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김관욱 지음 | 인물과사상사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김관욱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8년 10월 / 280쪽 / 18,000원
가족의 아픔
4ㆍ3항쟁과 4ㆍ16참사 사이에서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 기사 두 편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다. 베트남과 제주도 이야기다. 첫째는 문재인 대통령이 2018년 3월 23일 베트남 국빈 방문 중 한국군의 베트남전쟁 참전 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우리 마음에 남아 있는 양국 간의 불행한 역사에 대해 유감의 뜻을 표한다.”고 밝힌 기사다. 그다음은 10여 일 후인 4월 3일 제주도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4ㆍ3항쟁 70주년 추념사 중 “국가 폭력으로 말미암은 그 모든 고통과 노력에 대해 대통령으로서 다시 한 번 깊이 사과드린다.”고 한 기사다. 이 두 기사는 2월 25일 막을 내린 평창동계올림픽 전후로 긴장 완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남북한 상황과 겹쳐졌다. 4ㆍ3항쟁 추념사 마지막에 문재인 대통령이 말한 “여러분, 제주에 봄이 오고 있습니다.”라는 선언처럼 한국사의 과거, 현재, 미래에 따뜻한 ‘봄’이 오는 것인지 감흥에 젖게 만들었다. 과거에도 이런 온기에 잠긴 적이 있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정도다.
평창동계올림픽 모토인 ‘새로운 지평’이 우리 현실에서 실현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기대와 함께 가슴이 설레기도 한다. 또한 이 봄이, 화사한 유채꽃과 산들바람이 더는 누군가의 몸을 아프게 만들지 않기를 기대해보기도 한다. 두 기사는 왜곡되거나 낙인 찍혀왔던 아픈 역사를 제대로 조망하고 ‘망각’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수 있겠다는 기대를 하게 했다.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 권력에 대한 시민들의 투쟁이란 공식적인 역사에서 특정 사건과 인물을 삭제하는 이른바 ‘망각’의 정치에 대항하는 ‘기억의 투쟁’이라고 강조했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과 제주 양민 학살이야말로 그동안 당사자나 관심을 지닌 소수만 ‘기억’하던 학살의 역사였다. 그러하기에 오늘날 제주도민들이 “제주 4ㆍ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라고 주장하는 것일 테다. 이 글은 죽음 이후에도 삭제되고 왜곡되었던 역사적 진실에 대한 나름의 추모다. 특히, 그 밑바탕에 씨줄과 날줄이 된 보이지 않지만 수없이 많은 가족의 아픔과 치유에 대한 애도 섞인 기록이다.
그렇지만 잔혹하게도 봄의 기대는 일순간 증발해버렸다. 우리가 마주한 한국의 현재는 전쟁보다 잔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018년 1월 3일 한 30대 여성 웹디자이너가 장시간 노동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 사건이 벌어졌다. 자살한 웹디자이너는 “내 앞날이 너무 깜깜해서 그냥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싶다.”고 했다. 깜깜한 앞날, 사라져도 미동도 없을 세상. 이것이 한국전쟁을 거쳐 온 조부모 세대와 IMF를 견뎌온 부모 세대의 자녀가 직장에서 처한 삶의 민낯일지 모른다.
두려운 것은 추운 겨울, 봄을 기다리지 못하고 끝내 다른 세상으로 탈출을 선택한 그녀가 이 세상에서 빠르게 ‘망각’될 것 같다는 차디찬 심해 같은 현실이다. 매초 매시간 숨을 ‘죽이며’ 살아가는 하루살이의 직업전선은 총성 없이도 충분히 잔혹해 보인다. 2016년 한 해 자살자 수가 1만 3,092명이었다. 베트남전쟁 참전 병사 중 사망자는 총 5,099명이었다. 공식적으로 알려진 제주 4ㆍ3항쟁의 사망자 수만 3만여 명이었다. 거칠게 수치로만 비교해본다면 “이 땅에 봄은 있느냐”는 제주도민의 70년의 외침은 멈출 수 없을 듯 보인다. 그리고 세월호 참사 4주기를 맞아 안산 지역에서 조직한 준비위원회인 ‘네 번째 봄을 만드는 사람들’은 “일상에서 기억하다.”를 슬로건으로 잡았다. ‘봄’도 ‘기억’도 제주 4ㆍ3항쟁과 닮았다. 다른 듯 모두 같다. 혼자하면 기억은 그 자체로 ‘고통’이지만, 같이하면 ‘위로’가 된다.
베트남전쟁의 희생자들, 제주 4ㆍ3항쟁 생존자들, 4ㆍ16 세월호 참사를 경험한 우리에 대한 이야기다. 이 모두는 결국 누군가의 가슴 아픈 가족사다. 이를 통해 당사자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고 버텨냈는지 들어가 보자.
