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내공
신도현, 윤나루 지음 | 행성B
말의 내공
신도현, 윤나루 지음
행성B / 2018년 11월 / 212쪽 / 14,500원
세상보다 자신을 더 사랑할 것
세상보다 자신을 사랑한다면 세상을 맡길 수 있다.
반면 자신을 바쳐 세상을 사랑하려 든다면,
어찌 세상을 맡길 수 있겠는가?
- 노자
자신보다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세상을 맡기는 것이 상식인데, 노자는 이를 역전시킨다. 오히려 세상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이라야 세상을 맡길 수 있다고 한다. 노자가 말한, 세상보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세상의 규정과 규범에 휘둘리지 않는다. 세상이 아닌, 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만들어 간다. 반면 자신을 바쳐서 세상을 사랑하겠다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는 만큼 세상의 규범에 종속돼 수동적으로 살아가게 된다.
즉, 자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자신이 꿈꾸는 세상과 가치를 만들어 가지만 자신을 세상에 바치는 사람은 지금 이대로의 세상의 모습과 규범에 충실할 따름이다. 세상에 대한 헌신이 곧 세상의 규범에 대한 헌신으로 이어진다.
또 세상보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선언할 수 있는 사람은 ‘나’가 귀한 것처럼 ‘너’ 또한 귀한 걸 안다. 개인의 가치를 이해하는 것이다. 반면 세상에 나를 바치려는 사람은 자신도 세상을 위해 희생하니 당신도 그러해야 한다고 하지 않을 리 없다.
그래서 노자는 모름지기 세상은 진정 자신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 맡겨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치세에 한정해서만이 아니다. 모든 일이 그렇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없으며, 나의 가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너의 가치도 알 수 없다.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데에서부터 말공부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다.
다만 통찰하려 애쓸 뿐이다
그대는 내가 많이 배워서 그것을 암기하는 사람이라 생각하는가?
아니다. 나는 다만 하나로 꿰뚫을 뿐이다.
- 공자
누군가 내게 A라는 문제를 어떻게 보느냐고 물었다고 하자. 이때 나의 관점이 있어야 말이 장황하지 않고 핵심을 짚을 수 있다. 그런데 A가 아니라 내가 잘 모르는 B나 C를 묻는다면? 알파벳 대문자는 A부터 Z까지 스물여섯 개지만 세상의 일과 이슈는 수없이 많다. 만물박사가 되어야만 매력적이며 의미 있는 말을 도출할 수 있는 것일까?
공자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공자는 생전에 이미 명성이 높은 학자였다. 전국 제후들의 존경을 받았고 제자만 무려 삼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사후에도 공자의 사상은 쭉 이어져 서양의 계몽주의에 영향을 끼친 것은 물론, 25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지대한 힘을 미치고 있다.
이토록 큰 업적을 남긴 공자이지만, 그 역시 모르는 게 많아서 모르는 건 누구에게나 물었으며 심지어 잘못된 지식 탓에 제자에게 핀잔도 들은 적이 있다. 그럼에도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공자의 철학 이 힘을 지니는 것은 그의 남다른 관점 때문이다. 공자 자신도 이렇게 밝혔다. 자신은 많이 배워 암기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모든 걸 꿰뚫을 뿐이라고. 여기서 ‘하나’는 물론 관점이다.
오직 신분으로 사람을 평가하던 시대에 공자는 인격만으로 사람을 바라보았다. 엄한 형벌로 백성을 통치하던 시대에 ‘통치자는 바람이요 백성은 풀’이라고 통찰했다. 즉, 바람이 불면 자연히 눕는 풀처럼 통치자가 선하면 백성은 절로 따르게 돼 있으니 백성을 처벌할 생각 말고 자기 수양에 전념하라는 것이다.
이 외에도 공자는 사회 교육 등 여러 분야에 기존의 관점과 결이 다른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관점이란 나무뿌리와 같다. 관점이 깊고 단단하다면, 다른 건 세세히 알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깊이 이야기할 수 있다.
