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유럽, 기원과 시작
김미지 지음 | 생각의힘
우리 안의 유럽, 기원과 시작
김미지 지음
생각의힘 / 2019년 6월 / 260쪽 / 16,000원
유럽과의 첫 만남과 첫인상
동과 서, 그 최초의 만남들
중국 대륙에서는 춘추전국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서방 세계와의 만남의 역사가 전해지는데, 본격적인 서양 국가와의 접촉은 서력기원(AD) 이전인 한나라 때 실크로드의 개척을 통해서라고 할 수 있다. 한나라 무제 이후 실크로드, 즉 비단길을 통해 이루어진 동서간의 무역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에까지 닿았다. 직접 유럽에까지 닿지는 않았지만 유럽과의 교류로 향하는 물꼬를 트는 사건이었다. 이후에 후한을 세운 광무제가 서기 1세기 말 서역 원정에 다시 박차를 가하면서 접촉의 범위는 더욱 확대된다. 이때 서역에 진출한 반초가 로마 제국과도 접촉을 시도한 것으로 알려졌고, 후에 로마 제국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우스의 사신이 중국에 입성하여 황제인 환제를 알현했다는 기록(166년)이 『후한서』에 남아 있다.
동서양의 만남은 13세기에 들어 전쟁과 정복의 시대를 거치면서 상호 교류와 접촉이 확산된다. 칭기즈칸이 페르시아와 소아시아까지 접수하며 몽골 제국을 확대해 나아가던 시기는 서구 세계가 십자군 전쟁을 치르고 있던 시기와 겹쳐진다. 이슬람 지역을 제패한 몽골 제국과의 외교적인 접촉을 이유로 교황청에서는 사신을 파견하게 되는데 그들이 바로 최초의 선교사들이었다. 1279년 중국 대륙에 원나라가 세워지고 1291년 십자군 전쟁이 십자군의 패배로 끝이 난 이후에도 서양의 선교사들은 동양 선교를 위해 몽골과 중국으로 꾸준히 진출했고,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와서 머문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한반도에도 실크로드의 한 귀퉁이로부터 서역의 풍문은 흘러들어 오기 시작했다. 이미 신라시대에 페르시아의 유리 등 서방의 문물이 전해졌다는 것이 그 증거이다. 또 16~17세기에는 우연한 일이긴 하지만 조선 땅에서도 유럽인들과의 접촉이 종종 있었다. 잘 알려져 있듯이 1627년 제주도에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박연(벨테브레), 1653년 8월 제주도에 역시 난파되어온 네덜란드인 하멜 등이 그들이다.
물론 이보다 앞선 기록도 있다. 임진왜란 시기 1593년에 일본군 종군 신부로 온 스페인 사람 그레고리오 데 세스페데스가 웅천포(진해)의 고니시 유키나가의 진지에 일 년여간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고, 1577년 포르투갈인 몬테이로 선장이 일본으로 항해하다가 조선에 표착했다는 연구도 있다. 이러한 사건은 우연적이고 돌발적인 에피소드이긴 하지만 큰 흐름에서 볼 때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사람이 이 땅에 발을 디딘 순간들은 유럽에서 시작된 대항해시대와 이후 제국주의가 만들어낸 물결의 한 자락이 이 땅을 적시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들이 있고 나서도 꽤 시간이 흐른 18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의심스러운 접근과 노골적으로 문을 두드리는 일들이 잦아지기 시작한다. 오랑캐들의 낯선 배, 이양선들의 출몰이 그것이다.
이양선(異樣船), 눈앞에 나타난 불길한 존재
이양선이 처음 조선 앞바다에서 목격된 것은 1735년 영조 연간으로 전해진다. 그리고 정조 11년인 1787년에 프랑스 군함이 나타났고, 1797년(정조 21)에는 영국의 북태평양 탐험선이 용당포(부산 동래)에 들어왔다. 이어서 순조 연간에는 이양선이 출몰했다거나 정박했다는 소식이 심심찮게 조정에 전해졌고,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가 지방과 중앙 모두에게 골칫거리였다. 참고로 『조선왕조실록』에서 이양선의 출몰에 대해 기록한 내용들은 크게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관련 사실을 보고하는 지방관의 장계이고, 다른 하나는 이 문제를 제대로 보고하지 않거나 미숙하게 처리한 관리들을 처벌하고 징계해야 한다는 건의(상소)였다. 특히,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못한 지방관들을 엄벌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던 것은 그만큼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한 낯선 존재들에 대한 경계심과 의구심이 점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산이 남포(보령)에 들어온 영국 이양선으로부터 전해진 국서(서계)를 읽고 “그들의 정박이 우연한 일이 아니리라”고 평했던 것은 매우 날카로운 감각이었다. 즉, 그들이 우리와 지리적으로 가깝거나 가까이 다가온다면 충분히 적이 되고 남을 위협적인 존재들이라는 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더구나 중국을 통해 건네받은 서양의 지도들을 접한 이들의 충격은 적지 않았는데, 김정희는 영국 오랑캐들이 두고 간 지도를 보고 그 상세함과 세밀함에 매우 충격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서양 문명의 첫 물결이었던 천주학과 서학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중국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서양의 종교와 과학을 전파하던 17세기 초, 조선의 학자들 역시 ‘서학’이라는 새로운 앎의 대상에 눈뜨며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중국에서 편찬된 마테오 리치의 한역(漢譯) 서학서 『천주실의』(1603)와 세계지도인 『곤여만국전도』(1602)는 이듬해에 중국에 다녀온 사신들의 손으로 조선 땅에 전해졌다.
