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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수록 다시 보는 서양 조각 100

김성진, 차홍규 지음 | 미래타임즈
알수록 다시 보는 서양 조각 100



차홍규, 김성진 엮음

미래타임즈 / 2019년 6월 / 560쪽 / 24,000원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



라오콘 군상



<라오콘 군상>은 1506년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인 에스퀼리노 언덕에서 포도밭을 일구던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라오콘 군상>은 트로이 신관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이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는 장면을 묘사한 고대 그리스 조각상이다.

트로이의 함락, 노여움, 벌 그리고 죽음……. 라오콘과 두 아들이 독뱀에 감겨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죽어가고 있다. <라오콘 군상>으로 불리는 이 조각상은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걸작이다.

<라오콘 군상>에 얽힌 가슴 아픈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트로이의 아폴론 신전의 신관이었던 라오콘은 성안의 사람들이 그리스군이 철수하고 남긴 거대한 목마를 성안으로 들이자고 하지만 그는 사람들의 의견에 반대한다. 그는 이에 더해 목마를 향해 창을 던지고, 그리스인의 귀향길에 풍랑을 일으켜 벌하도록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황소를 바쳐 기원을 한다. 하지만 황소를 죽이는 의식을 치르고 있을 때, 돌연 두 마리의 뱀이 출현해 라오콘과 그의 두 아들에게 독을 뿜어 세 사람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 이 장면을 목격한 트로이 사람들은 트로이 목마에 대한 라오콘의 저주가 신을 화나게 했다고 생각해 결국 자신들의 의도대로 목마를 성 안으로 들이게 된다. 하지만 성 안으로 목마를 들여오는 날 밤, 10년을 지켜오던 트로이는 목마 안에 잠복했던 그리스군에 의해 함락되고 만다.

<라오콘 군상>은 기원전 1세기 때 로디의 아게산드로스와 그의 두 아들 아테노도로스, 폴리도로스가 공동으로 만든 작품이다. 이 작가들을 배출시킨 로디를 비롯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터키의 에페소는 당시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헬레니즘 문화의 꽃을 피우는 요람지였다.

이 시대의 미술은 극단적인 사실주의로서 특색을 이루고 있는데 죽음에 앞서 절망적인 몸부림을 하고 있는 라오콘의 격노한 듯한 근육과 고통스러운 표정과 인간적인 연민의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는 오른쪽의 아들 상과 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쳐들고 절망 속에서 죽어가고 있는 왼쪽의 아들 상이 극적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삼각형 구도는 다소 불균형적이며 뱀이 무는 장면 역시 위협적이지 못해 비장미를 떨어뜨린다. 이른바 고통의 순간과 죽음에 대한 표현 형식이 다소 관념적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현재 <라오콘 군상>은 로마 바티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르네상스 시기에 로마 에스퀼리노 언덕의 티투스 황제 궁터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르네상스 미술가들과 18세기 독일의 문필가인 빙켈만, 괴테 등은 많은 감동을 받아 글로 남기기도 했다. 특히 미켈란젤로는 30대 초반에 <라오콘 군상>의 발굴 작업에 직접 참여했는데, <라오콘 군상>이 땅 속에서 나올 때 기뻐 놀라며 “이것은 예술의 기적이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 군상은 서양 미술에서 인간의 고통에 대한 원형적 상징이었으며, 예수의 수난이나 순교를 나타내는 기독교 예술에서 묘사되는 고통과는 달리, 이 군상의 고통은 어떤 속죄의 힘이나 보상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고통은 일그러진 얼굴 표현으로 나타나며 분투하는 몸체, 특히 모든 부분이 뒤틀리는 라오콘의 몸체와 조화된다.

양식 면에서는 그리스 전통 내에서 그리스 미술의 가장 훌륭한 예 중의 하나로 생각되지만, 이것이 원본인지 청동으로 만들어진 이전 동상의 복제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작품이 기원전 2세기의 원본이라는 견해는 이제 거의 없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이전에 청동으로 황제 시대에 만들어진 원작의 복제품으로 여기고 있다.

밀로의 비너스



<밀로의 비너스>는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조각상 가운데 하나로 기원전 130년에서 100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스 신화에서 사랑과 미를 관장하는 여신인 아프로디테를 묘사한 대리석상으로 길이는 203cm이다.

