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의 재발견
다산교육콘텐츠연구소 지음 | 프리윌
명작의 재발견
다산교육콘텐츠연구소 지음
프리윌 / 2019년 3월 / 320쪽 / 22,000원
유토피아 (토머스 모어)
이상향을 그린 작품
1516년, 영국의 인문학자 토마스 모어는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나라의 모습을 그린 책 『유토피아』를 출간했다. Utopia는 그리스어 ou(=no 없다)와 topos(=place)를 합쳐서 만든 말로 ‘아무 데도 없는 나라’, 즉 ‘이상향’을 뜻한다.
영국 사회의 부조리 비판, 근대소설의 효시
이 작품은 저자가 벨기에의 안토워프 거리에서 포르투갈인 어부를 만나 유토피아라는 섬 이야기를 들었다는 형식의 이야기 전달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내용면에서는 당시 유럽, 특히 영국 사회의 부조리를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내용이다.
유토피아는 54개 주로 나뉘어져 각주 중앙에 도시가 하나씩 있고, 그 둘레에 전원이 있는 그리스의 도시국가와 비슷한 나라이다. 전원에는 도시의 가구 수와 같은 수의 농장이 있어서 시민이 2년 교대로 농업에 종사한다. 그리고 이 유토피아라는 나라에는 국왕이 없다. 국민들은 모두 노동을 하고, 노동을 면제받는 사람은 공무원과 일부 특정 계급뿐이다. 노동시간은 1일 6시간으로 정해져 있으며, 여가 시간에는 교양을 쌓는다. 6시간 노동제로는 생산부족을 가져올 수도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영국과는 달리 성직자, 귀족, 지주들까지도 모두 노동에 종사하므로 노동력은 모자라지 않는다. 또한 유토피아에서는 음식 담는 그릇으로 사기와 유기가 주로 사용되고, 금과 은은 요강과 같은 불결한 용기의 재료로 쓰이고 진주나 보석은 어린애들의 장난감용으로 쓰인다.
교육은 어렸을 때부터 받으며, 어른이 된 뒤에는 여가를 이용해서 공부를 한다. 그들은 외국어는 배우지 않고, 자기 나라 말로 공부하며, 논리학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또 천문이나 기상에 대해서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미신에 속하는 점성술 같은 것은 알지 못한다. 그리고 윤리관은 유럽 여러 나라와 비슷하면서도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종교에 있어서는 영혼 불멸을 믿으며, 신의 은총에 의해서 선천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기질을 타고 난 인간은 내세에서도 선행에 대한 보상이 있고, 악행에 대해서는 벌을 받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참다운 행복을 선행 속에서 찾으며,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 찬 쾌락은 추구하지 않는다. 또한 도박이나 사냥 따위는 배척하고, 돈이 없기 때문에 자연히 사기, 도둑질, 강도, 살인, 배신 등이 없고 두려움과 슬픔도 없다.
소설 『유토피아』는 전체적으로 르네상스 시기에 맞추어 휴머니즘 정신을 반영하고 있으며, 종교적 관용, 평화주의, 남녀교육 평등 등을 주장하고 있다. 또한 사유 재산의 부정, 계획적인 생산과 소비, 노동분배의 합리화, 노동조건의 개선, 소비의 사회화 등 그야말로 ‘이상 사회’를 그리고 있다. 그렇지만 소설로서 『유토피아』의 중요성은 이상사회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영국과 유럽 사회의 부조리를 개선하려는 비판적 속성에 있으며, 근대소설의 효시를 이루었다는 점에 있다.
고결한 양심, 불멸의 영혼!
토마스 모어는 런던에서 법률가 존 모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옥스퍼드대학에 입학했다가 법률가가 되기 위해 링컨법학원으로 옮겨 졸업 후에는 변호사가 되었다. 1515년에는 통상교섭단으로 네덜란드에 건너가 외교 수완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는 탁월한 수완과 식견으로 헨리 8세의 신임을 얻어 1529년에는 마침내 대법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인문주의자로서 신랄한 언사를 서슴지 않았으나 동시에 경건한 그리스도인이었으며, 명문장가로서 국민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 공직자로서도 국내의 정치적 긴장과 국제적 압력에 대처하는 한편 국왕들이나 귀족들과도 교분을 유지했다. 그래서 친구 에라스무스와 함께 전 유럽에 그 이름을 떨쳤으나 불행이 닥쳐왔을 때는 그 어느 것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의 이혼과 재혼, 영국국교회 설립을 위한 수장령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런던탑에 수감되었다가 끝내는 반역죄로 목이 잘리고 그 머리가 장대 끝에 매달리는 치욕을 받았다. 그가 죽은 지 400년이 지난 1935년 이르러서야 비로소 로마 교황청은 그에게 성자의 칭호를 내렸고,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새겨졌다. “고결한 양심, 불멸의 영혼!” 작품으로는 『유토피아』 외에 『피코 델라 미란돌라전』과 『리처드 3세전』이 있다.
