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안중근 지음 | 서울셀렉션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안중근 지음
서울셀렉션 / 2018년 11월 / 228쪽 / 16,000원
서문 - 「동양평화론」과 「청취서」: 2018.10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일본은 1890년대 중반 청일전쟁을 끝낸 뒤 다시 10년간 많은 돈을 들여 군비를 확장하여 1904년 2월에 러일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을 준비하는 도중에 서구에서 국제평화운동이 일어나자 일본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일으키는 전쟁은 동양 평화를 위한 것이라는 억설을 폈다. 동양 평화를 위해서는 동양 진출을 노리는 러시아와 싸우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전쟁을 끝낸 뒤, 전승을 배경으로 한국 외교권을 빼앗는 ‘보호조약’을 강제하여 침략성을 그대로 드러냈다.
한국 황제는 이 조약이 불법적으로 강요당한 것임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 3인을 파견하였다. 일본 정부는 거짓과 비행이 드러나자 한국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거짓 조칙으로 한국 군대까지 해산하였다. 이에 한국인들은 국내외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의 불법 강제 행위를 규탄하면서 국권 수호를 위해 피나는 싸움을 벌였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대한의군(大韓義軍) 특파대 대장으로서 하얼빈 철도정거장에서 한국 국권 탈취의 우두머리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은 가장 빛나는 투쟁의 성과였다. 안중근은 ‘의거’ 현장에서 ‘대한 만세’를 세 번 외쳤고, 5개월 뒤 1910년 3월 26일 사형 집행 현장에서는 ‘동양 평화’를 삼창하기 바랐지만 일본은 허락하지 않았다. 안중근의 평화사상을 전하는 기록으로 두 가지가 남아 있다. 안중근은 1910년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자마자 법원장 면담을 요청하였다. 사흘 뒤에 이루어진 면담에서 자신이 구상하는 동양 평화 실현 방도를 말하였다. 통역이 면담 내용을 기록하여 「청취서(聽取書)」(일본어)라고 이름 붙인 것이 남아 있다. 다른 하나는 1910년 3월 18일경 자서전 『안응칠 역사』를 탈고한 뒤 바로 집필하기 시작한 「동양평화론」이다. 그는 집필을 끝낸 뒤 형장의 이슬이 되고자 하였지만, 3월 26일 조기 사형 집행으로 「동양평화론」은 미완의 유고로 남았다.
동아시아의 지식인이면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한문(漢文)으로 집필한 유고 「동양평화론」은 〈서(序)〉, 〈전감(前鑑)〉, 〈현상(現狀)〉, 〈복선(伏線)〉, 〈문답(問答)〉 등 다섯 절로 구상되었는데, 〈서〉와 〈전감〉만 끝냈고, 나머지 세 절에 어떤 내용을 담으려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앞서 이루어진 면담에서 동양 평화를 위해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가 해야 할 일을 언급한 것이 있어서 아쉬운 대로 대강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 밖에 신문(訊問) 기록에도 관련된 것이 있지만 단편적인 내용에 불과하다. 따라서 「청취서」와 「동양평화론」 두 기록은 안중근의 평화사상을 알 수 있는 핵심 기록이다.
「동양평화론」은 먼저 평화 추구의 당위성과 눈앞의 국제관계 형세를 설파하였다. 안중근은 동양이 문(文)만 숭상하다가 구미의 기계문명에 크게 뒤졌는데, 일본은 힘을 모아 빠르게 그것을 수용하여 국력을 키웠고 한주먹에 러시아를 꺾은 것은 놀라운 일이라고 높이 평가하였고, 러시아가 서쪽에서 여러 침략 행위를 했던 만큼 동쪽에 다시 군사기지를 두고 시설을 늘린 것은 한국, 중국 사람에게 의심을 살 만한 일이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래서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을 때, 두 나라 사람들은 10년 전의 큰 원한이 있었지만 이를 덮어두고 일본을 지원하여 그 승리에 기여하였다고 하였다.
안중근은 일본 천황의 러시아에 대한 선전포고 조서에 동양 평화를 위한 전쟁이란 것과 한국 독립을 보장한다는 것을 특별히 밝히고 있어 두 나라 사람들은 일본을 의심하지 않고 도왔다고 당시 상황을 부연 설명하기도 하였다. 이 상황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그는 반대로 두 나라 사람들이 이 전쟁을 지난 원수를 갚는 기회로 이용하려 했다면,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 다른 서양 나라들이 어떻게 하였을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만약 그랬다면 이 나라들은 하나같이 해상에 많은 군함을 띄우고 병력을 동원하여 경쟁적으로 이권을 요구하여 동아시아는 결딴났을 것이 불을 보듯 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러일전쟁에서 두 나라 사람들이 일본을 도운 것은 탓할 일이 아니며, 다만 그렇게 해서 전승국이 된 일본이 미국에서 열린 강화회의에서 패전국 러시아에 배상금을 한 푼도 받지 못하면서, 한국 국권을 빼앗은 것은 동양 평화를 배반하는 불법한 일이라고 규탄하였다.
