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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노 나나미의 리더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 북스코리아
시오노 나나미의 리더 이야기



시오노 나나미 지음

북스코리아 / 2018년 12월 / 295쪽 / 15,000원









좋은 바람, 베네벤툼



피로스는 그리스의 에페이로스에서 배를 타고 며칠 만에 이탈리아로 건너갔다. 타렌툼에는 전쟁을 준비한 흔적 따위는 찾아볼 수 없었다. 타렌툼 시민들은 피로스를 용병으로 고용했다고 생각했고, 고용주인 자신들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 오히려 불만을 표현했다. 여름이 다가오자 로마군이 남하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피로스는 그리스에서 데려온 휘하 병력만 이끌고 싸우기로 했다. 2만 6500명의 병사와 코끼리 18마리가 전력의 전부였다. 집정관 레비누스의 로마 연합군은 로마군 병사 8,000명에 동맹국 병사 1만 1,000명을 합해서 모두 2만 4,000명 정도로 비슷한 전력이었다.

헤라클레아 평야에 포진을 끝낸 양군의 진용은 극히 달랐다. 로마군은 평지보다 산지에 적합한 세로로 긴 병진을 구성했고, 피로스의 군대는 가로로 긴 병진을 취하고 있었다. 로마군이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18마리 코끼리는 앞쪽에 배치되지 않고 좌우 양쪽 날개에 배치되었다. 그리스군 보병이 로마군 보병과 맞서서 일진일퇴하는 동안, 지금의 전차부대에 해당하는 코끼리 떼는 로마군 기병대를 여지없이 격파했다. 그 뒤로 피로스가 이끄는 그리스 기병대가 로마군의 배후를 공격하는 데 성공했다. 포위된 로마군은 7,000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남기고 패퇴했다. 피로스 쪽의 전사자도 4,000명에 이르렀지만 이후 로마 편입에 대한 불만 세력이 피로스 쪽을 지원했기 때문에, 병력면에서는 당장 손실을 만회할 수 있었다. 고무된 피로스는 북상하여 수도 로마를 공격하기로 했다. 병력 보충의 사례처럼 로마로 진군하는 동안 ‘로마 연합’에 가담하고 있는 부족들이 로마에 등을 돌리리라는 것을 계산에 넣은 행동이었다. 그런데 피로스의 예상과는 달리 ‘로마 연합’의 가맹국들은 로마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 끈질기게 로마와 싸우다가 굴복한 삼니움족까지도 피로스의 제안을 거절하자 로마에서 불과 6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쳐들어간 피로스의 기세는 꺾여버렸다.

타렌툼으로 돌아간 피로스는 로마에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그리스계 도시에 대한 불가침 선언을 할 것과 그리스계 도시들과 로마 사이에 중립지대를 만들고 해당 지역에 사는 삼니움족과 루카니아족을 ‘로마 연합’에서 다시 독립시키는 조건으로 강화를 제안했다. 그러자 로마 원로원 의원의 대다수는 강화를 맺는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는데, 이것을 알고 은퇴해 있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에 나타나 호된 꾸지람(강화의 전제 조건은 적이자 침입자인 피로스가 이탈리아를 떠나는 것이고, 적이 강화나 교섭의 상대가 돼서는 안 된다)을 했다. 그의 말에 원로원의 분위기는 확 바뀌었다.

이듬해에 집정관으로 선출된 파브리키우스가 특사로 포로의 몸값을 가지고 타렌툼의 피로스를 찾아갔고, 피로스는 “나는 이탈리아에 장사하러 온 게 아니다. 전쟁터에서 결말을 내어야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해가 바뀌어 봄이 되자 로마는 결전장을 신중하게 골랐고, 아우디우스라는 곳이 선정되었다. 산 바로 밑에 있어서, 피로스의 기병대와 코끼리 부대를 억제할 수 있는 지형으로 로마군에게 유리하고도 절묘한 선택이었다. 양군의 전력은 이번에도 막상막하였다. 피로스는 좁아진 전쟁터 지형에 맞추어 전술을 바꾸었고, 전장 지형의 영향으로 말과 코끼리의 움직임이 둔해진 탓에 첫날 전투는 어느 쪽도 우세하다고 할 것 없이 끝났다. 이튿날 피로스는 다시 전술을 바꾸어 좀 더 평탄한 지역으로 로마군을 유인해냈고, 유리한 지형으로 옮긴 피로스의 전술이 효력을 발휘해 로마군은 집정관 한 명이 전사하고 총 6,000명의 전사자가 날 만큼 큰 손실을 보았다. 피로스 쪽도 손실이 컸다. 패주하는 적도 뒤쫓지 못하고 타렌툼으로 돌아온 피로스에게 시칠리아섬의 시라쿠사에서 사절이 찾아왔다. 카르타고의 공격으로부터 시칠리아의 그리스인을 지켜달라는 요청이었다. 로마인과의 싸움에 진저리치던 피로스는 자세히 살피지 않고 이 요청을 수락했다. 피로스는 타렌툼 시민들에게 시칠리아 공략은 쉽게 끝날 테니까 곧 돌아오겠다고 말하고 휘하 병력만 이끌고 메시나 해협을 건넜다.

