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그리움이다
최효찬, 김장권 지음 | 인물과사상사
집은 그리움이다
최효찬, 김장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8년 11월 / 395쪽 / 19,000원
집에 대한 그리움
집은 어떤 곳인가?
나는 가끔 예전에 살았던 아파트를 지나갈 때가 있는데, 그때마다 그 아파트에서 살았던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런데 단독주택에 살았던 기억은 오래도록 남아 있다. 아파트는 땅이 아니라 허공에 공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인지, 혹은 획일적인 공간 때문인지 몰라도 이사를 하면 그곳에 살던 기억마저 덩달아 사라져버린 느낌이다. 이는 나만의 경험은 아닌 것 같다. 아파트와 같은 주거 형태는 삶의 기억마저도 축적시켜주지 못하고 증발시켜버리는 것 같다.
누에고치 집처럼 지어진 아파트는 그야말로 베드타운의 전형이다. 단독주택처럼 마당이나 정원이 있지 않아도 된다. 관리도 필요 없다. 모든 게 잘 갖추어져 있다. 다시 아침에 일어나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기에 최적화된 구조가 바로 아파트다. 나도 아파트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는데, 아파트는 단지 저녁 늦게 귀가해 잠을 자고 일어나 출근하는 곳이었다. 그곳은 말하자면 아늑한 집이 아니라 단순한 거주지에 불과했다. ‘홈’이 아니라 ‘하우스’였다. 홈은 우리가 흔히 말할 때 안식의 거처로서 가족의 정이 느껴지는 공간을 의미한다면, 하우스는 건축물의 기능을 갖춘 공간으로서 집을 의미한다. 예컨대 고향집은 영원한 노스탤지어를 느끼는 곳으로 홈을 의미하지만 하우스를 의미하지 않는다. 반면 우리가 전세나 월세로 살면서 임시로 거주하는 집은 홈이라기보다는 하우스에 가깝다.
아파트는 집을 홈이 아니라 하우스의 기능으로 전락시킨 상징적인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그곳에는 기억이 축적될 수 없다. 나는 결혼 후 아파트를 10번 이상이나 옮겨 살았지만, 뚜렷한 기억이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단독주택에 살았던 때의 기억들은 선명하게 남아 있다. 물론 고향집은 말할 나위가 없다. 또 고등학교 시절이나 대학 시절에 자취를 했던 집들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들이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된다. 그러나 그곳마저 이제는 거대한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다산 정약용이 쓴 500권이 넘는 방대한 책들은 그가 죽은 지 85년이 지나 그의 현손(손자의 손자)인 정규영이 1921년에 펴냈다. 정규영은 벽장 속에 묻혀 있던 다산의 저술들을 꺼내 『사암선생연보』(‘사암’은 정약용의 호다)로 재정리했고, 그제야 우리는 다산의 사상을 제대로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처럼 전세 계약 기간인 2년마다 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아마 다산의 글들은 대부분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사를 하다 분실하기 일쑤일 테니 말이다. 다산이 살던 경기도 남양주의 생가는 지금 다산의 후손들이 살고 있지 않은데, 만약 다산의 후손들이 다산의 생가에 그대로 살았더라면 우리는 더 풍부한 다산의 글들을 만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산은 생전에 자녀들에게 “벼슬이 끊기더라도 문화적 안목을 유지하기 위해 한양을 떠나지 마라”고 언명을 내렸지만, 다산의 6대손에 이르러서야 한양에서 살게 되었다고 한다. 다산이 아파트 도시로 변해버린 지금의 서울을 보면 어떤 생각을 할까? 아마도 “한양 한복판에서 살아라”는 말을 거두어들일지도 모르겠다. 실학자인 그의 눈으로 볼 때도 아파트는 너무 실용성에만 치우진 집이라고 혹평하지 않을까 싶다. 어쩌면 다산마저도 “내가 언제 한양에서 살았던가”라고 탄식을 할지도 모르겠다.
요즘 세대들은 태어나자마자 아파트에서 생활하고 아파트에서 생애를 살다 아파트에서 죽음에 이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한편으로는 이들도 아파트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 점점 더 커질 것이라고도 생각해본다. 누구나 전원생활을 그리워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인간의 욕망이기 때문이다. 과연 사람들은 아파트에서 얼마나 인생을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 아파트는 노동의 재생산에 최적화된 공간이지 인간다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주거 공간은 결코 아니다.
