날 세계의 종교가 됐다. 축의 사상이 지닌 엄청난 확산력과 ‘왜 그 당시 유라시아에서 이러한 사상이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했을까?’ 하는 문제를 설명하는 가설이 몇 개 있다. 그중 하나가 ‘유목민 가설’이다. 이 가설은 2016년에 피터 터친의 책 『초협력사회』에 소개되어 있는데, 그는 기마민족이 가져다준 충격이 축의 사상을 유라시아 전역으로 확산시킨 핵심 동력이라고 주장한다. 유목민이 빠른 기동성으로 고대 국가의 전쟁에 충격을 주기 전까지는, 왕이 신의 현신이라는 ‘신왕 사상’ 정도로도 국가를 유지하는 데 무리는 없었지만, 기병과 철제전차로 움직이는 기마 유목민이 북쪽 변경지대 전체를 위협하자, 더 대규모로 병력을 동원해야 하는 압박이 가중되었다. 그 결과 왕과 백성을 평등하게 대하는 보편윤리가 힘을 얻었다는 것이다.

<불교 탄생의 시대적 배경> ‘축의 시대’에 탄생한 대표 종교 중 하나가 불교이다. 불교가 탄생할 당시 인도는 브라만교가 지배하는 사회였다. 그 무렵 브라만교는 우주의 궁극적 근원인 브라만과 개인에 내재하는 아트만이 동일하다는 범아일여 사상을 갖고 있었다. 또 인간의 행위는 전생의 업(카르마)에 의해 지배된다는 교리와 현재의 행위는 미래를 결정한다는 윤회 사상을 갖고 있었다. 그 무렵 종교인들은 윤회로부터 해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브라만교의 카르마, 윤회, 해탈 사상은 인도 사상의 근간을 이루었다. 하지만 브라만교는 엄격한 카스트제도를 갖고 있었다. 이러한 계급제도에 반발해 만민평등 사상이란 보편윤리를 갖고 탄생한 종교가 불교이다. 그러나 불교 역시 브라만교의 중심 사상은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후에 불교를 극복하고 출현한 힌두교 역시 브라만교가 불교와 토속신앙을 흡수해 변신에 성공한 종교이다. 결국 브라만교, 불교, 힌두교는 한 뿌리의 세 종교인 셈이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