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공포 아프리카의 폭군들
류광철 지음 | 말글빛냄
살아 있는 공포 아프리카의 폭군들
류광철 지음
말글빛냄 / 2019년 3월 / 320쪽 / 15,000원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적도기니공화국 대통령
적도기니공화국: 아프리카에서 스페인의 몇 안 되는 식민지 중 하나였으며 스페인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유일한 국가인 적도기니는 본토인 리오무니와 주 섬인 페르난도 포(현재 이름은 비오코), 가봉 해안지역에 산재해 있는 몇몇 도서 그리고 멀리 떨어져 있는 안노본 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도는 페르난도 포에 있는 말라보(옛 이름은 산타 이사벨)이다. 1960년 인구가 24만 5천 명에 불과했던 이 나라는 다른 아프리카 대국들에 못지않게 종족 분쟁과 지역주의에 시달렸다.
페르난도 포의 원주민은 부비 족인데, 적도기니 인구의 15퍼센트를 차지하며, 15세기 이전에 카메룬으로부터 이곳으로 건너왔다. 한편 내륙 쪽의 팡 족은 인구의 80퍼센트를 차지하며 67개의 부족을 거느리고 있다. 한편 팡 족의 숫자가 증가했으므로 부비는 팡에게 지배권을 뺏길까봐 스페인 식민 정부에 적극 협력했으며, 크레올(유럽인의 자손으로 점령 식민지 지역에서 출생한 사람)과 함께 적도기니에서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진화한 부족이 되었고 행정관리나 교사직 등을 독차지했다. 그런데 부비와 팡이 모두 대농장의 일꾼이 되는 것을 거부했으므로 섬의 경제는 자연스럽게 해외노동력에 의존하게 되었다. 특히 코코아 농업의 경우 전적으로 외국 노동자에 의존해야 했다. 한편 적도기니의 경제는 코코아, 커피, 목재 3개 품목의 수출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그러나 1968~1969년 스페인 지주 및 기업인들의 대규모 이탈과 1975~1976년 나이지리아 근로자들의 철수 등으로 인해 경제가 거의 파산 상태에 이르렀다. 1979년 응게마 실각 후 국제사회로부터 상당한 금액의 원조가 도달했으나 적도기니의 경제는 독립 이전의 생산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오랫동안 낙후된 상태에 머물렀다.
응게마의 어린 시절과 정치적 성장: 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는 1924년 1월 1일 가봉의 월레우 은템 주 오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팡 족의 일부인 에상기 씨족 출신이었으며 주술사였다. 그가 9세 되던 때 아버지는 씨족 대표로 보다 나은 임금 조건을 협의하기 위해 추장 칭호를 쓰려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스페인 관리에게 맞아 죽었다. 그로부터 1주일 후 어머니가 자살함으로써 그와 열 명의 형제들은 고아로 남았다. 그는 삼촌 집에서 양육되었고, 초등학교를 마친 후 하급관리가 되기 위해 시험을 치렀는데, 1950년 네 번째 만에 합격했다. 그 후 삼림국 직원으로 일하면서 바타, 리오 베니토, 몽고모 등지에서 근무했으며, 통역 보조로 일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챙겼는데, 농부들로부터 뇌물이나 선물을 받았고, 스페인 위정자들에 대해서는 비굴할 정도로 아부와 굴종을 행했다.
한편 아프리카 식민지에 독립의 물결이 다가오면서 스페인은 팡 족 출신 엘리트 중에서 충성을 바칠 사람을 찾고 있었는데, 마침 응게마가 적절한 인물로 꼽혔다. 이렇게 해서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그는 예기치 않게 승승장구하게 된다. 1963년 그는 몽고모 시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리오무니 의회 의원이 된 후 연이어 리오무니 대표로 수도 산타 이사벨에 있는 국회에 입성했다. 1964년 그는 온두 에두 자치정부의 공공사업부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이어서 부총리가 되었다. 1967년 독립이 다가오는 가운데 그는 변호사 겸 사업가인 안토니오 가르시아 트레비하노에게 포섭되어 그의 지원과 보호를 받게 되는데, 트레비하노는 응게마를 자신의 야심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로 이용코자 했다.
