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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

제임스 S. 게일 지음 | 책비
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1888~1897)



제임스 S. 게일 지음

책비 / 2018년 11월 / 340쪽 / 18,000원





첫인상 - 그 미지의 세계



코리아는 일본이 중국으로 진출할 때 고속도로가 되어주는 반도국이며, 인구는 1,200만 명쯤으로 추정된다. 면적은 유타주와 비슷하고, 땅의 형상은 끝없는 산의 연속이라서 여행할 때면 항상 그 너머에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기대하게 되는 그런 곳이다. 조선인들은 이 산들을 용(龍)이라 여기며 그곳에 조상들의 묘를 쓰는데, 이 묏자리에 따라 자손들이 사는 땅에도 길흉의 기운이 미친다고 믿는다.

마침내 우리는 환상의 세계처럼 신비로움에 휩싸여 있는 그곳, 서울에 도착했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서울은 동방에서 가장 그림 같은 곳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사실 사람들을 벌벌 떨게 할 것투성이였다. 잔인한 인종이지는 않을까 하고 상상해오던 것과는 완전히 반대로 사람들은 어진 품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 동방 전체에 만연한 소름 끼치는 관습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온 사방에 시체가 널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슬픔 속에서도 예를 갖추어 시신을 매장하고, 고인의 부활과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을 기원한다. 하지만 조선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은 시신을 자리에 둘둘 말아 그대로 익어 썩어가도록 햇볕 아래에다 방치한다. (참고: 저자가 묘사한 시신을 바로 매장하지 않는 우리네 풍경은 초분일 수도 있고, 조선시대에 일반적으로 임종과 매장까지의 기간이 길어서일 수도 있다.) 나는 온 사방에 시체가 널린, 사람을 정말 미치게 만드는 이 나라를 당장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었을까? 나는 점차 다른 측면을 보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풍습은 그들이 숭배하는 유교문화의 일부여서 어쩔 수 없는 것일 뿐, 이들도 나만큼이나 이런 것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편 1889년 3월, 나는 조선 땅 안으로 첫 모험을 떠나보기로 했다. 나는 믿을 만한 조선인에게 70달러를 쥐여 보내며 황해도의 중심 도시인 해주에 집을 하나 사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3주 뒤, 그가 겁에 질려서는 돈을 도로 가지고 돌아온 것이 아닌가!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가 ‘야만인’의 첩자라는 소문을 들은 순박한 해주 사람들이 마을에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곳의 순수한 사람들이 이 사태를 경계하고 있었지만, 나는 비록 내 몸 하나 누일 집 한 칸 없더라도 그곳에 가야만 한다고 느꼈다. 그때 누군가 정직한 사람이라며 해주에서 좀 떨어진 Chang-yon(장연군)에 사는 안 씨를 소개시켜 주었는데, 나는 먼저 그에게 서신을 띄우고는 친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 말 두 마리에 마부 하나, 포졸 한 명, 시중 들 소년 한 명과 함께 해주로 향했다.