그러나 시칠리아를 수중에 넣는 일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3년 동안 피로스를 괴롭힌 것은 카르타고인이 아니라 바로 시칠리아의 그리스인이었다. 피로스는 결국 시칠리아 그리스인들의 내분과 배신에 우롱당하고 마지막에는 신변의 위험까지 겪어야 했다. 그래서 결국 피로스가 시칠리아를 포기하고 3년을 허송세월한 뒤에 타렌툼으로 돌아왔을 때, 남은 것은 이제 절반으로 줄어버린 휘하 병력뿐이었다. 타렌툼 시민들도 시칠리아의 그리스인들과 다를 게 없었다. 돌아온 피로스가 군대를 다시 편성하게끔 지원하는 것조차 아까워했다. 한편 로마는 피로스가 자리를 비운 이 3년을 ‘로마 연합’을 단단히 굳히는 데 활용했고 동맹국은 모두 확실한 로마 편이 되었다.

기원전 275년 여름, 로마군 2개 군단은 말벤툼에 있고, 나머지 2개 군단은 그보다 남쪽에 있는 산지를 행군 중이라는 보고에 피로스는 우선 말벤툼에 있는 절반의 로마군을 공격하기로 했다. 피로스는전력의 열세를 조금이라도 만회하기 위해 동트기 전에 기습 공격하기로 했다. 하지만 산지를 행군하는 데 예정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소비했고, 말벤툼에 도착했을 무렵에는 이미 날이 훤히 밝아 있었다. 또한 코끼리 울음소리에 놀란 주민들이 피로스의 진입을 벌써 로마군에 알리고 난 뒤였다. 집정관 마니우스는 피로스가 미처 진형을 펼치기 전에 공세를 폈다. 격전이 벌어졌지만 기습할 기회를 놓친 피로스보다는 로마군에게 줄곧 우세한 전황이 전개되었다. 피로스는 후퇴 명령을 내렸다. 결국 초가을 무렵 피로스는 타렌툼을 떠나 에페이로스로 돌아갔고, 3년 뒤에 스파르타와 싸우다가 전사했다.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이름 높은 장수였던 피로스를 회군하게 만든 이 사건으로 로마는 반대급부를 얻어 일약 국제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로마인들은 피로스에게 기념할 만한 승리를 거둔 전쟁터 ‘나쁜 바람’이란 뜻의 말벤툼을 ‘좋은 바람’이라는 뜻의 ‘베네벤툼’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기원전 273년, 타렌툼을 공격, 간단히 함락시키고 로마의 6동맹국 안에 포함했다. 하지만 ‘로마 연합’의 다른 동맹국과는 달리 타렌툼에는 자치권을 주지 않았고 항구를 자신들의 직할 해군기지로 삼았다.

리더에게: 로마제국의 군사력은 현재의 미국과 비교될 정도로 독보적인 수준이었다. 그러한 로마제국이 후대의 영국, 프랑스, 스페인의 제국주의 국가와 달리 평가되는 결정적인 차이는 정복지에 펼친 정책에 있다. 로마 시대에 전후처리는 식민화를 전제로 전쟁을 이끈 지휘관이 담당했다. 오늘날로 치면 군사정치인 셈이다. 로마 군사들은 공병이기도 했기에 전쟁이 끝나면 정복지에 도시기반 시설을 정비하는 일에 착수했다. 이는 로마인의 전통이었다. 점령군이 도시기반시설 구축사업에 이다지도 전념했다면 치안은 어떻게 관리했을까? 로마제국은 피지배 민족에게 원로원과 시민, 황제로 구성된 로마의 사회조직과 문화를 강요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때그때의 상황에 따라 처리했다. 각각의 민족과 고유한 특성에 따라 무니키피움이라는 지방자치단체를 두고 내부 자치를 전적으로 허용했다. 자치를 인정했다는 말은 스스로 책임을 지게 했다는 뜻이다. 사형 이외의 사법상의 자결권까지 허용하면서, 커뮤니티 내부의 치안 유지에 관한 책임도 그들에게 돌렸다. 물론 전체적인 관장은 로마가 맡았다. 전후처리가 끝난 후에 파견하는 속주 총독 역시 로마제국의 중앙정부인 황제와 원로원이 임명했다. 지방 분권이 잘 이루어진 만큼 반로마 봉기의 온상이 될 법도 하건만 그럴 일이 없도록 로마의 중앙정부는 제대로 쐐기를 박아두었다. 그 쐐기는 다름 아닌 지방자치단체의 유력자들에게 부여한 로마 시민권이었다. 그들 중 지도자들에게는 원로원 의석까지 제공했다.

