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맥주 인문학
이강희 지음 | 북카라반
맛있는 맥주 인문학
이강희 지음
북카라반 / 2018년 9월 / 296쪽 / 15,000원
chapter 1 맥주는 스타일이다
라거와 에일: 독일의 라거, 영국의 에일
과거의 실크로드는 현대에 와서는 자원을 연결하는 송유관으로 변신했다. 바닷길은 더 다양해지고 중요해졌다. 그렇다면 고대의 ‘비어 로드’는 현재 어떤 모습으로 변심했을까?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된 맥주는 이집트를 거쳐 유럽으로 건너가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했다. 현재 맥주는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그중 영국, 아일랜드, 독일, 벨기에, 체코 등 유럽 국가들이 맥주 강대국으로 꼽힌다. 기후가 따뜻한 와인 생산국과 달리 포도 재배가 어려운 북유럽과 동유럽에서는 보리를 원료로 한 맥주가 발달했다.
주요 맥주 국가를 살펴보면, 물의 구성에 따라 종류가 달라진다. 연수로 만드는 체코 쪽으로 가면 라거 전통이 강하고, 영국과 아일랜드 쪽에서는 경수로 빚는 에일의 전통이 강하다. 독일은 ‘맥주의 나라’ 답게 라거를 비롯한 다양한 맥주가 분포되어 있고, 벨기에는 국가 전체가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맥주 문화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남다르다.
벨기에에는 여러 지역의 맥주가 혼재되어 있어, 다양한 맥주를 맛볼 수 있다. 생산량과 소비량으로 보면, 전 세계적으로 저온발효 맥주인 라거가 대세다. 특히 라거 가운데 필스너 계열의 맥주가 전 세계 맥주의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아시아 국가에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맥주는 대부분이 라거다.
‘독일=맥주’의 이미지가 굳어진 것은 15세기 경 독일 바이에른 지방에서 탄생한 라거의 영향이 크다. 전 세계 맥주 소비량을 보면 체코가 1위고 아일랜드가 2위지만 맥주의 본고장으로 독일을 꼽는 것은 이런 배경 때문이다. 그 이전에는 맥주의 효모가 발효를 끝내면 거품과 함께 위로 떠오르는 상온 발효 방식(윗발효)으로만 맥주가 만들어졌는데, 뮌헨에서 저온에서 발효시키는 저온 발효법(아랫발효 또는 밑발효)이 발견된 것이다.
저온발효법은 우연히 발견되었다. 여름에 맥주가 쉽게 상하는 것을 막으려고 수도사들이 맥주를 만든 뒤 온도가 낮은 동굴에 보관했던 방법을 차용한 것이다. 그랬더니 상온 발효와는 달리 깔끔하고 청량한 맥주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동굴에 저장해두었다가 마시다 보니 ‘저장하다’라는 의미인 ‘Lagern’에서 온 ‘Lager’가 고유명사가 된 것이다. 이후 맥주 주조장들은 땅을 파서 지하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에 맥주를 보관했다. 이렇게 라거가 만들어지고 널리 퍼지면서 맥주의 종주국 자리에 서게 된 독일은 맥주 순수령으로 위치를 굳건히 지키며 오늘에 이르렀다. 지금도 오래된 맥주회사에 가면 지하에 저장고를 만들어 사용하는 곳이 많다.
라거가 오늘날처럼 대량유통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반 독일의 맥주 회사 슈파텐의 제들마이어가 영국의 페일 에일 기술을 가져와 페일 라거를 만들면서다. 저온발효 맥주는 처음에는 맥주시장을 장악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저온발효를 저온숙성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저온발효 맥주가 상온발효 맥주를 누르고 주류가 된 것은 1950년대부터다. 뉴질랜드의 모턴 W. 쿠츠가 저온 발효 맥주 생산기간을 크게 단축시키는 연속발효 공정을 개발했다. 연속발효 공정을 도입한 대형 맥주 업체들은 라거를 만들어 유통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상온발효 맥주들을 누르고 저온발효 맥주가 전 세계 맥주 시장을 석권하게 되었다. 그 이후 라거의 대세는 이어지고 있다.