독립과 응게마의 집권: 적도기니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처음 일어난 것은 1959년으로 식민지의 지위가 낮아진 데 대한 저항이었다. 초대 가봉 대통령 레옹 음바의 사위인 아타나시오 은동 미요네가 앞에 나섰다. 미요네는 적도기니해방운동이라는 정당을 창당했는데, 나중에 적도기니국민해방운동(모날리게, MONALIGE)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편 리오무니에서는 적도기니국민연합운동(뭉게, MUNGE)이 결성되어 독립 과정에서 주목을 받게 되었는데, 리더는 목사 출신인 보니파시오 온두 에두였다. 뭉게는 과도 자치공화국의 정부 역할을 수행했는데, 정실과 부패 그리고 장관들의 사치스러운 생활과 행정적 무능력을 드러냈고, 불명예스러운 온두 에두를 대신할 만한 정치인으로 응게마가 부상했다.
1968년 10월 독립 후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누구도 과반수 득표에 미치지 못했다. 응게마 36,716표, 온두 에두 31,941표 그리고 은동 미요네가 18,223표를 얻었다. 결선 투표를 앞두고 은동이 연대를 제의했으나 온두가 이를 거절하자 은동은 응게마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했다. 응게마는 은동에게 외교장관직을 약속했고, 응게마는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런데 당선된 지 3개월이 채 되지 않아 체포, 구금 및 살해 등 정치탄압이 벌어졌다. 이후 종주국 스페인과의 불화가 일어나자 적도기니에 체류하고 있는 스페인인 대부분이 빠져나갔다. 1969년 스페인인의 대탈출과 함께 모든 정당은 강제로 응게마 정당으로 통합되었고, 산타 이사벨의 행정 관료는 대부분 리오무니의 팡 출신으로 교체되었다.
1970년 7월 응게마는 공식적으로 일당 독재국가를 부르짖고 1973년에 종신 대통령이 되었다. 스페인 및 서방과 관계를 단절하였으며, 중국, 쿠바 및 소련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 소련과 특별 무역협정 및 운송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소련은 그 대가로 차관을 제공했다. 운송조약으로 인해 소련은 어업 프로젝트를 추진할 수 있게 되었고 루바에 해군기지를 건립했다. 중국과 쿠바는 재정, 군사 및 기술적 지원을 했다. 이렇게 하여 공산 진영은 서부 아프리카의 중심에 교두보를 마련했다.
숙청과 파괴: 정권을 잡자마자 응게마는 모든 교육받은 자와 지식인층에 대한 숙청에 나섰다. 안경을 쓴 사람을 지성인으로 몰아 사형에 처하는가 하면, 탈출자를 막기 위해 모든 배를 파괴했으며 본토에서 외국으로 나가는 유일한 도로도 폐쇄했다. 또 중앙은행 총재를 사형시킨 후 은행에 남아있는 모든 재화를 자신의 관저로 옮겼다. 1975년 크리스마스이브에는 약 150명의 반대파 인사들이 처형되었는데, 말라보에 있는 축구장에서 메리 홉킨스의 ‘Those were the days(그때가 좋았지)’를 크게 틀어놓고 총을 난사하여 죽였다. 권력 후반기에 응게마는 몽고모 벙커를 강화하여 철옹성으로 만든 자신의 세계에 침울하게 들어앉아 그의 친족으로 구성된 마피아 집단에게 국가의 통치를 맡겼다.
