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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필립 샌즈 지음 | 더봄
인간의 정의는 어떻게 탄생했는가



필립 샌즈 지음

더봄 / 2019년 4월 / 631쪽 / 28,000원



프롤로그 - 초대장



[1946년 10월 1일 화요일, 뉘른베르크 법원]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간, 피고인석 뒤의 문이 열리고 한스 프랑크가 600호 법정으로 들어섰다. 한스 프랑크는 아돌프 히틀러의 변호인이었으며, 후에 독일이 점령한 폴란드에서 히틀러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 사람들로 가득한 그날의 법정에는 케임브리지대학의 국제법 교수인 허쉬 라우터파하트도 있었다. 그의 옆에는 유명한 영국 검사 팀이 자리하고 있었다. 라우터파하트 교수는 뉘른베르크 헌장에 ‘인도에 반하는 죄(crimes against humanity)’라는 용어를 사용하자는 아이디어를 최초로 낸 사람인데, 이 용어는 폴란드에서 자행된 400만 유대인과 폴란드인에 대한 살상을 의미했다. 프랑크는 5년 동안 라우터파하트 교수의 부모와 형제자매, 그들의 아이들을 포함한 가족들이 살았던 렘베르크가 속한 지역의 나치 독일 총독이었다.

재판에 관심을 기울이는 또 다른 사람인 라파엘 렘킨은 프랑스 파리의 미군병원 침상에서 라디오로 판결을 들었다. 검사 출신으로, 후에 바르샤뱌에서 변호사가 된 그는 1939년 전쟁이 발발하자 폴란드에서 탈출하여 최종적으로 미국에 정착했다. 미국에서 그는 전범재판을 담당하는 미국 검사 팀의 일원으로 영국 검찰 팀과 함께 일했다. 재판이 진행된 오랜 기간 동안 그는 항상 서류들로 가득 찬 여러 개의 가방을 들고 다녔는데, 그중에는 프랑크가 서명한 많은 법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렘킨은 이 자료들을 검토하던 중 프랑크의 행동에서 일종의 패턴을 발견하였는데, 그가 저지른 범죄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있었다. 그는 프랑크의 범죄를 ‘제노사이드(genocide, 집단학살)’라고 불렀다.

개인을 보호하는 것이 목적인 인도에 반하는 죄에 초점을 맞춘 라우터파하트와는 달리 렘킨은 집단의 보호에 더 집중했고, 프랑크의 재판에 제노사이드 범죄 혐의를 포함시키기 위해 혼신을 다해 노력했으나, 재판의 마지막 날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 참석할 수 없었다. 그는 리비우에서 몇 년을 살았으며, 그의 부모와 형제는 프랑크가 통치한 영토에서 자행되었다고 알려진 범죄에 휘말렸다.

“한스 프랑크!” 재판장이 불렀다. 프랑크가 크리스마스 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을 것인지, 그래서 그의 일곱 살짜리 아들에게 집에 돌아가겠다고 한 약속을 지킬 수 있을지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2014년 10월 16일 목요일, 뉘른베르크 법원] 그로부터 68년 후에, 나는 한스 프랑크의 아들 니클라스와 함께 600호 법정을 방문하였다. 나클라스가 마지막으로 이곳을 방문한 것은 1946년 9월이었다. 그는 말했다. “여기가 세상에서 유일하게 아버지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곳이에요.” 그리고 니클라스는 아버지의 행동을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법률가였어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가 인도에 반하는 죄와 제노사이드 혐의로 재판을 받는 동안 앉았던 자리로 갔다. 그는 나를 바라보고 법정을 둘러보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니클라스와 내가 600호 법정에 함께 있게 된 이유는 몇 년 전 내가 받은 예상치 못한 초대장 때문이다. 지금은 리비우라고 알려진 도시의 대학 법학부에서 온 것이었는데, 인도에 반하는 죄와 제노사이드에 대한 내 연구를 주제로 공개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리비우로부터의 초대에 응했던 이유는 분명 내 저술활동보다는 법정변호사로서의 직무라는 이유가 더 컸다. 나는 또 다른 이유로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내 어머니의 아버지인 레온 부흐홀츠가 거기에서 태어났다. 나는 외할아버지인 그를 오랫동안 알았다. 그는 파리에서 1997년 사망하였다. 하지만 나는 1945년 이전의 그의 삶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것이 없었다. 외할아버지가 그 시절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나는 강연을 하기 위해 2010년 가을, 리비우에 도착했다. 그때까지 나는 궁금하지만 아직 언급되지 않은 사실을 파헤쳐 왔다. 뉘른베르크 재판에 인도에 반하는 죄와 제노사이드라는 기소항목을 도입한 두 남자, 허쉬 라우터파하트와 라파엘 렘킨은 폴란드 시인 비틀린(『나의 리비우』의 저자)이 문학작품 활동을 하던 시기에 이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이 두 학자의 삶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지만, 나는 그런 질문에 답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날 늦은 오후가 되어 한 여학생이 나에게 다가왔다.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우리는 외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녀는 리비우에 사는 어느 누구도 라우터파하트나 렘킨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교수님 강의가 제게는 아주 중요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매우 중요합니다. 교수님께서 라우터파하트와 렘킨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녀는 덧붙였다. “하지만 먼저 교수님의 외할아버지의 흔적부터 찾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레온(LEON)



