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노 나나미의 국가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 북스코리아
시오노 나나미의 국가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북스코리아 / 2019년 1월 / 334쪽 / 15,000원
제1장 개혁은 루비콘강을 건너는 모험이다
거물급 ‘사기꾼’이 아니면 개혁을 총지휘하지 못한다 - 내가 꿈꾸는 내각 로마 편(1)
올해는 전 세계적으로 혼돈의 시기를 맞이할 조짐이 보이는데 일본은 어떨지 모르겠다. 어쩌면 올 한 해는 격동의 해가 될 것이다. 이는 설령 선거를 치르지 않는 나라라도 개혁이라는 파도를 피할 길이 없다는 의미다. 정치판이 돌아가는 상황이 하도 재미없어서 내가 꿈꾸는 내각을 구성해보았다. 장관 자리에는 내가 잘 알고 있는 로마 황제들을 임명했다. 요즘 정치 지도자들보다 그들을 훨씬 잘 알기 때문이다.
‘총무성’ 장관에 앉힐 인물로 아우구스투스 황제보다 적합한 자는 없다. 총무성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지방분권 개혁이다. 로마는 중앙집권과 지방분권을 통해 광대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했는데, 이 시스템을 확립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투스다. 지방분권을 확립하면 지역경제와 삶이 활성화한다.
아우구스투스 총무성 장관은 여느 때처럼 들락날락하는 공무원들과 책임자들의 눈을 일일이 들여다보며 그들의 ‘의견’을 끝까지 귀 기울여 듣는다. 설명을 마친 사람은 이에 만족해 자신이 속한 지방자치단체로 돌아가 보고를 한다. 장관이 우리 의견을 수렴하기로 했다고. 하지만 그들은 개혁을 시행하고 나서야 깨닫는다. 장관이 의견을 수렴하기는 했으나 수용하지는 않았다는 걸. 그러나 때는 이미 늦었다. 유권자와 미디어는 아우구스투스의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개혁의 동조자로 돌아선 지 오래였다.
[로마인 이야기]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을 종식시키고 느닷없이 공화정으로의 복귀를 선언했다. 이 뜻밖의 선물에 너무 기뻤던 원로원에서는 그를 ‘아우구스투스’라고 명명하기로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아우구스투스는 고대 로마에서 ‘신성하고 경배 받아야 마땅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가 뜻했던 바와 같이 로마를 다시 원로원들의 세상으로 돌려줄 의향이 없었다. 그런 척만 했던 것이다.
이후, 아우구스투스는 팍스 로마나 실현을 목표로 각종 개혁을 실시함과 동시에 원로원들에 의한 정치체제인 공화정에서 황제에 의한 정치체제인 ‘제정’으로의 변화를 느리지만 교묘하게 그리고 강력하게 추진해 나갔다. 팍스 로마나 완성의 핵심에는 경제적 안정이 있었다. 로마는 금화와 은화와 동으로 만든 화폐 교환 비율을 고정시켰고, 교역에서는 안정된 화폐인 로마 화폐를 쓰도록 했다.
또한 군제를 개편했다. 평화의 시대 로마에서 더 이상 징병 필요가 없어지자 상비군을 창설했고, 그 상비군에게 월급, 퇴직금 등을 주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제 개편도 이루어졌다. 오늘날 간접세와 거의 비슷한 소비금액의 1퍼센트를 세금으로 징수하여 상비군을 지탱할 수 있게 하였고, 치안을 담당하는 경찰 2개 군단과 소방청도 신설했다. 한편 특이한 개혁은 당시 로마에 불어닥친 출산율 저하 문제 해결이었는데, 아우구스투스는 결혼하지 않거나 결혼을 했어도 애를 둘 이상 낳지 않은 여자들에게 엄청난 세금을 물리고 상속도 못 받게 하는 법을 제정했다.
외무성 장관 자리에는 네로 황제가 적임이다. 네로는 폭군 중의 폭군으로 유명하지만 이는 역사 교과서에나 나올 평가일 뿐이다. 외교에서는 제법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로마의 안위에 가장 위협적인 페르시아와 오랜 기간 우호 관계를 유지해온 사람은 그였다. 네로의 방식은 독특하다. 타고난 성격이 개방적인 네로는 타국의 통치자들에게도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어느 나라든 우방국으로 삼고, 대국과 소국을 차별하지 않는 그 태도에 다들 감격한다. 특히 소국 통치자들이 감동받는다. 페르시아와 로마의 관계가 나아진 이유도 페르시아를 둘러싼 소국들이 힘을 모아 로마를 지지해준 덕분이었다.
