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인문학
임형남, 노은주 지음 | 인물과사상사
골목 인문학
임형남, 노은주 지음
인물과사상사 / 2018년 10월 / 372쪽 / 17,000원
제1부 골목에 삶을 두고 왔다
여러 집이 얼굴 비비며 빼곡히 차 있다_ 서울 남창동과 북창동 골목
남산과 서울시청 사이에 남창동과 북창동이 있다. 버스를 타고 명동과 한국은행을 지나 숭례문 쪽으로 접어들면, 사람들이 북적거리며 인도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동차가 많이 정차해 있는 곳이 나온다. 왼쪽은 남창동이고 오른쪽은 북창동이다. 남창동에는 남대문시장이 있다. 낮에도 사람들로 가득하지만 이곳은 사실 새벽에 가면 사람이 많을 뿐 아니라 생의 활기가 넘쳐나는 곳이다. 삶이 힘들고 지칠 때면 새벽시장에 간다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새벽에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 대부분은 일반 소비자가 아니라 도매상을 통해 대량으로 물건을 구입하는 상인들인데, 새벽시장을 누비는 그들의 모습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계곡을 굽이쳐 흐르는 듯한 기운이 느껴진다. 나도 그 이야기를 듣고 새벽에 몇 번 가보았다. 추운 겨울날이었는데도 사람들의 열기로 후끈거렸고, 시장 주변의 노점에는 다양한 먹거리도 많이 있었다. 시장이 아니라 마치 축제의 현장 같았다.
남창동은 남산 아래에서 남대문시장을 향해 뻗어 있고, 북창동은 남대문시장과 서울시청 사이에 끼어 있는 동네다. 이 근처에는 대동법이 시행되었던 조선시대에 만든 창고가 있었다고 하며, 그 터가 남창동에 남아 있다. 남창동은 남대문시장뿐 아니라 남산 쪽으로 사람이 제법 살고 있는 동네다. 그러나 북창동은 거주하고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고, 낮에만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한 동네다.
임진왜란 이후인 광해군 원년(1608)에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게 되어 있던 공물제도를 쌀로 통일하는 대동법이 시행되었다. 그때 대동미를 전국으로 출납하는 기관인 선혜청이 설립되어 용산에 별창인 만리창을, 삼청동에 북창을, 옛 장용영 자리에 동창을, 남대문 안에 남창을 두었다. 선혜청이 있다 보니 남대문 인근을 ‘창동’이라 불렀고, 그것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쌀 미’ 자가 붙은 남미창정, 북미창정이 되었다가 다시 남창동과 북창동으로 정리된 것이다.
선혜청에 보관되었던 대동미는 관리들의 급여로 지불되기도 하고 국가의 여러 비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때 지급받은 쌀을 다른 식량이나 의류 등의 생활필수품으로 교환하는 시장이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위치로 서울의 제일 관문인 숭례문 인근이고 국가의 창고가 있었으니, 그런 흥청거림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던 것이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지금의 봉래동에 있었던 칠패시장이 이곳으로 옮겨오며 더욱 큰 시장으로 거듭나게 된다. 조선시대 한양에는 3대 시장이 있었는데, 종로통에 있던 운종가, 지금의 동대문시장인 이현시장, 그리고 칠패시장이다. 운종가는 그야말로 국가 공인 시장이었고, 이현시장은 청과물 등 농산물이 주종이었다. 칠패시장은 마포나 서강 등이 가까운 영향으로 수산물이 주로 거래되었다.
이후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은 서울을 대표하는 시장으로 군림했다. 동대문시장과 남대문시장에는 당시에는 아주 귀했던 외제 물건들도 있었다. ‘미제’나 ‘일제’ 물건을 하나 갖고 있으면 어깨에 힘을 주었던 시절, 사람들은 남대문 도깨비시장에 가서 카메라도 사고 화장품도 사고 ‘양담배’도 구입했다. 물론 정식으로 수입되었던 것은 아니고 미군 부대나 해외 주재원, 비행기 승무원들이 가지고 들어온 물건들이었다. 도깨비시장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그 당시 물건을 판매대에 늘어놓고 장사하다 단속반이 들이닥치면 순식간에 철수하는데, 그 모습이 도깨비장난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당시 양담배가 특히 남자들의 ‘로망’이었다. 또한 허리춤에 붙어 있는 가죽 패치에 말 두 마리가 청바지를 당기는 그림이 있는 ‘쌍마청바지’라 불렸던 리바이스사에서 만든 청바지는 젊은이들의 로망이었다.
