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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100년 100개의 기억

모지현 지음 | 더좋은책
한국 현대사 100년 100개의 기억



모지현 지음

더좋은책 / 2019년 3월 / 472쪽 / 19,500원





1장 희망으로 탄생한 대한민국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1919년 4월) - 대한민국, 국체와 국호의 탄생



3ㆍ1운동은 민족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되었다. 3ㆍ1운동으로 민족의 독립 염원을 느낀 많은 애국지사들이 독립운동에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고 이에 임시정부 수립을 추진하면서 독립운동에 불을 지폈다. 최초의 정부 형태를 띤 블라디보스토크의 대한국민의회와 국내의 한성정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가 다양한 움직임으로 수립된 7개 임시정부 중 대표 격이다. 프랑스 조계 상해 보창로에 임시 독립 사무소를 설치, 1919년 4월 11일 임시 의정원으로 출발한 임정은 각 도 대의원 30명이 만든 헌법 격인 ‘대한민국 임시 헌장’을 통해 행정, 입법, 사법의 3권 분립 형태의 민주공화정부를 선포한다. 헌장(헌법)과 국호, 연호가 선포되면서 정식으로 임정이 수립된 후에 한성정부 수립 소식을 들은 지도자들은 세 임정들의 통합을 추진했다. 그 결과 근거지는 상해에 두고 임시 의정원과 대한국민의회를 합병한 의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했다.

9월 상해 대한민국 임정을 중심으로 대한국민의회와 한성정부가 통합되면서 한성정부의 이승만을 임시 대통령, 대한국민의회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하는 정부가 출범했다. 임정은 외교, 군사, 교육, 문화, 재정, 사법, 교통 등 10여 개 부분에 걸친 중앙부서를 조직하고 국내 각지를 연결하는 교통국과 비밀 연락망인 연동제를 시행했다. 국내와 해외에서 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고 독립공채를 판매하기도 했으며 운동가들 사이의 비밀 연락 업무와 소식 교환들을 수행하기도 했다. 역사편찬부를 설치하고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를 간행해 일본 침략 사실을 기록, 세계인에게 알리고 독립의 당위성을 호소하거나, 독립신문과 잡지들을 발행해 독립운동의 전개 상황을 알리기도 했다.

그러나 다양한 세력으로 정부가 출범한 데서 예견되었던 대로 곧 내재되었던 갈등이 표출된다. 만주의 무장독립투쟁 세력이 이승만을 중심으로 추진된 외교독립노선과 독립청원운동에 반대하여 임정을 배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동휘를 중심으로 1920년을 독립전쟁 원년의 해로 선포하면서 실력 양성과 독립전쟁을 병행하는 노선을 채택하기도 했으나, 이승만의 위임통치 발언 등에 대한 파문은 컸다. 하와이에서 활동했던 이승만은 임정 수립 직후 상해로 왔지만 외교독립노선에 대한 반발이 거세지자 미국으로 돌아간다. 이후에도 임정의 활동 방향과 구미위원부를 중심으로 모인 독립자금 운용에 대한 내부의 대립은 계속되었다. 결국 임정은 국민대표회의를 개최, 기존의 임정을 해체하고 새로운 임정을 수립하자는 창조파와 정부 자체는 두고 조직만 개조하자는 개조파로 분열되었고 이승만 대통령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이후 십여 년간 대한민국 임정은 독립운동 세력 사이의 통일을 이뤄 내지 못하고 침체 상태에 놓이게 된다. 정부라 이름 붙이기에는 민족 운동 전체를 결집시킬 역량을 담보해 내지 못하면서 독립운동단체 중 하나로 전락했고, 무장독립투쟁과 외교독립운동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8ㆍ15광복을 맞기까지 27년 동안 5차에 걸친 개헌을 비롯한 각 세력 간의 분열과 재정난, 8차례에 걸친 상해를 포함한 중국 각지 이동 등 극심한 부침을 겪으면서 말이다.

임정을 탄생시켰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떠난 뒤 약화된 임정의 자리를 지킨 것은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처했던 김구였다.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변경하면서 임정의 명맥을 이어간 김구는 1930년대 중 반 이후 변화되는 정세 속에서 임정의 위상이 변모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만주의 무장독립투쟁 세력이 만주사변 이후 활동 입지가 좁아짐에 따라 중국 관내로 이동한 뒤 임정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세력 간 통일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후 임정은 광복에 이르기까지 군사와 외교활동까지 담아내면서 독립운동의 구심점으로서 정부 역할을 하게 된다.