방위성 장관 자리에 앉히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은 하드리아누스다. 그는 전쟁이라는 수단을 쓰지 않고 국방의 책임을 완수한다는 어려운 과제를 극복한 황제였다. 국민 입장에서는 가장 고마운 안전보장제도를 재구축했던 사람이다. 이 사람을 장관으로 맞이하는 방위성의 공직자들은 앞으로 고달픈 직장 생활을 보내게 생겼다.
임기 중에 드넓은 로마제국의 변방에 있는 국방시설을 죄다 돌아본 사람이니 일본 열도의 기지를 시찰하는 일쯤은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이 사람은 군사 지식과 정보에도 능통하다. 방위성의 직원들 입장에서 무엇보다 힘든 점은 낭비라면 펄쩍 뛰는 그의 기질이다. 그는 쓸데없는 지출, 비효율적인 인력 관리, 정경유착 등을 질색한다. 인사 행정에는 무척 공정하다. 재일외국인이라도 일본 국적을 취득한 사람이라면 선서를 하게 한 다음 일본 국방 중요 부서 수장 자리에도 앉힐 사람이다. 후대의 역사가들이 효율 귀신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을 정도다.
행정개혁 담당 장관 임무를 완수해낼 만한 이는 카이사르밖에 없다. 개혁에 필요한 능력은 카이사르의 앞을 내다보는 통찰력과 반대파조차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설득력, 여론에 휘둘리지 않는 끈질긴 의지, 수단을 목적으로 만들지 않는 자기 제어 능력,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데 갖추어야 할 신체의 내구력 등이다.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데 만족해서는 안 되며 그 후에도 쉴 틈 없이 달려야만 진정한 개혁을 이룬다. 또 그 수단에는 인품이 반영되어야 한다. 카이사르라면 공무원들의 의견을 그저 듣는 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함께 논의할 것이다. 그의 정적이었던 키케로도 인정했듯이, 그는 아무리 무거운 주제라도 농담을 섞어가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러는 사이 상대방은 절로 무장해제가 된다.
이것만은 보증한다. 장관실을 나와 자기 사무실로 돌아가는 공무원들은 하나같이 가슴에 손을 얹고 자신을 돌이켜볼 것이다. ‘우리는 왜 공무원이 되었는가?’ 다른 길을 놔두고 굳이 공무원의 길을 선택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초심을 되새긴다. ‘남들보다 우수한 우리가 기득권이나 상부 명령만 따르는 시시한 일에 일생을 바치자고 공무원이 되었단 말인가? 저 사람을 따라 루비콘강을 건너면 지금보다도 훨씬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할 것이다.
개혁을 총지휘하는 사람은 거물급의 ‘사기꾼’이 아니면 그 자리를 감당하지 못한다. 할애된 지면을 다 쓴지라 남은 장관들은 생략한다. 다만 총리 자리에 적합한 인물은 생략하면 안 되지만, 이름이 떠오르지 않는다. 총리 역할도 완벽하게 해낼 만한 사람들을 장관 자리에 앉혀 놓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총리의 역할은 개혁을 맡긴 각 장관이 반대에 부딪혀 휘청휘청할 때 개혁을 단행하겠다고 활기를 불어넣는 일이다. 하지만 내가 구상한 내각의 장관 중 반대에 부딪힌다고 휘청휘청할 사람은 한 명도 없다. 그러니 총리 한 사람쯤 없어도 괜찮다.
개혁은 루비콘강을 건너는 모험이다 - 내가 꿈꾸는 내각 로마 편(2)
지난번의 시답잖은 내 넋두리를 읽은 독자들의 요청에 부응해 속편에 도전한다. 그전에 두 가지만 짚고 넘어가겠다. 첫째, 사실상 로마제국은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이 세 사람이 세운 나라다. 카이사르가 청사진을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아우구스투스가 건설했다. 뒤를 이어 티베리우스가 내부 공사와 기타 정비를 했다. 이후 로마제국도 이런 형태로 발전했다. 그런 까닭에 대부분의 일은 이 세 사람이 도맡아서 했다.
카이사르는 로마가 정복한 지역에서도 널리 인재를 등용한다는 국책을 확립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조금씩 널리 거두는 세금 정책을 펼쳤다. 티베리우스가 가장 힘을 쏟아부은 분야는 치안 확립과 공정한 사법체계다. 둘째, 역대 황제들이 시행한 정책 중에 좋다고 판단한 정책은 그대로 승계했다. 설령 그 정책이 평판 나쁜 황제의 정책이었다 해도 좋은 정책이라고 여겨지면 주저 없이 그 정책을 받아들였다. 또 당시 미디어 역할을 했던 원로원과 유권자였던 국민들은 황제가 바뀔 때마다 새로운 정책을 내놓으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런 면에서 로마인은 정치적으로 성숙했던 것 같다. 그리고 오현제도 이 세 명의 선대 황제들이 정한 국책을 100년도 더 지난 시대에 맞게 고쳐서 재구축했을 뿐이다.