통치: 응게마 정권이 예상보다 오래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공포와 테러를 통해 저항할 힘을 상실시킨 것, 둘째 모든 지식인을 숙청하거나 추방시킴으로써 잠재적 반대 세력의 뿌리를 뽑은 것, 셋째 외국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국가를 철저히 고립시킨 것, 넷째 응게마가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고 선전 광고하고 이를 적절히 활용한 것, 다섯째 적도기니 내 모든 물자와 직위 등을 철저히 장악하고 이를 패거리들에게만 나누어준 것, 여섯째 개인과 친족 네트워크를 동원하여 보안군을 장악한 것 등이었다. 참고로 3,500명에 이르는 보안부대는 응게마 권력의 핵심인데, 응게마의 가까운 친인척, 몽고모 출신 지인, 에상기 씨족 및 리오무니의 팡 족 등으로 구성되었다.
응게마의 집권으로 내륙의 팡 족이 부상했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팡 족 가운데서도 에상기 씨족이 엘리트 세력으로 떠올랐다. 현대판 왕조를 구축한 에상기는 응게마가 처형된 후에도 적도기니를 굳건히 다스리고 있는데, 응게마의 조카로 정권의 제2인자였던 테오도로 오비앙 응게마 음보소고 대령이 현재까지 국가를 통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응게마가 가장 신임했던 오비앙은 1975년 국가보위군 사령관, 페르난도 포 군사령관, 국방장관 등을 지냈다.
쿠데타와 응게마의 최후: 응게마의 마피아 정권이 전복된 근본적인 배경은, 국정의 실패로 인해 궁핍하고 인색해진 응게마가 배분하는 물질적 혜택이 축소된 것에 엘리트층의 불만이 쌓인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응게마의 자의적인 약식 구속이나 숙청 등이 일상화되면서 지금까지 그에게 충성을 바쳐왔던 측근 내부에서 동요가 일었고 그에 대한 반감이 표출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1979년쯤 유엔과 유럽연합이 응게마 정부를 강력히 규탄하고 있는 국제적인 상황도 영향을 미쳤다.
1979년 6월 국가보안부 소속 장교 여섯 명이 응게마를 찾아가 수개월 째 봉급을 받지 못하고 있는 장교들에게 봉급을 지급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분노한 응게마는 여섯 명 전부를 총살형에 처했는데, 그들 중 하나가 오비앙의 막내 동생이었고, 오비앙은 응게마에 대한 충성 맹세를 접었다. 한편 오비앙을 더 이상 신뢰하지 말라는 충고를 받은 응게마는 리오무니 주지사에게 페르난도 포를 공격할 해군 함정을 출동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군 내부에서 반 응게마 세력을 총집결시킨 오비앙은 응게마의 폐위를 선언하고 몽고모로 병력을 출동시켰다.
쿠바와 북한 장교들의 지휘 아래 친위 병력이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응게마는 결국 무너졌다. 그리고 응게마는 외화가 가득 든 2개의 여행 가방을 들고 탈출을 시도했으나 곧 붙잡히고 말았다. 그 전에 응게마는 세 명의 자녀들을 북한으로 피신시켰는데, 이들은 유년 시절을 북한에서 보낸 후 지금은 다른 나라에서 살고 있다. 그 후 쿠데타 세력은 응게마를 재판에 회부했다. 9월 29일 선고가 내려졌는데, 국제사법재판소의 옵서버까지 참관한 이 재판에서 응게마와 정부인사 5명에게는 사형 및 재산 몰수 등, 두 명에게는 14년 형 그리고 다른 두 명에게는 4년 형이 선고되었다. 그리고 이날 오후 6시 ‘블랙 비치 교도소’에서 응게마는 다섯 명의 인사들과 함께 모로코 수비대에 의해 사살되었다.