여행 중 나와 동행했던 포졸은 특유의 빠른 걸음으로 내 조랑말 앞에서 뛰듯이 가곤 했는데, 길에서 사람들을 마주치면 사람들에게 “길을 비켜라,” 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고는 번개처럼 그들을 후려갈겼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처참하게 두드려 맞고 차이면서도 어떤 경우에도 참고 복종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불러서 당장 이런 짓을 그만 하라고 이야기한 뒤, 앞으로 권력을 행사할 때는 반드시 내 허락을 구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자기 방식은 조선의 좋은 풍습이라고 설명하면서 내가 나라 곳곳을 행차할 때 그에 걸맞은 권위를 갖추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우러러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한 고을의 포졸들이 떠나가는 즉시, 다음 고을 포졸들이 나를 경호했다. 그렇지 않아도 내 통행증이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끌어 모으고 있는 상황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나에게 의식적으로 자세를 낮추는 것을 겪으려니, 이 땅에서의 내 첫 여행은 참으로 고역이었다. 게다가 나는 조선의 풍습에 무지했기 때문에 그들이 예를 표할 때 그에 걸맞게 응대하지 못한다는 점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나는 2주 동안 해주에 머무르는 동안 여러 번 해주 목사를 알현했다. 그는 불안증이 확실해 보일 정도로 안절부절못하는 사람이었는데, 내 이름, 나이, 결혼 여부를 비롯해서 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왜 오게 됐는지 등등을 물었다. 또 그는 나의 조국을 궁금해 했고, 내가 ‘미국’이라고 대답했을 때 그는 창문 틈으로 엿보고 있던 부하 관리들에게 미국이란 나라가 이 세상 어디쯤 붙어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당연히 아무도 없었고, 목사는 의심에 차서 머리를 흔들 뿐이었다.

보름간의 유람은 해주의 특성을 파악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고, 조선의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번성했던 지난 세월을 떠올리게 했다. 성곽은 허물어져 있었고, 초막은 진흙과 작대기를 쌓아 올린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누추함 속에서도, 유생들은 한 점의 얼룩도 없는 비단도포를 입고 있었다. 내가 사귀었던 다른 조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여기서 만난 사람들도 모두 똑똑했다. 정말 신기했던 것은 이렇게 낙후된 문명 수준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찌 이토록 현명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순박해 보이는 시골사람 하나가 갑작스레 찾아와 자기가 안 씨라며 곧바로 자신의 집인 장연으로 떠나자고 했고, 다음 날 나는 두 명의 포졸을 앞세우고 조랑말에 올라 길을 떠났다. 길을 가는 동안 많은 사건이 일어났는데, 해주 목사가 억지로 붙여준 이 포졸들의 목소리는 멀리까지 쩌렁쩌렁 울려 퍼졌고, 운 없게도 자신들이 제왕의 행차 길에 있다는 걸 알게 된 사람들은 혼비백산 도망치느라 난리였다. 제발 그러지 좀 말라고 수없이 타일러 봤지만 헛수고였다. 결국 그들에게 이제 그만 가보라고 했다. 포졸들은 당혹스러워했고, 애꾸눈 포졸은 자기가 나를 더 잘 모셨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라며 끝내 울음까지 터뜨리고 말았다. 이별은 슬펐지만, 우리는 결국 그렇게 헤어졌다. 안 씨가 사는 마을에 당도했을 때는 거의 열 시경이었는데, 서둘러 들어간 방구석에서 호롱불과 불빛이 드러낸 흙벽, 흙 천장, 흙바닥,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덮고 있던 담배 냄새. 혹시 이곳이 고대 설화 속 저승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그 여인숙은 아닐까? 나는 상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그곳에 머물렀던 3개월 동안 내 삶은 아주 단조로웠다. 나를 찾아오는 손님은 항상 있었는데, 그들은 꼭두새벽부터 와서는 극동지역을 찾아온 어떤 여행자에게라도 상관없이 던져댔을 질문의 홍수 속으로 나를 몰아넣었다. 성이 뭐냐, 어디 사냐, 이곳까지 올 때 별 일 없었냐, 양친은 살아 계시냐, 몇 살이냐, 형제는 몇이냐, 자식은 있냐, 왜 여기에 왔냐, 머리에 눈알이 하나만 달린 사람들이 어디에 사는지 혹시 아냐, 여자들만 산다는 나라는 어디에 붙어 있냐, 돈은 얼마나 버냐, 이빨이나 눈알을 뽑았다 넣었다 할 수 있냐, 만병통치약을 가지고 있냐 등등 끝이 없었다.