중국의 서학 수용의 역사에서 가장 앞자리에 놓이는 인물로 상해 출신의 서광계(1562~1633)가 있다. 중국 명나라 말기의 학자이자 관료인 서광계는 서양의 서적들을 한문으로 번역하고 간행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서학의 선구자이며 천주교 세례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에도 중국의 서광계와 같이 일찍이 서양의 새로운 과학과 학문에 매료된 이들, 적어도 깊은 관심을 가진 이들이 있었다.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최한기, 홍대용 등은 주자학의 질서를 거스르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세계와 학문에 대한 앎을 사상적 성찰의 계기로 삼은 이들이다. 유럽이라는 수만 리 밖의 세계와 서학의 존재, 중국의 서양 과학 수용을 진작부터 감지하고 있었던 18~19세기 조선의 일부 학자들은 그 낯선 학문이 충분히 상고(詳考)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고, 자신들의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노력했다.
서학은 지리와 천문, 수학을 비롯한 과학 지식이 큰 부문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매력적인 학문의 대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이 학문의 범주 내에는 천주학 역시 큰 비중으로 존재했다. 애초에 천주학은 서학이라는 큰 범주의 일부일 뿐이라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었고, 실제로 이익의 경우처럼 그렇게 받아들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유학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진 천주학과 서학 전체가 동일시되거나 매도되면서 서학은 곧 사학이 되고 많은 부분 금단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시대, 《한성순보》가 포착한 유럽
세계 속으로 들어간 조선 그리고 《한성순보》의 탄생
유럽과 세계에 대한 지식은 수백 년 동안 중국으로부터 전래된 서학서나 지리지, 천주교 선교사들의 저작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것도 꽤 지체되어 우리 땅에 뿌려졌다. 그런데 이제 다른 상황이 펼쳐졌다. 더욱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당대의 지식들이 소개되고 정리될 필요가 생겼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은 이미 조선보다 수십 년 더 이른 시기부터 그러한 작업들을 해오고 있었다. 대표적인 작업이 바로 근대적인 의미의 신문, 즉 ‘뉴스페이퍼’를 발간하는 일이었다. 중국에서는 개항장인 상해와 홍콩을 중심으로 신문이라는 근대 정보 매체가 1850년대부터 등장했다. 1860년대부터는 영자신문과 중문신문이 함께 발행되어 경쟁구도를 형성하기도 했다. 일본도 1860년대 말부터 동경을 비롯해 각 지방마다 신문들이 활발하게 나오기 시작한다.
한편 조선에서는 1883년 10월 31일 《한성순보》 창간호가 나왔다. 당시 중국과 일본 대부분의 신문들이 한 장의 종이에 전체 지면을 인쇄하여 여러 번 접는 방식인 전장 신문지 형식이었던 것과 달리, 조선에서는 아직 근대식 인쇄 조판 기술이 도입되지 않았던 터라 일반적인 서책 형태로 제작되었다. 1884년 10월 9일까지 일 년 남짓 발행된 이 서책 형태의 신문 또는 잡지 앞부분에는 왕실 조정의 소식과 인사, 정책 결정 사항들을 담은 관보인 ‘조보(朝報)’가 배치되고, 나머지 분량에는 각종 외신 기사들을 순서대로 배열한 ‘각국근사’로 채워졌다. 그러다가 5호부터 이 둘 중 어디에도 속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중요한 국내 기사들을 따로 ‘국내사보’라는 항목으로 명하기 시작하였다.