가난한 사람들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도스토예프스키의 위상
도스토예프스키는 러시아 문학의 최고 거장으로 불리며 20세기 세계 문학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그의 소설은 이질적, 극단적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인간 심리에 대한 놀라운 해부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당대 러시아의 정치, 사회, 정신세계 등을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념적인 면에서는 신흥 자본주의 압박 밑에서 신음하는 소시민층의 대변자인 동시에 열렬한 슬라브주의자였다. 그의 작품은 늘 어두운 그늘을 드리운 채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모순이나 부당함을 강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는 언제나 가난하고 학대받는 사람들 편이 되어 그들을 동정하면서 그 속에 흐르고 있는 순수함과 진실을 속속들이 밝혀 보인다. 그의 작품은 비단 문학의 영역에서뿐만 아니라 철학, 종교, 사회 문제 등 각 방면에 걸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은 폭력적 혁명을 부정하고 기독교, 특히 정교회 교리에 바탕을 둔 사상을 담고 있다. 종교 재판을 자행한 기독교의 폭력을 비판함으로써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대 작가로서의 서곡
『가난한 사람들』은 25세의 무명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를 일약 러시아 문단의 총아로 만들어 준 작품이다. 소설에는 가난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가난이 인간 심리와 삶에 끼치는 영향들 그리고 가난하고 핍박받는 자들에 대한 강한 동정심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소설은 러시아문학 최초의 본격적인 도시소설이며, 소설에 나타난 문제는 작가가 미래에 대작가로 성장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제부시킨과 바르바라의 불우한 사랑 이야기
소설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마카르 제부시킨과 바르바라는 페테르부르크의 어느 빈민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제부시킨은 50세 전후의 관공서 서기이고, 그의 먼 친척뻘 되는 바르바라는 의지할 데 없는 처녀이다. 제부시킨에게 바르바라의 존재는 하나의 빛이자 삶의 의미이다. 바르바라를 위해 월급을 가불하고, 자신의 옷까지 팔아서 돈을 건네주며, 그녀에게 매일 편지 쓰는 것을 유일한 기쁨으로 삼는다. 하지만 바르바라는 그러한 제부시킨의 호의를 부담스러워한다. 그러면서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 의심한다. 하지만 제부시킨은 자신의 호의가 아버지의 애정 같은 순수한 것이라며 부정한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바르바라는 차츰 제부시킨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브이코프라는 돈 많은 지주가 바르바라에게 청혼을 한다. 그녀는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브이코프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제부시킨는 비통한 마음을 숨긴 채 그녀의 결혼 준비를 도와주다가 병을 얻는다. 마침내 바르바라는 브이코프와 함께 떠나고, 혼자 남게 된 제부시킨은 마지막 편지에서 바르바라를 잃은 슬픔을 처절하게 울부짖는다.
도스토예프스키의 파란 많은 삶의 궤적
도스토예프스키는 1821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의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엄격하고 가부장적이며 거친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반면 어머니는 온화하고 자애로운 성격으로 7남매에게 따뜻한 보금자리 같은 존재였다. 도스토예프스키는 13세 때 형 미하일과 함께 모스크바 체르마크 기숙학교에 입학하여 3년간 공부했으며, 그가 졸업하던 해에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어머니의 죽음은 도스토예프스키는 물론 가족에게 큰 충격이었다.