기네스: 세계를 사로잡은 맥주
1725년 아일랜드 킬데어주 셀브릿지에서 태어난 아서 기니스는 27세던 1752년에 대부인 프라이스 대주교에게 100파운드를 물려받아 레익슬립에 양조공장을 세웠다. 그리고 1759년 12월 31일, 더블린에 있는 가동이 중지된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에 있는 맥주 양조장을 임대했다. 임대 기간은 자그마치 9,000년이었고, 계약금 100파운드에 매년 임대료를 45파운드 내는 조건이었다.
더블린시는 리피강 둔치 옆 늪지대에 있는 폐양조장이 골칫거리였다. 공짜로 준다고 해도 사용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는데 영원히는 아니지만 오래 사용하면서 임대료까지 내겠다니 계약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더블린시는 아서가 마음을 바꿀까 봐 계약을 서둘렀다. 아서 기니스에게는 4에이커(약 1만 6,000제곱미터)의 부지에 방앗간과 마구간, 200톤의 건초 더미를 저장할 수 있는 규모의 헛간이 달린 공장을 푼돈으로 얻는 횡재였다.
어찌되었든 아서 기니스와 더블린시는 서로의 이해타산이 맞는 만족스러운 계약을 했고, 한 장의 계약서를 작성했다. 계약서는 아일랜드어도, 영어도 아닌 라틴어로 작성했다. 당시는 중요 문서를 라틴어로 작성했는데, 아서 기니스가 변심할 것을 걱정한 더블린시가 아서 기니스가 모르는 라틴어로 계약서를 썼다는 유머도 있다. 이렇게 작성된 한 장의 계약서로 기네스의 화려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계약을 마친 아서 기니스는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 브루어리를 설립해 맥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기타 첨가물은 넣지 않고 맥아, 홉, 효모, 물 4가지를 사용해서 발효했다. 구운 맥아를 사용해서 매혹적인 검은색을 만들어냈다. 양조를 시작한 지 10년이 되어가던 1769년 영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하면서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영광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처음에는 에일을 생산했으나, 1799년부터는 흑맥주에 집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맥주가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기네스다. 기네스는 현재 약 150개 나라에서 매일 1,000만 잔 이상 팔리는 히트 상품이다.
하지만 기네스는 세계적인 상품이기 전에, 우리의 막걸리와 유사한 ‘노동주’였다. 우리 조상이 쌀이나 보리, 옥수수 같은 곡물로 빚은 막걸리를 새참 대신 마신 것처럼, 아일랜드 조상들도 맥아로 빚은 기네스가 식사 대용이 된다고 생각했다. 민간에서는 뼈를 튼튼하게 해준다는 속설이 돌아 출산 후 뼈가 약해진 산모에게 기네스를 마시게 했고 자양강장제나 약으로 처방하기도 했다. 실제로 알코올 때문에 주목받지 못하긴 하지만 맥주에는 비타민 B군과 미네랄 등 여러 영양소가 들어 있어 전혀 틀린 말은 아니다.