아프로디테는 로마 신화에서 비너스 여신에 해당된다. 그러나 성격은 비너스 여신과 많이 다른데, 비너스 여신은 모성애가 강한 성격으로 자식에 대한 애정이 깊은 인물로 나온다. 반면 아프로디테는 기분에 따라 매우 변덕스러워 인간들은 그녀를 추앙했지만 두려워하기도 했다.

<밀로의 비너스>는 1820년, 당시 오스만 터키 제국의 식민 치하에 놓여 있던 밀로스 섬에서 그리스인 농부에 의해 발견됐다. 그는 집을 수리하려고 땅을 파다가 이 아름다운 석상을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오스만 터키군에 이를 빼앗길까 우려해 집에 숨겼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 터키 당국은 강제로 석상을 빼앗아갔다. 며칠 후, 이 비너스 상의 존재는 당시 이 부근에 정박 중이던 프랑스 해군장교 쥘 뒤몽 드위빌에 의해 프랑스 본국에 보고됐으며, 프랑스 정부는 당시 터키 주재 프랑스 대사를 통해 해당 석상을 구입하겠단 의사를 밝혔다. 당시 군사 강국인 프랑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전쟁이 날 것을 우려한 터키 정부가 이를 받아들여 비너스 상은 프랑스로 실려 왔고, 루이 18세에게 바쳐져 오늘날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됐다.

<밀로의 비너스>는 왜 팔이 없을까? 비너스 상은 애초에 출토될 때부터 두 팔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밀로스 섬에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비너스 상을 놓고 현지에서 프랑스와 터키 해군 사이에 격전이 있었으며, 비너스 상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투다가 팔이 잘려나가 바다에 빠졌고, 이것을 프랑스 함대가 건져서 가져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일각에서는 루브르 박물관이 약탈 후에 정식 수입한 작품으로 꾸미기 위해 남은 팔까지 더 잘라내서 아예 팔이 없는 석상이 됐다는 이야기도 있다.

반나체의 비너스는 엉덩이 부분에 옷이 걸쳐 있는 상당히 매혹적인 자태의 전신상으로, 양팔과 왼발이 없는 상태로 발견되었다. 비너스의 비례나 구조는 안정적인 자세와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등을 약간 앞으로 구부린 유연한 자세는 육감적이고 관능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이런 경향은 그리스 신화에서 그려지고 있는 이상적인 모습이 아니라 현실에서 느끼는 아름다운 여인상,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과장되어 길게 늘어진 신체 구조는 다소 비현실적이고 비고전적인 형태미를 보여주고 있다. 비너스의 잘려진 오른쪽 손은 몸을 가로질러 왼쪽 무릎 쪽으로 옷의 천을 잡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왼쪽 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들이 존재한다. 이 석상을 승리하는 비너스로 해석하는 일각은 비너스의 왼손에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준 사과를 들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반면에 비너스가 악기인 리라를 들고 있다는 주장도 있다.

<밀로의 비너스>에는 머리의 관과 목걸이, 귀고리, 팔에 두르고 있는 밴드를 조각상에 부착하기 위한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보석들로 치장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얼굴을 보면, 수려하고 뚜렷한 이목구비가 눈에 띈다. 또한 목주름과 약간의 지방질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복근 등이 세밀한 관찰과 해부학에 의거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커다란 눈은 맑고 순수한 마음의 상태를, 오똑한 콧날의 코는 자신에 대한 확신을, 작고 굳게 다문 입은 단호함을, 갸름한 얼굴은 미적 이상을, 단정한 머릿결은 흐트러짐 없는 성격을 보여준다. 가슴의 모습 또한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 적절한 크기를 지니고 있음에, 이런 모습은 실제 인간세계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형상이다.

조각사를 통틀어 무수히 많은 비너스 중 가장 장엄한 미와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는 <밀로의 비너스>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그야말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비너스를 탄생시킨 그리스 문화의 중요한 의미를 살펴보면, 미술 전반은 물론이고 신전 건축조차도 인간 존중 사상에 기반을 두었다는 점이 가장 큰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고대 그리스가 추구한 자유정신과 인간 중심의 정신적 바탕을 나타내는 바, 이 정신이 오늘날 유럽 문명의 모태가 되었으며, 세계 문화의 정립에 중요한 기틀을 마련했다.