한편 북창동은 임오군란 이후 중국인이 많이 들어오면서 자리 잡은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서울의 차이나타운으로 무척 특색이 있는 동네였는데, 1970년대 초에 재개발사업이 진행되면서 중국인들이 거의 빠져나갔다. 몇 년 전 남창동에 집을 지을 일이 생겨 오랜만에 그 동네를 찾았다. 번잡한 시장 뒤 남산으로 향하는 조용한 주택가는 사람 사는 집이 생각보다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길 건너 북창동은 너무나 많이 변해 있었다. 1990년대 이후 퇴폐적인 유흥업소가 많이 들어서면서 북창동은 이상하게 변색되고 덧칠되었는데, 요즘은 그 유흥업소들도 썰물이라고 한다. 대신 늘어나는 관광객 수요에 맞춰 호텔이 급격히 늘어나며 동네가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중이었다. 그런데 주 고객이 관광하러 찾아온 중국인들이라 하니 참으로 묘한 역사의 인연이 느껴진다.
좁은 골목길과 그 골목에 얼굴을 비비며 빼곡하게 들어차 있던 집들, 그 동네 끄트머리의 소공동 경계에 한국은행이 있었고 시경이 있었다. 지금은 내자동으로 옮기고 이름도 서울특별시 경찰국에서 서울특별시 지방경찰청으로 바뀌었지만, 시경은 1950년부터 1989년까지 39년 동안 남대문시장과 마주하는 북창동 외곽에 있었고, ‘시경 앞’이라는 지명도 오랫동안 꽤 익숙했다. 시경은 없어졌는데 아직도 시경 앞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려나간 신체 부위의 감각이 여전히 살아남아서 존재를 주장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경 앞에는 시간과 국적과 양식이 모호한 2층짜리 상가건물이 있었다. 바로 옆에 있던 건물이 헐리며 갑자기 드러난 옆구리를 멋쩍게 내보이며 서 있었다. 종로나 서울의 대로변에 많이 있었던 2층 한옥 양식의 상가인데, 목조가 아니라 벽돌을 쌓아 지은 조적조 건물이다. 지붕의 틀도 대들보와 서까래 등으로 이루어지는 전통 가구 방식이 아닌 서양식 목조 트러스 구조로 만들어 자료적 가치도 높은 건물이라고 한다. 그런저런 역사적 사실을 다 떠나서 100년이 넘는 시간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있는 건물이다. 고치고 덧붙이고 하면서 그 건물이 겪었던 풍상이 그대로 느껴졌다. 늘 지나다니며 아직도 있구나 하며 안도했고, 재개발이라는 무서운 파도가 언제 덮칠까 조마조마하며 지켜보았다. 그러다 얼마 전 남대문시장에 갔을 때 들르니, 주변의 풍경이 많이 바뀌었고, 그 건물도 달라져 있었다. 그사이 역사 자료로 지정되면서 시간의 때를 말끔히 씻어내고 성형수술을 통해 젊음을 다시 찾은 얼굴처럼 새초롬하게 앉아 있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좋았지만, 지워진 시간의 흔적이 아쉬웠다.
흉터 같은 삶의 흔적들_ 부산 초량동 골목
광안대교를 건너 해운대 방향으로 바다를 건너갈 때 미래도시를 방불케 하는 초고층 호텔과 주상복합 건물군이 보여주는 다이내믹한 풍경은 부산이라는 도시의 역동성을 대변해준다. 부산이 에너지가 넘치는 도시라는 생각은 부산 출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더 확실해진다. 어떤 모임에서 처음 보는데도 유난히 살갑게 다가와 싹싹하게 인사를 하고 자기주장을 잘하면서 쉽게 가까워지는 멤버가 있다면 십중팔구 부산 사람이다. 매사에 적극적이면서도 붙임성이 좋은 기질은 그곳 사람들 모두 타고나는 것인가 싶기도 하다.
2017년 봄 일 때문에 부산에 갔다가 우연히 역 바로 건너편에 있는 초량동이라는 동네에 가보게 되었다. 예전에도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었지만, 6ㆍ25전쟁 이전부터 원주민이 많이 살았던 오래된 곳이라는 것은 이번에 알았다. 단지 길을 건너 한 겹 안을 들추었을 뿐인데, 방금 부산역 광장에서 본 떠들썩하고 복잡한 풍경과는 조금 다른, 부산의 생살을 만지는 듯한 느낌을 주는 곳이었다.
사실 원래 가려던 목적지는 따로 있었다. 그날 볼일을 생각보다 일찍 마치고 모처럼 생긴 여유 시간에 둘러볼 곳을 찾다가, 먼저 그 유명한 보수동 책방 골목으로 향했다. 몇 개의 중고책방과 카페와 그 밖의 가게 몇 개가 늘어선 길은 생각보다 깔끔하고 좁고 짧았다. 혹시 좋아하는 루이스 칸(미국 건축가)이나 카를로 스카르파(이탈리아 건축가) 같은 건축가의 작품집이 있나 싶어 그중 가장 책이 많아 보이는 대우서점에 들어갔다. 예술ㆍ건축 분야 서가가 제법 큰 편이었는데 한 시간 정도 머물렀지만 역시 마땅한 책은 없었다.