오비앙 정권과 오늘의 적도기니: 오비앙은 정권을 잡은 직후 유엔인권헌장 준수와 정치범 석방, 종교의 자유 및 전면 개혁을 선포했다. 그리고 소련과 맺은 어업협정이 시들해지면서 소련대사관 인력이 100명에서 12명으로 축소되었으며 쿠바의 군사고문단도 철수했다. 서방과의 관계가 다시 시작되었다는 상징으로 스페인의 카를로스 국왕이 1979년 12월 중순 말라보를 방문했으며, 1982년에는 교황이 방문했다. 한편 군부는 붕괴된 경제를 속히 재건코자 했으나 어려움에 봉착했다. 그런데 극적으로 석유가 발견되어 산유국으로 변모했고, 지금의 적도기니는 하루 36만 배럴의 원유 수출로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나이지리아와 앙골라에 이어 3위의 산유국이 됐다.
그런데 응게마를 몰아냈다고 좋아했던 국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독재자를 맞이하게 된 것을 알아차렸다. 쿠데타 1년 후 유엔인권위원회는 혁명평의회가 군사독재 기구로 변질되었다고 경고했으며 스페인 언론은 적도기니의 상황이 1978년과 같거나 이보다 더 나쁘다고 보도했다. 불법 체포나 임의 살인과 같은 행위는 점차 줄어들었으나 강제노동, 강압, 집단적인 부패 등은 여전했으며, 군 조직 전체가 부패의 온상이 되었다. 한편 스페인과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었고, 오비앙은 사이가 벌어진 스페인 대신 점차 프랑스 쪽으로 기울었다. 오늘날의 적도기니는 응게마 시대와는 다르지만 철권통치가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유사하다. 변덕과 광기 및 살인이 횡행했던 암흑시대는 아니지만, 적도기니는 여전히 부패하고 모든 권력이 오비앙 한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독재국가이다.
이디 아민, 우간다 공화국 대통령
우간다 공화국: 우간다는 일찍부터 ‘아프리카의 진주’로 불릴 정도로 전도양양했고 고립된 적이 없으며 나름 각광을 받았던 나라였다. 내륙국인 우간다는 24만 평방킬로미터이며, 인구는 성장세에 있어 현재 4천 5백만 명쯤 된다. 공용어로 스와힐리어를 사용하는데 루간다어도 사용되고 있다. 그리고 40여개의 부족이 있는데, 압도적으로 다수인 부족은 없고 10여개 부족들이 세력 균형을 이루고 있다. 종족을 구분 짓는 요소는 언어인데, 반투어, 동부 나일어, 서부 나일어, 중앙 수단어 외에도 많은 소수어가 있다. 동부 반투어족 중에 간다가 있는데 인구의 17퍼센트를 차지하며 우간다에서 가장 큰 종족이다. 영국이 빅토리아 호수에 진출했을 당시 그들의 왕국인 부간다(Buganda)는 중앙집권화되어 있고 세습 봉건 왕국의 형태를 가진 힘 있는 국가였다. 영국은 부간다와 손을 잡고 이 지역을 장악했으며, 부간다는 영국이 우간다 전체를 지배하는 데 앞장서는 꼭두각시 노릇을 했다. 서부 반투어 부족으로는 바뇨로(Banyoro)가 있다. 바뇨로 왕국은 당시 가장 크고 오래된 왕국이었는데, 영국이 들어와 부간다와 손을 잡는 통에 부간다에게 패권을 내주고 말았다. 식민 시대 이후 부간다가 바뇨로의 기름진 땅을 많이 차지했고 이로 인해 두 부족은 독립 후 오보테 대통령이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바뇨로에게 유리한 결과가 나올 때까지 첨예한 대립상태에 있었다. 서부 나일계 종족으로는 호전적인 랑기와 아촐리가 있는데, 이들은 인구로 봐서 각각 6번째와 8번째 쯤 되는 부족들이다.
