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요리노트
김현철 지음 | 노마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요리노트
레오나르도 다빈치 지음
노마드 / 2019년 7월 / 240쪽 / 14,200원
들어가는 말
이 책을 읽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일단 읽어보면 알겠지만 레오나르도의 요리나 인물에 대한 평가는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인물을 평가하는 데 대단히 인색하고, 심지어 아주 조롱조로 말하기도 한다. 음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추어올리는 말인지 깎아내리는 말인지 모호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 점 염두에 두기 바란다. 둘째, 요리에 쓰이는 재료의 양이다. 여기에 소개하는 대부분의 요리는 대규모 만찬에 올릴 것으로 서너 사람을 위해 요리하는 일반 가정 요리와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레오나르도가 묘사한 요리법을 그대로 따라하다가는 큰코다치기 십상이다.
셋째, 이 역시 양에 관련한 문제인데, 한두 가지를 제외하고는 정확한 양을 밝히지 않는다. 몇 그램, 몇 리터, 큰 숟갈, 작은 숟갈 하는 구분이 도통 안 간다는 것이다. 눈짐작으로 적당히 알아맞힐 수밖에 없다. 넷째, 조리기구에 대한 것이다. 그 당시에는 조리기구가 오늘날처럼 세분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보통 냄비, 솥, 프라이팬 등으로만 얘기할 뿐 특정 요리를 위한 특정 조리기구를 세분하지 않았다. 음식의 양이나 재료에 따라 짐작해가며 읽기를 바란다. 다섯째, 재료의 성격 문제다. 500여 년 전에 만들어 먹던 음식들인지라 재료가 요즘과는 많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개중에는 실로 ‘엽기적인’ 재료라고 생각되는 것도 있을 것이다. 옛날 어려웠던 시절임을 감안하여 읽기 바란다.
산드로와 레오나르도의 세 마리 개구리 깃발 식당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평생 동안 요리에 대단한 관심을 나타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레오나르도의 유년 시절과 관련이 있을 성싶다. 레오나르도는 1452년 피렌체에서 가까운 빈치(Vinci)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피렌체에서 공증인으로 활약했고, 어머니는 빈치의 귀부인이었다. 레오나르도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버지는 열여섯 살의 피렌체 아가씨와 결혼했고, 어머니는 빈치 출신 과자 제조업자와 식을 올렸다. ‘촌스럽고 꾀죄죄하고 먹보인’ 의붓아버지는 레오나르도에게 단것을 실컷 먹이며 섬세한 미각을 키워주었다. 레오나르도는 의붓아버지로부터 단것에 대한 취미와 요리에 대한 열정을 전수받아 평생 갈고닦았는데, 너무 열중하는 바람에 하마터면 다른 뛰어난 재능을 썩힐 뻔했다.
친아버지는 엄청나게 뚱보가 되어버린 장남을 피렌체의 베로키오 작업장으로 보내 조각, 미술, 공학, 대장일, 수학을 익히게 했다. 3년이라는 수련기간이 끝나고 이제 독립해야 했으나 베로키오가 알선해준 일감이 적어 수입이 형편없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밤마다 피렌체 베키오 다리 옆에 있던 ‘세 마리 달팽이’라는 유명한 술집에서 접대부로 일하기 시작했다. 1473년 어느 봄날, ‘세 마리 달팽이’의 주방 식구들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두 죽고 말았다. 레오나르도는 드디어 주방 일을 보게 되었다. <그리스도의 세례> 그림 작업을 함께하던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의 급작스런 변신에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나 레오나르도는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겠다는 의지에 불타 평생을 주방지기로 결심했다.
레오나르도는 ‘세 마리 달팽이’에서 파는 음식을 개선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복잡한 요리를 단순화하는 등 그야말로 음식을 문명화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다고 했던가. 너무나 혁신적인 요리에 손님들은 떨어져 나가고, 주인장은 레오나르도를 벼르게 되었다. 줄행랑. 레오나르도는 다시 베로키오 작업장으로 돌아와 <그리스도의 세례>라는 그림에서 안식처를 찾았다.
잠시 동안이긴 했지만 ‘세 마리 달팽이’에서 한 경험은 연구하기 좋아하는 레오나르도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곳에서 당시의 요리법이 얼마나 유치한지, 시간과 수고는 또 얼마나 낭비되는지를 몸으로 깨우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레오나르도는 주방에서 시간과 수고를 절약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아마 이때부터 요리 노트를 따로 만들어 틈틈이 기록하지 않았나 싶다. 레오나르도는 많은 기구를 도안해 삽화로 남겼지만 곧바로 시제품을 만들어 사용하지는 않았다. 레오나르도는 모두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기록을 남겼지만 400년 후 사람들은 그것을 전쟁 도구를 만드는 데 이용해 먹었다. 고기다지기, 빨래기계, 자동 호두까기 등을 그렇게 써먹은 것이다. 그런 중에도 레오나르도는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다. 화가로서 이름을 떨쳐야 했던 것이다.