오두막집에서 행복 찾기
가스통 바슐라르가 쓴 『공간의 시학』에는 앙리 바슐랭의 『하인』에 나오는 오두막집이 소개되어 있다. 바슐랭에 의하면, 그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은 더할 수 없이 소박한 집이었다. 프랑스 모르방 지방의 어느 읍에 있는 시골집이었지만, 농가에 부속 건물들이 딸려 있었다. 아버지가 부지런하고 검소해 가정의 평안과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그런 집이었다. 날품팔이꾼이자 성당지기인 아버지가 저녁이면 희미한 램프 불빛이 가득한 방 안에서 성인들의 전기를 읽는, 바로 그 방 안에서 어린 바슐랭은 원초적인 몽상을 즐기곤 했다.
나는 2009년 경기도 양평에 땅을 구입해서 허름한 이동식 주택을 마련한 적이 있었다. 건축법 규제로 정화조를 설치할 수 없어 이동식 화장실을 한 켠에 마련했는데, 이 이동식 주택에서 보낸 추억이 지금도 많이 남아 있다. 방이 하나여서 가족이 잠도 함께 자야 했다. 그런데 가족이 함께 자다 보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게 되고, 이는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가족이 하룻밤을 보내면 서로 더 친밀감을 느끼게 되고, 공유할 수 있는 추억거리도 생기게 된다.
가끔 아내도 그때의 일을 이야기한다. 추운 겨울날에 바깥에 있는 화장실을 이용하기가 좀 불편했지만,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은 그 기억을 오히려 즐거워했다. 아들도 어찌된 영문인지 이동식 주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면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든 것 같다며 좋아했다. 나는 이동식 주택에서 종종 바슐랭의 오두막집을 생각했다. 주위에는 으리으리하게 지어놓은 별장들이 있었지만, 거의 인기척이 없고 적막할 뿐이었다. 반면 나의 ‘오두막집’에는 주말이면 마당에 장작불이 타오르고 밤이면 이야기꽃이 핀다.
이것이 어쩌면 바슐랭이 그린 오두막집의 원초적인 안락함이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오두막집에서 보내면 작은 공간에서도 능히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면 너무 크게 다가오는 집에 또 한 번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된다. 그것이 오두막집의 위력이라면 위력이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도시 공간에서의 집은 바슐랭의 오두막집이 아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아파트보다 이동식 주택이 더 안락함을 주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쩌면 회귀본능이 아닐까 싶다. 오히려 편리함 속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는 현대성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러시아에는 다차라는 주말 별장이 있는데, 오래된 전통문화라고 한다. 러시아인들은 주말이면 다차로 가서 고기를 구워먹으면서 휴식을 취하며 긴 겨울을 이겨낸다. 다차는 우리나라 별장처럼 화려하거나 큰 집이 아니라 소박하고 작은 집이다. 러시아가 서구 세계의 경제제재를 세 번이나 당했는데, 큰 위기 없이 이겨낸 것은 다차 문화가 한몫했다는 분석도 있다. 힘들 때마다 자연으로 돌아가 불을 피우면서 원시적인 생활로 되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큰돈 필요 없이 생활할 수 있고, 이것이 물질적인 결핍을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것이다.
집을 위한 인문학
이황, 이상향을 짓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많은 건축물을 남긴 철학자는 아마도 퇴계 이황이 아닐까 싶다. 퇴계는 고향에 집 다섯 채를 지었다. 단순히 집을 소유한 건축주가 아니라 그의 성리학적 세계관을 집짓기에 적용시키고, 직접 설계도를 그리는 등 탁월한 안목을 보여주었다.
김동욱의 『도산서당, 선비들의 이상향을 짓다』에 따르면, 사람이 평생 한 번 집을 지을까 말까 함에도 퇴계는 여기저기에 집을 지으며 옮겨 다녔다. 평생 학문을 했던 것처럼 건축을 하면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퇴계는 본부인을 상처한 지 3년 만인 30세 때 권씨 부인을 맞이해 달팽이집이라는 이름의 지산와사(芝山蝸舍)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이 거처하는 방을 선보당(善補堂)이라고 했다. 퇴계는 여기에서 15년 동안 살았지만 대부분 한양에서 생활했다.
퇴계는 한양 생활 3년째부터 고향에 돌아가기를 꿈꾸었다. 그리고 한양 생활 10년을 넘긴 46세 때인 1546년 봄 휴가를 얻어 고향에 내려온 퇴계는 귀경 중에 병이 나서 고향으로 다시 돌아왔고, 휴가 기간을 넘겨 해직되었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온갖 해명을 하면서 공직에서 해임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을 텐데도 퇴계는 오히려 해직을 기뻐했다. 그리고 46세 때 거처를 토계리로 옮기고 두 번째 집인 양진암(養眞庵)을 짓고자 했는데, 이황은 홍문관 응교에 임명되어 한양으로 가면서 설계도를 직접 그리고 집에 있는 아들 준에게 설계도대로 집을 지을 것을 당부했다. 아들은 5월에 집을 짓기 시작해 11월에 완공했다. 이즈음 이황은 동네 이름에서 호를 따서 ‘퇴계’로 삼고 이를 주제로 시를 썼다.