세계관이 없는 건 불가능하다
어느 누구도 세계가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는
방식 이외의 방식으로 세계를 보여 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관점으로 돌아온다.
세계관이 없는 것은 불가능하며,
설령 가능하더라도 이를 바라지 않는다.
- 마르틴 부버
마르틴 부버는 관점 없이 세계를 볼 수 없다고 한다. 이는 주관적 관점을 제거한 채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관점이 없다는 건 죽은 상태와 다름없다. 관점을 가졌다는 것이야말로 곧 그 사람의 인식 체계가 생동한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최대한 관점을 없애야 할지가 아니라 더 훌륭한 관점에 기초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학교와 사회가 우리에게 주입한 관점은 그다지 훌륭하지도 새롭지도 않다. 기존의 관점을 고수해서는 남다른 언어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새로운 언어생활을 바란다면 관점을 먼저 바꾸어야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깊이가 곧 내 언어의 깊이란 점을 명심하자.
책을 읽을 때도 마땅히 치열해야 한다
모름지기 한 번 때렸으면 한 줄기 흔적이 남아야 하고,
한 번 쳤으면 한 움큼 피가 묻어나야 한다.
글을 읽을 때도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니,
어찌 마음을 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주희
옛 선비들은 위 인용문처럼 치열하게 글을 읽었다. 주희는 독서를 결투에 비유할 정도였다. 생사의 결투라면 나의 공격은 마땅히 치명타가 되어야 한다. 글을 읽었다면 분명 남은 바가 있어야 한다. 한 줄을 읽었다면 나의 삶도 그만큼 바뀌어야 한다. 글을 읽기 전과 후가 다르지 않다면 그것은 읽지 않은 것과 진배없다.
선비들이 이렇게 치열하게 독서했던 이유는 독서를 단지 지식을 쌓는 수단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더 깨닫게 하는 관문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선비들은 그저 먹고사는 삶이란 의미가 없다고 보았으며, 이 땅에 태어난 이상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독서로 그 길을 찾고자 했다. 나의 삶을 바꾸는 독서. 여기서 주의할 점은 치열함이 책을 집중해서 열심히 읽는 것만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열심히 읽은 결과는 암기이나, 독서를 통해 이루어야 할 결과는 삶의 변화다.
독서할 때 집중해야 할 대상은 글이 아닌 나 자신이다. 글을 읽을 때마다 나의 삶과 세상을 돌아보며 읽어야 한다. 또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글을 선별해 읽어야 한다. 이것이 지성을 기르는 자세다. 신영복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책은 반드시 세 번 읽어야 합니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필자를 읽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그것을 읽고 있는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합니다. 모든 필자는 당대의 사회, 역사적 토대에 발 딛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를 읽어야 합니다.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하는 까닭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서는 새로운 탄생입니다. 필자의 죽음과 독자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탈주입니다.”
당신 안엔 무한한 힘이 있다
지능의 평등은 인류를 이끌어 주는 공동의 끈이자
인간 사회가 존재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사실 우리는 인간이 평등한지 모른다.
인간은 ‘어쩌면’ 평등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의 의견이다.
그리고 우리처럼 그 의견을 믿는 자들과 그것을 입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어쩌면’ 덕분에 인간 사회가 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 자크 랑시에르
랑시에르는 현대의 고전 『무지한 스승』에서 인간의 지능이 평등하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펴기 위해 과거의 한 이야기를 발굴한다. 19세기 루뱅 대학의 외국인 교수 자코토는 네덜란드 학생들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쳤다. 그런데 문제는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전혀 모르고 자코토 역시 강의를 매개할 네덜란드어를 모른다는 것이었다.
자코토는 단지 학생들에게 간단한 교재를 제공하고 학생들이 공부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에 불과했다. 한데 놀랍게도 점차 학생들은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스승이 일방적으로 지식을 주입하지 않고, 학생들의 의지를 북돋워 주는 것만으로도 교육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준 예다. 이를 통해 랑시에르는 사람 사이에 일방적인 지시 구조가 불필요함을 역설하고 사람의 지능이 놀라 울 정도로 평등하다는 점도 강조했다.