기네스 캔 안에 있는 위젯은 1988년에 만들어진 질소가스와 함께 넣어졌다. 이 위젯의 질소가스로 기네스 맥주 특유의 부드러운 거품을 맛볼 수 있다. 기네스 맥주가 탄생한 250주년이던 2005년에 ‘아서 기니스 데이’가 열렸고, 매년 이어지고 있으며 55개국에서 열릴 정도로 확산되고 있다. 물론 회사 측에서 다양한 홍보와 기획을 했지만 팬들의 호응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칼스버그: 맥주의 정상에 서다
칼스버그는 덴마크어로는 ‘칼스베어’에 가깝게 발음한다. 독일의 물리학자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의 원리를 만들 때 후원해주었다고 해서 우스갯소리로 ‘물리학자의 공식 맥주’라고 불리기도 한다. 칼스버그는 크리스티안 야콥센의 가족 경영으로 시작되었다. 크리스티안은 1700년대 초반 코펜하겐에서 소규모로 맥주 양조업을 시작했다. 그 당시 덴마크에는 2가지 맥주가 있었다. ‘맛있는 맥주’와 ‘맛없는 맥주’다. 맛있는 맥주의 대부분 주변 국가에서 수입한 맥주였고 맛없는 맥주는 거의 덴마크 맥주였다. 당시만 해도 덴마크 양조는 주먹구구식이어서 온도계를 사용하는 크리스티안은 ‘맛있는 맥주’를 만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아들인 야콥 크리스티안 야콥센은 대를 이어 맥주 양조업에 뛰어들었다. 야콥이 맥주 양조에 뛰어든 시기는 나폴레옹전쟁 이후 유럽 전역이 전쟁 후유증으로 황폐해져 있을 때였다. 맥주 양조의 대세도 변하고 있었는데, 바이에른에서 시작된 라거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던 무렵이었다. 호기심이 강했던 야콥은 바이에른에 가서 유명한 양조업자를 찾아 저온 발효 기법을 배워왔다.
야콥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양조장에서 새롭게 배워온 발효법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할 맥주를 생산하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야콥이 도입한 새로운 방식이 사람들의 입맛에 맞아 맥주 판매량이 크게 늘었다. 이 방식으로 만든 맥주는 저온에서 발효해 알코올 함량은 적고 부드러운 향미가 느껴졌다.
야콥은 자신이 모은 돈과 어머니가 상속받은 돈을 합쳐 새로운 양조장을 세웠다. 덴마크 최초의 철도가 지나는 지역 바로 옆에 있는 언덕이었다. 1847년 24세의 청년이던 야콥은 아들 카를의 이름과 양조장이 있던 베스테르브로 끝의 언덕을 합쳐 칼스버그라는 이름을 만들었다.
맥주의 품질 향상을 위해 좋은 효모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았던 야콥은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연구를 위해 1874년 화학부와 생리학부로 구성된 칼스버그 연구소를 설립하고 에밀 크리스티안 한센을 고용한다. 한센은 이 연구소에서 순수 효모 배양법을 개발하고 실용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기술로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게 가능해졌다.
한센은 칼스버그만의 독특한 맛을 구현한 효모에 ‘사카로미세스 칼스베르겐시스’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이미 발견된 효모와 같은 종으로 분류되어 이 이름은 사라졌다. 하지만 영광은 시들지 않았다. 칼스버그는 이 발견을 다른 양조 업체에 무상으로 제공해 맥주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산업화를 앞당기는데도 혁혁한 공을 세웠다. 지금도 칼스버그 연구소에서는 맥주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100여 명의 과학자가 맥주의 맛을 높이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칼스버그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맥주의 봉우리가 되고 싶었던 것일까?
하지만 야콥은 이후 그렇게 사랑했던 아들 카를과 기나긴 맥주 전쟁이 벌이게 되었다. 1867년 양조장 화재를 계기로 야콥은 새로운 냉장 시스템을 설치하는 등 양조장을 현대화했다. 이 시기 카를은 양조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카를은 사업보다 예술품 획득에 열정을 쏟았는데, 야콥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전통을 중시하던 보수적인 야콥과 진취적인 카를은 마찰을 빚었다. 야콥은 상온 발효 맥주와 저온 발효 맥주를 함께 생각하고자 했고 카를은 모든 생산 라인을 그 당시에 유행하던 플젠 라거로 전환해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카를은 자신만의 맥주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카를은 아버지의 양조장 옆에 본인의 양조장을 지었다. 카를은 칼스버그 맥주의 양조법을 발전시키고 판매량을 늘려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맥주가 양조되는 과정을 절반으로 줄여 생산량을 2배로 늘렸다. 카를의 ‘신칼스버그’는 아버지의 ‘칼스버그’ 판매 실적을 추월했다.
