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탑 공화국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바벨탑 공화국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9년 2월 / 283쪽 / 15,000원
머리말 - 왜 한국은 ‘바벨탑 공화국’인가?
욕망의 충족에 미쳐 있는 바벨의 시민들: 구약성서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 이야기는 많은 학자와 예술가의 상상력을 자극해 새로운 버전의 이야기를 탄생시켰는데, 영국 철학자 마이클 오우크쇼트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다. 오우크쇼트가 쓴 현대판 바벨탑 이야기는 인간의 탐욕과 그 인과응보에 관한 이야기다. 바벨은 온통 돈 버는 일과 소비하는 일로 시끌벅적한 ‘욕망의 도시’이며, 거주자들은 욕망의 충족에 미쳐 있는 사람들이다. 한편 20여 년 전 서울대학교 교수로 초대 국토개발연구원장을 지낸 노융희는 「바벨탑을 쌓으려는 사람들」이라는 글에서 부동산 투기의 열풍 속에서 하늘 높이 치솟기만 하는 초고층 아파트의 문제를 지적하면서,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게 되는 ‘바벨탑의 방언 저주’가 이미 환경 문제 등을 통해 내려지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초고층 건물로 인해 제기되는 사회적 문제들을 현재로선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면서 지속가능성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더 높은 서열을 차지하기 위한 각자도생 투쟁: 한국은 현재 50층 이상 주거용 초고층 건물을 세계에서 4번째로 많이 보유한 나라인데, 2008~2014년 사이 31층 이상 고층 건물은 2.6배 급증했다. 이런 급증 추세는 더욱 가파르게 위를 향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왜 그럴까? 물론 돈 때문이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다. 초고층 아파트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다. 땅값이 비싼 곳에 있어야 한다. 어디가 땅값이 가장 비싼가? 서울이다. 그리고 강남이다. 강남에 대한 열망은 강하고 강남의 땅은 제한되어 있으니 높이 올라가는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경제 원리’의 메커니즘은 전국으로 확산된다.
바로 여기서 바벨탑의 이미지가 생겨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벨탑은 같은 인간들 사이에서 더 높은 서열을 차지하기 위한 각자도생형 투쟁이다. 그래서 수많은 바벨탑이 세워지며, 상호 소통이 불가능해진 불통은 이미 이 단계에서부터 나타난다. 이 바벨탑들은 탐욕스럽게 질주하는 ‘서열 사회’의 심성과 행태 그리고 서열이 소통을 대체한 불통 사회를 가리키는 은유이자 상징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대한민국 헌법 제1조 제1항은 추상적 당위일 뿐, 구체적 현실은 바벨탑 공화국이다. 헌법 제2장 제10조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고 했지만, 이 아름다운 말은 과거의 신분제를 대체한 서열제 앞에선 무력해지고 만다.
우리의 삶을 보자. 주거지만 서열이 있는 게 아니다. 한국은 대학 입시에서부터 취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게 다 서열이 있는 나라다. 이 지구상에 서열 없는 나라가 어디에 있겠는가. 문제는 서열 격차다. 예컨대, 서열 의식이 한국 못지않은 일본만 해도 중소기업의 연봉은 대기업의 80퍼센트를 넘지만, 한국은 겨우 절반 수준이다. 사회적 대접까지 돈으로 환산하자면 절반에도 한참 미치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걸 당연시하면서 방치한다. ‘모든 노동자의 대기업 노동자화’와 ‘모든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라는 목표를 진보적인 것이라고 내세우면서 언제 실현될지도 모를 기약 없는 목표에만 매달린다. 그래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경향신문》 논설위원 박종성이 잘 지적했듯이, 한국 사회에서 정규직 진입은 ‘사활의 문제’가 되고, “정규직의 성안으로 들어가면 문을 닫아버리고 자신만 살겠다”고 혈안이 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래서 분신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차별에 한이 맺힌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는 “우리도 정규직 드나드는 정문 앞에서 데모 한 번 하고 싶다”고 절규한다.