물론 랑시에르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자코토와 다른 사례를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랑시에르가 자신의 주장에 ‘어쩌면’이란 단서를 붙인 이유다. 하지만 지능이란 사실 불평등할지 몰라도, 지능의 평등성을 믿고 나아가려는 이들의 노력이 쌓여 사회는 발전한다.
랑시에르의 주장이 의미 있는 이유는, 지능의 평등을 입증해서라기보다는 지능의 평등에 대한 가능성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교육을 받지 못했다고 해서, 가난 탓에 책 읽을 기회가 많지 않았다고 해서 지능이 떨어지는 게 결코 아니라고 랑시에르는 밝혀내고자 했다. 사회적 배경 때문에 자기 지능이 남들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이론적 희망과 가능성의 토대를 제공한 것이다.
자코토 사례 같은 지적 기적을 일으키려면 먼저 ‘나는 안 된다’, ‘나는 모자라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나의 무한한 잠재력을 확고히 믿어야 한다. 믿음과 노력으로 모든 걸 해석하고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을 폄하해서도 안 된다. 지적 도약을 꿈꾼다면 나의 무한한 힘을 신뢰해야 한다. 창의성을 키우려면 우선, 자신을 신뢰하라.
‘공백’에 주목할 것
한 사건의 근본적인 존재론적인 성격은 ,
그것을 사건이게 하는 그 공백을 기입시켜
명명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알랭 바디우
알랭 바디우의 말을 간추리면, ‘사건’이 되게 하려면 ‘공백’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백은 어떤 분야에서 은폐되고 가려진 지점이다.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부분으로 특히 주류가 숨기려는 것 이 있는 곳이다. 여기에 이름을 붙이고 의미를 부여해 드러낼 때 그것은 사건이 된다. 사건은 기존과 다른 새로운 방식과 체계의 출현이다. 즉, 사건이란 창의적인 결과물인 셈이다. 예를 들어 거시성과 의미 담론은 근대 모더니즘의 특징이다. 이때의 공백이라 할 수 있는 미시성과 무의미성에 초점을 맞추고 이를 사상과 예술로 표현한 것이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인 것처럼 말이다.
말할 때에도 공백에 주목해야 새롭다. 예컨대, 칭찬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읽어 내지 못한 장점을 발견해 칭찬하는 것이다. 그럴 때 상대는 색다름을 느끼고 호감을 품게 된다. 비판할 때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흔히 지적하는 것보다는 공백의 부분, 즉 애써 외면해 왔던 문제점을 드러내 일깨워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말이란 표현과 치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그 안에 담긴 내용이 중요하다. 말 공부에서 창의성을 강조하는 것도 그래서다. 독창적인 내용이 담긴 말은 설령 표현이 투박해도 그 자체로 충분히 상대의 마음을 울릴 수 있다. 공백을 드러내는 말하기는 형식은 미흡해도 파급력이 강할 수밖에 없다.
빼앗고 싶다면 먼저 줘라
그의 마음을 얻으려거든 우선 펼치게 하고,
그에게서 빼앗으려거든 우선 주도록 하라.
이것을 은밀한 지혜라 하니,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는 법이다.
- 노자
대화란 말하기와 듣기의 어울림이다. 보통 말하기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듣기를 잘하는 게 더 중요하다. 면접과 같은 특수 상황을 제외하고 대화에서 꽃은 단연 듣기다. 주로 듣기를 자처하는 사람이 관계의 중심을 쥐는 법이다.
내가 되고자 하는 모습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겠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내가 만나고픈 사람은 나의 말을 잘 들어 주는 사람이다. 누구나 듣는 것보다는 말하려는 욕구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마케팅 측면에서도 소비자의 욕구를 잘 파악해야 성공할 수 있듯이, 대화할 때도 상대방의 말하기 욕구를 잘 파악해 들어 주는 사람이 매력을 끌기 마련이다.