베트남에 세워진 한국군 증오비: 한국은 박정희 정권 시절 베트남에 1964년 9월 11일 1차 파병을 시작으로 1973년 3월 23일 후발대가 철수를 완료할 때까지 미국의 우방국으로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한국은 파병의 대가로 미국의 경제원조를 받아 일부는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하는 데 사용했다.
2000년 6월 1일에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에 30년간 봉인되었던 자료들이 세간에 공개되었다. 이 중에는 베트남전쟁 한국군 민간인 학살에 대한 미국의 보고서가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한겨레21》이 공개한 보고서에는 1968년 2월 12일 꽝남성디엔반현 퐁니ㆍ퐁넛에서 발생한 학살 현장 사진 20장이 첨부되어 있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해병대 1개 중대가 마을 주변을 지나던 중 어디서 인가로부터 저격을 받자 마을을 공격했다고 한다. 대략 79명의 베트남 여성과 어린이들이 칼에 찔리거나 총에 맞아 죽었고, 한국 해병 1명이 사망했다. 이 외에도 수차례 크고 작은 민간인 학살이 자행되었다. 베트남 정치국 전쟁범죄조사보고서는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피해자를 5,000명으로 추정할 정도니 베트남 꽝응아이성에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졌다는 사실에 전혀 놀랍지 않다.
베트남전쟁 당시 미군과 연합군은 베트남 군대를 ‘물고기’로, 인민은 물고기가 사는 ‘물’로 비유했다. 이 비유는 잔인했다. 물고기를 잡으려면 물을 퍼서 없애면 된다는 생각에 많은 인민을 학살했다. 그렇게 학살된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과 아이, 여성이었다. 한국군의 학살은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라기보다 물고기에 대한 보복성 학살에 가까웠다. “쎄 싹 롱 싸잉 퐁 타이 박호”라는 말은 당시 베트남 게릴라 전사들 사이에 퍼졌던 구호다. 내용은 “청룡을 몰아내자, 백호를 떼죽음시키자.”다. 한국군의 만행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이 집단 학살로 가족과 삶의 터전, 심지어 조상의 무덤까지 잃어버린 생존자들은 어떠한 삶을 살아왔을까? 거리의 시체와 무덤이 누구의 것인지, 내 가족이 언제 어디에서 죽었고 묻혔는지 파악하기조차 어려운 그곳에서 말이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인류학자 권헌익은 1994년부터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현지 조사와 문헌 조사로 베트남인들의 기억을 재조명해 『학살, 그 이후』, 『베트남 전쟁의 유령들』로 엮였다.
그 중 인상적인 부분을 소개하면 이렇다. 베트남 정부는 전투 중에 사망한 군인들을 ‘영웅’으로 추대하고, 민간에서 만든 가족 사당과 마을의 신당에서 열사를 추도하게끔 했다. 권헌익의 표현대로 ‘전쟁 기념관을 친족의 영역에 넣은 셈’이다. 군인은 친족 여부를 가리지 않고 사당에 모셔졌고, 사당은 군인만이 아니라 전쟁 중 사망한 모든 이를 기리는 장소가 되었다. 더 나아가 의례의 장소는 사당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대규모 학살의 현장(예를 들면 논두렁 한복판)에는 증오비와 위령비가 세워졌고, 거리에서 죽어간 모든 사람을 기억했다. 여기에는 ‘한국인’도 포함되었다.
베트남전쟁의 유령들 : 상호 돌봄과 공유된 몸: 많은 베트남인들은 자국민은 물론 다국적 망자를 위해서도 일상적으로 추도를 올린다고 한다. 혼령에 대한 추도야말로 가장 중요한 치유의 의례일지 모른다. 그렇다고 이것이 한국 정부가 2000년 12월 베트남 정부와 함께 베트남전쟁 희생자 추모비를 세우며 내세웠던 공동 결의인 “비극적 과거를 잊지는 말되 초월한다”처럼 ‘초월’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권헌익은 베트남전쟁 학살을 종횡으로 엇갈리는 도덕적ㆍ정치적 양극성의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복잡한 사건이라고 말한다(예를 들면 좋은 죽음 대 나쁜 죽음, 공산주의 음모 대 제국주의 야욕과 내통). 한국군의 만행에 대한 증오의 기억은 쉽게 ‘초월’할 수 있는 것이 아닐지 모른다. 특히 생존자의 몸에 새겨진 그날의 기억을 지워내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한 세대가 지나도 단 한 번의 계기로 되살아나기도 한다. 전쟁의 참혹함은 종종 꿈을 통해 생생히 재현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권헌익은 꿈보다 비실재적인 ‘유령 관념’으로 현지인의 치유적 삶을 보여준다. 새벽에 밭을 갈러 가면서 죽은 부인과 자신들의 유령을 만났다는 등 일상에 출현하는 유령은 베트남인들에게는 매우 흔했다. 베트남인들이 말하는 유령은 서구에서 이야기하는 실존하지 않는 공포스러운 상상 속 존재와 다르다. 베트남의 유령은 인간과 상호작용하는 실제 존재다. 권헌익은 유령이 베트남인의 일상 속에서 공존하는 것은 베트남전쟁으로 말미암은 수많은 죽음이 참혹하고 억울하기 때문이며, 그것이 제대로 해명되고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즉, “혼과 유령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담론에는 비판적인 역사적 의미가 풍부하게 담겨 있고, 이 담론이 널리 확산되는 이유는 정확히 그것을 통해 당대의 삶에서 중대한 의미를 갖는 도덕적ㆍ정치적 쟁점에 개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다.
