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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

만프레트 마이 지음 | 이화북스
세계사 최대한 쉽게 설명해 드립니다



만프레트 마이 지음

이화북스 / 2018년 12월 / 352쪽 / 13,800원



서기 1000년의 세계



서기 1000년, 지구촌의 모습은? 1999년에서 2000년으로 해가 바뀔 때 마치 이제부터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라도 한다는 듯 새로운 천 년의 시작을 기념하는 축제가 세계 곳곳에서 열렸다. 그러나 연수 에 맞추어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 일어나거나 새로운 시대가 개막되는 것은 아니다. 999년 연말에는 사람들이 이와 유사한 소동을 벌였을 것 같지는 않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1000년으로 바뀐다는 것도 몰랐을 수 있다. 그러나 마법의 숫자 1000을 이용해 그 당시 세계의 모습이 어땠는지 한번 전체적으로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시 지구 인구는 대략 2억 6,000명이었고 그 중 6,500만 정도가 중국인이었다. 이 거대한 동방의 나라는 기술과 문화에서 이미 큰 진보를 이루었다 중국인들은 비단과 도자기를 만들 줄 알았고, 인쇄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최초의 계산기라고 할 수 있는 주판을 사용했다. 또 수력을 이용해 기계를 작동시켰고, 화약을 발명했다. 아시아를 가로질러 팔레스타인까지 이르는 실크로드를 통해 상품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무역뿐 아니라 정신적 교류도 활발해졌다.

인도는 인구가 8,000만 명으로, 당시 지구상에 이보다 인구가 더 많은 나라는 없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인도 역시 그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먹여 살리느냐가 나라의 큰 골칫거리였다. 2모작 같은 땅에서 일 년에 두 번 곡식을 수확하는 토지 이용법(여름에는 벼, 겨울에는 보리ㆍ밀 등을 경작한다)이 도입된 뒤에야 비로소 모든 사람에게 충분한 쌀이 생산되었다. 1000년경 인도 사람들의 삶은 부처가 살았던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아랍인들이 이슬람의 세력 범위를 북부 인도까지 확장하고 불교를 거의 몰아내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그 후 인도에서는 이슬람교와 힌두교가 세력 다툼을 벌였고, 이러한 갈등이 훗날 나라의 분열과 파키스탄의 독립으로 이어졌다.

거대한 이슬람 제국은 곧 칼리프에 의한 결속과 통제가 불가능해질 정도로 커져버렸다. 제국은 점차 붕괴해갔지만 이슬람교 자체는 이로 인해 어떤 타격도 입지 않았다. 다만 이슬람 세계의 주도권이 아랍인에게서 투르크인에게로 넘어가게 된다. 비잔티움제국 역시 투르크족의 압력 아래 점점 약해지다가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지역으로 축소되었다. 당시 문명화된 세계에서 서유럽은 가장 보잘것없는 지역이었다. 로마제국은 멸망했고, 그에 견줄 만한 강대한 세력은 나타나지 않았다. 서유럽은 이제 겨우 동방의 옛 문화와 제국의 그림자에서 벗어나는 중이었다.

아메리카 대륙 중부에는 3,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마야ㆍ잉카ㆍ아스텍 문명이 있었다. 그들은 장대한 건축물을 세웠고 고도의 천문학과 수학을 알고 있었으며, 대단히 정확한 달력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시아와 유럽의 민족들이 보여준 빠르고 역동적인 발전은 그들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함으로써 상황은 변화하게 되지만 이 변화는 지독하게 끔찍한 것이었다. 1000년으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사람들은 신석기 말기와 거의 비슷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와 아프리카 남부의 원주민들도 사정은 비슷했다. 이에 반해 이슬람 세력이 지배했던 북부 아프리카는 문화ㆍ정치ㆍ경제에서 지중해 동쪽의 국가들과 큰 차이가 없었다.