노자가 이야기하는 것은 당위가 아니라 전략이다. 상대의 마음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펼치게 해야 한다. 상대가 충분히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게 관심을 기울이고 편안하고 따뜻하게 해 주어야 한다. 속마음을 내게 드러낸다는 것은, 곧 내가 그의 마음을 얻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빼앗으려거든 먼저 주어야 하는 게 이치다. 나의 귀를 주어야 상대의 말을 뺏고 마음도 얻는다. 내가 듣는 만큼 상대방은 말한다. 내가 듣기에 집중할 때 상대도 말하기에 집중하며, 내가 진심을 담아 들을 때 상대도 진심을 담아 말한다.
듣기가 말하기를 이기며, 화자가 아닌 청자가 마음을 얻는다. 말을 잘해 상대의 마음을 얻는 것은 강함의 기법이요, 잘 듣는 것으로 상대의 마음을 여는 것은 부드러움의 기법이다. 강함끼리 경쟁하는 세계에서 부드러움을 택하는 것이야말로 ‘틈새 공략’이다. 노자의 표현으로는 “은밀한 지혜”다.
비판은 스스로를 갈고닦게 한다
세상에서 나의 주장을 비판하는 이들의 논리 가운데 진실로
내가 취할 만한 좋은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나를
갈고닦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것은 나를 경계하고 두려워하게 하며
수양하고 성찰하게 하여 한층 더 덕을 발전시키는 기반이 된다.
옛날에 “나의 단점을 공격하는 사람이 바로 나의 스승이다.”라고 했는데,
스승이라면 또 어찌 그를 미워할 수 있겠는가?
- 왕수인
말 한마디가 주는 상처는 생각보다 깊다. 나를 향한 근거 없는 비난은 근거가 없어서 아프고, 이유 있는 비판은 이유가 있어서 또 아프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타인과 관계를 맺는 이상 피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다면 애써 피하기보다 비난과 비판을 최대한 덜 아프게 받아들이고 나아가 내게 이로운 방향으로 이끄는 게 더 낫다.
왕수인이 주목한 것은 비난과 비판 중 후자다. 나를 향한 공격이야말로 오히려 나를 계발시킨다고 왕수인은 말한다. 물론 그 전제는 “진실로 내가 취할 만한 좋은 것”이다. 근거 없는 비난은 왕수인의 말에 포함되지 않는다. 칭찬도 나를 북돋우지만 비판만큼 나를 깊이 아프게 하면서 성장시키는 것도 없다.
논리가 부족하다면 무시라도 하겠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도 나의 허점을 제대로 짚은 비판이라면 흘려듣기 어렵다. 이때 내 안에서는 허점을 보완하겠다는 다짐 내지 허점을 알게 된 것에 대한 감사함과 허점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반감과 분노, 수치심이 일어 서로 싸울 수 있다.
이 중 어떤 감정을 택할지는 나의 선택이다. 왕수인은 전자를 택한다. 나를 비판한 사람은 나의 부족한 점을 알려 줘 나를 발전시키는 사람이다. 더 나아가 그를 스승으로 생각할 수 있다면 도리어 고마운 존재일 뿐, 굳이 미워할 대상은 되지 않는다.
적당한 거리는 어디에서든 필요하다
작가는 충격을 주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짓을 하면 자기모순에 빠지고 만다.
설령 강하게 말해야 할 경우에도
독자가 수행해야 할 과업을 제시하는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
이 때문에 ‘순수한 제시’라는 성질이 예술 작품에서
본질적인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 장 폴 사르트르
질문에 가능한 한 의도를 담지 않는 것도 잘 질문하는 방법이다. 의도가 너무 드러나게 않게 질문하는 게 좋다는 뜻이다. 요즘 유행하는 ‘답정너(‘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의 줄임말)’ 유형의 질문이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대표적인 예다. 목적이 분명한 질문을 하면 이것 역시 취조가 되기 십상이다. 사실 취조할 때도 마냥 윽박질러서 답을 끌어내지는 않을 것이다. 은근히 묻는 것도 취조의 한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