고딕 시대의 조각



샤르트르 대성당



고딕 예술의 절정을 보여주는 샤르트르 대성당은 프랑스 국민들의 염원과 노력으로 만들어진 성당이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실내 장식은 일부러 도입된 최초의 장식으로 이러한 건축 양식은 이후 유럽 종교 건축물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우뚝 솟은 첨탑과 첨두 아치 등 고딕 양식의 특징이 살아 있는 샤르트르 대성당에는 서로 모양이 다른 거대한 두 개의 첨탑이 우뚝 솟아 있다. 샤르트르 대성당은 그때까지 지어졌던 다른 건물에 비해 실내 공간이 넓고,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를 비롯한 다양한 장식과 4,000개가 넘는 사실적인 조각으로 꾸며져 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성당은 네 번째로 건설된 성당이다. 12세기 중반의 서쪽 정면을 그대로 보존하고, 13세기 초에 남북에 새로 큰 문을 냈고, 13세기 중반에 대규모 조상군과 부조를 장식하였다.

프랑스 국민들이 사랑하는 대성당에 화재가 끊이지 않아, 국민들은 성당 재건을 위해 발 벗고 나서게 되었다. 성당의 재건축이 시작되자마자 전국에서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샤르트르로 몰려들어 공사를 도왔다. 또 영주와 상인들은 건축에 필요한 자재와 식량을 기부하였다.

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다시 탄생한 샤르트르 대성당은 이전에는 흔히 볼 수 없었던 하늘을 향하여 우뚝 선 날렵한 위용을 나타냈다. 2개의 거대한 탑을 중심으로 모두 9개의 첨탑이 있는데, 각각 모양과 크기가 다르다. 특히 서쪽 정면에 세워진 웅장한 2개의 첨탑은 건설된 시기가 달라 전혀 다른 모습을 갖고 있다. 두 탑을 보면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의 차이를 한눈에 알 수 있다.

아케이드를 비롯하여 높다란 창에 맞춰 넣은 176개의 스테인드글라스와 거대한 장미창은 성당 내부에 있는 꽃 모양의 스테인드글라스로서, 그 세련된 아름다움 때문에 ‘프랑스의 장미창’으로 불린다. 스테인드글라스에는 성모 마리아를 비롯하여 많은 성인들이 묘사되어 있는데, 서쪽 정면의 장미창은 최후의 심판을, 남쪽 장미창은 영광의 그리스도를, 북쪽의 장미창은 성모를 주제로 하고 있다. 특히 ‘샤르트르의 청색’이라고 불리는 특이한 색감이 관람객들로 하여금 신비한 감흥에 빠져들게 한다.

샤르트르 대성당의 건물에 장식된 4,000여 점의 조각은 어느 건축물에서도 볼 수 없는 많은 양이다. 대성당의 대표적 조각은 서쪽 정면에 새겨진 조각과 성당 안 성가대 벽을 장식하고 있는 조각이다. 서쪽 정면 입구를 장식하고 있는 조각은 고딕 건축물에 새겨진 조각의 표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왕의 문’으로 불리는 서쪽 정문에는 세 개의 커다란 문을 중심으로 수백 점의 조각들이 새겨져 있다. 13세기 초 성당 재건축 때에 이 왕의 문은 그대로 보존하여 증축할 정도로 당시에는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조각 군상은 이전 건물들에서 볼 수 있었던 조각에 비해서 사실적이며 질서 있고, 반복적인 리듬이 돋보이는 화려한 작품들이다. 반복된 형태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변화를 주고 있어 조각마다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문의 위쪽에는 예수가, 오른쪽과 왼쪽에는 복음서 저자를 상징하는 조각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쪽에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24명의 장로들로 장식되어 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조각



다비드 상



르네상스 조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로는 미켈란젤로가 있다. 미켈란젤로의 조각은 재료의 물질적 속성을 초월하여 그 속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미켈란젤로는 이탈리아 카센티노의 카프레세에서 1475년에 태어났다. 아버지는 카프레세의 행정관이었고, 어머니는 미켈란젤로가 6살 때 세상을 떠나 미켈란젤로는 어느 석공의 아내에게 위탁되어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미켈란젤로는 학교에서 오직 데생에만 관심을 두고 스케치를 했다. 아버지는 몰락한 가정을 일으키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며 어린 미켈란젤로를 야단치며 매를 댔다. 그러나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그런 미켈란젤로는 13세가 되던 해 당시 피렌체의 유명한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공방에 들어가 그의 제자가 된다. 그곳에서 그는 두각을 나타낸다.