물론 지배국으로서의 강제력도 행사했다. 10대 중반에서 20대 중반의 유력자 자제들을 볼모로 제국의 수도인 로마나 본국 이탈리아로 데리고 갔다. 하지만 감옥에 집어넣거나 강제노동을 시키지는 않았다. 자유롭게 자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제약만 있을 뿐, 실제로는 현재 미국의 풀브라이트 유학생과 다를 바 없는 혜택을 누렸다. 각자의 신분에 걸맞은 집을 숙소로 제공하고, 그 집 아이들과 나란히 미래의 지도자에게 필요한 지식을 배우게끔 배려했다. 왕후의 자제일 경우에는 왕궁을 숙소로 제공했다. 제국의 차세대 왕손이 속주국의 왕손과 함께 자라난 셈이다.

속주국의 지도자 육성을 위해 배려한 점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유력자 집안에서 태어난 신분이 아닐지라도 패기가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로마 군대의 문을 열어주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로마가 속주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데 적극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지도층에게는 자기 가문의 이름을 하사했다는 점이다. 로마인의 이름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같이 개인 이름, 가문 이름, 가족 이름 이렇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로마인들은 가문 명을 나누는 것을 ‘클리엔테스 관계를 맺는다’라고 표현했다. 클리엔테스라는 라틴어는 클라이언트라는 말의 어원이다. 고객이라는 뜻이 아니라 ‘체인점’, 혹은 ‘부모와 자식 관계, 두목과 부하 관계’라는 뜻에 가깝다. 만약 로마가 이라크를 점령했다면 사담 부시 후세인이나, 아후메드 블레어 허쉬드 같은 이름의 인물이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가문 명을 부여받을 정도였다면 하물며 로마 시민권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구별이 모호해졌다. 이러한 패자 동화 노선이야말로 다민족국가를 운영하는 로마인의 철학이었다. 나는 로마제국을 표현할 때 ‘운명 공동체’라는 말을 사용한다. 로마인이 사용하는 라틴어에는 없는 말이다. 그들은 운명 공동체라는 말 대신 ‘파밀리아(familia)’라고 표현했다. 이 말이 패밀리의 어원임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로마제국도 멸망을 피할 길은 없었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제국을 지키려 했으나 로마는 결국 쇠퇴의 길을 걸었다. 왜 로마가 멸망했느냐는 논의는 지금까지도 끊이지 않는다. 근대의 제국들은 식민지가 하나둘 독립하면서 사라졌지만, 마지막까지 속국의 민심이 돌아서지 않았던 로마는 제국의 형태 그대로 멸망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명예로운 경력



수많은 부족의 연합체였던 왕정 시대의 로마에서 부족장들이 왕에게 조언과 권고를 하는 기관으로 설치한 것이 로마 원로원의 기원으로 기원전 753년부터 존재했다.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으로 바뀐 뒤에는 원로원의 역할은 달라졌는데, 이때부터 단순하게 부족의 대표들이 모인 기관에서 현대의 국회에 가까운 조직으로 변모한다. 유력자나 유력한 가문에서 태어나야 한다는 조건은 있었지만 30세에 이르면 귀족과 평민의 구별 없이 원로원 의석을 얻을 수 있었다. 평민의 권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던 호민관도 임기가 끝나면 원로원 의석을 얻을 수 있었다. 그 결과 로마 원로원에는 유능한 인재를 모아두는 기관이라는 의미가 추가되었다. 공화정 시대에 국가 요직은 문무 구별 없이 시민집회에서 선거로 결정되었지만 입후보하는 사람은 대부분 원로원 의원이었다. 오늘날 의원내각제와 비슷하다. 게다가 원로원은 입법기관 역할도 맡고 있어서 입안된 법률은 원로원에서 채택되어야 비로소 국가 법률로 제정되었다. 한편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고 재력과 재능도 있는 사람이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 것은 로마인들에게 의무로 여겨졌기 때문에 원로원 의원은 모두 무급이었다. 그래서 명예로운 경력이라고 불렀다.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가 고대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는 한니발에게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선택받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무를 다하며 최전선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사는 1년마다 교대되어도 선택된 그들은 최전선을 굳게 지켰다. 아무튼 공화정 시대의 로마는 정치와 군사만이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까지도 선택받은 사람들의 모임인 원로원이 주도했다.