그리고 안중근은 이로써 일본은 러시아보다 더 심한 침략 국가가 되었으며, 모든 책임은 일본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단언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은 하얼빈에서 일본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고, 담판을 구하는 뤼순에서 진정한 동양 평화의 의견을 제출하니 양식 있는 사람들이 이를 살펴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한마디로 「동양평화론」은 세계 지성을 향한 성명서로써 그 논설은 명쾌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서 미완의 글이지만 당대의 어떤 글보다도 읽는 이의 가슴을 찌른다.
한편 「청취서」에 담긴 동양 평화 방략은 매우 참신하고 선진적이다. 그는 우선 영토는 주인이 바뀔 수 없는 것이므로 일본이 전승 대가로 차지한 다렌과 뤼순을 중국에 돌려주어야 하며, 이곳들은 한국ㆍ중국ㆍ일본 세 나라 동양 평화 실현의 중심지로 삼기를 제안하였다. 또 일본이 그토록 강조하였듯이 서양 백인 국가들이 동양을 위협한다면 세 나라가 공동으로 대처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하였다.
즉, 군사적으로 세 나라 청년들로 구성한 공동 군단을 만들어 뤼순에 본거지를 두는 한편, 구미 자본주의 경제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세 나라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폐를 발행하여 경제공동체를 만들자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은행은 세 나라 인구가 많으니 회원제로 돈을 모아 설립하면 어렵지 않다고 하였다. 또 그는 이 공동화폐제가 성공하면 태국, 인도로까지 확대하자고도 하였다. 이 공동화폐 통용을 통한 지역 경제공동체의 발상은 독특한 것으로, 당대 구미의 어느 지식인도 언급하지 않은 것이며, 유럽연합 구상보다 반세기나 앞서는 것으로, 안중근의 높은 지식수준을 보여준다.
안중근은 동서 고전을 섭렵한 수준 높은 지식인이었다. 안중근은 평소 학문을 부지런히 닦은 지식인으로 교육을 통한 입국(立國)을 도모하다가 러일전쟁으로 국권을 위협받는 상황이 눈앞에 닥치자 연해주 대한의군 지휘관이 되어 독립전쟁에 앞장섰다. 그러던 중에 이토 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 소식을 듣고 특파대 결성에 제일 먼
저 자원하여 대장이 되어 처단에 성공하였다. 법정 투쟁에서 일본인 법관과 간수들이 내심으로 그를 존경하게 된 것도 높은 수준의 지식과 정의감에서 우러나는 그의 변설 때문이었다. 이 책의 간행으로 우리의 영웅 안중근을 ‘아주(亞洲) 제일 의협(義俠)’을 넘어 당대 세계 최고의 지식인 및 평화사상가로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원본: 1910년 경술(庚戌) 2월 대한국인 안중근 뤼순 옥중에서 쓰다
서(序): 합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한다는 것은 만고에 분명한 이치이다. 지금 세계는 동서로 나뉘어 있고, 인종도 달라 서로 경쟁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농업ㆍ상업보다 무기를 더 많이 연구하여 기관총, 비행선, 잠수함 등 새로운 발명품들을 만들었지만, 이는 모두 사람을 다치게 하고 사물을 파괴하는 기계이다. 청년들을 훈련해 전쟁터로 몰아넣고 수많은 생명을 희생양처럼 버리니 피가 냇물을 이루고 살점이 땅에 질펀하게 널리는 일이 매일 그치지 않는다. 살기 바라고 죽기 싫어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거늘 밝은 세상에 이 무슨 모양인가. 말과 생각이 여기에 이르니 뼈가 시리고 심장이 서늘해진다. 근본을 따져보면 예로부터 동양 민족은 학문에만 힘쓰고 제 나라만 조심해 지켰을 뿐, 유럽 땅을 한 치도 침입해 빼앗은 적이 전혀 없음은 오 대륙 사람이나 짐승, 초목까지도 다 아는 일이다.