미켈란젤로의 천재성을 발견한 스승은 오히려 어린 미켈란젤로의 재능을 질투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미켈란젤로는 그림 수업에 싫증을 느껴 일 년 만에 마치고 보다 새로운 예술을 원해 조각을 선택한다. 그리고 피렌체의 권력가인 메디치 가문에서 가르치는 조각 학교에 입학한다. 예술가의 후원자로 알려진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는 어린 미켈란젤로가 가진 천재성을 일찌감치 알아보고 그를 주목한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프랑스의 밀라노와 피렌체 침공으로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평화가 찾아오자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로 돌아와 작품 활동에 전념하였다.

이 시기의 유명한 조각가인 도나텔로가 거대한 대리석 덩어리를 샀으나, 돌에 갈라진 틈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반품하였다. 거대한 돌덩어리는 쓸모없이 흉측스런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이 돌덩어리를 발견하고는 그 돌을 사들였다. 그리고 열과 성을 다해 조각한 끝에 유명한 <다비드 상>을 완성하기에 이른다.

미켈란젤로는 지금까지 없었던 독창적인 형태로 <다비드 상>을 만들려고 구상하였다. 그때까지의 <다비드 상>은 발밑에 잘려진 골리앗의 머리가 놓여 있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는 막 돌을 던지려는 나체의 다비드 상이다.

보통 사람 키의 세 배 가까이 되는 4m 높이의 <다비드 상>은 건강한 신체와 고전적 자세를 지닌 영웅의 면모를 담고 있다. 순간적으로 찡그린 표정 묘사와 손과 발 혈관의 세부적이고 사실적인 묘사에서 보이는 정신적 긴장감은 <다비드 상>에 고전적이고도 르네상스적인 생동감이 함께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다비드의 자세에는 다소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날카로운 눈매, 꼭 다문 입은 힘과 분노를 표현하고 있으며, 왼손에 쥔 돌멩이를 거인 골리앗을 향해 막 던질 듯 보인다. 도나텔로나 베로키오의 <다비드 상> 발밑에서 볼 수 있는 골리앗의 머리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에는 없는데 이것은 독창적으로 제작하려 했던 미켈란젤로의 의도로 보인다.

다비드와 골리앗의 결투는 구약성서 사무엘기 상 17장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이 <다비드 상>은 성경 내용보다 극적인 요소는 적으나, 마치 그리스 신화의 헤라클레스가 활로 태양을 쏘는 모습처럼, 모든 힘이 돌을 던지려는 다비드의 팔 끝에 집중되어 있다. 그래서 <다비드 상>의 팔은 힘센 팔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이 작품은 설치 장소 때문에 많은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미켈란젤로의 희망과 결정에 따라 베키오 궁 앞 테라스에 설치되었다. 후에 <다비드 상>은 프랑스에 대한 피렌체 공화국의 승리를 상징하는 조각이 되었다. <다비드 상>은 피렌체 공화국 시민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애국의 상징, 도시의 수호신으로서 시청 앞에 세워지기도 했다. 현재 원작은 피렌체 아카데미아 미술관에 있으며 똑같은 크기로 모각되어 광장에도 세워져 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은 야외 조각으로서, 또는 주변과의 조화를 꾀한 환경 조각으로도 첫발을 내디뎠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조각을 건축으로 완전히 독립시켜 3차원의 표현을 이룩한 점은 조각사에 지대한 공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피에타



미켈란젤로는 예술 가운데 조각을 최고의 위치에 두려고 했던 진정한 조각가였다.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의 주제를 ‘인간’으로 규정짓고, 초인간적인 제작 의욕을 바탕으로 생명력 없는 단단한 돌에 살아 숨 쉬는 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탁월한 재능에 의해 탄생한 미켈란젤로의 인간 조각들은 후반기에 이르러 내면 의식과 다양한 모습의 육체가 조화를 이루어 매너리즘과 바로크 미술을 예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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