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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세계사 2 인물편

김상훈 지음 | 행복한작업실
B급 세계사 2 인물편



김상훈 지음

행복한작업실 / 2018년 12월 / 320쪽 / 15,800원





우리가 몰랐던 위인의 단면



신의 세상만 꿈꾸었던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_ 종교 개혁 vs 사회 개혁



726년 동로마 제국 황제가 성상 숭배 금지령을 내렸다. 예수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의 조각상과 동상을 쓰지도 말고 숭배하지도 말라는 뜻이다. 로마(서로마) 교회는 즉각 반발했다. 게르만족 같은 야만인을 개종시키려면 성상이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 성상 숭배 금지령으로 교회는 사실상 로마 가톨릭(서로마)과 동방 정교회(동로마)로 분열했다. 1054년 두 종파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플 교회(동방 정교회)는 서로를 파문했다. 이로써 두 종파는 완전히 갈라섰다. 동방 정교회는 동유럽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로마 교회는 중세 서유럽을 정신적으로 지배했다. 이후 시간이 꽤 흐르는 동안 서유럽에서 교회와 성직자의 권력은 갈수록 강해졌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도 손을 댈 수 없을 정도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은 늘 위험하다. 교회가 타락하기 시작했다.

15세기 이후 유럽에서는 인문주의 열풍, 즉 르네상스의 바람이 불었다. 인문주의자들은 교회를 강도 높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때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성당을 수리하고 있었고 돈이 필요했다. 교황은 죄를 지었을 때 처벌을 면해 주는 면벌부(면죄부)를 팔도록 했다. 면벌부는 과거부터 교회의 짭짤한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교황까지 판매에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교황마저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다. 1517년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 소속의 수사이자 신학자인 마르틴 루터(1483~1546)가 교회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루터는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을 붙였다. 루터는 면벌부를 산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며 구원은 신앙심과 은총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고 설파했다. 나아가 토지를 비롯한 교회의 재산도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황은 루터를 파문했다. 하지만 종교 개혁의 열풍은 꺾이지 않았다. 루터파가 독일 전체로 확산되자 마침내 로마 교회도 종교 회의를 통해 루터파를 정식으로 인정했다.

16세기 초반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 개혁은 16세기 중반 이후에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기존의 로마 교회에 저항하는 이들을 프로테스탄트(저항하는 사람)라고 불렀다. 새로 등장한 이 종교를 신교(개신교)라고 하고, 로마 가톨릭을 구교라고 했다. 스위스에서도 신교가 세력을 얻었다. 장 칼뱅(1509~1564)이 등장해 예정설을 주장했다. 칼뱅의 논리는 명료했다. 오로지 신의 선택을 받은 자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성서의 가르침대로 최선을 다해 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칼뱅은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것이 미덕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훗날 자본주의 정신으로 발전했다. 영국에서는 헨리 8세가 로마 교회와 충돌했다. 그는 왕비와의 이혼을 원했지만 교황이 허락하지 않자 화가 난 헨리 8세는 왕이 직접 교회를 관장한다는 수장령을 공포했다. 이로써 영국에서는 로마 가톨릭의 성격이 짙은 신교인 영국국교회(성공회)가 탄생했다. 이 밖에도 장로교, 청교도 등 여러 종파의 새로운 종교가 생겨났다. 한 마디로 중세 유럽은 종교의 시대였다.