1478년 여름, 피렌체를 대표하던 두 집단 간에 싸움이 붙어 그 유명하던 술집이 홀랑 타버리고 말았다. 레오나르도는 당시 아주 중요한 그림(베키오 궁의 산 베르나르도 예배당에 설치할 그림)을 의뢰받아 작업하던 중이었음에도 친구 보티첼리와 함께 그 술집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새로 술집을 세웠다. 베로키오 작업장에서 그림을 빼내 실내도 장식했다. 술집 이름은 ‘산드로와 레오나르도의 세 마리 개구리 깃발’이라고 붙였다. 레오나르도가 밖에 내걸 깃발의 한쪽 면을 그렸고 다른 쪽 면은 보티첼리가 그렸다.
술집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피렌체의 멋쟁이들은 레오나르도가 개발한 요리를 외면했다. 안초비 한 마리와 당근 네 쪽만이 달랑 놓인 접시로는 그들의 시선을 끌 수 없었다. 그리고 메뉴판도 문제였던 것 같다. 레오나르도는 메뉴판에도 멋을 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써 내려갔다. 당연히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다. 베로키오 작업장에서 빼낸 그림은 제자리로 돌아갔다. 가게는 문을 닫았다.
레오나르도는 이후 3년 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다. 레오나르도를 요리사로 고용하려는 식당은 없었다. 하다못해 허드렛일조차 구할 수 없었다.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레오나르도의 엉뚱한 요리법을 헐뜯고 다닌 것이 분명했다. 레오나르도는 그림으로 다시 뛰어들지도 않았다. 그저 피렌체 거리를 배회하며 아이디어를 끼적거리거나, 만돌린을 치거나, 매듭 묶는 법을 궁리하거나 할 뿐이었다. 이런 무사안일에서 탈출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는 듯했다.
1482년, 레오나르도는 밀라노를 향해 출발했다. 밀라노 대공 ‘모로인’ 루도비코 스포르차 앞으로 쓴 소개장(레오나르도 본인이 쓴)도 챙겼다. 레오나르도의 자기추천서 내용을 간추리면 이렇다.
교량, 성채, 석궁, 기타 비밀 장치를 제조하는 데 본인과 견줄 사람은 다시 없다고 확신하는 바임. 회화와 조각도 본인에 버금갈 사람은 없음. 수수께끼, 매듭 묶기에도 대가임을 자신함. 이 세상에 둘도 없는 빵을 구워낼 자신이 있음.
이 겸손한 자기추천서를 읽은 루도비코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루도비코는 알현을 허락했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제 레오나르도는 루도비코의 축성위원회 자문, 스포르차 궁전 연회담당자가 되었다. 루도비코는 레오나르도를 시시한 그림쟁이나 글쟁이와 달리 ‘한가락 하는’ 인물로 파악했던 것이다. 레오나르도는 이제 개인 몸종과 개인 작업장을 가질 수 있게 되었고 밀라노 궁정 사람들, 그러니까 궁정 조신ㆍ자문관ㆍ장군ㆍ강대국 사신ㆍ고명한 선생들과 허물없이 사귈 수 있게 되었다. 편지 한 장이 인생역전을 이루어낸 것이다.
최후의 만찬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장이 요청한 그림의 주제는 레오나르도의 입맛을 돋우는 것이었다. ‘만찬’과 ‘요리’. 레오나르도는 식당 벽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떻게 그릴 것인가. 특히 상 위에 놓일 ‘요리’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많은 화가가 이 주제에 달려들었지만 숭고한 주제에 주눅이 들어 상 위에 놓일 요리에는 별다른 신경을 쓰지 못한 것이다. 처음 1년간 레오나르도는 그저 수도원과 궁전을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수도원에 머무를 때도 가끔씩 식당에 들어가 벽을 지그시 바라만 볼 뿐이었다. 1494년이 저물어갈 무렵, 레오나르도는 수도원장에게 이렇게 부탁했다. “식당에 긴 식탁을 들여놓고 먹을 것을 상 위에 차려주십시오.”