별 성과 없이 책방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나가니 건너편에 국제시장이 있었다. 깡통시장을 지나 국제시장으로 접어드는데 별다른 감회는 없었다. 평일 낮이라 그랬는지 길은 한산했고, 노점들이 늘어선 교차로에 서서 보니 한쪽으로는 부산타워가, 한쪽으로는 목 언저리까지 집들이 차오른 보수산이 가까이 눈에 들어왔다. 중간에 중고 레코드 가게 간판을 보고 혹시나 절판된 음반이 있나 궁금해서 들어가 보았다. 젊은 점원은 컴퓨터로 검색을 하며 요즘은 자기들도 들어오는 목록을 홈페이지에 그때마다 올리고 있으니, 원하는 음반이 있으면 자주 사이트를 확인해보면 된다고 일러주었다. 모든 것은 간편해지고 단순해져서 오래된 가게를 뒤져 먼지 쌓인 선반에서 소위 ‘레어템’을 찾는 일이 이제는 없을 거란 이야기였다. 처음 찾아간 부산의 유명한 시장들은 하드웨어는 얼핏 보기에는 예전과 다를 바 없는 듯하지만, 과거의 향수만으로 유지되고 기억되는 공간은 아니었다.
애초에 딱히 무엇을 사려던 생각은 없었지만, 시장을 한참 돌고도 빈손으로 택시를 타고 역으로 돌아가자니 왠지 허전한 감이 들었다. 택시기사와 몇 마디 말을 나누다 보니, 돌아가는 길에 산복도로를 한번 보고 가라고 했다. 내륙에서 달려 나온 산맥의 힘줄들이 뻗어가다 해안에 이르러 급하게 멈춘 듯, 가파르게 바다를 향해 떨어져 내리는 부산의 산줄기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일컫는다. 언덕길을 돌아올라 산복도로 중에서도 부산항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는 망양로에 내렸다. 망양로 아래가 바로 초량동이고, 그 언덕배기에 어깨를 붙이고 자리한 집들을 훑고 내려가면 부산역이 나온다.
원래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마을들은 초입에 양민들의 집이 지어지고, 경치가 좋고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높은 곳에 마을 어르신 역할을 하는 반가가 자리 잡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 근대 이후 발전한 부산이나 목포 같은 개항기 항구도시들은 부두나 시장에서 일하기 위해 찾아든 노동자들이 기존의 주거지보다 점점 위쪽으로 숨 가쁘게 올라가 산동네에 정착했다. 경사지에 빼곡하게 채워진 집들은 6ㆍ25전쟁 이후 폭발적으로 유입되는 인구를 도시 인프라가 미처 감당하지 못한 결과일 것이다.
초량동 언덕에서 가장 바다가 잘 내려다보이는 자리에는 시인 유치환이 경남여자고등학교 교장을 두 번 지낸 인연을 모티브로 만든 ‘유치환의 우체통’이 있었다. 모두가 들어 알 만한 명사의 태어난 곳, 살았던 곳, 세상을 뜬 곳들이 저마다 이름을 빌려 사업을 벌이는 것도 참 어색한 일이지만, 그 작은 우체통은 제법 정감이 갔다.
요즘은 어느 도시나 주거와 상업 공간이 잘 짜인 도시계획 하에서 만들어지는 신도심으로 사람들이 이동하면서 유서 깊은 원도심이 쇠락하게 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 등의 성공 이후 많은 지방자치단체가 오래된 길에 이름을 붙여 의미를 만들고 관광지화하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부산 역시 초량이바구길에 이어 산복도로 주변 지역 재생사업을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인위적으로 무엇을 덧붙이지 않아도 되는 장소의 가치가 굳이 예산을 들여 시행한 불필요한 덧칠로 훼손될까 봐 쓸데없는 걱정이 앞선다.
제2부 풍경을 굽이굽이 담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 하는 삶의 터전_ 서울 북아현동 골목
아현동에서도 특히 신촌 방향으로 이화여자대학교와 경기대학교 사이에 있는 북아현동은 그 규모와 경사도, 복잡한 정도로 볼 때 우리나라 모든 골목을 통틀어 최고라 할 만하다. 무악재 안산에서 흘러내려오는 산의 흐름이 금화터널을 품고 마포 쪽으로 가는 중간에 생긴 북아현동은 그렇게 언덕과 골짜기를 메우며 집들이 들어섰던 동네다. 워낙 자유롭게 자리 잡고 지어진 덕에 북아현동 골목의 표정은 정말 재미있다. 다양한 형태의 집과 대문,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쑥불쑥 나타나는 계단과 예상할 수 없는 골목길 등 언제 거닐어도 그 안을 다 알 수 없고 흥미가 닳지 않는 곳이다.