리비우로 여행을 떠나기 몇 주 전에 나는 어머니와 마주 앉았다. 우리 앞에는 서류 가방이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는 내 외할아버지 레온의 사진과 서류, 신문기사들과 전보, 여권, 신분증, 편지, 메모 등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헤이그에서의 심리절차가 끝난 후 스케줄이 비는 틈을 이용하여 런던에서 리비우로 날아갔다. 나는 어머니와 외숙모 애니 그리고 15살짜리 아들과 함께 답사 여행을 했고, 이 여행 과정을 통해 재구성한 레온 가족 삶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의 외할아버지 레온은 리타와 1937년에 비엔나에서 결혼했으며, 1년 후 독일군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위해 비엔나에 들어온 다음 몇 주 만에 그의 딸이자 내 어머니인 루스가 태어났다. 1939년에 그는 파리로 거처를 옮겼다. 리타는 내가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인 1986년에 돌아가셨다. 레온은 1993년 뉴욕에 있었던 내 결혼식에 참석했으며, 4년 뒤에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1913년 1월, 레온의 누나 구스타는 렘베르크를 떠나 비엔나로 가서 주류판매상인 막스 그루버와 결혼을 했다. 1923년, 레온은 전기 및 기술에 대해 공부하면서 그의 매형인 막스의 주류상점에서 그를 도우며 아버지가 밟았던 교육 과정을 따라가기를 희망했다. 5년 후, 레온은 비엔나의 20번 구역 라우셔 거리 15번지에 자신의 상점을 가진 주류제조업자가 되었다.

한편 1933년 1월 말,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아돌프 히틀러를 독일의 총리로 임명한다. 레온은 당시 레오폴드슈타트 구역의 중심가에서 더 큰 상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주류 거래가 활성화되자 그는 근처 독일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두렵게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1933년 5월 13일 토요일, 새로운 독일 정부의 대표가 처음으로 오스트리아를 방문했다. 여기에는 새롭게 임명된 바이에른 주 법무장관이며 히틀러의 전 법률고문이자 친구인 한스 프랑크 박사가 이끄는 일곱 명의 나치 장관들이 타고 있었다. 프랑크가 도착하자 대규모의 지지자들이 집회를 시작했다. 그 후 1938년 3월 12일 아침, 독일군이 오스트리아를 침공해 비엔나로 행진하면서 엄청난 규모의 군중들로부터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사흘 뒤 히틀러가 베인나에 도착하였고, 헬덴 광장에 모인 청중들에게 연설을 하였다. 그 후 며칠 만에 국민투표로 합병이 비준되고, 오스트리아 전역에 독일법이 적용되었다. 또 나치에 반대하는 151명의 오스트리아인이 비엔나에서 독일의 다하우 강제수용소로 이송되었다. 아울러 유대인들이 강제로 도로을 닦도록 학대하였으며, 대학 입학과 전문직 진출이 금지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유대인의 자산과 부동산, 사업 등록을 의무화했고, 이는 레온이 운영하는 주류상점의 종말을 뜻했다.

사업체는 아무런 보상 없이 몰수되었다.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총독의 새로운 정부는 ‘유대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 실행을 담당하는 기관인 유대인 이주 중앙본부의 운영을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일임했다. ‘자발적인’ 이민과 국외 추방과 함께 학대가 정책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자산 이전 사무소가 유대인의 자산을 비유대인에게 이전시켰다. 또 다른 위원회는 오토 폰 베히터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신정부 공작에서 유대인을 제거하는 일을 감독했다. 그러자 많은 유대인들이 이민을 가거나 그렇게 하려고 애썼다. 레온과 그의 처남들도 마찬가지였다. 레온의 세 조카, 즉 구스타와 막스의 세 딸들은 그곳을 빠져나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들의 부모인 구스타와 막스는 비엔나에 남았다.