이후 49세 때 벼슬을 던지고 고향에 내려온 퇴계는 이듬해 2월 계상 서쪽에 집을 장만하고 한서암(寒棲庵)이라는 정사(精舍)를 짓고 본격적으로 주자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한서암은 살림집이라기보다 퇴계의 서재이면서 제자들이 찾아와서 가르침을 받는 곳이었다. 한서는 원래 속세를 떠나 산중에서 가난하게 거처한다는 뜻이었는데, 주자는 무이정사를 지으면서 한서관이라는 이름을 지은 바 있다. 이황 역시 주자의 행적을 본받아 자신의 정사를 한서관에서 따와 한서암이라고 지은 것이다.
퇴계는 집이 완성되었을 때 그 심경을 이렇게 적었다. “세상에 발을 잘못 내디뎌 세속을 따르느라 골몰하다 보니 수십 년의 세월이 홀연히 이미 잘못 지나갔다. 고개를 돌려 회상하여 보니 망연자실할 뿐이라 내 몸을 어루만지며 크게 탄식할 뿐이다. 그래도 오히려 다행스러운 것은 몸을 거두어들여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옛 서적을 찾아내어 깊은 뜻을 찾고 뜻을 풀어보니 때때로 내 뜻에 맞는 것이 정말 옛날부터 이른바 ‘공부에 몰두하면 혼연히 밥 먹는 것도 잊는다’고 한 말이 나를 속이지 않음을 알겠다. 퇴계(토계리) 곁에 겨우 몇 칸의 집을 엮어 이제부터는 곧바로 죽을 때까지 기약하고, 묵묵히 앉아 고요하게 학문을 완성하면서 여생을 지내려 한다.”
한편 퇴계는 많은 제자가 찾아와서 한서암이 협소하고 불편해지자 이듬해 근처에 계상서당(溪上書堂)을 지었다. 제자인 학봉 김성일이 와서 본 바에 따르면, 계상서당을 포함한 퇴계의 집은 겨우 10여 칸에 불과했다. 그러나 퇴계는 이곳에 좌우로 도서를 둘러두고 세상의 근심을 잊은 듯 학문에 침잠했다고 했다. 퇴계는 후일 도산서당이 완성되고 나서도 겨울철과 한여름에는 계상서당에서 지냈으며, 자신이 숨을 거둔 곳도 바로 계상서당이었다.
퇴계는 도산서원을 끝으로 기나긴 건축 여정을 마감하는데, 57세 때 땅을 구입하고 4년 만에 도산서당을 완성했다. 도산서당은 정면 3칸에 측면 1칸의 아주 소박한 규모인데, 도산서원에 가서 도산서당을 대면하면 그 소박함에 숙연해진다. 한편 퇴계는 집 짓는 일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도산서당 공사를 막 시작한 어느 날 제자 황준량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스로 고생을 사서 하니 때로 혼자 웃습니다”라고 토로했는데, 1561년이 되었지만 공사는 아직도 마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건축 공사는 대개 기초를 다지고 집이 완성되는 데 6개월에서 1년 정도면 되었다. 조선시대의 건축은 뼈대를 목조로 하고 벽체만 흙으로 마무리하는 것이어서, 미리 재목을 다듬어두었다가 공사가 시작되면 일시에 조립을 해나가 그만큼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보통 터를 다지기 시작해 기둥을 세우고 상량을 하는 데까지 2개월, 지붕을 올리고 기와를 얹는 데 1개월, 내부의 벽을 마무리하고 창호를 설치하는 등 마무리 공사에 2~3개월이 걸렸다.
누구나 집을 지어보면 알 테지만, 새로운 터를 마련하고 여기에 지을 집을 구상하고 궁리하는 일이 한편으로는 힘들고 버겁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색다른 즐거움이기도 하다. 집은 그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입한다. 건축 비용도 그렇고 설계와 시공에도 자신의 생각과 신념이 투입된다. 그렇게 집을 짓다 보면 영혼을 다 바쳐 짓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든다. 퇴계 역시 그랬던 것 같다. 퇴계는 땅을 구하고 집을 짓는 데 자신의 철학과 재산을 모두 투입했다. 오래도록 알맞은 터를 구하려다 뜻밖에 도산 남쪽 사는 곳 가까이에 자신의 마음에 드는 터를 구하고 그 기쁨을 시로 읊고 나서 다시 며칠 뒤 그곳을 찾은 퇴계는 이번에도 시를 짓고 그 기쁨을 노래하고 이를 제자와 아들에게 보여주었다.