이디 아민의 출생과 성장: 이디 아민은 1925년 우간다 국경의 서부 나일 주에 속한 소즈만 마을 코보코에서 카크와 부족 출신 아버지와 로그바라 부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그가 출생한 직후 이혼했고, 아민은 어머니를 따라 누비아 족의 거주지인 봄보에서 살았다. 아민은 봄보에 살 때 이슬람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나 몇 년 되지 않아 자퇴했고, 이것이 학력의 전부이다. 9살 때부터 어머니 곁을 떠나 부랑자로 살았는데, 사랑과 애정의 결핍, 인정해주는 사람이 없고 의지할 사람도 없이 구걸하며 살았던 최악의 어린 시절이 그의 성격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아민은 1946년 영국의 왕립 아프리카 소총군단에 들어가 처음에는 접시닦이로 일하다가 보조 요리사가 되었고 나중에는 보병으로 근무했다. 무학인 아민은 거구의 몸집과 장기인 완력에 의존하여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1959~1960년 우간다의 복싱 헤비급 챔피언을 지냈으며 무패의 전적으로 은퇴했다. 럭비와 수영에도 뛰어나 영국군 장교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무슬림으로 무학이나 고분고분하고 명령에 복종하며 강건한 육체와 힘을 지닌 아민은 영국이 아프리카 병사에게 원하는 스타일이었다. 1959년 아민은 당시 식민지 영국군에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계급인 아판데(준사관)에 올랐고, 우간다로 돌아온 후 1961년 중위가 되었다. 우간다 인으로 중위까지 오른 사람은 단 두 명에 불과했다. 아민은 1962년 독립 직후 대위로 진급했고 이듬해 소령이 되었으며, 1964년에 육군 부사령관 그리고 1965년 육군 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970년에는 합참의장직에 올랐다.
대립의 정치: 우간다에서 처음 전국적인 정당으로 나타난 것은 민주당(DP)이다. 1956년 간다 족 가톨릭 세력이 창당한 민주당은 부간다 정부의 가톨릭교도 차별에 대해 저항했다. 1961년 민주당의 주요 라이벌은 우간다국민회의(UPC, 이하 본문에서 ‘국민회의’로 줄임)였는데, 리더는 랑기 족 대표로 참가한 밀튼 오보테였다. 한편 민주당은 부간다에서 다수 가톨릭교도의 지지를 확보하는 동시에 다른 지역의 반부간다 정서에 편승하여 1961년 3월 선거에서 승리했다. 부간다의 비타협으로 인해 이러한 선거 결과가 나타나자 향후 독립 우간다에서 부간다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카바카 궁에 번졌고 이로 인해 ‘오로지 왕’당이 창설되었다. 그 후 1962년 선거 결과 민주당 또는 국민회의 어느 쪽도 과반을 얻지 못한 가운데 ‘오로지 왕’당(KY)은 국민회의와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15명의 내각에서 다섯 자리를 얻었다. 하지만 공동의 적인 민주당이 약화되자 양당 내부에서 파열음이 일어났다. 이렇게 민주당과 ‘오로지 왕’당 모두 약화되자 국민회의가 과반수를 차지하면서 1964년경에는 단독 집권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민회의 내에서도 정쟁이 일어났다.
한편 부간다 측은 ‘오로지 왕’당 사무총장 오쳉으로 하여금 오보테를 축출시키기 위한 공작을 전개토록 했다. 오쳉은 오보테의 측근인 합참부의장 이디 아민의 직무정지를 요청하면서 ‘금과 상아’ 사건에 대한 조사를 요구했는데, 이는 콩고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오보테와 아민 등 핵심인사들이 비밀리에 금과 상아를 거래하여 불법 이익을 취했다는 주장이다. 오쳉이 의회에 제출한 오보테 사임 발의가 네 명의 반대표만 나온 가운데 통과되자 오보테의 고립이 두드러졌다. 상황은 오보테에게 불리한 것처럼 보였으나, 그는 군을 장악하고 있었고, 마침내 오보테가 행동을 개시했다. 1966년 2월 22일 보안부대 요원들이 회의 중인 내각으로 들이닥쳐 음모에 가담한 다섯 명의 장관과 이빈기라 국민회의 사무총장을 체포했다. 이후 오보테는 행정부의 모든 권한을 독점하고 헌법과 국회의 정지를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