베트남의 유령에는 조상이 아닌 이름 모를 영혼도 포함된다. 내 가족이 집이 아닌 낯선 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처럼 집 없이 떠도는 영혼들을 위로하는 것을 일종의 ‘상호 돌봄의 의례적 관계’로 받아들이고 있다. 권헌익은 이것을 “폭력적인 죽음으로 고통받는 자들에 대한 공동체적 숭배”와 “결속을 위한 초종족적 동원을 의례로 도입”한 것이라 소개한다. 즉, 누군가의 가족일 유령을 서로 돌보는 의례를 수행함으로써 새로운 ‘친족 관계’를 ‘발명’했다고 보았다.
아픔을 공유하며 생물학적인 친족 기준을 초월한 베트남의 역사가 멀게는 제주 4ㆍ3항쟁을, 가깝게는 4ㆍ16 세월호 참사를 경험한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런데 유령을 환대하는 것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권헌익이 소개한 베트남의 유령에게 ‘몸-빌려주기’는 더욱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권헌익은 한 소녀의 몸에 억울하게 객사한 혼령들은 물론이고 전쟁 유령들이 접신한 사례를 자세히 소개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혼령이 들어오는 ‘몸’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공유지나 공원 같다고 한다. 즉,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고, 또한 반드시 나가야만 하는 규칙이 있다고 한다.
주민들은 몸에 들어온 혼령과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한 맺힌 이야기를 듣고 해결해준다.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유령에게까지 열려 있는 이들의 몸과 마음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설명 모델로는 이러한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베트남인들이 유령들을 위해 기도하고, 기꺼이 몸을 빌려주며 대화하고, 더 나아가 넓은 범위의 친족으로 받아들이는 행위를 통해 베트남전쟁이 남긴 대학살의 아픔을 극복하려 한다는 ‘사회적 사실’에 주목한다.
국가가 보장한 ‘빨갱이 사냥’: 강준만의 『한국 현대사 산책』에 묘사된 4ㆍ3항쟁은 국가권력으로 포장된 깡패의 광기 어린 활보 같았다. 살인과 고문에 중독된 깡패들의 활보 말이다. 이념이나 민족은 학살을 정당화하려는 거짓 명분일 뿐이었다. 왜 제주도민을 죽여도 되었는지, 왜 살인이 허락되었는지, 알고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제주 4ㆍ3항쟁 당시 정부의 작전 명령으로 소탕된 것은 대부분 노인과 부녀자, 아이들이었다.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이 몇 명이라도 피살되면 그에 대한 보복으로 대량 학살을 저지르고 가옥을 불살랐다. 경찰, 서북청년회 등 우익 청년 단체, 토벌대의 행위는 20여 년 후 베트남전쟁에서 벌인 한국군의 행태와 소름 끼치도록 유사했다.
제주 4ㆍ3항쟁은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에 무장대 350명이 경찰과 우익 단체의 탄압에 저항하며, 통일과 반미 구국 투쟁을 기치로 제주도 내 경찰지서 열두 곳을 일제히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이 사건은 1954년 9월 21일 한라산의 금족 지역이 완전히 개방되기까지 거의 6년 6개월간 지속된 대규모 유혈 사태다. 당시 제주도 인구 30만 명의 10분의 1인 3만여 명이 살해당했다.
1945년 해방 이후 북한이 사회주의 체제로 자리 잡아가면서 남한에서 좌우간의 충돌이 격해졌고, 민중은 좌우 양자택일을 강요받았다. 심지어 해방을 기념하는 3ㆍ1절에도 우파와 좌파가 따로 기념 대회를 개최했고 유혈 사태까지 발생했다. 제주도에서는 1947년 3ㆍ1절에 무장 경찰이 군중에 발포해 6명이 숨지고 6명이 중상을 입는 일이 발생했다. 3월 10일에는 이에 항의하는 민관 총파업이 벌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물리적 충돌은 점점 더 깊어져갔고 결국 1948년 제주 4ㆍ3항쟁의 씨앗이 되었다.