도산서당은 흰옷을 단정하게 차려입은 선비를 연상시킨다. 퇴계는 도산서당에서 10년 동안 지내면서 성리학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별처럼 빛나는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비록 작은 집이었지만 도산서당은 주변의 여러 사물과 하나가 되어 그 공간은 무한히 넓은 세계로 확장되었다. 한 인간의 길이 이토록 울림이 클 수 있음을 퇴계의 집짓기와 그의 생애를 통해 엿볼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집 순례기
나는 33번을 이사했다
내가 살아온 집들을 셈해보니 32번이나 되었다. 경남 합천군 봉산면 남은동의 고향집을 떠난 이후 고등학생 시절을 보낸 경남 진주 옥봉남동과 상대동의 자취방, 대학생 시절을 보낸 서울 개화동과 등촌동과 청천동과 연희동의 자취방, 창천동과 대신동의 하숙집, 대학 졸업 이후 대신동의 월세방, 신혼 생활을 시작한 경기도 고양시 화정동의 아파트, 생애 첫 번째 내 집인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빌라, 두 번째 내 집인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아파트,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아파트를 거쳐 서울 홍은동과 은평구의 아파트, 은평한옥마을에 집을 짓고 채효당에 깃들기까지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렇게 2017년 7월 입주한 채효당은 고향집을 떠난 후 내가 33번째 맞은 집이다.
그런데 나는 한옥으로 집을 옮기고서도 한동안 무의식적 자기 검열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아파트에 살면서 내면화된 모양이다. ‘아이가 뛰면 아래층에 들릴 텐데…….’ 나는 아침마다 국민체조를 하는데 발을 들어 뛰는 동작을 할 때마다 나 자신도 모르게 살며시 발을 내려놓곤 했다. 그런데 한옥으로 이사를 오면서 이런 자기 검열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층간 소음에 대한 무의식적인 억압이 내면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던 것 같다.
‘이제는 단독주택이니 층간 소음 걱정은 안 해도 되는데’ 하면서 지금은 마음의 긴장을 푼다. 나는 아파트에서 20년 동안 살았다. 단독주택에서는 채 2년도 안 되게 살았다. 그동안 나의 몸과 마음은 아파트에 최적화된 의식 상태를 유지해왔다. 공동 주거 단지인 아파트는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을 통제하고 있었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묵묵히 지켜보았던 것이다.
“집은 연애가 시작될 때 관여했으며, 숙제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포대기에 푹 싸인 아기가 병원에서 막 도착하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한밤중에 부엌에서 소곤거리며 나누는 이야기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이는 알랭 드 보통의 『행복의 건축』에 나오는 말이다. 나는 이 책을 읽다가 이 대목에서 저자의 혜안에 탄성을 질렀다. 우리는 대개 생명체인 인간이 집에 대해 갖고 있는 이런저런 생각을 말한다. 그런데 저자는 이와 반대로 관점을 달리해서 무생물체인 집을 생물체로 간주해 집에 깃들어 사는 인간에 대해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을 포용하듯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처럼 집은 한 인간의 성장사와 함께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아파트 주거 문화가 대세를 이루고 있다. 또한 아파트에서 오래 거주하기보다 전세 기간(보통 2년)만 살다 다른 아파트로 옮기기 일쑤다. 말하자면 우리 시대의 주거 문화는 한곳에 오랫동안 거주하는 정주의 문화가 아니다. 초원의 목동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유목 문화여서 한 사람의 성장사는 여러 집에서 살았던 흔적을 조각조각 모자이크하듯이 구성할 수밖에 없다. 나는 수십 번에 걸쳐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이 자취방에서
저 자취방으로, 이 아파트에서 저 아파트로 옮겨 다니며 살아왔다.
승효상은 내가 강조하는 주거 문화에 대한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그는 “유목이 아니라 정주하는 이들에게 주거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유효한 수단이며, 그래서 하이데거는 정주는 존재 자체라고 했다. 우리에게도 수천 년을 지탱한 고유하고도 아름다운 정주의 풍경이 있었다”라고 강조한다. “마당을 품은 기와집들과 자연을 닮은 초가들이 섞여 평화”롭게 공존하던 마을이 바로 그것이다. 승효상은 이것이 1960년대 말부터 짝퉁 서양집과 아파트가 건축되면서 일거에 무너졌다고 강조한다. “정치권력과 결탁한 건설자본은 엄청난 특혜 속에 아파트를 찍어댔고, 결국 투기판이 된 도시는 부동산 공동체”가 되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아파트 공화국이라는 비난을 듣는다며 개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