하지만 어떤 조직도 경직화는 피할 수 없다. 포에니 전쟁에 이긴 뒤 지중해의 패권자가 된 로마 원로원에 기득권 계급적인 성격이 점점 강화되어 나타났다. 이 무렵 로마 시민권 소유자의 수도 급증하여 1년에 한 번씩 모여 선거로 국가 요직을 결정하는 공화정의 근간이 기능을 못 하는 상태에 빠졌고, 통치 능력이라는 면에서도 600명의 합의로 통치하는 체제는 부적당해졌다. 즉 원로원 주도 체제는 이탈리아반도를 통치하는 데에는 적당했지만, 더 넓은 영토를 가지게 된 로마와는 맞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래서 로마는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의 변화라는 루비콘을 건넌다. 원로원이 주도하는 시대에서 황제가 주도하는 시대로 넘어갔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도 공동체라는 사고방식을 유지해온 로마는 변하지 않았다. 제정이 되었다고 해서 1인의 사유물로 바뀐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로마는 여전히 시민과 원로원을 주권자로 하는 국가였고, 주권자가 황제에게 권력 행사를 위임했을 뿐이라는 의식이 모두에게 존재했다.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에서 시작된 서기 1~3세기의 정치체제를 원수정이라고 부르는 것은 ‘로마 시민권 소유자 가운데 제일인자’가 통치의 최고 책임을 지는 정치체제였기 때문이다.

황제가 제국 통치의 정점인 정치체제로 바뀐 이상 원로원의 역할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고, 왕정 시대처럼 통치의 최고책임자에게 조언이나 권고를 하는 역할로 돌아갔다. 하지만 500년이나 지속하여 정착된 원로원의 역할이 제정으로 바뀌었다고 완전히 폐지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제정으로 변모한 원로원의 역할은 국가 요직에 내보낼 수 있는 인재 육성과 입법기관으로 조정됐다. 황제는 자유롭게 법률을 결정할 수 있지만, 그것을 국가 정책으로 이행되게 하려면 원로원의 의결을 거쳐야 했다. 황제들도 제국을 통치하려면 협력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인재 육성 기관으로 원로원을 활용하려 했다.

원로원의 이 역할을 사라지게 만든 것은 서기 260년대에 원로원 의원이 군단 사령관으로 전출하는 것을 금지한 갈리에누스 황제의 법률이었다. 이는 원로원 의원의 군단 전출을 막아놓은 것이지만, 거꾸로 우수한 인재가 군사 경험을 쌓을 기회와 군단에서 출세한 사람이 원로원에 들어가 정치 경험을 쌓을 기회를 빼앗게 되었다. 성장의 기회는 적절한 때 주어져야 또 다른 성장을 끌어내는 법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리에누스의 법률을 철저히 지켰고, 군사 경력과 정치 경력의 분리 정책은 원로원의 의결 없이 칙령이라는 형태로 황제의 의사가 곧 국가 정책이 되게 만드는 최종 결과물을 낳았다. 황제 혼자서 국법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은 황제 마음대로 폐기할 수 있다는 뜻과 같아졌으며, 이때부터 로마는 확실히 비법치국가로 변신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특징을 모두 지닌 ‘중세화’되었다. 한편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개혁 중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그대로 답습했는데, 원로원과 관련된 것이 특징적이며,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임명하는 의원은 실권이 없는 명예직일 뿐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후기에 들어선 로마제국을 상징하는 것이 되었다. 한때는 로마 그 자체였던 원로원은 이념과 기능을 상실하고 로마가 아닌 로마제국이 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리더에게: 시험에 갓 합격한 예비 외교관들이 연수를 받는데, 거기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나와 관련이 없는 강의는 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워두어서 4월에는 일본에 갈 일이 없다는 핑계를 들어 거절했다. 한데 만약 내가 초보 외교관 앞에서 강의한다면 어떤 이야기를 해야 할까? 우선 그들이 이제 시작하려는 일이 ‘외교(外交)’가 아닌 ‘외정(外政)’임을 확실하게 말해주고 싶다. 외국과 교섭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 외교 관계 속에서 정치하는 게 그들의 임무란 뜻이다. ‘외정성(外政省)’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외무성의 목표는 무엇일까? 그것은 일본의 국익을 지키는 일이다. 그런데 국익이라는 말을 들으면 자국의 이익만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그래서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타국의 이익도 고려해야 하는가? 세계화 속에서는 오롯이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할 수 있는 상황이란 없다’ 등의 논의가 버젓이 오간다. 그런데 이런 논의는 국익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미궁 속으로 더욱 빠지게 할 뿐이다. 그럼 국익을 효과적으로 추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키아벨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업에 성공하려면 참가한 전원이 이익을 얻는 구조가 형성되어야 한다.” 모두가 이익을 얻어야 자신도 이익을 얻는다는 뜻이다. 세계화 시대라고 해서 국익을 추구하는 형태가 따로 있지는 않다. 또한 좁은 국익이나 넓은 국익의 구별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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