아버지는 장남 미하일과 도스토예프스키를 공병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공병학교 군사교육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런 속에서 그는 문학을 유일한 위안과 탈출구로 삼고, 작가지망생들을 만나 서로 습작을 평하거나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18세 되던 해인 1839년 그의 가정에는 또 다른 불행이 찾아온다. 그의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는 실의에 빠져 의사직을 그만두고 영지로 내려가 생활했는데, 농노들을 가혹하게 다룬 것이 원인이 되어 농노들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로 인해 도스토예프스키는 심한 충격을 받았는데, 이 시기에 도스토예프스키를 평생 괴롭힌 간질 발작이 처음 나타났다고 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공병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성 제도국 소위로 임관되었지만 문학에 대한 열망이 더 컸기 때문에 작가가 되기 위해 1844년 10월 군복을 벗고 제대하였다. 그러다 25세 되던 해인 1846년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하여 일약 러시아 문단의 주목받는 작가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후에 연이어 발표한 『백야』와 『분신』은 비평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도스토예프스키는 서구 사상에 끌리게 되고,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가 주도하는 사회주의 연구모임에 가담했다.
그들 모임이 급진적 사회주의 색체를 띠자 당시 차르였던 니콜라이 1세는 비밀요원을 보내 그들 모임을 감시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당시 불온문서를 회원들 앞에서 낭독한 죄로 당국에 체포되었다. 니콜라이 1세는 체포된 지식인들을 진짜로 사형할 생각은 없었지만 당시 확산되고 있던 급진주의 정치단체들에게 경고를 주는 의미로 그들에게 사형선고를 내렸고, 사형은 집행 직전에 특별감형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가까스로 사형은 면했으나 시베리아 옴스크 감옥에서 4년간이나 수형생활을 해야만 했다. 성경 이외에는 일절 다른 물품이 반입되지 않았기 때문에 도스토예프스키는 감옥 안에서 성경을 깊이 탐독하는 한편 다른 죄수들의 민중적 삶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러면서 그는 차츰 사회주의자에서 기독교적 인도주의자로 변모해갔다. 훗날 그가 쓴 『죽음의 집의 기록』에는 이러한 변화가 잘 나타나 있다.
수형생활을 마치고 출소한 도스토예프스키는 4년간 사병으로 근무했다. 그는 36세에 미망인인 마리아 드미트리예브나 이사예바라와 결혼했다. 아내 마리아와 함께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도스토예프스키는 10년간의 공백을 메꾸기라도 하듯 의욕적으로 문학 활동을 재개했다. 1861년에는 형과 함께 잡지 《시대》를 발간하고, 『학대받는 사람들』, 『죽음의 집의 기록』을 연재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그 잡지는 이듬해에 당국으로부터 발행 금지를 당했다. 그 뒤 다시 형과 함께 새로운 잡지 《세기》를 창간했지만 경제적으로 실패하여 큰 빚을 지게 되었다. 그는 그 빚을 갚기 위해 출판사와 무리한 원고 계약을 하여 늘 마감에 쫓기는 나날들이 많았다. 그리고 시베리아 유형 때 악화된 간질과 상습화된 도박 습관이 그를 괴롭혔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신체적 어려움 속에서도 1866년 그는 최고의 걸작 『죄와 벌』을 완성했다. 1867년부터는 독일의 드레스덴에 거주하며 작품에 전념하여 『백치』, 『악령』 등을 완성하였다. 7년 뒤에는 다시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미성년』을 발표하여 경제적 성공을 거둠으로써 비로소 빈곤한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후 59세의 나이에 최후의 걸작인 장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을 완성하였는데, 1년 후 폐동맥 파열로 사망했다.
전쟁과 평화 (레프 톨스토이)
극단의 선과 악 사이에 배열된 인물들
소설 『전쟁과 평화』는 총 4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역사소설과 예술소설의 영역이 잘 융합된 작품이다. 작가는 집단의 권력 앞에 개인의 무력함을 강조하는 ‘태생적 숙명론’을 소설의 밑바닥에 깔고 있다. 나폴레옹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그와 대조시켜 카라타예프라는 일개 농민을 정신적 영웅으로 찬양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만도 559명이나 된다. 그들은 극단의 악인 나폴레옹과 극단의 선인 카라타예프 사이에 촘촘이 배열되어 있다. 그러면서 작가는 보르콘스키와 로스토프 양가 가문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개인의 슬픔, 기쁨, 고민 같은 가정적인 요소를 짜 넣어 이 소설이 전쟁과 사회정의 문제를 다룬 역사소설의 영역을 넘어 문학성도 지닌 세계 최고의 고전이 되게 하고 있다.