카를이 신칼스버그 맥주 생산량만 늘리자, 야콥은 법적인 제재를 가해 신칼스버그의 생산량을 줄이도록 했고, 브랜드도 바꾸도록 했다. 양조주 이름까지 바꿀 것을 요구하는 등 부자간의 송사는 계속되었다. 두 사람의 분쟁으로 직원들까지 갈등의 골이 깊어졌지만 결국에는 가족의 중재로 갈등을 매듭지을 수 있었다.
야콥은 카를에게 손을 내밀어 로마 여행을 청했고, 여행을 하면서 부자는 관계를 회복했다. 그러나 화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야콥이 숨을 거두었다. 카를은 야콥의 유해와 같이 돌아왔다. 극적인 화해는 이루어졌지만 오랫동안 분쟁이 있었던 탓에 모든 유산은 칼스버그 재단으로 넘어갔다. 카를은 단 한 푼의 유산도 상속받지 못했지만,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켜 품질 좋은 맥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칼스버그는 1904년 덴마크 왕실 공식 맥주로 선정되었다.
야콥은 과학에 관심이 많았다. 칼스버그 재단을 설립해서 양조뿐만 아니라 과학 전반에 많은 기여를 했다. 카를은 예술과 문화에 관심이 많았다. 새로운 칼스버그 재단을 세워서 덴마크의 예술을 발전시키고 많은 예술인을 후원했다. 유명한 인어 공주상도 이러한 결과물 중 하나다. 카를의 아들 헬게 야콥센은 조각이나 조형에 관심이 많던 아버지의 대를 이어 자신은 회화에 관심을 갖고 예술가에게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야콥의 재단과 카를의 재단은 1906년 하나의 재단으로 통합되었다. 재단 운영과 맥주 사업으로 생긴 이익금은 과학과 예술에 투자하고 있다. 특히, 맥주 양조에서 생기는 이익은 공익사업에 투자하고 있다.
덴마크 국민들은 칼스버그 맥주를 마시는 것을 단순한 음주를 넘어 과학과 예술에 기여하는 것으로 여겨 자랑스러워한다. 사회 기여 측면에서 마땅히 박수를 받을 만하다. 국가와 기업의 선순환에 대한 훌륭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칼스버그는 기업의 사회적 공헌에 따라 나라가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칼스버그가 지금도 덴마크 국민들에게 사랑받는 기업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은, 이들 부자의 나라 사랑 정신 덕분이다.
chapter 2 맥주의 모험
맥주와 기업: ‘수입 맥주 4캔 1만 원’의 함정
편의점의 ‘수입 맥주 4캔 1만 원’은 최근 우리나라 맥주 시장을 크게 키웠다. 수입되어오면 운송비가 많이 들 텐데도 국산 맥주와 큰 차이 없는 가격에 팔리고 있다. 요즘 웬만한 맥주는 4캔 1만 원에 구입할 수 있다. 편의점은 물론이고 대형마트에서는 더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취향에 따라 미국ㆍ유럽ㆍ일본ㆍ중국ㆍ호주 등 다양한 나라의 맥주를 원할 때 마실 수 있다. 그에 비해 우리나라 맥주를 찾는 손길은 안타까울 정도로 적다. 국내 맥주 회사들은 판촉이나 할인으로 붐을 일으킬 만도 한데, 전혀 그런 움직임이 없다. 수입 맥주의 적극적인 공세에 전의를 잃은 병사 같다.수입 맥주의 인기 덕분에 무역에서도 적자가 발생했다. 1억 달러나 된다. 한때 와인 수입으로 재미를 보았던 주류 수입 유통 업체들도 맥주로 갈아타고 있다. 맥주는 2017년 7월부터 와인과 양주를 제치고 주류 수입 1위를 기록하고 있다. 품목도 2016년에 비해 2017년에는 2배 이상 다양해졌다.