이외에도 종종 과학과 인문지리 정보들, 즉 지리와 천문에 대한 설명문에서부터 시작해 세계의 각 대륙에 대한 역사 문화 지식, 외신 서양 과학 지식을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수록했다. 국내에서 생산된 기사가 매호 제일 첫머리에 등장하기는 하지만, 창간사인 《순보서》에 ‘외보를 폭넓게 번역하고 아울러 내사까지 기재한다’는 취지대로, 《한성순보》가 나라 바깥으로 훨씬 더 많이 시선을 돌리고 있고 전통보다는 새로움을 향해 열려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한성순보》는 중국과 일본에서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소개하고 전파하는 핵심적인 수단으로 자리 잡은 ‘신문’들을 모델로 한 것으로 이해된다. 애초에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박영효가 박문국이라는 발행기관의 설치를 건의하고 고종의 유지를 받들어 유길준을 책임자로 근대적인 신문을 발간하려고 기획했던 것이 《한성순보》탄생의 첫 배경이었다. 그런데 박영효가 광주(경기도)로 좌천되면서 이러한 기획은 좌절되고, 후에 오늘날의 외교부에 해당하는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산하에 교육 기관 겸 서적 간행 기관인 동문학을 설치하고 그 아래 박문국을 두어 신문을 발간하게 된다. 운양 김윤식의 사촌 형인 한학자 김만식의 책임 아래 김인식을 주사로 하여, 9월 7일에 실무사사로서 장박, 오용목, 김기준 등이 편집진으로 임명되었으니, 두 달 남짓한 짧은 기간 안에 신문 발간을 성공시킨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이 정기간행 매체를 ‘최초의 근대 신문’으로 칭하지만, 사실 그러한 이름표를 붙이기에는 많은 한계를 안고 있다. 우선 순한문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은 독자를 사대부, 관원, 한문 식자층으로 제한해버린다. 또, 열흘에 한번 발간하는 ‘순보’의 발행주기는 신문치고는 길다고 밖에는 할 수 없다. 게다가 실제로 기사 내용을 들여다보면 발행주기 이상의 문제도 발견된다. 기사의 내용이 되는 사건이 발생한 시간이나 인용한 외국 신문의 발행 시간과 대조해보면, 《한성순보》에 게재되는 기사와 원자료와의 시간적인 격차는 평균 한두 달을 훌쩍 넘는다. 신문의 속성 또는 근대성을 논할 때 어디에 방점을 찍느냐에 따라 여러 입장이 있겠지만, 적어도 신문, 즉 새로운 소식통이 가지는 속보성이나 시의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한성순보》를 오롯이 신문으로 부르기엔 무리인 것이다.
무엇보다 근대 신문의 필수 요소 가운데 첫손에 꼽히는 것은 논설의 기능인데,《한성순보》에는 이 부분이 거의 없거나 매우 취약했다. 이렇게 《한성순보》가 근대적인 매체냐 아니야, 신문이냐 잡지냐 하는 문제는 논의의 여지가 있지만, 모든 논란거리에도 불구하고 《한성순보》가 근대 전환기에 중요한 매체임은 사실이다. 근대적인 매체로서 《한성순보》의 가치는 당대에 동아시아, 특히 중국에서 만들어진 외신 기사들과 영국, 프랑스 등의 유럽 발 뉴스들을 꼼꼼하게 수집하고 망라해 제공했다는 점에 있다.
뉴스의 원천이 된 상해의 영국 조계 신문들
《한성순보》 한 호에 기재된 외신 기사의 건수는 적게는 20건에서 많게는 50건 이상에 이르고 전체 지면의 70퍼센트 이상을 차지한다. 이러한 엄청난 양의 외신들을 어떻게 수집한 것일까? 그것은 바로 중국에서 발간되는 중문(한문)신문들일 수밖에 없다.19세기 중반부터 영국, 프랑스 등 제국들의 조계지가 된 개항장(조약항)인 상해와 홍콩에서 발간된 신문들은 대부분 영국 상인들이 발행한 영자신문을 모체로 하고 있거나 그 영자신문들의 중문 자매지들이었다. 《한성순보》가 정부 주도로 발간된 관찬 매체였던 것과 달리, 중국 개항장의 신문들은 치열한 경쟁체제 속에서 독자층을 확장해 나아가야 했던 대중 상업지였던 것이다.