종교가 분화하자 정치 지형도 급변했다. 유럽 전역이 구교와 신교로 나뉘어 대립했다. 결국 대형 전쟁이 터졌다. 바로 30년 전쟁(1618~1648)이다. 따지고 보면 이 종교 전쟁의 불씨를 만든 인물이 마르틴 루터였다. 그는 독실한 신앙심으로 무장했기에 크리스트교가 타락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파문을 무릅쓰고 권력에 도전했다. 그 결과 정체되어 있던 유럽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루터는 적어도 크리스트교의 영역에서는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횃불을 피워 올렸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루터는 ‘종교의 개혁’만이 중요했을 뿐 ‘사회의 개혁’은 염두에 두지 않았다. 루터는 비참한 농민의 삶을 외면했다. 심지어 농민들을 저주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또 다른 종교 개혁가 한 명을 소개한다. 그의 이름은 토마스 뮌처(1489 혹은 1490~1525), 뮌처는 원래 루터의 제자였다. 처음에는 루터의 편에서 서서 로마 교회에 맞섰다. 하지만 두 사람의 사상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뮌처는 훨씬 급진적이었다. 그는 교회와 수도원, 영주를 모두 지배자로 여겼다. 로마 교회를 개혁하는 것을 넘어 로마 교회 자체를 부정했다. 뮌처에게 로마 교회의 교황은 종말론에서 말하는 적(敵)그리스도였다. 그들을 타도해야 진정한 종교 개혁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이런 사상을 주장한 순간부터 뮌처는 루터와 한 배를 탈 수 없었다. 결국 뮌처는 루터와 결별했다.

1525년 뮌처는 5,000여 명의 농민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켰다. 정부군의 잔인한 진압이 이어졌다. 농민군은 몰살당했다. 뮌처 역시 붙잡혀 처형되었다. 뮌처가 주도한 농민 봉기를 루터는 지지할 수 없었다. 사실 루터의 사상은 조금 복잡한 면이 있다. 그는 2개의 정부가 존재한다고 보았다. 하나는 영적인 정부 또 하나는 세속적인 정부다. 신이 주관하는 영적인 정부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 하지만 세속적인 정부에서는 왕이나 황제의 통치에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세속적인 정부에 속한 국민은 신분의 차별을 인정하고 순응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기준에 따르면 농민 봉기는 세속 질서를 어지럽히는 행위다. 루터에게 봉기는 곧 폭력이자 야만적인 행위였다. 이런 점 때문에 루터를 지지했던 농민들은 나중에 돌아섰다. 이후 농민 반란은 더욱 격해졌다. 루터는 농민 반란군을 이단이자 반역자라고 몰아붙이며 처단해야 한다고 맞섰다. 한때 제자였던 뮌처가 농민 반란군과 함께 처형되자 잠시 인간적인 동정심을 보이기는 했지만, 종래의 입장을 바꾸지는 않았다. 이후 농민들은 루터를 향한 지지를 완전히 거두었다.

루터는 왜 그랬을까?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종교 개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 루터는 제후들과의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했어야 했다’는 의견이 다. 당시 루터는 로마 교회를 피해 망명 생활을 했다. 그때 그를 보호해준 사람들은 로마 교회에 비판적인 제후들이었다. 루터에게 그 제후들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였지만, 농민들에게는 착취자였다. 농민의 편을 든다면 제후들의 지원은 물 건너가 버릴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루터가 농민의 삶에 무관심했고 봉기에 나선 농민들의 편을 들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루터에 대한 또 다른 비판은 유대인을 박해했다는 것이다. 그는 유대인의 경전인 탈무드를 없애고 회당과 학교를 없애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폈다. 이 또한 종교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달리 해석할 여지가 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크리스트교로 개종할 것을 권했다. 하지만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일방적으로 항복하라는 뜻인데, 수천 년의 박해 속에서도 자신들의 종교를 지켜 온 유대인들이 받아들일 리 없었다. 이후 루터는 유대인에게서 등을 돌렸다.

마르틴 루터는 청소년의 역사책에 매우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부패한 교회와 권력에 취한 교황에 저항해 종교 개혁을 이끌었다는 점은 분명 인정받을 만한 업적이다. 하지만 중세 시대의 종교적 시야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 또한 어쩔 수 없는 한계로 지적된다. 머리는 차갑지만 가슴은 따뜻하게 사람을 향해 활짝 열려 있는 따뜻한 가슴이야말로 개혁가가 지녀야 할 기본 소양이 아닐까? 사람이야말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가치이니.