그런데 유럽 여러 나라는 최근 수백 년 이래 도덕심을 까맣게 잊었다. 경쟁하는 마음을 기르고 무력을 일삼으면서도 조금도 꺼리지 않으니, 그중 러시아가 더욱 심하다. 러시아의 폭력과 잔인함이 서유럽이나 동아시아 어느 곳이든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이 차고 죄가 넘쳐 신과 사람이 분노하였다. 그 까닭에 하늘이 한 번 기회를 주어 동해의 작은 섬나라 일본이 이같이 강대한 나라 러시아를 만주 대륙에서 한주먹으로 때려눕히게 하였다(1904~1905년 러일전쟁을 말한다). 누가 이런 일을 헤아릴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하늘의 뜻에 따르고 땅의 보살핌을 얻은 것으로 인정(人情)에도 어울리는 일이다.
만일 당시 한국과 청 두 나라 사람 모두 전날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을 배척하고 러시아를 도왔다면 일본이 어찌 대승 거둘 것을 예상이나 했겠는가. 그러나 한국과 청 두 나라 사람들은 이같이 행동할 생각도 없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일본 군대를 환영하고 운수, 도로 정비, 정탐 등 힘들고 수고스러운 것을 잊고 힘써 주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시작할 때, 일본 천황은 선전포고 조서에서 “동양 평화를 유지하고 대한 독립을 공고히 한다.”고 했다. 이 같은 대의가 대낮보다 더 밝았기에 한국과 청 사람들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따른 것이 그 이유 중 하나이다. 하물며 일본과 러시아의 다툼은 황인종과 백인종의 경쟁이라 할 수 있으므로 지난날 원수진 마음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도리어 하나의 큰 애종당(愛種黨, 같은 인종끼리 마음을 같이 하는 무리)을 이루었으니, 이것도 인정과 이치에 합당한 또 하나의 이유라 할 수 있다. …중략…
슬프다. 천만뜻밖에도 일본이 크게 승리한 이후 가장 가깝고 가장 친하며, 약하지만 어진 같은 인종 한국을 힘으로 눌러 조약을 정하고, 만주 창춘 이남을 조차(租借)를 빙자하여 점거하였다. 그 때문에 세계 모든 사람의 머릿속에 의심이 구름처럼 홀연히 일어나 일본의 명성과 정대(正大)한 공훈이 하루아침에 뒤집혀, 만행을 일삼는 러시아보다 더 못된 나라로 여기게 되었다. …중략…
지금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침략의 손길을 뻗쳐오고 있는데, 이 환란을 동양 인종이 일치단결해서 힘껏 방어함이 최상의 방법임은 어린아이라도 다 알고 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일본은 같은 인종인 이웃 나라를 강제로 빼앗고 친구의 정을 끊어, 스스로 조개와 도요새가 서로 물고 물리는 형국이 되어 어부를 기다리듯 하는가. 한국과 청 두 나라 사람들의 소망이 완전히 끊어지고 말았다.
만약 일본이 정략을 고치지 않고 이웃나라들을 날로 심하게 핍박한다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같은 인종에게 욕을 당하는 것은 참을 수 없다는 의론이 한국과 청나라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용솟음쳐서 모두가 스스로 백인의 앞잡이가 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게 되면 동양의 수억 황인종 가운데 수많은 뜻있는 이들과 울분에 쌓인 사람들이 수수방관하며 동양 전체가 까맣게 타죽은 참상을 앉아서 기다릴 것이니 그래서야 어찌 되겠는가. 그래서 동양 평화를 위한 의로운 싸움을 하얼빈에서 시작하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 자리는 뤼순구(旅順口)에 정했다. 그리고 동양 평화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니 여러분은 깊이 살펴 주시기 바란다.
전감(前鑑):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동서남북의 6대주 어디를 막론하고 헤아리기에 어려운 것은 대세가 뒤엎어지는 것이고 알 수 없는 것은 인심이 변하는 것이다. …중략… 당시 일본과 러시아 두 나라가 각각 만주로 출병할 때 러시아는 단지 시베리아철도로 팔십 만 군비를 실어 날랐으나, 일본은 바다를 건너 남의 나라(대한제국)를 지나 네댓 군단과 군수품과 군량을 수륙 양면으로 보내 랴오허 일대에 수송했으니 비록 예정한 계획이었다고는 하지만 어찌 위험하지 않았겠는가. 결코 완전한 방책이 아니요, 참으로 마구잡이 싸움이라 할 수밖에 없다. 일본 육군이 잡은 길을 보면 한국의 각 항구와 싱징, 진저우만 등지에 상륙하였으니 사오천 리를 이동하며 겪었을 수륙(水陸)의 괴로움은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이때 일본군이 연전연승은 했지만 여전히 함경도를 벗어나지 못했고, 뤼순구도 아직 격파하지 못했으며, 평톈에서도 이기지 못했다.