교황과 황제의 대결



교황과 황제의 갈등, 과연 최후의 승자는 누구일까? 프랑크 제국의 황제 샤를마뉴 대제는 수도원을 후원해 일종의 교육기관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수도원들은 너무나 ‘세속화’되었기 때문에 11세기에 이르러 이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 발원지는 부르고뉴에 있던 베네딕투스수도회 소속 클뤼니수도원이었다. 이곳의 수도사들은 ‘기도하고 일하라’고 요구한 성 베네딕투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달라져야 할 것은 비단 수도원 생활만이 아니었다. 클뤼니 수도사들의 비판은 세속적 삶과 너무 밀착되어 있는 교회 전반을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교회 권력과 세속 권력의 관계는 샤를마뉴 시대 이후 점점 더 긴밀해졌다. 이제 교회 권력과 세속 권력의 관계를 어떻게 조절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기나긴 대결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카롤링거 왕조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이 세상의 지배자로서 아주 자연스럽게 수도원장과 주교의 임명권을 행사했다. 1039년에서 1056년까지 재위했던 하인리히 3세는 한 술 더 떠서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교황들을 퇴위시키기까지 했다. 이러한 처사는 많은 성직자들을 격분케 했다.

하인리히 3세가 서른아홉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그의 어린 아들 하인리히 4세가 왕위에 오르자 성직자들은 이때를 반격의 기회로 삼았다. 그들은 황제의 간섭을 배제하고 일곱 명의 추기경에 의한 교황 선출 제도를 관철시켰다. 1075년, 새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교황이 독점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인리히 4세는 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권리, 즉 서임권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황제의 지위가 약화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측근들과의 숙의 끝에 교황의 폐위를 선포했다. 그러자 교황은 하인리히 4세를 파문하고 신하들이 황제에 게 한 충성 서약을 무효화했다. 이런 전례 없는 사태에 대해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황제가 마치 범죄자처럼 취급당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리히 4세의 파문은 곧 그 효과를 나타냈다. 스스로 추방당할 위협에 내몰린 많은 제후들이 교황의 편으로 넘어갔다. 게다가 제후들은 황제의 힘이 약화된 틈을 타 자기들 권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하인리히 4세는 점점 더 심한 압박을 느낀 끝에 교황과 화해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찾아가기에 이르렀다. 그는 카노사의 성에서 참회복을 입고 교황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했다. 자비로운 그리스도 교도였던 그레고리우스 교황은 참회하는 죄인을 다시 교회의 품 안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다. 황제 하인리히 4세의 힘겨운, 하지만 현명한 선택은 ‘카노사의 굴욕’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책에 기록되고 있다. 이 일로 교황은 황제와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도 잠시, 하인리히 4세는 유리한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진군했고, 그레고리우스에게 대항하는 다른 교황을 내세웠다. 그리고 이 교황에 의해 베드로 대성당에서 황제로 추대되었다.

이미 그 당시 사람들도 이런 방식으로는 ‘주교 서임권 논쟁’이 매듭지어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해결을 위한 양측의 노력이 시작되기까지는 수십 년의 세월이 더 흘러야 했다. 처음에는 영국과 프랑스에서, 나중에는 신성 로마 제국에서 협상의 움직임이 일어났다. 교황과 황제는 결국 1122년에 ‘보름스 종교 협약’으로 불리는 조약을 통해 일정한 타협에 도달하게 된다. 이 조약은 종교 권력과 세속 권력의 관할 영역과 권리를 확정했고, 훗날 정교 분리라고 불리게 될 원칙의 확립을 향한 중요한 일보가 되었다. 이 조약은 동시에 교황에게 그리스도교 최고 수장의 지위를 확실히 보장해 주었다.

십자군 원정



유럽인들은 이슬람을 상대로 일으킨 십자군 전쟁에서 무엇을 얻었을까? 중세 사람들에게 삶의 중심은 종교와 신앙이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천국에 가면 현세의 삶에서 겪은 고통을 보상받을 수 있다고 기대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를 위해 종교적인 규율에 따라 생활해야 했다. 그리고 이를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참회했다. 많은 그리스도 교도들이 예수가 살고 고난을 겪었던 팔레스타인과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떠났다. 이곳에 거주하던 아랍인들은 순례자들의 통행을 허용했다. 그러나 1071년 투르크족의 일파인 셀주크족이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그들은 순례자들을 약탈하고 살해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셀주크족은 가뜩이나 세력이 약화된 비잔티움 제국까지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위기에 처한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교황에게 도움을 청했다, 1095년에 교황은 선동적인 말로 모든 그리스도교 도들에게 투르크족에 맞서 싸울 것을 촉구했다. “저주받을 민족, 신을 모르는 타락한 민족이 그리스도 교도의 땅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불태웠다. (…) 우리는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믿음이 없는 자들에 대항하여 무기를 드는 사람은 모든 죄의 형벌에서 완전히 면제되며 성스러운 투쟁에서 전사하는 사람은 영원한 삶을 보장받을 것이다.”