링컨이 노예제 폐지보다 더 바랐던 것은?_ 미합중국을 완성한 대통령



선거에 낙선해 실의에 빠져 있던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에게 열한 살 소녀로부터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소녀는 링컨의 움푹 팬 볼 때문에 날카로운 인상을 준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충고했다. “수염을 기르면 훨씬 부드럽게 보일 거예요. 여자들은 수염 기른 남자를 좋아하니 남편에게 링컨을 찍으라고 권할 걸요.” 이후부터 링컨은 수염을 길렀다. 그 덕분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어쨌든 그 후 링컨은 정치판에서 승승장구했고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대통령 링컨’ 하면 어떤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아마도 “흑인 노예제를 폐지하고 마침내 노예를 해방시킨 대통령”이라고 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링컨 자신은 세인들의 이러한 평가를 좋아할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는 다른 평가를 바랄지도…….

링컨은 농부 집안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형편 때문에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하고 어렸을 때부터 농장에서 품을 팔아야 했다. 성인이 된 후 벌인 사업도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정치인으로 성공하기까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1834년 일리노이 주 의원에 당선되어 정치인의 길을 걸었지만 ‘전국구’가 되기까지는 이후로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1846년 37세가 되어서야 하원 의원이 되었고, 1860년 마침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하지만 그가 노예 제도를 반대하는 낌새를 보였기 때문에 남부 지역의 주들은 반발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가 가장 먼저 연방에서 탈퇴했고 이어서 조지아, 플로리다, 앨라배마, 미시시피, 루이지애나, 텍사스 주도 연방을 떠났다. 1861년 2월에는 7개 주가 따로 아메리카 남부 연합을 결성하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링컨은 미국을 분열시키는 행동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7개 주의 즉각적인 연방 복귀를 명했다. 그러나 아메리카 남부 연합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자 링컨은 남부 지역의 연방 정부 재산을 몰수하고, 4월에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있는 연방군의 섬터 요새에 폭탄을 투하했다. 남북 전쟁(1861~1865)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남군이 다소 우세했다. 전세를 역전시킬 계기가 필요했다. 링컨이 그 계기를 만들었다. 1863년 링컨은 노예 제도를 폐지하고 노예를 해방한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으로 인해 남부를 지원하던 영국과 프랑스가 남부 지원을 중단했다. 남부를 계속 지원하면 자칫 노예제를 옹호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어 7월에는 펜실베이니아 게티즈버그에서 대형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는 남북 전쟁을 통틀어 가장 피해가 컸다. 단 3일 동안의 전투에서 남군과 북군을 합쳐 5만 명 이상이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북군이 승리하면서 전세가 완전히 역전되었다. 1865년 북군이 아메리카 남부 연합의 수도인 리치먼드를 점령했고, 제퍼슨 데이비스를 붙잡았다. 이로써 남북 전쟁은 최종적으로 북군의 승리로 끝이 났다.

안타깝게도 링컨 대통령은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전쟁이 끝나기 한 달 전쯤 연극을 보러 워싱턴 포드 극장에 갔다가 피살되었다. 남북이 하나 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그래도 노예 해방을 이루어 냈으니 링컨이 평생소원을 이루고 간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한다면 틀렸다. 링컨이 가장 원한 것은 노예 해방이 아니었다. 지상 과제는 따로 있었다. 연방을 지켜내고 하나로 통합하는 것! 링컨에게 있어 모든 정책의 1순위는 미국 연방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노예 해방은 2순위였다. 실제로 연방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노예 제도를 그대로 두어도 상관없다는 의미의 발언을 여러 차례 했다. 심지어 어떤 지역에서는 그 지역의 상황과 분위기에 따라 노예제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이를테면 어디서는 “특정 인종이 열등하다는 식의 궤변은 버리자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라고 했다가도 또 다른 곳에서는 “나는 백인과 흑인의 평등을 찬성한 적이 없다. 백인과 흑인의 결혼도 찬성하지 않는다. 백인과 흑인 사이에는 물리적 차이점이 있고, 그 차이점 때문에 동등하지 않다. 백인은 우월한 지위를 유지해야 한다.”라고 했다.