레오나르도는 날이면 날마다 제자들과 함께 식당을 찾아가 그림은 그리지 않고 상 차리는 일에만 열중했다. 1496년 성주간(聖週間), 참다못한 수도원장이 루도비코에게 항의 편지를 보냈다. “각하, 각하께서 레오나르도 선생을 보내주신 지도 어언 열두 달째입니다. 하지만 이 선생이라는 작자, 벽에 물감칠 한번 하지 않았습니다.” 그로부터 아홉 달이 지난 1497년 정월, 구르크의 주교 레몽 페로가 수도원으로 레오나르도를 찾아갔다. 레몽 페로 주교가 인스부르크의 윗사람들에게 보낸 보고서는 위 수도원장의 불평이 진심이었음을 증명한다. “레오나르도 선생은 벽에 식탁 하나와 기둥 몇 개만 달랑 그려놓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선생 주변에는 심부름꾼들이 여럿 부지런을 떨고 있었는데, 그렇게 보아서 그런지 물감을 탄다, ‘요리’를 나른다, 포도주통을 나른다 하고 있었다.”
그림 하나를 그리는 데 2년 9개월이라는 시간은 너무 긴 세월이다. 그래도 그동안 요리라는 요리는 모두 맛보았을 것이다. 이때 레오나르도가 즐긴 요리는 주로 이런 것이었다. 잘게 썬 당근을 곁들인 삶은 달걀, 풋참외꽃으로 치장한 검둥오리 넓적다리, 자잘한 빵, 뭇국, 장어 요리. <최후의 만찬>이 상 위에 차린 소박한 요리 때문에 걸작으로 인정되었다고 주장한다면?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이제 겨우 상 위에 차릴 요리 선별 작업이 끝났다. 일단 요리가 결정되자 나머지 과정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물론 계약기간이 다 된 탓도 있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인물들 앞에 놓인 잔이 많이 비어 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작업 전에 ‘레오나르도 선생 일당’이 수도원 포도주를 대부분 마셔버렸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언제 어디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프랑스 왕은 식도락가로서의 레오나르도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부응하느라 레오나르도는 ‘스파게티’를 발명했다. 그야말로 콜럼버스의 달걀이었다. 200년도 전에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스파게티와 비슷하게 생긴 것을 가져왔다. 바로 국수였다. 마르코 폴로는 국수가 먹거리라는 사실을 빼먹고 사람들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수를 식탁 장식용으로 사용해오던 중이었다.
우리가 지금 파스타로 알고 있는 것도 아주 오래전부터 나폴리와 이탈리아 남부 지방에 알려져 있었다. 물론 요즘처럼 국숫발이 가는 것이 아니라 빈대떡처럼 넓적한 것이었다. 레오나르도는 단지 모양새를 조금 바꾼 것이다. 자신이 고안한 기계를 이용해 반죽을 실처럼 길게 뽑아 적당한 길이로 잘라 끓는 물에 삶는다. 바로 스파게티다. 레오나르도가 붙인 이름이 재미있다. ‘스파고 만지아빌레,’ 즉 ‘먹을 수 있는 끈’이다.
그러나 별로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국수를 삶아 접시에 담다 보면 온통 엉클어지는 바람에 나이프로 가지런히 정리해서 먹기가 여간 까탈스러운 게 아니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레오나르도는 일명 삼지창(이가 세 개 달린 포크)을 발명해냈다. 당시 호화저택에는 포크라는 것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이가 둘 달린 커다란 것으로 주방에서나 사용하는 것이었다. 포크를 발명했음에도 스파게티는 인기를 끌지 못했다. 재주 없는 목수 연장 탓만 한다고, 사람들은 도무지 불편한 것을 싫어했다. 그렇다고 입에다 떠먹여줄 수는 없는 노릇. 레오나르도는 포기하지 않았다. 스파게티와 국수 뽑는 기계에 너무나 애착을 가진 나머지 그 도안을 두툼한 노트에 잘 갈무리해두고 평생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요리노트
더러운 식탁보를 대신할 수 있는 것
루도비코 어르신과 그 식솔들이 연회장을 떠난 후 식탁보를 살펴보니 그 꼴이 그야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한바탕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가 꼭 그런 꼴일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말이나 풍경을 그리기 전에 우선 식탁보를 대신할 만한 것이 없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묘안이 하나 떠올랐다. 식솔들에게 각각 천 한 조각을 나누어준다. 식솔들은 식사 후 손과 나이프를 그 천으로 닦고 얌전하게 접어놓는다. 그러면 식탁은 더럽혀지지 않고 산뜻한 모양을 유지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천조각을 무엇이라 이름할 것인가? 그리고 어떤 모양으로 선보일 것인가?