이야기를 계속해보자. 재무성 장관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적임자인데, 그는 조세제도를 신설하는 데 천재였다. 그래도 ‘조금씩 널리 거두는 세금’의 세율은 변경하지 않았다. 로마인은 위생 관념이 철저한 덕에 상하수도 시설을 완비하고 있었는데, 베스파시아누스는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는 데도 세금을 받아야겠다는 발상을 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역시도 로마인답게 합리주의자였다. 공중화장실 이용자에게는 사용료를 받지 않고, 대신 공중화장실에서 퍼온 오줌을 사용하여 영리를 얻는 사람에게 세금을 부과했다.
당시 소변은 모직물 같은 직물의 기름 성분을 제거하는 데 쓰였다. 한편 베스파시아누스의 정책이 진가를 발휘한 분야는 재원 확보가 아니라 단기간에 공공공사를 끝내는 시공법을 보급한 건설 분야였다. 공사가 빨리 끝나면 추가 비용이 줄어든다. 콜로세움을 세운 사람도 그였다.
법무성과 국가공안위원회의 수장을 꼽자면 앞에서 말한 이유로 티베리우스가 안성맞춤이다. 그리고 국토교통성 장관은 재고할 필요도 없이 트라야누스다. 트라야누스만큼 공공공사를 많이 실시한 황제가 없는데, 그는 국가 차원에서 필요한 공공사업만 했다. 지역 주민의 눈으로 봤을 때 필요한 공사는 민간 기업에 맡겼다. 또 그는 자신이 태어난 고향에도 무엇 하나 짓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중에는 방문도 하지 않았다. 멸사봉공이라는 사자성어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 듯한 이 남자가 현대 일본의 특수법인이나 독립행정법인에 대해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다.
문부과학성과 후생노동성 장관은 누가 되든 상관없다. 이는 카이사르가 결정한 정책을 그대로 승계하면 되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훌륭한 제도라도 종사자의 수와 능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실제로 적용하지 못하기에, 보다 많은 교육자와 의사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어 인재를 확보했다. 저출산 대책도 수장이 누가 되든 변하지 않는다. 이 역시 아우구스투스가 제정한 ‘세 자녀 출산 장려법(동등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여러 명 있다면 세 자녀를 양육하는 사람을 우선 등용하는 정책)’이 유효한 까닭이다. 하지만 아이를 원해도 낳지 못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에 자녀가 없어도 특출한 사람은 예외로 인정해 기회를 박탈하지 않았다. 개혁이란 마음을 단단히 먹고 루비콘강을 건너는 모험이다. 또한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후 총리가 바뀌어도 개혁정책을 고스란히 승계해야 한다.
제2장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
역사를 해석하는 관점 -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관람하고서
영화관에서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관람했다. 그날 로마에서는 찬바람이 몰아치고 비까지 내려 텅 빈 영화관을 상상하며 갔는데 놀랍게도 객석이 거의 차 있었다. 이탈리아인은 자막을 읽으며 영화를 관람하는 데 익숙하지 않다. 그 때문에 배우를 발탁해 자국어로 더빙하는 기술이 매우 발달했다. 그러나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는 더빙을 하지 않고 일본어 음성을 그대로 썼으며 이탈리아어로 자막 처리했다. 그런데도 관객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도중에 자리를 뜨거나 사담 한마디 나누지 않고 조용히 관람했다.
이 영화는 이오지마 전투라는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었는데, 이런 장르의 작품을 볼 때마다 항상 느끼는 약간의 아쉬움을 이 영화에서도 느꼈다. 영화는 전투가 벌어진 시간의 ‘경과’와 그때 싸우다 죽어간 사람들의 ‘숫자’가 지니는 의미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다. 관객의 마음을 파고들 예술성과 배려심이 부족했던 것이다. 일본은 무려 한 달이 넘게 이오지마를 끝까지 지켜냈었다. 그것도 물량작전으로 밀어붙인 미군에게 상대도 되지 않는 2만 명 정도의 병력만으로 버텨냈다.
하기야 영상이 아니라 문장으로 표현하는 작품이라도 이 두 가지 요소를 실감 나게 전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영화 관람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지란차를 마셨다. 지란차는 가고시마의 지란 지역에서 나는 녹차인데, 지란은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가 출격한 지역이다.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를 관람한 후 지란차를 마시니 다시금 이오지마 전투가 떠올랐다.