을지로에서 태어나 서울 한복판에서 자란 나에게 골목이란 아주 편안한 안식처였으며 세상에 다시없는 놀이터였다. 그러다 아현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그때 골목 안에 여전히 초가와 판자로 지은 집들이 남아 있는 모습을 생전 처음 보았다. 아현동 골목은 그 형태가 을지로와는 사뭇 달랐다. 을지로 골목도 복잡하다고는 하지만 나름의 질서와 방향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평지였다. 그러나 아현동은 골목이 다양한 경사로 이루어져 사뭇 삼차원적이며 입체적이었다. 그리고 방향성이나 체계가 아주 달랐다. 집들이 들어서 있는 골목은 경사로 이어지다가 급기야 하늘에라도 오를 듯 솟구쳐 있는 계단을 만나 한참 기어 올라가기도 했다. 그런데 그 경사로를 올라 위에 올라갔을 때 시원하게 도시를 내려다보는 맛이 을지로 골목에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었던 특이한 경험이었다.
아현동은 애오개 혹은 아이고개라는 이름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라고 한다. 고개가 높아서 올라가며 ‘아이고’ 해서 그렇다는 말도 있고, 아이의 무덤이 많아서 그렇다는 말도 있다. 예전에 북아현동에 어린 나이에 죽은 사도세자의 큰아들 의소의 무덤인 의령원이 있었다고 한다. 두 가지 설 외에도 다양한 이유가 있었는데, 모두 들어보면 그럴듯하고 재미있다. 동네의 이름은 단순히 명칭일 뿐 아니라 상징이며 상상이며 무엇보다 어떤 장소의 실존적 증명이다. 이런 이름들을 도로명으로 획일화하는 것은 입체를 평평한 판 위에 올려놓고 평면적으로 펴고 두들겨서 그 성질을 없애는 것과 똑같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로 위주로 구성된 서양의 도시 체계와 다른 우리나라의 도시 체계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물론 북아현동 골목이 아주 오랜 역사를 품고 있거나 그곳에 대단히 중요한 유적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연 발생적으로 집을 짓고 길을 만들고 했던 우리의 근대와 현대의 시간이 오롯이 남아 있는 곳이다. 서울 사대문 안 동네들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체계를 조금씩 개선하며 유지되었지만, 성 밖 동네들은 근대화 시기에 서울로 인구 유입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급속한 팽창이 이루어질 때 생겨난 동네가 많다.
박완서의 소설을 보면 그 당시 서울의 성 밖 동네 모습을 볼 수 있다. 특히, 『엄마의 말뚝』이라는 작품을 통해 현저동 언덕 동네에 다닥다닥 붙어 있던 집들과 골목에 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어머니와 오빠와 함께 개성에서 서울로, 언덕 끝에 있는 작은 집으로 이사 들어온 이야기를 듣노라면 우리의 근대가 어떻게 펼쳐졌는지 알 수 있다. 근대화 시기 영국 런던의 골목길과 서민의 애환을 보여준 『올리버 트위스트』를 읽는 듯하다.
그런 의미로 본다면 북아현동이나 현저동 골목길은 우리의 기억이며 추억이기도 하지만 어두운 과거이기도 하다. 지대가 높아서 물이 들어오지 않아 물을 퍼서 머리에 이고 양손에 들고 고갯길을 걸어 올라가야 했고, 날이 추워지거나 눈이라도 오는 날은 엉금엉금 기어서 오르내려야 했던 ‘경사진 삶’의 터전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기회가 되면 미련 없이 그 동네들을 깔아뭉개고 기억을 지워버리고 치부를 감추어버리는 ‘재개발’을 한다. 물론 그런 불편을 감수하라고 누구에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다. 현저동은 이미 그 기억이며 자취가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고, 북아현동은 지금 개발이 진행 중이다. 반은 깨끗이 지워졌고, 반은 아직 남아 있으며 사람들이 잘 살고 있다.
골목길이 좁고 복잡한 것은 아주 일반적인 특징이긴 하지만, 북아현동 골목길은 그중에서도 도드라져서 자연 발생적으로 생겨나고 가지를 뻗고 그 진행을 예상할 수 없이 흘러나간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다. 그런데 어떤 길이건 그 길을 따라가면 끊어질 듯 절대 끊어지지 않고 흐르지만, 그 골목의 끝은 늘 앞의 툭 트인 호쾌한 전망을 볼 수 있는 정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