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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의사 우종영의 바림

우종영 지음 | 자연과생태
나무의사 우종영의 바림



우종영 지음

자연과생태 / 2018년 11월 / 424쪽 / 18,000원





1 편지



신이 깃든 나무



인류보다 3억 년 먼저 생겨 세계를 떠받치는 존재: “나의 어머니는 돌이었다.” 이 얼마나 간결한 문장인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낸 식물의 위대함을 한마디로 압축해 툭 던진다. 최초의 땅 마그마로 이루어진 용암대지는 바람에 삭박되고 추위와 더위에 갈라지며 물에 깎인다. 바위는 갈라져 자갈이 되고, 자갈은 부서져 흙이 된다. 흙은 나무 몸속으로 들어가 몸을 이루고 하늘과 땅은 비로소 나무에 의해 단단히 결속하게 된다. “그 옛날 인류가 아직 바위에 갇혀 있을 때 뿌리는 심원의 물을 끌어올리고, 곧게 뻗은 줄기는 천상과 지하의 깊은 곳을 연결”했다.

나무가 태어난 뒤 인류가 출현하기까지는 대략 3억 년의 간극이 있었다. 우리 몸을 이루는 원소들이 한때 우주 먼지였듯이 바위 속에 갇혀 옹기종기 있었다는 것은 그리 먼 이야기가 아니다. 나무의 긴 시간으로는 엊그제 일쯤으로 여겨질 것이다. 시베리아의 알타이인은 지구 중심에 가장 키가 큰 전나무 한 그루가 솟아 있으며 그 가지들은 천상의 수호신이 사는 곳까지 뻗어 있다고 믿었다. 자크 브로스의 『나무의 신화』에 따르면 타타르인은 천상의 나무와 똑같은 나무가 저승에도 존재한다고 믿었다. 한편 동시베리아의 골디인은 세 그루 우주목이 있는데 그중 천상으로 뻗은 나뭇가지에는 부활을 기다리는 죽은 자들의 영혼이 새처럼 앉아 있다고 믿었다.

나무가 자라면서 많은 생명을 먹여 살리기 시작했다. 갓 직립보행을 시작한 인류에게 나무는 한없이 고마운 존재였을 것이다. 온갖 맹수에게서 몸을 피할 수 있는 공간과 잠자리를 제공했으며 열매를 주었다. 열매를 먹음으로써 인류는 나무와 돌과 근친관계를 형성했다. 인류의 조상은 나무에게 몸을 의탁하고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도 고하며 신탁을 기다리기도 했다. 자크 브로스는 “옛날 사람들은 우주가 하나의 중심축에 꿰인 세 영역(천상, 지상, 지하)으로 이루어졌다고 믿었으며, 중심축에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영역 간 왕래가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심축이 일종의 통로 역할을 해 신들이 지상으로 내려오고 죽은 자들이 지하세계로 내려가는 관문이 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중심’ 혹은 ‘통로’의 상징은 옛날 사람들의 사유체계 속에서 거룩한 공간, 즉 성스러움이 현현한 곳이라는 장소 개념이 된다. 성경에서도 야곱이 광야에서 돌베개를 베고 잠을 청하는데, 꿈속에서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닿는 사다리가 나타나고 천사들이 오르내리는 것을 본다. 그때 바로 곁에서 하느님 음성이 들려온다. 여기서 사다리는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을 상징한다. 인간은 나무를 사다리 삼아 천상으로 오르려 하고 신은 나무를 타고 강림하므로 나무는 삼계에 걸친 중재자가 된다.

설화와 신화의 시대를 관통하다: “그러던 어느 날 신과 인간의 전쟁이 시작되었고, 인간이 신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신으로부터 이성을 되돌려 받은 인류는 세상을 한꺼번에 바꾸고자 했다. 무질서해 보이는 자연에는 질서를 부여했고, 원시는 야만으로 규정했다. 곳곳에 널린 귀신과 도깨비는 저잣거리 에서 놀림을 당했으며, 신이 깃들었던 나무는 베이거나 멸시당하기 일쑤였다. 요즘에는 나무에 대한 전설을 이야기하면 비논리이며 미신이라고 꺼리는 경향이 있다. 이야기가 탄생하고 2만 년이라는 문자 없는 시대를 통과하며 많은 설화가 만들어졌다. 고대인에게 설화란 세상을 이해하는 창이었으며 규율이고 생활 지침서였다. 기댈 곳 없는 사람들은 나무 품으로 찾아들었다. 나무는 아이가 없는 집에는 아이를 점지해 주고, 괴롭히는 귀신을 퇴치하고, 농사의 풍흉을 점쳐 주며, 나라를 지켜 주고, 변고를 예고해 주는 광역 멘토였다.