봉오동전투ㆍ청산리대첩(1920년 6월ㆍ1920년 10월) - 승전보를 알려라!



3ㆍ1운동을 겪으며 많은 독립운동가들은 비폭력적ㆍ평화적 방법으로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중국 관내 독립운동 세력이 임정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동안 만주와 러시아 영내에서는 1919년 상반기에만 70여 개의 단체를 결성하고 군사력을 키울 만큼 무장독립투쟁 노선을 택한 독립운동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무장독립전쟁을 통한 조국 광복, 이것이 이들의 최종 목표가 되었고 국권 피탈을 전후해 형성된 이주민들의 망명촌이 이들의 근거지가 되었다. 특히 간도 지역이 키워낸 독립군은 1920년대를 전후해 압록강, 두만강을 건너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해나간다. 관공서를 습격하며 일본 군대, 경찰과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이에 일제는 군대를 만주로 보내 독립군을 토벌하려고 했고, 그 중심에 독립군이 대승을 거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 있다.

1920년 6월 독립군 부대가 북간도에서 출발해 함북 강양동에 주둔하던 일본군 헌병 국경 초소를 습격해서 격파한다. 급보를 받은 일본군은 참패를 거듭하면서도 반격을 시도했고 독립군의 유도 작전에 말려 두만강에서 40리 거리에 위치한 봉오동으로 들어온다. 최진동을 사령관으로, 홍범도를 제1연대장으로 한 독립군 부대는 100여 호에 달하는 봉오동 주민을 미리 대피시키고, 일본군이 포위망에 들어오자 3면에서 공격한다. 잠복해 있던 700여 명의 독립군이 협공해 일본군 157명의 전사자와 200여 명의 부상자를 낸 데 비해 독립군은 장교 1명, 병사 3명의 전사와 약간의 부상자를 내며 크게 승리한다. 이 전투가 바로 첫 정규전의 쾌거로서 독립군의 사기를 드높인 봉오동전투다.

그동안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의 승리로 승승장구하던 일제는 봉오동전투에서 정규군이 대패하면서 이에 대한 보복을 계획한다. 간도에 직접 토벌군을 침입시켜 항일단체와 독립군을 근본적으로 없애려 는 대규모 작전을 세운 것이다. 일제는 훈춘사건(일제가 중국 마적 두목을 매수해 훈춘 성과 일본 영사관을 공격, 약탈하게 하고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 등을 살육하게 한 사건)을 출병의 빌미로, 독립군 토벌을 위한 간도 침범을 시작해 중국과의 교섭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조선 내 주둔 부대, 관동 및 연해주 주둔 부대들을 독립군 토벌대 병력으로 만주 지역에 투입시킨다. 이를 중국 측으로부터 통고받은 독립군 부대들은 청산리(중국 길림성 화룡현 이도구~삼도구) 방면으로 이동하게 된다.

그러자 북간도 독립군 부대인 북로군정서는 10월 10일경 삼도구에 도착, 20일 백운평 계곡에 매복해 있다 공격하여 200여 명의 일본군 전사자를 내는 등의 큰 전과를 거둔다. 일본군 수가 늘어나자 밤새 행군해 160여 킬로미터 떨어진 갑산촌으로 이동했는데, 그동안 홍범도 부대는 이도구에서 일본군 한 부대를 전멸시키고 있었다. 다음 날인 21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연합부대는 함께 어랑촌에서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격파했고, 이로부터 26일 새벽까지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어랑촌, 천수평, 고동하 등 동서로 약 25킬로미터에 달하는 청산리 계곡에서 대소 10여 회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많은 무기를 노획한다. 이것이 바로 청산리대첩이다.

이 전투에서 1,600여 명의 김좌진 부대와 홍범도 연합부대 1,400여 명의 독립군은 5천여 명의 일본군과 싸워서 전사자 60여 명, 부상자 90여 명, 일본군 전사자 1,200여 명, 부상자 2,100여 명을 내며 승리하였다. 이는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13년 만에 총을 든 우리 군대가 한 사람당 겨우 감자 3개와 한 줌의 쌀로 연명하면서 일제의 정규군을 물리친 독립군 사상 최대의 전과를 거둔 빛나는 승리였다. 2장 밤을 뚫고 빛, 돌아오다 1931~1945년



민족말살통치(1937년) - 일상 깊은 곳까지 스며든 정신적 말살의 시작



만주사변 이후 중일전쟁(1937)으로 전선이 확대되면서 필요한 노동자나 군인들의 수가 늘어나자 일제에게는 큰 고민이 생겼다. 일본인만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어 조선인을 노동자로 징용하거나 군인으로 징병하는 정책을 추진해야 했는데, 무기를 쥔 조선인이 누구를 공격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잘못하면 적에게 총을 쥐어주는 상황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무기를 주었을 때 일본인을 공격하지 않고 아무 사심 없이 천황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조선인을 양산해내야 했다. 그를 위해서는 조선인의 조선인 됨을 가능하게 하면서 항일투쟁과 독립운동의 힘이 되는 민족정신을 없애야 했는데, 이것이 193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민족말살통치 추진의 배경이다.