만약 한국의 관민이 한 목소리로 일본인이 을미년에 한국 명성황후 민씨를 무고히 시해했으니 그 원수를 이 기회에 갚아야 한다고 사방에 격문을 띄우고 일어났다면, 함경ㆍ평안 양도 사이에 있던 러시아 군대가 예상치 않은 곳에서 오가며 생각지 못한 곳을 공격하여서 일본군과 전후좌우로 충돌하였고, 청 또한 위아래가 협동해 지난날 의화단 때처럼 들고일어나 갑오년(1894년)의 묵은 원수를 갚겠다면서 베이징 일대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허실을 살펴 방비 없는 곳을 공격해 가이핑ㆍ랴오양 방면으로 유격 기습을 벌이며 싸우고 지켰다면, 일본군은 남북이 분열되고 앞뒤로 적을 맞아 중심과 주변 모두 곤경에 처하는 어려움을 면하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이 지경에 이르렀다면 일본군 세력이 머리와 꼬리가 닿지 않아 군수품과 군량미를 이어댈 방법 찾기가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중략… 이때 한국과 청 두 나라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약장(約章)을 준수하고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아 일본이 만주 땅 위에서 위대한 공훈을 세우게 했다. 이를 보면 한국과 청 두 나라 인사의 개명 정도와 동양 평화를 희망하는 정신을 충분히 알 수가 있다. 그러니 동양의 뜻있는 인사들의 깊은 생각과 헤아림은 훗날의 모범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러일전쟁이 끝날 무렵, 강화조약 성립을 전후해서 한국과 청 두 나라의 뜻있는 인사들의 수많은 소망이 잘려버렸다. …중략…
슬프다. 그러므로 자연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인 이웃 나라를 해치는 자(일본을 가리킴)는 끝내 따돌림을 받아 혼자가 되는 재앙을 결코 피하지 못할 것이다(안중근 의사는 여기까지 쓰다가 나머지는 집필하지 못한 채 1910년 3월 26일 사형 당했다).
「청취서」원본: 다음과 같이 기록하다. 메이지 43년(1910년) 2월 17일 관동도독부 고등법원 서기 다케우치 시즈에(竹內靜衛) [피고인 안중근은 지방법원 판결에 대한 항소 여부를 정하기 전에 고등법원장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형무소장을 통해 요청했으므로, 고등법원장은 촉탁 통역인 소노키 스에키에게 통역을 맡기고 그를 만나자 피고는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 나의 살인 피고사건에 대한 지방법원 판결에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어, 먼저 이 부분부터 말하겠다. 나는 원래 이토 히로부미를 만난 적이 없다. 그런데도 그를 죽인 것은 나라를 위해서 한 일이었으며 결코 한 개인 자격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본 건은 단지 한 살인범을 심리하는 문제가 되어선 안 된다. 따라서 이 재판은 합당하지 않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 …중략…
- 내가 한국의 의병중장으로서 일한 것은 일본인도 인정한다. 일본 군대 및 경찰관도 안응칠(安?七, 안중근의 자)이라는 자가 함경북도와 러시아 경내에서 한국을 위해 일한 것을 인정하고 있다. 이번 행위도 그 자격으로 행한 것이니 포로로 취급받아야 한다. 따라서 국제공법이나 만국공법을 적용해야 하니 뤼순 지방법원에서 심리하여 판결을 내리는 것은 매우 부당한 일이며, 한일협약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가령 내가 이번 재판에 승복하여도, 각 나라는 일본을 야만국이라며 비웃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도 이번 판결에 불복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 여러 번 주장했지만 러일전쟁 개전 당시 일본 황제는 선전 조서에 한국 독립을 강고하게 한다고 적었으며, 또한 한일협약에도 같은 내용이 쓰여 있다. 그런데도 이토 히로부미는 한국 군부를 폐지하는 동시에 일본이 사법권을 이어받게 하더니 행정권까지도 탈취하려고 한다. 이는 ‘한국 독립’ 운운한 것과는 상반되며, 한국 황실의 존엄을 유지한다는 것도 말만 그렇지 속은 그렇지 않다. 러시아와 일본 전역에서 일본 청년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한일협약이 성립될 때도 수많은 인명을 잃었다. 이는 모두 이토의 정책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이러한 악당을 제거했는데 왜 지나치게 무거운 처벌을 받아야 하는가? 마치 큰 도적을 용서하고 좀도둑을 처벌하듯 참으로 부당하다.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