그런 만큼 나무와 관련된 많은 설화가 전해진다. 『한국 구비문학의 이해』에서는 설화에 대해 “설화가 지향하는 형태는 대체로 신화, 전설, 민담 세 갈래가 있다”면서 사건과 캐릭터 시공간을 기준으로 구분한다. 신화는 신적인 존재인 주인공이 이룬 창조적 행위를 담은 이야기인데 비해 전설은 다소 특별한 상황에 처한 인간에게 실제로 일어난 예기치 않은 사건을 전하는 이야기이고, 민담은 일상적인 인간의 허구적인 운명 극복담이다. 그리고 아득한 태초 또는 신성시되는 시공간이 무대인 신화나 구체적으로 제한된 시간과 장소가 배경인 전설에 비해서 민담은 뚜렷한 시간과 장소가 없다. ‘옛날 옛적 어느 곳’이 민담의 시공간이다.

설화는 우리말로 이야기란 뜻으로, 이야기판에서 구연되는 언어예술이다. 그렇다고 이야기판에서 구연되는 모든 이야기가 설화가 되지는 않는다. 설화는 거짓말이기 때문에 실제 일어났던 사건이나 경험담은 설화 영역일 수 없다.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서사구조를 가진 거짓말, 곧 상상력으로 구성한 이야기로서 문자가 아니라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신화는 신에 관한 내용이나 자연현상, 사회현상의 기원과 질서를 담으며, 공동체에 기반을 두고 그것을 신성시하는 집단의 이야기다. 문중의 시조 이야기는 문중 내에서는 신화지만 타 문중에게는 전설이 되는 이유다. 신화는 주변 세계에 대한 세밀한 관찰을 통해 만들어진다. 신화 구조 속에는 동물이나 식물 생태 분류 축적이 감추어져 있다. 인류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현상이나 대상에서 패턴을 인식하고 그것을 구체화하고 전승했기 때문이다. 신화에는 현대과학에도 뒤지지 않는 과학 정신이 깃들어 있으므로 신화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는 것이며 인문학의 출발이다.

숲의 왕



식물과 동물의 차이는 바둑과 장기의 차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장수의 조건으로 몸집의 크기와 재생능력을 꼽았지만, 나무는 동물과 달리 모듈형 생장방식을 따르기 때문에 어찌 보면 불사의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식물과 동물의 차이는 바둑과 장기를 연상하면 쉽게 이해된다. 장기는 군사가 아무리 많다 해도 왕이 죽으면 게임이 끝난다. 왕을 대신해서 차나 포가 궁에 들어앉아 전쟁을 지휘할 수 없는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바둑은 자기 집이 상대의 집보다 많으면 승리하는 방식이다. 바둑이 얼마나 식물적인가. 집만 있으면 되는 삶, 나무는 자기 몸을 집으로 삼고 스스로 집을 키우며 사는 존재다. 모듈이란 서로 독립적이고 닫혀 있으며 영역에 따라 다른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나무는 뿌리와 줄기, 가지로 이루어져 있고 서로 다른 역할을 하지만 유사시 서로 역할을 대신할 수 있도록 분화가 이루어진다. 마치 공장에서 조립되는 조립식 주택 단위 같아서 서로 닫혀 있으나 기능적으로 소통하며 목적을 이룬다.

나무의 몸은 수많은 모듈로 구성되었기에 움직일 수 없으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다. 수많은 초식동물이 호시탐탐 노리며, 애벌레도 주기적으로 와서 잎을 먹어 치운다. 그때마다 나무는 새로운 싹을 틔우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야생동물은 다리 하나만 다쳐도 죽음에 이르는 것을 볼 때 나무의 모듈성은 모든 생명의 필멸이란 한계를 불사의 경계까지 밀어붙인다.

철학자 헤겔은 나무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나무는 줄기 하나에서 가지가 여러 개 뻗는다. 하지만 그 가지들은 각각 독립적이다.” 나무의 모듈 형태는 나이를 먹더라도 본성을 잃지 않는다.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브리슬콘소나무의 어린 눈은 다른 정상 환경에서 자란 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감자의 싹과도 다르지 않다. 단지 차이점은 눈이 지하에 있느냐, 허공 위 가지에 달려 있느냐 뿐이다. 하늘을 향해 진군할 것인가, 땅속에서 내 일을 도모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들은 둘 다 새로 태어난 클론이기 때문에 노화 프로그램에 동참하지 않았다. 각각의 모듈에 늙지 않은 클론들을 장착한 브리슬콘소나무, 울릉도의 향나무에게 흘러 간 세월은 집이라는 형태로 남아 있다.