1938년 7월 17일, 리타는 내 어머니인 딸 루스를 낳았다. 네 달 뒤에 파리의 독일대사관에 근무하는 낮은 직급의 직원이 살해당하며 크리스탈나흐트 - Kristallnacht, 수정의 밤이라는 의미로, 나치 대원들이 독일 전역의 수만 개에 이르는 유대인 상점을 약탈하고 250여 개 시나고그(유대교 회당)에 방화를 저지른 날을 말함 - 가 촉발되었고, 유대인의 재산과 사업의 종말이 시작되었다.

11월 9일, 거리의 유대교 회당이 불에 탔으며 수천 명이 체포되었다. 죽거나 ‘사라진’ 수백 명의 사람 중에 레온의 매형 두 명도 포함되었다. ‘수정의 밤’ 이후 리타는 그녀의 이름에 ‘사라’를 추가하여 유대인 출신임을 표시하도록 강요당했고, 출생신고서와 혼인신고서도 수정해야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레온이나 그들의 딸은 이런 모욕을 당하지 않았다. 11월 25일, 비엔나 경찰청장인 오토 스타인하우스는 레온에게 추방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리타는 그녀의 어머니인 로사를 돕기 위해 남기로 했다.

한편 루스의 여권에는 그녀가 한참 시간이 지난 1939년 7월 22일 오스트리아를 떠나 다음날 프랑스에 입국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도장이 찍혀 있었다. 1939년 1월 말 레온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네 살이었다. 레온은 그의 딸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프랑스 군대에 지원하여 독일과의 전투에 참전하였다. 프랑스군은 그에게 신분증을 발급해주었고, 그를 ‘전기기술자’라고 기재했다. 그런데 한 달도 되지 않아 그는 전투를 하기에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퇴역하였다. 전쟁은 6월 22일 휴전협정 체결과 함께 끝났다. 연대는 해산되었다. 레온은 1940년 6월 14일 파리로 돌아왔다.

한편 1941년 여름 비엔나에서 보낸 시간은 리타에게 힘든 시기였다. 레온과 그녀의 딸과 3년 가까이 만나지 못했다. 그녀는 친정어머니 로사와 시어머니 말케와 함께 살았다. 9월에 비엔나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노란색 별을 달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그리고 살고 있는 지역을 허가 없이 떠날 수 없었다. 그런데 8월 14일, 리타는 1년간 독일제국의 안팎을 다닐 수 있는 외국인 여권을 발급받았고, 10월 10일, 비엔나 경찰청은 프랑스와 독일의 국경에 있는 자를란트 주의 하르가르텐 팔크를 통해 나라 밖으로 나가는 편도 여행을 허가하였다. 비엔나를 떠나기 위해 리타는 내부에 있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1941년 11월 9일 리타는 비엔나를 떠났다. 바로 그 다음날 난민을 대상으로 독일제국 국경이 폐쇄되었다. 말케는 이제 비엔나에 남아 있는 레온의 마지막 가족이었다. 레온과 리타가 함께 살았던 건물이자 내 어머니가 태어난 곳인 타보르 거리로 갔다. 그곳은 말케(레온의 어머니)의 마지막 비엔나 집으로, 다른 노인들과 함께 살았던 셰어하우스였다. 그곳에서 1942년 7월 14일 아침에 시작된 마지막 날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도로는 탈출을 막기 위해 나치 친위대에 의해 봉쇄되었다. 말케는 일흔두 살이었으며, 동쪽으로 떠나는데 단 하나의 가방만이 허락되었다.

아슈팡역까지 감시를 받으며 이동하는 동안 구경꾼들은 그녀와 다른 강제추방자들에게 침을 뱉고 조롱하고 모욕을 가하였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말케가 혼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리타의 어머니 로사와 함께였다. 두 연로한 여성이 작은 여행가방을 하나씩 들고, 동쪽으로 향하는 994명의 비엔나 노인들 속에 섞여 아슈팡역의 플랫폼에 서 있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진다.