왜 고시원은 타워팰리스보다 비싼가? - 초집중화
‘서울은 위대한 혁신의 집합소’: 나는 균형을 좋아한다. 그래서 서울 비판에 앞서 좀 더 객관적인 시각에서 서울을 예찬한 어느 외국인의 주장도 소개하련다. 미국 하버드대학 경제학과 교수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도시의 승리』에서 혁신과 학습을 조장하는 데 도시가 가진 우위의 대표적 사례로 한국이 이룬 성공을 들었다. 서울은 수십 년 동안 전국 각지에서 많은 인재를 끌어오며 번영한 도시로 위상을 높였는바, 서울의 크기와 범위는 서울을 위대한 혁신의 집합소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사실 서울이라고 하는 초일극 중앙 집중화의 터전 위에 선 ‘아파트 공화국’이야말로 네트워크를 깔기에 가장 적합한 체제였다. 한국은 이미 10여 년 전 국민의 반 이상이 아파트에 거주할 뿐만 아니라 전화국 반경 4킬로미터 내에 거주하는 인구가 93퍼센트라, 인터넷 서비스 공급에도 매우 유리한 위치를 확보해 하드웨어에선 세계적인 인터넷 강국이 되었다. 그러나 대도시가 제공하는 네크워크 효과엔 그만한 비용과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다. 네트워크 효과로 성장한 거대 기업들이 독과점의 횡포를 저지르듯, 네트워크 효과는 그 효과에서 배제된 사람들에게 부당한 희생을 강요한다.
또한 네트워크 효과를 낳게 하는 이른바 ‘연결과잉’은 통제 불능 등과 같은 수많은 부작용을 낳으면서 사회 전체를 파멸의 위기에 빠뜨릴 수도 있다. 따라서 그 어떤 혁신에도 지방을 희생으로 한 서울의 크기와 범위는 무조건 무한대 팽창할수록 좋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그 어떤 혁신이라도 “과연 누구를 위한 혁신인가?”라는 물음을 피해 갈 순 없다. 네트워크 효과가 아무리 유익하고 아름다워도 그 네트워크에서 배제된 사람들에겐 흉악과 추악의 원인일 수 있다.
“강남 재건축은 복마전”: 강남은 어떤 곳인가? 바벨탑 정신이 가장 강한 곳이다. 이미 10년 전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 박철수가 「10억짜리 욕망의 바벨탑: 대한민국 아파트, 거주 공간 아닌 금전적 이익의 결정체」에서 잘 지적했듯이, “재건축 아파트 조합 결성을 아이의 대학 합격 소식보다 더 반기는 부모들, 아파트가 구조적으로 튼실하지 못해 곧 무너지게 생겼다는 구조 안전 진단 평가 결과에 경축 현수막을 서둘러 붙이는 건설업체와 이름도 다양한 추진위원회” 등으로 대변되는 한국 아파트 문화의 발상지이자 전파지가 바로 강남이다.
재건축을 둘러싼 갈등은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이익 갈등의 고농도 압축판이 되었다. “강남 재건축은 복마전”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인데, 2018년 12월 그 ‘복마전’의 일면이 공개되었다. 단군 이래 최대 규모라는 서울 반포주공아파트 1단지는 45년 된 5층 아파트지만 재건축 기대감에 집값은 최고 40억 원을 웃돈다. 재건축 사업 규모만 10조 원에 달하다 보니 공사를 따내려는 건설사들 간 불법 출혈 경쟁과 금품 살포가 난무했다. 금품 살포가 무차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한 아파트에서만 절반이 넘는 1,400여 명의 조합원이 금품을 받았다. 경찰에 불구속 입건된 사람만 334명이나 되었다.
“웅크리고, 견디고, 참고, 침묵하는 고시원의 삶”: 집이란 무엇인가? 《한국일보》는 이런 답을 내놓았다. “누구에겐 ‘욕망의 바벨탑’ 누구에겐 ‘절망의 외딴방’. 돈이 되는 욕망의 바벨탑 이야기는 늘 무성하지만, 절망의 외딴방 이야기는 그곳에서 사람이 죽어나갈 때에만 세인의 입에 오르내린다. 죄 없는 아파트는 ‘중간계급 제조 공장’이 된 반면, 아파트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하층민은 쪽방으로 밀려났으니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 찜질방을 오가다가 돈이 조금 모이면 찾는다는 고시원은 어떤가. 2018년 11월 9일 18명의 사상자(사망 7명)를 낸 서울 종로구 국일고시원 화재 사건을 통해 드러났듯이, 고시원도 도저히 집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주거 조건이 극도로 열악하다.
2015년 7월 30일 손석희는 이런 브리핑을 했다. “작가 박민규의 「갑을고시원 체류기」란 단편을 펼쳐봤습니다. ‘그것은 방이라고 하기보다는 관이라고 불러야 할 크기의 공간…… 그 좁고 외롭고…… 정숙해야만 하는 방 안에서 나는 웅크리고 견디고 참고 침묵했고…….’ 비좁은 고시원에서 생활하는 젊은 청춘의 모습을 작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고시원 거주자의 희망은 고시원 탈출이겠지만, 누군가는 또 고시원을 찾는 끝없는 행렬이 이어질 것이다. 고시원과 쪽방, 만화방이나 찜질방 등 다중 이용업소와 같은 ‘집 아닌 집’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수에 관한 정확한 통계는 없다. 많게는 228만 가구로 추정하지만, 수가 많건 적건 이는 우리 사회가 외면해선 안 될 인권 문제로 보는 게 옳다.