한편 소식(小食)은 느린 생장을 뜻한다. 못 먹고 잘 자랄 수는 없다. 현대과학이 밝힌 정보들에 따르면 느린 삶은 장수에 기여한다. 몸집이 큰 동물일수록 세포는 연료를 덜 소비하고 물질대사 속도도 느리다. 실험에 의하면, 물질대사 속도를 줄이려고 동물에게 먹이를 조금씩만 주자 수명이 늘어났다고 한다. 나무도 분재로 키울 때 더 오래 산다는 보고가 있다. 오래 사는 대가가 가혹하기는 하다. 울릉 도 향나무나 브리슬콘소나무 역시 느리게 살았다. 수천 년을 살았어도 키가 10미터를 넘지 않는다. 여기서 생기는 또 하나의 궁금증은 그렇게 느리게 자라면 주변 나무들한테 경쟁에서 밀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다. 하지만 그럴 염려는 없다. 그런 환경에서 버틸 만한 식물이란 이끼를 비롯한 자그마한 풀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오히려 해마다 유기물을 남기므로 도움이 된다.

나무가 오랜 세월을 살려면 식물을 죽이는 사건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필멸의 운명을 뚫고 살아남은 나무를 조사해 보면 공통점이 있다. 우선 보호장치가 많아야 한다. 첫째는 추위와 건조, 산불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껍질이 두꺼워야 한다. 용문산 천왕목은 절이 전소되는 화마에서도 살아남았다. 둘째는 병이나 충해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절해고도 해안단애나 고산준령에 사는 나무가 느리게 자라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비교적 병충해를 덜 받기 때문이며, 병충이 싫어할 물질이나 독특한 향을 지니고 있어서다. 잔병치레 없이 산다는 것 또한 얼마나 큰 축복인가. 모든 이의 바람이지만 그러려면 어찌해야 하는지 우디 앨런의 말이 다시 떠오른다. “100세까지 살려면 100세까지 살아서 하고 싶은 것을 하지 않으면 된다.” 오래 산다는 것은 활발한 대사활동보다는 오랜 휴면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2 예찬



뿌리 깊은 나무



나무뿌리가 깊은 원인의 8할은 바람이다. 바람은 뿌리 없는 것들을 흩어 버리기도 하지만 부초 같은 삶에 깊은 생명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완도에서 제주도로 이어지는 길은 바람길이다. 전남 해남에서 완도대교를 건너 수목원 가는 길에는 기골이 장대한 상황봉이 버티고 있다. 그곳으로부터 백운봉을 향해 흘러내린 능선이 바다를 쓸어 담듯 그물처럼 펼쳐진다. 수목원 입구에 군락을 이룬 동백나무는 해남에서 불어오는 옹골찬 바닷바람에 갓 잡아 올린 물고기 비늘처럼 반짝인다. 잎이 햇빛에 반짝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조엽수림(照葉樹林). 그곳 동백나무들은 바람에 단련되어 잎사귀가 유난히 두껍고 뿌리는 깊다. 탐방을 끝내고 수목원을 나서니 바람이 눈보라를 몰고 와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정기 노선버스도 없고 읍내까지 걸어 나가기에는 너무 멀기에 민박집을 찾기로 했다. 민박집 간판은 여기저기 있으나 한겨울이라 문 연 곳이 없었다. 마침 새로 짓고 있는 집에 주인이 있었다.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 않은 곳이었으나 근처에는 잘 만한 곳이 없다는 걸 아는 주인장은 마음씨 좋게 객을 들인다.

“누추하지만 해거름에 어디 갈 곳도 마땅찮으니 방을 치워드리겠습니다.”



정중한 말씨다. 방은 공사 중이라 장판도 제대로 깔려 있지 않고 어수선했지만 주인 부부의 숙달된 일머리로 금세 말끔해졌다.

“찬은 없지만 저희랑 같이 저녁식사를 하시지요.”



그러잖아도 춥고 허기까지 들이닥쳐 염치없지만 부탁할 참이었다. 남도 인심은 나그네 속마음까지도 헤아려 준다. 가자미조림에 배추겉절이가 상 위에 푸짐하게 올라오고, 명절 때 담갔다면서 맑은 술을 내놓는다.

“여기가 고향이신가요?”

“저희 아버님 고향입니다.”

“그럼 고향이나 마찬가지겠군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곳에 대한 기억이 없어요.”“무슨 말씀이신지…….”

“어렸을 때 일들이 기억에 없어요.”



마치 드라마처럼 특별한 사연이 있나 보다. 호기심이 발동한 나는 무릎을 당겨 앉으며 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다. 주인의 이야기보따리를 바짝 조여 다 털어놓게 할 심산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길었다. 그 긴 이야기는 이 시대의 아픔과 단단하게 결합되어 있어 쉽게 잊히지 않았다.