민중이 역사를 움직이는 진정한 주인공
소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안드레이 공작과 베즈호프는 특히 중요한 인물이다. 안드레이 공작은 전형적인 귀족형으로 명예욕이 강하고 현실적이며 나폴레옹의 열렬한 숭배자이다. 그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부상당한 뒤 삶의 허무함에 사로잡혀 현실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는데, 그때서야 비로소 인간의 가치는 사랑과 희생에 있음을 깨닫는다. 이에 반해 베즈호프는 나폴레옹을 영웅시하지만 농민병사 카라타예프를 만난 뒤에는 신의 의지를 믿게 된다. 그리하여 자기가 찾고 있던 길을 발견하게 되며, 많은 고난과 도전 끝에 ‘인생의 목적은 살아남는 데 있다’라는 점을 깨닫고 주어진 삶을 충실하고 발랄하게 살아가는 나타샤와 함께 새 생활의 길을 찾아 떠난다. 처참한 전쟁 상황이 이 소설의 배경이지만, 이 작품에서 의외로 밝은 청춘의 빛을 느낄 수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베즈호프와 나타샤의 긍정적인 삶의 철학 때문이다. 작가는 소설 속에 고난에 굴하지 않고 살아가는 많은 민중들을 등장시킴으로써, 그들이야말로 러시아 정신의 체현자이자 역사를 움직이는 주인공들임을 보여주고 있다.
군 생활을 거쳐 고향 영지로 돌아오다
톨스토이는 1828년 러시아 남부지방 야스야나 폴라냐에서 태어났다. 불행히도 일찍 부모를 여읜 톨스토이 가족 다섯 남매는 친척집에서 자라났다. 넷째인 톨스토이는 16세 때 카잔 대학에 입학했으나 3년만에 학업을 중단하고 부모의 유산 가운데 자신의 몫으로 물려받은 야스야나 폴랴나 영지로 돌아온다. 영지에서 잠시 농민 자녀들을 상대로 계몽교육을 하던 톨스토이는 20세 되던 해에 다시 고향을 떠나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한동안 도박 등 방탕한 생활에 빠졌다. 그러다 23세 되던 해에 군인이었던 형 니콜라이의 뒤를 따라 캅카스로 가서 육군 장교가 되어 체첸과의 전쟁에 참전했다. 이 시기에 그는 자전적인 소설 『유년 시절』을 발표하여 러시아 국민시인 네크라소프로부터 격찬을 받으며 문단에 데뷔했다.
이상과 현실 사이
톨스토이는 34세 되던 해에 18세 소녀 소피아 안드레예브나와 결혼했다. 소피아는 신혼 초기부터 남편의 복잡하고 모순적인 성격을 알고 충격과 혐오에 빠지기도 했다. 남편이 이상주의자였다면 부인은 현실주의자였으며, 비록 8남매를 낳고 반세기 가까이 해로하긴 했으나 두 사람의 성격 차이는 톨스토이의 말년을 힘겹고도 불미스럽게 만든 원인이 되기도 했다. 40대에 들어서면서 톨스토이는 대작 『전쟁과 평화』에 이어 『안나 카레니나』를 발표해 문명을 확고히 했다. 하지만 40대 후반에는 문학보다는 삶과 죽음 그리고 종교 문제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51세 때 『고백록』을 쓰는 것을 기점으로 그는 주로 신학과 성서 연구에만 매달렸다. 그러면서 기존의 기독교에 실망한 나머지 자비, 비폭력, 금욕을 강조하는 새로운 기독교를 제창했다. 이른바 기독교적 아나키즘으로도 평가되는 ‘톨스토이즘’의 요지는 그가 발표한 수많은 우화 속에 잘 요약되어 있다. 톨스토이의 활동이 이상주의적 종교 쪽으로 기울자 현실주의자인 아내와의 갈등은 점점 커져만 갔다.
세계적인 명성과 불행한 말년
1891년, 톨스토이는 청빈의 실천을 위해 저서의 판권을 포기하려 했지만 가족들은 이에 크게 반발했다. 결국 그는 1881년 이후에 발표한 작품의 판권만 포기하고, 그 이전 작품의 판권은 모두 아내에게 넘기기로 타협했다. 다행히 톨스토이는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70대에 접어든 말년까지 집필력을 잃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예술이란 무엇인가?』와 『부활』을 발표하여 대문호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08년 80회 생일을 맞이했을 때는 전 세계인들로부터 축하 인사를 받을 정도였다. 하지만 곧이어 발생한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인해 그의 사생활은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