왜 고시원의 80퍼센트가 수도권에 몰려 있을까?: 한양대학교 건축학부 특임교수 함인선은 「왜 고시원은 타워팰리스보다 비싼가?」라는 글에서 타워팰리스의 3.3제곱미터당 월세는 11만 6,000원이고 고시원은 13만 6,000원이라고 했다. 그는 고시원의 ‘존재 이유이자 경쟁력의 원천’을 이렇게 설명한다. “일자리, 정보, 문화, 교류에서 소외되지 않고 짧은 출퇴근 시간이 보장된다면 개인 공간이 지옥고(지하방, 옥탑방, 고시원)에 있음은 문제가 아니다. 좋은 입지는 ‘강남’만큼 희소하고 저성장 및 1, 2인 가구 증가로 경쟁은 더욱 가속화될 것이기에 고시원은 당분간 시장 지배자일 것이다.”
고시원이 타워팰리스보다 비싼 건 정치학 박사 최장집이 말한 ‘초집중화’의 문제를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초집중화란 정치적 권력뿐만이 아니라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자원들이 지리적ㆍ공간적으로 서울이라는 단일 공간 내로 집중됨을 의미한다. 이런 중앙 집중은 집중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중첩되면서 집적되는 형태까지 만들어내고 있다. 함인선이 지적했듯, 일자리에 대한 접근성이 초집중화 문제의 핵심이다. 집 아닌 집의 수도권 집중도에 대한 정확한 통계 역시 없지만, 고시원의 80퍼센트가 수도권에 몰려 있다는 건 무엇을 말하는가? 수도권의 일자리 집중도와 비슷하다는 게 우연일까?
가치 판단을 배제하고 그냥 구경만 하고 있자면, 정부가 하는 일은 너무 재미있어 웃음이 나온다. 수도권의 주택 문제는 수도권의 경제 집중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수도권의 경제 집중은 그대로 두거나 오히려 악화시키면서, 수도권의 주택 문제를 공급 대책으로 해결하겠다고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한다. 그러면 수도권의 경제 집중은 더욱 심해질 텐데, 또 다시 주택 문제가 불거질 게 아닌가? 그러나 그건 걱정할 일이 아니다. 정부를 지배하는 정권은 5년짜리기 때문이다. 이 희한한 셈법에 웃는 사람도 없고 화내는 사람도 없다. 모두들 새로운 공급 대책의 잔치판에 대해 각자 주판알 튕기느라 정신이 없기 때문이다. 정책 실패로 서울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자 정부가 2018년 9월 13일 내놓은 ‘수도권 주택 공급 확대 대책’도 바로 그런 이상한 게임의 산물이다.
왜 ‘지주들의 소작농 수탈’은 여전히 건재한가? - 부드러운 약탈
폭력을 써서 빼앗는 것만 약탈이 아니다: 2018년 12월 8일 《중앙일보》의 토요판인 《중앙선데이》를 읽다가 매우 흥미로운 주장을 접하게 되었다.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교수 유현준이 쓴 「임대주택은 ‘소작농’ 만드는 것… 청년에게 집 소유를 허하라」라는 글이었다. 내가 흥미를 느낀 동시에 의아하게 생각한 건 다음과 같은 대목이었다. “대한민국 사회가 지난 수십 년간 현대사에서 정치적으로 문제가 많았음에도 사회가 안정적으로 유지ㆍ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아파트 소유 덕분이다. …… 지난 수십 년은 소작농이었던 국민이 모두 지주가 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지금 임대주택 중심으로 바꾸겠다는 부동산 정책은 지주가 된 국민을 다시 소작농으로 만드는 것이다. 정부가 임대주택을 모두 소유하게 되면 이 시대의 지주는 정부가 된다. 정부는 실체가 없으니, 실제 소유주는 정치가가 되는 것이다.……젊은이들도 부동산을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기주의를 적절히 이용해서 세상을 좋게 바꿀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사피엔스종의 사회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글 전체에 흐르는 유현준의 좋은 취지와 선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 기사에 달린 댓글 하나가 내 의문을 대변했다. “누가 청년들에게 집 소유를 금지했나? 서울, 특히 강남을 중심으로 집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정상적인 일반인의 수입으로는 집을 살 수 없는 것이 현실인데, 뭔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이야기! 집값이 최소 10억인데 임대주택 말고 다른 어떤 방법이 있는지 한번 이야기해보실래요?” 그런 의문이 들긴 했지만, 내가 유현준의 주장을 소개한 건 이 글의 균형을 위해서다. 유현준은 ‘지난 수십 년은 소작농이었던 국민이 모두 지주가 되는 시간’이라고 했지만, 대체적으로 보아 그렇다는 말일 게다. 나는 그 대체적인 흐름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입장을 대변하고자 하기에 유현준과는 다른 각도에서 ‘지주들의 소작농 수탈’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그렇게 이해해주시기 바란다.