이승만은 1948년 12월 10일 서북청년회 총회에 참석해 “제주도 4ㆍ3사태와 여수, 순천 반란 사태로 전국이 초비상사태에 돌입했다. 이 국난을 수습하기 위해 사상이 투철한 서북청년회를 전국 각지에 배치하겠다.”고 선언했다. 사상이 ‘건전’하다던 서북청년회는 4ㆍ3항쟁 이전에는 주로 엿장수로 일하며 이승만 사진과 태극기를 강매하며 지냈다고 한다. 4ㆍ3항쟁이 발발한 이후 이들은 경찰과 군인으로 전환되었다. 이들의 만행에는 투철하고 건전한 ‘사상’이란 존재하지 않았던 듯하다. 당시의 증언은 이렇다. “군인도 아니고 경찰도 아니고 사람 피쟁이(백정) 서북청년단들, 다 사람 백정이지…… 순 엿장수나 하던 무식한 것들이지…… 조금만 거슬리면 잡아다가 때리고, 죽였지…… 시계 달라고 해서 안 주면 죽여버렸지…… 지옥살이하듯 죽지 못해 살았지.”
이러한 서북청년회에 국가권력으로 날개를 달아준 이는 이승만이었다. 심지어 1949년 1월 21일 이승만은 국무회의 자리에서 “가혹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제주 4ㆍ3사건을 완전히 진압해야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미국의 원조가 가능하다.”고 지시했다. 미국 역시 제주 4ㆍ3항쟁 이후 초토화 작전의 책임을 면할 수 없다. 당시 미국 장교가 4ㆍ3항쟁 진압을 직접 지휘했다는 증언도 나왔으나 정확한 진상 파악은 어렵다고 한다. 그렇지만 미국이 ‘인간 사냥’을 방조하거나 부추겼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제주 4ㆍ3항쟁에 대한 미군정이 작성한 정보 보고서에서는 군대ㆍ경찰ㆍ우익 청년단체의 토벌을 ‘레드 헌트’로 명시했다. 제주도민을 사냥해야만 하는 ‘동물’로 본 셈이다.
애도되지 못한 유령들의 공간: 제주도민은 이승만 정권의 ‘빨갱이 섬’이라는 낙인 속에서 살아야 했다. 제주도 출신 소설가 현기영은 제주 4ㆍ3항쟁의 여파를 담은 소설 『순이 삼촌』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역대 독재 정권들은 공포 정치를 통하여 4ㆍ3을 금기의 영역에 묶어놓고, 그 사건에 대한 도민의 집단적 기억을 폭력적으로 말살하려고 해왔다. …(중략)… 비참한 사건에 대한 도민의 집단적 기억을 말살하는 정치를 ‘망각의 정치’라고 한다.” 이러한 여파는 민주 정부가 들어서고 1997년 제주도의회가 희생자 조사를 할 당시까지도 이어졌으며, 많은 유족이 연좌제에 대한 불안감으로 신고를 기피했다.
‘휴양지’ 제주도는 사실 4ㆍ3항쟁 당시 학살당한 시체가 도처에 묻혀 있는 땅이다. 홍승혜는 이곳을 “애도되지 못한 유령들의 공간”이라 명명했다. 떼죽음당한 유골들이 개발 현장에서 우연히 발견되고 뒤늦게 합동 장례식을 거행하는 곳이 제주도다. 그런데도 연좌제를 위시한 공안의 감시가 지속되어왔기에 베트남처럼 망자들이 제주도민의 일상에 ‘사회적 사실’로 등장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제사상 역시 기대할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으니 말이다.
국가권력에 희생당한 억울한 혼령들: 마지막으로 세월호 참사 이야기를 하려 한다. 우리에게는 4년간 세월호 희생자들을 기리는 정부합동분향소가 있었다. 팽목항에도 수많은 노란색 리본과 영혼을 달래기 위해 놓아둔, 희생자들이 생전에 좋아했던 물건이 놓여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림과 조형물, 음악으로 단원고 학생들과 일반인 희생자의 영혼을 달래주었다. 광화문 광장에서는 참사 이후 지속적으로 희생자를 추모하고 기억하는 공간을 유지하고 있다.
그곳에서 모든 시민은 일시적으로나마 희생자의 영혼과 접속한다. 나 역시 희생자들의 사진 앞에 서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삼키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들은 그 순간 이후 내 몸에 거주하기 시작했다. 희생자들은 자신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실재하는 사회적 사실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상징’인 유령이 아닌 ‘자연현상’과 같이 우리의 오감을 자극하면서 말이다. 그렇지만 권헌익이 베트남에서 보았던 초월적인 친족 관계 형성과 열려 있는 ‘몸-빌려주기’ 같은 행위까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