미국과 일본이 두 나라의 근현대 역사를 공동으로 연구하면 어떨까. 한국과 일본은 이미 작업이 끝났다.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2001년 10월 한일정상회담에서 합의하여 발족, 2005년 5월 제1기 활동결과보고서가 발표되었고, 2010년 6월에 제2기 활동결과보고서가 발표되었다. 2기에는 교과서분과위원회가 신설되었다.)도 발족했다. 일본과 중국도 역사 공동 연구를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역사적 사실은 공유가 가능해도 역사에 대한 인식은 공유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한일, 중일 간 역사 공동 연구는 돈과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라고 단언해 왔다. 그렇지만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 성과는 절망적이더라도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보여주는 일의 유효성은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에 들이는 돈과 시간은 광고 선전비라 생각하면 된다.
[로마인 이야기] 전후 60년 이상이 지난 한일 간 역사 문제: “역사에 대한 해석은 국가별로 제각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사실에 대해서는 국가의 처지가 달라도 공유할 수 있습니다. 좋은 예가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이 지난해 개봉한 이오지마 전투를 다룬 두 영화입니다. 적국으로서 각기 이 전투에 참여한 미국과 일본의 군인들 이야기를 두 편의 영화로 엮어냈습니다. 유럽 역사학계에서는 이에 대해 ‘콜럼버스의 달걀’이라고 합니다. 쉬운 일이지만 아무도 생각지 못했다는 뜻이지요.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알아보는 게 먼저입니다. 역사 문제에 관해서는 지난 60년간 한국과 중국은 일본이 변명만 한다고 반발하고, 일본은 질려서 반발하고 있습니다. 이제 젊은이들은 ‘대체 지난 60년간 뭘 했길래 아직도 그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느냐’며 반발하지요. 이런 경우 다시 기본으로 돌아가는 게 상책이라고 봅니다.” - 《신동아》(2007.5) 저자 인터뷰 중에서
그러나 미일 간 근현대사 공동 연구를 진행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한일, 중일 간 연구와 달리 미일 간 공동 연구는 모든 면에서 일본에 유익할 가능성이 있다. 첫째, 일본의 본심이야 어떻든 겉으로는 공동 연구를 하고 있다고 알릴 필요가 없다. 둘째, 공동 연구에 참가하는 미국 인사 중에는 시작하기 전부터 일본에 적대적인 사람이 없을 것이다. 셋째, 이오지마 전투는 역사적인 사실이며 이를 어떻게 볼 것인가는 역사 인식이다. 미국과 일본은 굳이 역사에 대한 인식 공유 없이 같은 역사적 사실을 두 방향으로 해석한 사례가 이미 있었다. 영화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가 그 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에 열린 도쿄 재판 과정에서 유달리 냉철하고 논리적인 자세로 전쟁범죄자를 변호한 사람은 다름 아닌 미국인 변호사였다. 그러한 미국인이라면 역사 인식의 완전한 공유까지는 아니어도 상당히 가까워질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에 필요한 돈과 시간도 광고 선전비라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이 작업은 미국과 일본 간에만 그치지 않고 영국, 호주까지 확대해도 좋다. 영국은 냉철함과 객관성을 자부하는 국민성을 가진 나라이고 호주도 비슷하다. 우선 이들 나라의 연구자들은 시작 전부터 핏대를 세우는 반일본 성향의 사람이 없다는 공통점이 있다. 역사 공동 연구를 한일, 중일 간으로 한정 짓지 말고 다른 국가로 넓혀 간다면, 한일, 중일 간 공동 연구에 쏟아붓는 돈과 시간은 쓸데없는 낭비가 아니라 이득을 창출해 낼지도 모른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일, 중일 간 공동 연구가 여러 나라와의 연구 중 하나가 된다. 둘째, 공동 연구를 하는 모습을 비교하면서 일본인뿐 아니라 한국인과 중국인도 자신들의 연구 자세를 되돌아볼 것이다. 셋째, 일본인이 성숙해진다. 현대 일본인은 대부분 문제만 일으키지 않으면 괜찮다는 무사안일주의에 반대한다. 그에 반발한 일부 세력의 이념이 감상적이며 과격한 국수주의로 치닫는 경향도 있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일본은 패전 이후 반세기 동안 엄연한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역사 인식을 냉정히 받아들이고 명시하는 일에 소홀히 해왔다. 근현대 역사에 대한 공동 연구의 틀을 미국까지 넓혀간다면 적어도 머리를 식히는 데 도움이 되리라 본다. 중장기적으로는 일본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 되는 데도 큰 역할을 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