교황의 호소는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본래 귀족이나 기사 계급을 향한 것이었으나 이들뿐 아니라 농부와 수공업자들, 심지어 여자들까지도 열렬히 호응했다. 하지만 ‘성스러운 전사들’의 동기는 아마도 힘겨운 삶으로부터 무작정 탈출하고 싶은 심리, 전리품을 한몫 단단히 챙길 수 있으리라는 기대, 구원에 대한 진정한 믿음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었을 것이다. 유럽 전역에서 병력이 모여들었고, 1096년 8월, 십자군의 깃발 아래 팔레스타인으로의 행군이 시작되었다. 혹독한 3년이 지나 최초의 십자군이 목적지에 도달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이슬람교도들과 유대인들을 끔찍하게 학살했다. 투르크 족은 성지에서 추방당했고,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십자군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건설하거나 심지어 작은 독립 국가들을 세우기도 했다. 이들은 주위의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위협을 느꼈으므로 계속 서방 세계의 지원을 요구했다. 그 결과 십자군 원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한 십자군의 노력에도 예루살렘과 성지는 1300년에 끝내 이슬람 세력권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십자군 원정은 비록 군사적으로는 실패로 돌아갔으나 서양의 그리스도교 세계에 미친 영향이 적잖았다. 서유럽인들은 수백 년 만에 처음으로 우월한 문화와 접촉하게 되었다. 십자군 원정대에 속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시골 지역 출신이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장식이 호화로운 건물, 공공 목욕 시설, 병원과 약국, 화려한 이슬람 사원과 도서관, 학교 등이 늘어선 이슬람 세계의 도시는 무척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또 그들은 벨벳과 비단, 도자기와 유리 제품, 동양의 향료들을 알게 되었다. 동양과 서양 사이의 무역은 십자군 전쟁 때 이미 눈에 띄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ㆍ피사ㆍ제노바 같은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들은 교역의 중심지로서 부와 권력을 키워나갔다.

많은 상품들 외에 의학과 자연과학에 관련된 지식, 아라비아 숫자 체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랍인들에 의해 보존되고 전승된 고대의 유산들이 서유럽으로 넘어왔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면, 십자군 원정은 원래 의도와 정반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교도들은 미개한 이교도들의 손아귀에서 성지를 해방시키기 위해 전쟁에 나섰다. 그러나 막상 이곳에 도착하자 미개한 이교도들이 자기들보다 훨씬 더 발전된 문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스도 교도가 이슬람교도에게 배울 것은 있었지만 그 반대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서양은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많은 이득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신대륙’의 ‘발견’



세계 지도를 새롭게 그린 ‘신대륙’의 ‘발견’, 그런데 왜 그들은 신대륙의 사람들과 문명을 살육하고 파괴했을까? 르네상스는 학자와 예술가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탐험가와 항해자들의 시대이기도 했다. 중세까지만 해도 항해자들은 대개 알려진 해안을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 잘못하다가 혹시 ‘세상의 끝’에 가서 얼어 죽거나 불에 타 버리거나 폭풍에 휩쓸리거나 바다의 괴물에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이런 불안감은 15세기에도 있었으나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는 듯한 르네상스 시대의 들뜬 분위기는 항해자들의 사기를 북돋웠다. 그들은 탐구욕과 모험 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물론 새로운 항로와 지역을 개척하는 데 따른 확실한 경제적인 이익도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을 완전히 무너뜨린 투르크족은 콘스탄티노플의 이름을 이스탄불로 바꾸고 새로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수도로 정했다. 이후 그들은 지중해 전 지역을 장악하고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모든 주요 통상로를 통제하면서 상인들에게서 상당한 액수의 통행세를 징수했다. 인도와 중국에서 서양으로 들어오는 귀한 물건들의 가격은 더욱 비싸졌다. 이에 사람들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통과하지 않고 동아시아와 거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고, 바다만이 그 유일한 가능성으로 나타났다.