잠은 온돌바닥에서 잤는데, 이 딱딱한 바닥과 나 사이에는 요 하나만 있었다. 이 무렵 자주 꿈을 꿨는데, 내 머리를 받치고 있는 목침이 구천을 떠도는 귀신들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인지 꿈속에서 헤매지 않은 날이 거의 없었다. 음식은 뭐, 어느 정도는 견딜 만했다. 밥과 소금물에 절여놓은 풀(짠지 혹은 장아찌)뿐이었는데, 본 적은 없었지만 안 씨 부인이 챙겨주는 날이면 가끔 달걀을 먹기도 했다. 이렇게 거의 세 달이 흘러갔고, 이제 나는 내일 아침이면 황해 뱃길을 통해 서울로 돌아가기로 했다. 우리를 데리고 황해 바닷길을 남쪽으로 300킬로미터나 헤쳐 나가야 할 배가 모래톱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동양 사람들의 작별 인사는 정말 감동스러운 것이었다. 흰옷을 입고 둔치에 모여 있던 이 사람들은, 삶의 어느 순간 자신들 속에서 함께 살다 간 첫 번째 서양인에게 깊이 허리 숙여 인사했다. 나는 어색해서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따뜻한 마음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잠시 뒤 나는 배에 올랐고, 배는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아갔다. 내가 탔던 배는 서양의 배와 달랐는데, 마치 하늘을 집어삼킬 듯 엄청나게 큰 돛대를 달고 있었다. 단 하나, 그래도 날 안심시켰던 것은 고대의 뱃사람이 그대로 환생한 것 같았던 뱃사공, 키를 잡고 있던 노인이었다. 배는 폭 2.4미터, 길이 6미터밖에 되지 않았지만, 세 명의 뱃사공이 더 있었고 여섯 명의 조선인 승객이 타고 있었다.

얼마 후, 배를 바다로 밀어주던 바람이 갑자기 잦아들었고, 우리는 출발할 때 해변에서 어렴풋이 보이던 어떤 섬 근처에 발이 묶이고 말았다. 지금으로선 한 쪽에 배를 대고 다음 날 아침 밀물이 들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우리가 접안하려던 곳은 만조 시 물이 들어오는 해변 바로 위에 일곱 채의 초가가 들어앉은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바로 앞에는 늘 그렇듯 담뱃대를 빼어 물고 흰옷을 입은 조선 사람들이 이 배는 대체 뭘 싣고 가는 중인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그중 우두머리는 얼마 전 해주에서 만난 적이 있는 김 씨였는데, 고기잡이를 위해 집을 이곳으로 옮겼던 터였다.

오후에는 횃불을 들고 동굴을 탐험하며 시간을 보냈는데, 조선 사람들은 내가 권총을 쏠 때 땅 밑에서 울리는 총성을 아주 즐거워했다. 날이 저물자, 그물을 거두러 나가는데 함께 가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이 그물은 해변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바다에 나무 기둥을 박아 설치했다가, 하루 두 번 썰물 때 거두는 것이었다. 우리는 곧 어살을 세워 둔 곳에 도착해서 기둥을 받치는 줄들 사이를 지나 그물을 당기기 시작했다. 잡힌 것 중 제일 좋은 놈들은 도다리나 가자미였다. 돌아오는 길, 나는 뱃사람들에게 노래를 청했고 그들은 제대로 된 조선 창으로 화답했다. 한 사람이 목청을 떨며 길게 선창을 뽑으면 천둥소리 같은 합창이 뒤따랐는데, 박자가 노 젓는 속도와 딱 맞아떨어졌다.