“바람이 분다. 이제 살려고 애써야 한다.”: 1970년대 초반 그의 아버님은 사고로 병석에 누워 있었고 어머님 혼자 생계를 꾸려 나가셨다. 줄줄이 있는 어린 동생들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 장남인 그는 살림에 보탬이 되려고 이 일 저 일 찾아다녀야 했다. 하지만 어린 그에게 제대로 보수가 주어질 리 없었고, 야위어 가는 동생들 보기가 민망해 결심한 것이 월남전 자원 입대였다. 한 입 덜 수 있는 데다 월급도 준다기에 솔깃했다. 더구나 혹여 전사할 경우 부모님에게 연금이 나온다는 것에 혹했다고 한다. 그때는 이미 전쟁 막바지였다. 사이공만 함락되지 않았을 뿐 전선이 따로 없었다. 언제 박격 포탄이 머리 위에 떨어질 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말단 보병부대에 배치되었다. 매일매일 이어지는 전투에 집에 살아 돌아가리라는 확신이 사라질 즈음, 같이 배치된 전우와 친해지게 되었다.

“너 고향은 어디고?”

“난 전라도랑께.”

“먼 데서 왔구나, 난 포항.”

“넌 우째 자원했냐? 난 여기서 죽으련다. 그래야 우리 동생들이 산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죽어서 효도하는 게 효도가?”



대화도 잠시뿐, 포탄이 날아오고 기관총은 불을 뿜고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들렸다. 그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 중에 하나라도 살아서 돌아가면 살아남은 쪽이 상대방 집에 찾아가 대신 아들 노릇을 해 주기로 약속했다. 다음 순간, 서로의 고향을 이야기할 새도 없이 벙커 안으로 포탄이 떨어지고 그 후로는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다.

여기까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연신 쯧쯧 하며 이야기를 듣다가 “그런데 어떻게 살아 돌아왔어요?”라고 물었다. 사연인즉, 그의 몸은 전신에 파편이 박히고 갈기갈기 찢어졌지만 목숨은 붙어 있었기에 야전병원으로 후송되었고, 얼마 뒤 본국으로 후송되어서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았다. 2년 뒤 다행히 의식은 돌아왔지만 과거 기억은 몽땅 사라져 뇌 속은 텅 빈 상태가 되었다. 그 뒤 새로운 기억을 쌓아가며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중년신사가 찾아왔다.

“야! 김 일병 아이가?”

“누구시더라.”



월남에서 돌아온 김 일병과 이 일병. 하지만 김 일병은 퇴원 이후의 기억만 있을 뿐 이전의 기억이 없으니 이야기는 이 일병 말로 채워진다.

그는 그때 이 집 주인장, 김 일병이 죽은 줄 알았단다. 그래서 김 일병과 약속한 대로 그의 부모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제대하고 돌아와 보니 눈앞의 생은 먹고 살기 바빴다. 약속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고, 그는 시간 나는 대로 백방으로 수소문해 보았으나 생사조차 불분명해 거의 포기상태로 지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원호처에 갔다가 김 일병이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사지에서 살아온 두 전우는 만나게 되었고, 다시 만나던 날 밤 두 사내는 서로 부둥켜안고 울다가 웃으며 밤을 꼬박 새웠단다.

기막힌 사연에 잠은 달아나고 좁은 골짜기를 통과하려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를 들어야 했다. 김 일병은 젊은 시절, 울타리 없는 광야에서 모진 바람을 맞고 쓰러졌다. 과거는 지워졌으나 쓰러진 자리에서 일어나 뿌리를 내리며 산다. 인생은 평생 좀 더 깊은 곳으로 뿌리를 내리며 살아가는 외딴 나무와 같다. 생애 전반에 바람이 불지 않는 적은 없다. “바람이 분다. 이젠 살려고 애써야 한다”는 폴 발레리의 시가 귓가를 맴돌며 밤이 깊어간다.

아름다운 나무



자작나무 숲에는 특별한 아름다움이 있다: 자작나무 하면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의 두꺼운 장편소설과 영화 <닥터 지바고>에서 차이코프스키의 장중한 음악을 배경으로 설원을 달리던 마차 그리고 그 배경으로 펼쳐진 나무들이 떠오른다. 북한에는 개마고원 같은 심산유곡 원시림에 살고 있다 하며 남한에서는 자생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늘 대하는 나무처럼 친숙하다. 나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려면 나무 밑에 누워서 하늘을 볼 일이다. 자작나무 아래는 반그늘이다.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도 빛을 다 가리는 법이 없다. 잎자루가 길어 작은 잎들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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