유럽의 서쪽 맨 끝에 위치한 작은 나라 포르투갈은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려는 항해자들의 출발점이 되었다. 여기서 출발해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에 도달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들은 해를 거듭하며 아프리카의 서쪽 해안을 따라 계속 남쪽으로 내려갔다. 1487년에야 배 한 척이 아프리카 대륙의 최남단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프리카는 사람들이 그때까지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던 것이다.

이때 한 이탈리아 항해자에게 단순하고도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지구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한 대로 둥글다면, 계속 서쪽으로 항해할 경우 언젠가는 극동 지역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들여온 나침반은 이런 대담한 모험을 가능하게 해줄 중요한 항법 도구였다. 하지만 선구적인 생각을 한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 역시 주변 사람들의 조롱과 비웃음을 샀다. 그는 몇 년에 걸쳐 포르투갈 왕에게 인도의 보물을 약속하며 원정에 필요한 자금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의 청원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콜럼버스가 다음으로 발길을 돌린 곳은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이라고 그의 생각에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결국 설득에 성공해 스페인의 여왕에게서 세 척의 범선을 갖추기 위한 자금을 얻어낼 수 있었다. 1492년 8월 3일, 콜럼버스는 120명의 선원을 데리고 스페인을 출발했다. 낯선 바다 위에서의 항해가 콜럼버스의 당초 예상보다 훨씬 더 길어지자 선원들은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불안은 날로 심해져 갔고, 자연히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자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조만간 인도 땅에 이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에 선원들을 독려해 항해를 계속했다 1492년 10월 12일, 마침내 누군가가 외쳤다. “땅이 보인다!” 콜럼버스는 항해 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는 모든 돛을 내리고 보조돛 없이 주돛 하나만으로 배를 몰았다. 그 다음엔 배를 서서히 정지시키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인디언 말로 ‘구아나하니’라고 불리는 한 섬에 도착한 날을 금요일이었다.”

콜럼버스는 ‘인디언 말’이라고 썼다. 당연하게도 그는 자신이 인도에 속하는 섬에 상륙한 것이라고 믿고 그곳의 원주민들을 ‘인디엔’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 후 10년간 콜럼버스는 서쪽 방향으로 세 차례 더 항해를 했지만 끝까지 자신이 아시아 지역에 간 것으로 믿었다. 사람들은 이 착오를 기념하는 뜻에서 그가 발견한 섬들을 서인도 제도라고 명명했다.

이후 다른 사람들도 서쪽을 향한 항해에 나섰는데, 그들은 곧 콜럼버스가 인도로 가는 새 항로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대륙을 발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중 한 사람인 항해자 아메리고 베스푸치(1454-1512)의 이름에 따라 이 대륙은 아메리카라고 불리게 되었다.

발견자의 뒤를 이어 정복자들이 새로운 대륙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페인과 포르투갈 사이에 ‘신대륙’의 소유권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났다. 결국 이 문제는 교황에게 넘겨졌다. 교황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신대륙의 지도를 가져오게 해서 북에서 남으로 선 하나를 긋고 이 선을 기준으로 서쪽 땅은 스페인에, 동쪽 땅은 포르투갈에 속한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분쟁이 당분간은 해결된 셈이었다.

정복자들은 오로지 엄청난 보물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아메리카로 몰려갔다. 특히 금에 대한 탐욕 때문에 그리스도교의 미덕을 모두 잊어버리고 무자비한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500명의 부대를 이끌고 간 스페인의 기사 에르난 코르테스가 저지른 짓은 특히 악질적인 것이었다. 인디언들에게 전설적인 아스텍 왕국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를 들은 그는 부하들을 데리고 이 왕국을 찾아 나섰다. 인디언들은 방어하려 했지만 스페인의 기병이 나타나거나 대포 한 방만 발사해도 기겁을 하고 달아났다. 인디언들은 그때까지 말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며 대포 소리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겐 막강한 힘을 가진 이방인들이 신으로 보였다. 1519년 11월 아스텍 왕국의 수도에 도착한 스페인인들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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