그들은 24시간의 여정 끝에 프라하 북쪽 60킬로미터 지점인 테레지엥슈타트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그들은 몸수색을 당했다. 그런 뒤에 그들을 위한 구역으로 안내되었다. 그 뒤 로사는 몇 주 동안은 살아 있었다. 사망진단서에 따르면 그녀는 9월 16일 결장주위염으로 사망했다. 로사가 죽고 일주일 후 말케는 Bq 402를 타고 테레지엥슈타트에서 추방당했다. 그녀는 기차를 타고 바르샤바를 넘어 동쪽으로 달려 한스 프랑크가 통치하는 지역으로 들어갔다.

기차는 기차역에서 2.5킬로미터 떨어진 트레블링카라는 작은 도시의 강제수용소에 멈췄다. 그 후의 일정은 프란츠 슈탕글 수용소장의 직접적인 지휘 아래 늘 하던 대로 반복되었다. 그들은 플랫폼에서 남성과 여성으로 나눠 줄을 서서 강제로 옷을 모두 벗어야 했고, 알몸 상태로 걸어서 수용소에 들어갔다. 이발사가 여자들의 머리를 밀었으며, 그 머리카락은 묶음으로 포장되어 매트리스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말케의 삶은 열차에서 내린 뒤 15분 만에 끝이 났다.

라우터파하트(LAUTERPACHT)



허쉬 라우터파하트는 1897년 8월 16일 주키에프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아론 라우터파하트와 데보라 터캔코프인데, 레온의 어머니와 먼 친척뻘인 바리흐 올란데르가 출생을 지켜보았다. 아론은 석유 판매업을 하며 제재소를 운영했다. 라우터파하트가(家)는 대가족이고 중산층이며, 교양 있고 독실한 유대인 가정이었다. 라우터파하트의 여동생 사비나는 후에 잉카라는 이름의 딸을 낳았는데, 내가 잉카를 만났을 때 그녀는 아론과 데보라를 훌륭한 조부모님이라고 회상했다. 주키에프 토지대장 기록에 따르면, 라우터파하트 가족은 488구역의 158번지 집에 살았다. 이 집은 내 외증조모 말케 부흐홀츠가 살던 이스트 웨스트 거리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네의 다른 한쪽 끝이었다.

라우터파하트는 1910년에 부모와 형제들과 함께 주키에프를 떠나 렘베르크로 이주했다. 그 뒤 1915년 6월, 라우터파하트는 대부분의 시간을 아버지의 제재소에 있는 임시 숙소에서 보냈지만, 곧 오스트리아 군대에 징집되었다. 이후 1915년 가을, 그는 렘베르크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였다. 라우터파하트의 삶은 렘베르크에서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간의 유혈충돌을 촉발시킨 스물세 살의 ‘붉은 왕자’ 빌헬름 대공이 비밀리에 내린 결정 때문에 완전히 달라졌다. 폴란드와 우크라이나 민족 간의 전투가 이어졌고, 유대인은 그 사이에 끼어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11월 11일, 폴란드가 독립을 선언한 날 독일과 연합국 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에도 갈등은 계속되었다. 라우터파하트가 살던 테아트랄나 거리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져 그의 집도 상당한 재산적 피해를 입었다.

1919년 당시 라우터파하트는 대학이 동부 갈리치아 유대인들에게 문을 닫아버렸기 때문에 작가 이스라엘 장윌의 조언에 따라 비엔나로 갔다. 그는 법과대학에 등록하였는데, 그의 스승이 바로 저명한 법철학자 한스 켈젠이다. 이를 계기로 라우터파하트는 개별 시민은 양도할 수 없는 헌법상의 권리를 가지며, 이 권리를 행사하기 위해 법원에 재판을 신청할 수 있다는, 유럽의 새로운 사상을 직접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켈젠은 렘베르크에서 온 라우터파하트의 비범한 지적 능력을 알아보았다.

대학 행사에서 인기 있는 연사가 된 라우터파하트는 지적이며 의지가 강한 매력적인 음대 학부생인 팔레스타인 출신 레이첼 슈타인버그를 소개받았고, 사랑을 고백했다. 이 커플은 1923년 3월 20일 화요일 결혼했다. 신혼부부는 1923년 4월 5일 영국 북동부 그림즈비 어항에 도착했다. 라우터파하트는 런던정치경제대학(LSE)에 등록했고, 레이첼은 왕립음악학교에 등록했다. LSE에서 그는 스코틀랜드 명문가 출신으로, 국제법 전공인 아놀드 맥네어 교수 밑에서 공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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