다음 날 아침 바람도 좋고 조류도 좋았다. 배는 곧 물위를 미끄러지듯 날았고, 그렇게 흰옷을 입은 마음 따뜻한 사람 김 씨와 그가 사는 섬을 뒤로한 채 우리를 먼 바다로 데리고 갔다. 오후 다섯 시 경이 되자 우리가 떠나온 해안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Teungsan(등산곶)도 근처였다. 우리는 이곳에 닻을 내렸다. 고등군관인 Chomsa(첨사)가 이 섬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인터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안 씨를 데리고 해안으로 내려갔다. 첨사는 따뜻한 양반이었다. 저녁을 함께 먹자고 나를 붙잡고는 갑오징어국과 꿀물로 아주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다음 날 아침, 나는 북소리에 눈을 떴다. 갑판에 올라가서 살펴보니, 만을 따라 늘어서 정박한 모든 배 위에 뱃사공들이 한 명씩 올라가 있었고, 마치 여기에 자기 인생이라도 걸린 듯 북채 두 개로 열심히 북을 두드려대고 있었다. 나는 이 북 치기 행사가 대체 뭘 의미하는 건지 안 씨를 깨워 물었다. “아무 의미도 없어요.” 안 씨의 특이한 성격을 아는지, 우리 배의 일행이던 서 씨가 가만히 지켜보다가 본인이 설명해 주겠다고 나섰다. 이 북 치기는 조선 뱃사람들의 전통인데, 날씨가 험할 것 같으면 폭풍을 일으키는 신에게 기도를 하면서 북을 울려 바다를 잠잠하게 해주기를, 그래서 안전하게 바다에 나갈 수 있기를 비는 것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듣기 전까진 전혀 상상도 못한 이유였다.

기도를 드려야 할 시간인 것은 분명했다. 태풍이 몰려오고 있는지 안개가 두텁게 덮쳐오는 바람에 그날 아침 우리는 겨우 두 시간여 바다에 나갈 수 있었을 뿐이었다.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배가 파도 속으로 처박힐 때마다 마치 바다가 철갑이라도 되는 듯 큰 소리가 울려 퍼졌고, 돛대를 구부려 연결했던 가운데 이음새는 불길하게도 갈라져 버렸다. 이렇게 폭풍은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 시간여를 매 순간 침몰하거나 암초에 처박힐 것처럼 나아갔다.

하지만 어느 순간, 놀랍게도 우리는 잠잠한 바다 위에 떠 있었다. 바람이 잦아든 것도 아니었다. 흩어지는 안개 사이로 살펴보니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을 섬 하나가 막고 있었고, 우리는 그 뒤편 물이 잠잠해진 곳에 들어와 있었다. 나는 이런 예상치도 못한 피난처를 찾아낸 것에 대해서 혹시 좀 놀란 빛이 있지 않을까 하고 늙은 사공을 쳐다봤지만, 그의 낯빛엔 어떠한 변화도 없었다. 그는 마치 몇 시간 동안 정확히 이 장소에 다다르기 위해 노력했고 그것을 딱 이루어낸 사람 같았다.

우리는 아주 황량해 보이는 어느 마을 앞에 닻을 내렸다. 하룻밤과 낮이 지났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36시간이나 지났는데도 우리는 아직 썰물이 빠져나간 갯벌 위에 꼼짝도 못하고 붙들려 왔었다. 시간은 천천히 갔다. 그렇게 마침내 닷새째 되던 날 저녁, 드디어 날씨가 좋아졌다. 배를 힘껏 밀어주는 바람과 늙은 사공의 지휘 아래 우리는 다시 한 번 바다로 나갔다. 그날 밤 우리는 멋진 항해를 해냈고, 아침에는 동쪽으로 경기도의 산들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해 질 무렵, 우리는 영국, 미국 깃발을 펄럭이고 있는 제물포 외국인 촌을 발견했다.

해안에 접안하던 그때, 나는 원래 요금보다 훨씬 더 쳐서 선원 한 사람당 열두 냥 오 푼씩, 그리고 우리의 늙은 털보 선장에게는 스물닷 냥을 주었다. 선장은 깊은 감동을 받은 듯했다. 그는 이 항해를 나와 함께한 것이 매우 자랑스럽다고 하면서, 자기가 배의 키를 잡고 있는 한 나를 절대 잊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잠시 뒤 배는 다시 출항했고, 곧 물위를 덮은 안개가 모든 것을 감췄다. 이것이 이 고대 뱃사공과의 마지막이었다. 안 씨도, 또 안 씨의 그 괴상한 성격도, 그렇게 떠나갔다.