《한성순보》가 신문 발간 초창기에 가장 많이 의존하고 있던, 즉 가장 많은 기사들을 빌려온 것으로 나타난 상해의 신문이 바로 《호보》이다. 《호보》는 영자신문 《자림서보》의 중문 자매지였기 때문에 《자림서보》가 독점한 로이터통신의 전신을 역시 독점할 수 있는 매체였다. 중국 바깥의 외신들을 재빠르게 입수하고 전달하는 데 절대적인 우위에 놓여 있었던 셈이다.
《한성순보》를 구성하고 있는 외신의 성격을 들여다보기 위해 살펴야 할 또 하나의 상해 신문이 바로 1872년 창간된 《신보(申報)》이다. 《신보》역시 영국 상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신문이었으나 경영진과 편집진, 주필 대부분이 중국인이었고 영국의 색채를 벗어나 중국화 정책을 취함으로써 차별화되었다. 《신보》는 다른 상업정보지들과 달리 언론을 중시하여 매일 첫 면에 평론(논설)을 실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리고 상업성을 넘어서서 사회신문을 지향하여 기담과 같이 독자들이 흥미롭게 읽을 만한 이야깃거리들을 적극적으로 수록하기도 했다. 참고로 《한성순보》는 1880년대 상해 신문계의 쌍두마차라 할 이 두 신문을 적극적으로 참고하고 의존하고 있지만, 시기에 따라 의존도가 확연히 달라지는 현상을 보인다. 즉, 발간 초기에는 압도적으로 《호보》의 활용 빈도가 높았다가, 1884년 이후(특히 4월, 8~9월)에 《신보》의 인용 빈도가 급증했다.
제국주의와 서세동점의 한허리를 관통하여
《한성순보》는 1880년대 초, 특히 동아시아가 빠르게 변해가던 그 시점에 현장의 파편들을 끌어 모으고 이를 통해 세계에 새로이 접근하려 했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중국 중심의 세계관이나 천하에 대한 관념을 완전히 해체하고 있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동아시아 차원에서 이루어진 다른 세계와의 대결 의식, 동아시아가 보는 서양이라고 하는 인식론적인 중심은 있었다. 그것이 꼭 중화주의나 유교적 세계질서를 고수하고자 하는 몸부림 또는 완고함으로 설명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흔들리는 현장들뿐만 아니라 서양이라고 하는 견고해 보이기만 했던 성채 역시도 어지러운 혼란 속에 있음을 목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한성순보》의 인식론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키워드를 꼽으면 ‘상호성’을 들 수 있다.
창간호에 실린 ‘각국근사’의 가장 첫 번째 기사는 ‘한학서행(漢學西行)’, 즉 ‘한학이 서양으로 가다’였다. 영국 대학에서 한학을 가르치는 과정이 개설되었다는 소식을 첫머리에 내세운 것이다. 옥스퍼드대학을 위시한 영국의 대학에서 한학과를 설치했고 또 설치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가장 첫 기사에 배치한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즉, 서학이 동아시아에 들어온 지 삼백 년이 훨씬 넘은 시점에서, 이제 뉴스가 되는 것은 그 역으로 한학이 서양에 들어간 일이다. 이는 이 시점에 이미 서양 중심으로 재편된 세계질서 아래에서 동서양의 상호작용이나 상호이해의 가능성을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이제 사건은 서학이 동양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한학이 서양으로 ‘나아간’ 것이며, 이는 19세기 말이라는 시대를 특징짓는 동아시아 세계관의 일단을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동아시아 그리고 유럽 이외의 세계 전체가 여전히 절대적인 열세에 놓여 있긴 하지만, 기울어진 저울추를 동쪽으로 조금이라도 옮겨보고 싶은 욕망,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고 이제 시작이라는 일말의 기대와 믿음이 포함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후 《한성순보》의 기사들은 거세고 집요하게 공격해 들어오는 유럽 국가들과 이에 맞서는 청과 아시아의 분투, 제국주의 패권을 거머쥐기 위한 유럽 내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의 경쟁 관계와 혼란 등을 생생하게 담아내게 된다.
오랑캐에서 문명국으로, 우리가 발견한 유럽
세계사에 대한 관심과 구한말의 유럽 인식
애초에 세계 그리고 유럽 열강에 대한 앎이 주로 지도와 문헌 중심으로, 즉 이역의 지리지를 위주로 시작되었다면, 이후에 중요해진 것은 서양 역사서들의 전래와 편찬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서는 다른 땅에 세워진 국가들과 왕조들 그리고 정체에 대한 통시적인 이해와 함께 그 지역의 문화와 문명을 이해할 수 있는 길잡이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이 지식은 우리가 새로이 세워야 하는 문명, 국가, 정체를 꿈꾸고 구상하는 데에도 길잡이로 여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