민족말살통치는 유대인에게 행해진 홀로코스트와 같은 물리적 말살이 아닌 정신적 말살이 목표였다. 그랬기 때문에 내지인(일본인)과 선인(조선인)은 한 몸이라는 ‘내선일체’와 한국과 일본의 조상이 같다는 일선동조론이 기본이론이 되었고, 조선인을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려는 황국신민화정책이 그 내용이 되었다. 이 정책이 시행되면서 한국인은 충성스럽고 선량한 황민이 되기 위해 성인용과 아동용으로 만들어 배포한 황국신민서사를 일상생활 속에서 암송해야 했다. 심지어 결혼식에서도 신랑, 신부, 하객들이 모두 일어서서 이를 암송하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할 정도였다. 또한 마을마다 ‘내선일체’라고 쓴 포스터나 푯말이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하루에 한 번 정오에 일본에 있는 왕궁을 향해 절을 하는 궁성요배로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 표시를 하거나 경성의 남산을 비롯한 전국 중요 장소와 학교, 면마다 세워진 신사에서 참배도 해야 했다. 이를 거부하면 무자비한 탄압이 쏟아졌다.

게다가 1938년에는 조선교육령이 개정되면서, 보통학교에서 필수였던 조선어가 선택과목으로 바뀌게 된다. 조선어를 가르치면 탄압을 받는 상황에서 조선어를 선택하는 학교는 있을 리 없었으니, 실제로 조선어는 과목에서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초등국사』 교과서가 만들어져 황국사관에 입각한 역사교육이 행해진 것도 이 시기다.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도발한(1941) 뒤에는 학생들의 군사능력 배양 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일본어 교육과 군사교련이 강화되었고, 소학교의 명칭이 황국신민을 뜻하는 국민학교로 개칭되기도 했다.

1940년, 일제는 조선인 징병제 결정과 함께 조선인에게 조선식 성을 대신해 ‘일본식 씨를 새로 만들고’(창씨), ‘이름도 바꾸는’(개명) 정책을 실시한다. 대일본제국 병영 안에서 조선식 이름이 불리는 것은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국식 이름은 사대사상에 따라 붙인 것이니 일본식 이름을 가져야 한다고 정당화하면서 각 호주가 6개월 이내(1940.2.11.~ 8.10)에 새로 정한 씨를 신고하라는 자발적 창씨개명 방식을 공포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애국반과 각급 학교를 통해 무자비하고 폭력적인 방법으로 추진한 강제적 자발이었다. 그로 인해 일제는 1941년 말 조선 인구의 81.5%가 창씨개명을 하는 결과를 얻어 낼 수 있었다.

동화 정책에 감춰진 민족 차별을 간파했거나 전통적인 성(姓)에 대한 애착과 양반의식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적극적으로 반대하거나 자살을 택한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총독부나 일본인과의 접촉 기회 가 많거나 대규모 사업주, 기술자와 감독 등의 지도층, 지식 계급 등에서는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사람들도 많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신고하지 않으면 ‘불령선인’으로 불리면서 학교 입학, 공문서 발급, 우편물 수취, 식량과 물자 배급 등에서 제외되는 일제의 폭력적 조치에 어쩔 수 없이 신고한 힘없는 일반 민중이었다. 그러니 단순히 창씨개명 자체만으로 친일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일제는 친일적 성향을 띠고 있었던 한국인 신문조차도 탄압을 가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두 신문사는 강제 폐간(1940.8.10)되기에 이른다. 1942년부터는 강제로 일본어를 상용해야 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학교 안과 밖에서 서로 감시 고발해야 했고, 관공서에서는 업무 시간에 반드시 일본어를 사용해야 했다. 이와 같은 민족말살통치는 이론이나 정책, 일회성의 선전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국민정신총동원 운동 등의 조직화된 행정체계를 통해 한국인의 일상 가장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8ㆍ15광복(1945년) - 일제의 패망! 한국의 승리?