빈곤에서 풍족함까지 - 누더기 너머 위대한 인성과의 조우



살을 에는 겨울날이었다. 나는 조선을 동서로 나누는 이 산맥에 다다르기까지 말을 타고 평야 지대를 약 60킬로미터 달려온 터였다. 이건 2주간의 여행 중 일부였는데, 여행 기간 동안 하반신이 눈 속에 파묻혀 나는 동상에 걸렸고, 무엇보다 눈보라를 헤치고 길을 내며 280리나 되는 길을 나아가야 했다. 함께 가는 다섯 명의 조선 사람들과 나는 말없이 그저 터벅터벅 걷기만 했다. 골짜기 너머 마을에서 몸 녹일 방 하나 구할 수 있기를 바라며. 조선의 초가 중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하면 고약한 냄새만 나는 집이었다. 가장 나쁜 건 산속 화전민들의 그것인데, 그 집들은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하다.

우리가 머무르려고 했던 곳은 토성(강원도 고성군 토성면으로 추정됨)에 있는 마을이었다. 저녁 무렵 그곳에 거의 닿아 이제 곧 여관에 들어갈 수 있겠구나 생각하며 가고 있는데, 눈 속에서 일부 맨발을 드러낸 채 물을 두 동이 지고 비틀비틀 걸어가는 노인을 발견했다. 내 눈을 잡아끈 것은 노인의 처참한 모습이었다.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아주 점잖은 사람이었는데, 그가 걸친 넝마 같은 옷 아래에는 욕망과 고난의 세월이 빚어낸 온화한 심성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고향 갑산(삼수와 함께 개마고원에 위치한 우리나라 최고의 오지)에서 서울까지 640킬로미터, 이 길을 그는 난생처음 걸어갔다고 했다. 몇 푼 없는 돈을 일을 해서 좀 불려볼 요량이었지만 실패로 돌아갔고, 돈까지 떨어지니 고향으로 돌아갈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렇게 밥벌이도 하면서 천천히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 토성에 닿았다고 했다. 나는 그를 내 앞으로 잡아끌었다. 세상의 물건이라고는 거의 가지고 있지 않던 이 노인의 내면을 좀 들여다보고 싶어서였다. 노인은 남씨인데, 행동하는 것이 단순하고 아이 같았으며 공손하게 나의 ‘조국’에 대해 물었다. 나는 세상을 만드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조선 사람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저 멀리 바다 너머 바깥세상에서 왔다고 이야기했다. 저녁밥을 기다리며 앉아 있던 나는 뭐라도 좀 도와주면 좋겠다고 하면서 돈을 조금 건넸다. 노인은 주변을 꼼꼼히 살펴보다가 방 벽을 기어오르고 있던 해충을 한두 마리 잡았는데, 그건 엽전 다발 값어치에 꼭 맞는, 내 마음을 흡족하게 하는 행동이었다.

저녁은 김치 냄새, 국 냄새와 함께 그것을 한 번도 맛본 적 없는 외국인이 보통 ‘개’라고 부를 길게 찢은 고기가 김을 내며 나왔다. 그것은 너무나 기다리던 냄새였기에 나는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남 서방은 “진지 맛있게 드시라.” 하고는 물러갔다. 노인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만약 내가 가진 재물에 어떠한 탐욕도 품지 않았다면 그는 진정 하나님 나라에서 멀지 않은 사람이었다. 보통 그런 상황에 있는 동양인들은 겉으로는 아첨하면서도 속으로는, “나는 이렇게 굶주리고 있는데, 저 양놈 개새끼는 이 땅에서 제일 좋은 걸 처먹는다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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