정치학자 버트럼 그로스는 고전적 파시즘 체제가 보여주던 외양은 사라졌지만 날이 갈수록 심화되는 대기업의 지배와 정경유착 구조에 의해 개인의 자유와 민주적 권리가 억압받는 상태를 묘사하기 위해 ‘부드러운 파시즘’이라는 말을 썼다. 이 용어를 원용하자면, ‘부드러운 약탈’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불로소득 부자를 양산한 약탈 체제: 비수도권의 소득이 수도권으로 빨려 들어가는 ‘수도권 블랙홀’ 현상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2018년 11월 산업연구원이 내놓은 「전국 16개 시ㆍ도 지역 소득 역외 유출의 결정 요인」 보고서에 따르면, 지방에서 번 돈이 수도권으로 빨려 들어간 규모는 2016년 기준으로 62조 원에 이른 것으로 나타났다. 이걸 ‘약탈’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부동산 투기에 의한 약탈은 어떤가? 한국에서 부동산 투기에 의한 약탈은 1980년대부터 본격화되었다. 지가 상승을 통해 발생하는 불로소득은 1985~1986년에는 국민총생산 대비 15퍼센트를 웃돌았으며, 지가 상승이 컸던 1987년에는 36퍼센트를 초과했다. 땅값은 1988년과 1989년에 급격히 상승했는데, 1989년에는 땅값이 32퍼센트나 올랐다. 특히 서울 시내 주택 가격은 1988년 이후 폭등했는데, 이런 집값 상승으로 인해 1989년 지방에서 서울로 전입한 인구의 87.6퍼센트가 자기 집을 보유하지 못하고 전세나 월세 등을 살았다. 불로소득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해서 그걸 약탈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게 예외가 아니라 주요 사회적 흐름으로 구조화되어 있다면 그건 약탈이다.
0.1퍼센트 강남이 전체 땅값의 10퍼센트를 차지한 나라: 부동산에 의한 부드러운 약탈은 2010년대에도 계속되었으며, 그 진원지이자 선도자는 늘 서울 강남이었다. 2011년 공시지가 기준으로 지방 땅값 총액은 1,174조 원인 반면, 수도권 땅값은 2,361조 원이었다. 수도권과 지방의 땅값 총액 격차는 2001년 120조 원에서 10년 만에 1,200조 원으로, 10배나 벌어졌다. 강남 3구(강남ㆍ서초ㆍ송파)의 땅 면적은 전국의 0.1퍼센트에 불과하지만 땅값은 10퍼센트를 차지했다.
상위 20퍼센트 아파트값이 하위 20퍼센트의 6배: 《경향신문》 전병역 기자는 “‘1,500만 촛불’의 원동력은 박근혜 정부에 대한 분노만이 아니다”라며 “그 근저에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요구가 있다. 수년째 화두인 저출산 문제의 바탕에도 임금ㆍ교육비ㆍ주거비가 깔려 있다”고 했다. “일상이야말로 그 모든 혁명이 실패하는 원인”이라는 앙리 르페브르의 법칙 때문일까? 촛불정권은 그런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2018년 여름부터 서울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는 현상을 보였다. 《중앙일보》 이현상 논설위원은 “이 정도면 미쳤다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고 했다. “눈 떠보니 억 단위로 올라 있는 건 예사다. 위약금까지 물어주고 계약된 물건을 거둬들이는 집주인까지 생겼다. 집값 잡겠다는 정부 말을 믿고 집 구매를 미뤘거나 팔아버린 사람들은 가슴을 친다.”
반면 지방의 부동산 가격은 급락했다. 통계청 주택 매매 가격지수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서울ㆍ수도권의 7월 아파트 매매 가격지수는 2018년 11월 기준 시점으로 각각 100→105.6(서울), 100→102.1(수도권)로 급등한 반면, 지방의 아파트 매매 가격지수는 100→98.2로 내려갔다. 지방의 아파트값 하락세가 2년 이상 이어지자 가만히 앉아서 당할 수만은 없다고 생각한 일부 지방민들은 상경 투기ㆍ투자에 나섰다. 한국감정원 전국 주택 가격 동향 조사에 따르면, 2011~2016년 이루어진 서울 아파트 거래 중 ‘서울에 살지 않는 사람’이 매수인인 경우는 평균 16.6퍼센트였지만, 이 비율은 2018년 7월까지 20퍼센트로 뛰어올랐으며, 이후 계속 증가세를 보여 25퍼센트 수준으로 추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