농촌진흥청에 따르면, 2012년에는 국산 맥주 구입 비중이 60퍼센트에 육박했지만, 2017년에는 60퍼센트 밑으로 떨어졌다. 그 자리를 수입 맥주가 고스란히 차지했다. 관세청에 따르면, 2017년 우리나라 맥주 수출액은 1억 1,245만 달러였는데, 맥주 수입액은 두 배가 넘는 2억 6,309만 달러였다. 무역 수지는 2012년 577만 달러 적자에서 5년 동안 25배가 증가했다.
앞으로는 더 문제가 크다. 국산 맥주 회사는 이러한 상황을 역전할 계획도, 노력도 없어 보인다. 우리나라에서는 한ㆍ미 FTA로 2018년 1월부터는 미국 맥주에 대한 관세가 없어졌고 7월부터는 유럽 맥주에 대한 관세도 사라졌다. 수입 맥주는 더욱 저렴해진 가격과 다양한 스타일을 내세워 적극적으로 시장을 공략할 것이다. 맥주 시장이 잠식당하는 위기 상황이지만 정작 당사자인 대기업들은 이미 따로 밥그릇을 챙겨놓아서 걱정이 없다. 하이트진로나 롯데주류, 오비맥주가 이렇게 조용한 것은, 이들이 외국 맥주를 수입해서 판매ㆍ유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설렁탕집 주인이 설렁탕을 많이 팔기 위해 맛을 개발하는 게 아니라 잘 팔리는 옆집 설렁탕을 사다가 팔고 있는 것과 같다.
수입 맥주의 판매가 증가할 때마다 국내 회사의 맥주는 판매가 감소하는데, 기존 맥주의 매출과 영업이익 감소분을 수입 맥주의 매출과 영업이익 증가분으로 채우는 것이다. 각 회사가 대외비를 이유로 정확한 데이터를 공개하지 않고 있지만, 이런 이유로 수입 맥주의 판매량이 늘어도 맥주 회사들은 크게 타격을 받지 않는다. 경쟁력을 높일 생각을 하지 않고 경쟁 업체의 제품을 팔아서 이익을 챙기는 구조는 문제가 있어 보인다. 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맥주 산업 보호와 경쟁력 확보를 위해 수입 맥주에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다.
거기에 오비맥주는 다국적기업에 넘어간 지 오래다. 이젠 우리나라 기업이 아니라 우리나라 맥주 산업에는 더욱 관심이 없다. 다른 회사들도 국내 소비자의 다양한 취향을 이유로 수입 맥주 판매를 늘리고 있다. 문제는 그렇다면 소비자들의 다양한 취향에 맞추어 다양한 맥주를 내놓아야 할 텐데, 연구 개발비와 시간을 줄이기 위해 간편하고 효과가 빠른 수입 맥주로 방향을 잡은 것이다.
이런 모습을 볼 때면, 우리나라 맥주의 미래가 전혀 밝아 보이지 않는다. 이런 회사들의 맥주를 그동안 마셔준 게 아까울 지경이다.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국내 회사의 제품을 팔아줄 필요가 없다!’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수입 맥주를 마셔도 어차피 대기업에 이익이 되는 구조다 보니 한숨만 나온다. 이런 기업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라가 흥해도 잘살고 나라가 망해도 잘살았던 사람들이 떠오른다. 소비자의 니즈는 수입 맥주를 마시고 싶은 게 아니라 다양한 맛을 느끼고 싶은 것인데, 맥주 회사들은 왜 본질을 못 보고 있는 것일까? 좀 더 연구ㆍ개발해서 소비자의 기호를 맞추면 안 되는 것일까? 국가를 대표한다는 자부심이나 감성은 없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