한국인들은 일제강점기 내내 독립을 쟁취하려는 노력을 계속해왔다. 태평양전쟁 말기 해외에는 김구의 대한민국 임정, 김두봉의 조선독립동맹, 김일성의 빨치산 그룹, 이승만의 주미외교위원부 등 독립운동 조직이 있었다. 이들은 연합국의 후원 속에 국내 진공을 계획 중이었고, 국내에서는 여운형의 조선건국동맹이 이들과의 긴밀한 연계를 모색하고 있었다. 일반 국민들에게 광복은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었지만 국내외 독립운동가들에게는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1945년 8월 13일 일본은 포츠담선언의 수락과 무조건 항복에 동의하면서 15일 패망하고 한국은 해방되었다. 광복을 맞은 것이다. 하지만 정작 8월 15일의 서울은 고요했다. 히로시마에서 폭사한 의친왕의 아들 이우의 장례식이 이날 오후 평온하게 거행되었다. 서울 시민들이 거리에 쏟아져 나와 광복의 감격을 노래한 것은 서대문형무소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이 풀려나 행진함으로써 광복을 확인시킨 16일부터였다. 16일 오후 휘문중학교에 운집한 5천여 명의 한국인들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위) 위원장 여운형의 연설을 들으며 광복을 실감했다. 경축대회를 열던 한국인들은 소련군이 진주한다는 소식을 듣고 경성역으로 달려 나갔고, 건준 부위원장 안재홍은 패전한 일본인에게 관용을 당부했다. 평양과 서북에서는 관공서 방화나 친일파 공격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상대적으로 남한은 평온했다.

안재홍이 지방마다 건국을 준비하기 위한 건준 지부를 결성하라고 방송한 이후 17~18일에 걸쳐 전국에서 광복 축하 집회가 열렸고, 1945년 8월 말에 이르면 남한 내 145개 시ㆍ군에 건준위 지부가 결성되었다. 건준위는 조선총독부와의 타협 속에 여운형을 위원장, 안재홍을 부위원장으로 1945년 8월 15일 출범한 조직이다. 중심인물들은 조선건국동맹원들과 여운형의 인맥들이었다. 치안 유지, 식량 확보 등을 위해 조선총독부는 건준위가 필요로 하는 재정적 지원과 협력을 제공했다. 건준위의 임무가 치안유지 협조에 국한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건준위 말 그대로 건국을 준비하는 조직이라고 생각했고 실천에 옮긴다. 이에 따라 지방에서 건준 지부들이 치안대, 보안대 등으로 불리던 지방의 자치적 조직들로부터 재편되고, 실질적 행정권을 행사하자 이에 경악한 총독부는 일본군 헌병대 등을 동원해 강제 해산을 시도했지만 이미 그 힘은 총독부 통제 범위를 넘어서고 있었다. 결정적 시기에 기회를 얻은 한국인들은 현명하게 자주적 건국의 길로 달려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건준의 가장 큰 역할은 광복 후 한국인들이 정치사회 조직을 자유롭게 결성할 수 있는 정치적 공간을 마련해주었다는 점이다. 광복 후 불과 1개월 만에 50여 개의 정당과 사회단체가 조직될 정도였다. 하지만 건준이 당시 정국을 주도하는 정치적 중심으로 부각되면서 좌우익 갈등이 빚어지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간부진 교체 과정에서 좌익의 영향력이 강해지자 우익들의 불만은 커졌고,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로 대표되는 안재홍이 부위원장직을 사퇴하게 된다. 또한 이들이 9월 초에 급하게 조선인민공화국이라는 정권으로 전환한 것은 이후 많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한편 광복과 함께 해외에서 활동하던 한국인 지도자들이 속속 입국하기 시작한다. 남한의 경우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1945.10.16), 중국에서 활동하던 김구 등 임정 요인(1945.11~12)들이 귀국했고, 북한에는 소련에서 훈련받은 김일성 등 빨치산 그룹(1945.9), 중국 공산당의 후원으로 활동했던 김두봉, 무정 등 조선독립동맹 그룹(1945.12) 등이 귀국했다. 그리고 독립운동가들이 감옥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왔고 그동안 징용, 징병, 학병, 위안부 등으로 중국, 만주, 일본, 남태평양 등에 강제 동원됐던 한국인들이 1946년 중반까지 대거 귀환한다. 죽음을 넘어섰던 이들의 귀환, 거기에 전통적 영웅담을 통해 존경과 신망을 얻은 민족 독립운동가들의 귀환은 광복 이후 한국 정치에 힘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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