아몬드 수프
연한 무를 몇 개 솥에 넣고 삶는다. 여기에 삶은 양 머리를 넣는다. 그러고 나서 소금, 후추, 카민 종자(씨)를 치고 무를 버무린다. 이때 달걀을 넣어 잘 반죽한다. 둥근 모양이나 이런저런 모양으로 빚어 빵가루를 묻혀둔다. 모양을 내어 빚은 반죽 속에 삶은 새끼 양의 불알을 넣는다. 이제 기름을 두른 프라이팬에 넣어 노릇노릇하게 구워 먹는다. 밀라노를 대표하는 이 요리가 무슨 까닭으로 ‘아몬드 수프’로 불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포도주와 사프란
포도주에 사프란을 섞어 마시면 금방 취하게 된다. 입 냄새도 역겨워질 뿐 아니라 포도주 맛도 이상하게 변해버린다. 어떤 요리책도 포도주에 사프란을 섞어 마시라고 하지 않는다. 내 친구 가우디오 풀렌테가 왜 그렇게 악착스럽게 이 방법을 써보라고 하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그 친구가 항상 몽롱하여 냄새를 풍기는 바람에 내가 실수로 친구가 마신 술을 탓하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으면 그 친구에게 무슨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양 머리 케이크
(*가난한 사람과 천박한 사람을 위한 요리) 양 머리를 세로로 둘로 쪼갠다. 뇌와 혓바닥을 들어내고 당근 한 개, 파슬리 가지 한 개와 함께 물에 삶는다. 세 시간이 지나면 딱딱하게 굳은 폴렌타가 한 겹 덮인 쟁반 위에 국물과 함께 올린다. 여기에 푸른색 소스를 곁들여 내놓는다. 소스는 먼저 들어낸 뇌와 혓바닥으로 만든다. 뇌와 혓바닥을 잘게 썰어 미나리꽃과 함께 삶아 만든다. 이때 미나리꽃의 양은 뇌와 혓바닥 무게의 두 배가 좋다.
황새와 학
요즘에는 황새나 학을 별로 먹지 않는다. 무슨 까닭인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올챙이 요리
집 주변 개구리가 서식하는 연못 속을 체로 훑어보면 아직 개구리로 자라지 못한 올챙이를 충분히 구할 수 있을 것이다. 올챙이는 생후 5주 정도된 것을 골라야 하는데, 그 이유는 이때 맛이 가장 훌륭하기 때문이다. 올챙이를 죽이는 법은 간단하다. 펄펄 끓는 물에 잠시 담그기만 하면 된다. 흐르는 찬물로 올챙이를 조심스럽게 씻은 후 천에 늘어놓고 말려 혹시 남아 있을지 모르는 물기를 완전히 제거한다. 다 마르면 그 위에 고운 소금과 후춧가루를 뿌려준다(소금과 쿨란트로 가루를 뿌려도 상관없다). 바싹 마른 체로 쳐서 불필요한 양념 가루를 걷어낸다. 올리브유를 두른 프라이팬이 달아오르면 올챙이를 넣고 노르스름해질 때까지 볶는다. 볶은 올챙이를 다시 천에 늘어놓아 올리브유가 빠지게 한다. 기름기가 빠지면 먹을 수 있다. 올챙이 요리 애호가들은 여기에 레몬즙을 살짝 뿌려 먹기도 한다. 그러나 그와 반대인 사람들도 있다. 자기가 먹은 음식이 무엇인지 알아채는 바로 그 순간 하얗게 질려 식탁을 박차고 나오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우스갯소리 하나
주로 마돈나 상을 깎는 베네치아 출신 그레고리오 파치올리라는 친구가 평생을 앓아온 변비를 치료할 수 있는 비책을 포도에서 구할 수 있다는 도움말을 듣고는, 어떤 식으로 먹어야 할지를 줄곧 묻고 다닌 끝에 드디어 즙을 내서 먹게 되었다. 그런데 이 친구 그때부터 날이면 날마다 최고급 포도주를 여섯 병씩이나 비워댔다. 꿀이나 물도 섞지 않은 그냥 깡 포도주를 말이다. 그러더니 죽는 날까지 두 번 다시 변비로 고생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12년 동안을 깡 포도주를 마셔댄 셈이다.
또한 이 친구는 베네치아 의회뿐만 아니라 온 세상이 놀랄 만한 일을 저질렀으니, 두 번 다시 마돈나 상을 만들지 않았던 것이다. 의회로서는 난감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는데, 그 친구가 술을 마시기 시작한 그즈음에 서른여섯 개의 마돈나 상을 만들어준답시고 선금까지 받아 챙긴 것이었다. 그러니 의회는 그저 팔짱이나 끼고 그 친구가 술로 금화를 탕진하고 있는 꼬락서니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파치올리는 죽기 얼마 전에 동생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조금이라도 일찍 포도에 알았더라면 이전의 고통을 말끔히 지울 수 있었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