링컨 역시 정치인이었기에 별 수 없었던 것일까? 요즘도 선거 때가 되면 유권자의 입맛에 맞추어 수시로 공약이나 신념을 바꾸는 정치인이 많으니까 말이다. 어쨌거나 링컨의 진심은 명확했다. 노예제 폐지를 얻는다 해도 연방이 분열되거나 해체된다면, 아마도 링컨은 노예제 폐지를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링컨이 노예 제도를 옹호했다는 뜻은 아니다. 링컨은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사는 동안 줄곧 노예제를 반대했다. 남북 전쟁 중에 노예 제도를 폐지한다고 선언한 데 이어 이를 헌법에 명문화한 것도 링컨의 업적이다. 그 헌법이 바로 수정 헌법 제13조다. 노예 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한 수정 헌법 제13조는 1864년 12월에 발효되었다.

오늘날 미국인들은 대체로 링컨에게 우호적이다. 링컨은 늘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꼽힌다. 아마 첫 번째 이유는 링컨이 미합중국을 미합중국답게 만든 최초의 대통령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 론 노예 해방의 업적도 빼놓을 순 없겠지만 우리는 ‘링컨 = 노예 해방’이라는 공식으로 그를 기억한다. 물론 그가 오늘날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선조들에게 자유를 선물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은 바뀌지 않는 진실이다. 하지만 노예제 폐지는 링컨이 추구했던 정치적 노선의 일부분일 뿐이었다.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했다는 것으로만 링컨을 기억해서는 안 된다. 링컨이 진정 원했던 것은 미합중국의 탄생이었다.



역사의 한 순간을 장식한 사람들



러시아 혁명에 뛰어든 한국인이 있었다_ 김 알렉산드라의 파란 많은 삶



중국, 베트남, 라오스, 쿠바, 북한은 오늘날까지도 공산주의를 표방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공산주의는 마르크스와 레닌에게서 비롯되었다. 북한은 마르크스-레닌과는 다른 주체사상을 표방한다. 북한과 달리 앞의 네 나라는 공산주의 이념을 사실상 포기하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였다. 엄밀히 따져서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다. 다행히 최근 들어 북한도 변화를 보이고 있다.

공산주의 이념은 20세기 말에 몰락했다. 물론 사회주의자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유럽의 선진국에는 좌파라 불리는 사회당이 버젓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은 국가 전복을 꿈꾸지 않는다. 제도 권 정치의 틀 안에서 활동하며 개혁과 변화를 외친다.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는 1917년 러시아에서 탄생했다. 볼셰비키 혁명을 통해 전제 정권이 무너지고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섰다. 소비에트는 노동자 농민이 주축이 된 정권을 뜻한다. 귀족 혈통도 부르주아도 아닌 사람들이 지배 세력이 된다니! 당연히 기득권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비에트 세력과 혁명 반대 세력 사이에 치열한 내전이 벌어졌다. 내전은 소비에트 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1922년 러시아의 소비에트 정권과 주변 국가들의 소비에트 정권이 힘을 합쳐 연방 국가를 출범시켰다. 이것이 바로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Unions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USSR), 즉 소련이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기까지 70여 년의 역사가 이어졌다.

그 출발점은 1917년의 볼셰비키 혁명이다. 이 혁명을 이끈 인물은 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이었다. 볼셰비키는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지칭하며 ‘다수파’란 뜻이다. 소수파는 멘셰비키라고 불렀다. 다수파와 소수파는 구성원의 많고 적음을 뜻하는 게 아니다. 그들이 추종하는 이념이 혁명의 중심이 되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에 따라 소수파가 다수파도 될 수 있다. 실제로 볼셰비키의 구성원 수가 멘셰비키의 수보다 적었다. 그 대신 볼셰비키는 비타협적이었고 과격했다. 볼셰비키는 멘셰비키에 대해서 자본가, 권력자와 타협하는 세력이라 몰아붙였다.

러시아 혁명은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1917년 2월 혁명과 같은 해 10월의 볼셰비키 혁명이다. 2월 혁명은 시민 혁명이었다. 그 결과 차르 체제가 무너지고 자유주의 정부가 들어섬으로써 볼셰비키가 활동할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졌다. 2단계인 볼셰비키 혁명과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공산주의자가 이 혁명에 적극 가담했다는 점이다. 바로 김 알렉산드라(1885~1918)라는 여성이다. 그녀는 어쩌다 볼셰비키 혁명에 뛰어든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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