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생목록
재생목록이 비어 있습니다.
-
-
0:00 0:00
화면 너비 (여백)
좁게
보통
넓게
최대
배경 테마
글꼴
바탕/명조
돋움/고딕
글자 크기
작게
100%
크게
줄 간격
좁게
보통
넓게

과학으로 쓰는 긍정의 미래

랑가 요게슈바어 지음 | 에코리브르



과학으로 쓰는 긍정의 미래

랑가 요게슈바어 지음

에코리브르 / 2018년 8월 / 416쪽 / 20,000원





새로운 것 : 미래 - 시각의 문제



고장 난 커피머신

“이 멍청한 커피머신이 뭣 때문에 마이크로프로세스가 필요하다는 거야?” 내 아내는 커피머신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자 또다시 수리 센터에 보내야 해서 매우 화가 난 상태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전기 오븐에 물을 끓였다. 커피용 주전자에 물을 담아 종이 필터에 부었다. 이렇게 해도 되었다! 커피 향이 느껴지는 동안, 이런 의문이 들었다. 우리는 왜 전자동 기계를 만들었을까? 이런 커피머신은 멋져 보인다. 원두는 그 자리에서 신선하게 갈리고, 그러면 버튼 하나로 우리는 진한 커피를 마실지 연한 커피를 마실지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커피 잔을 머신 밑에 갖다 두면 끝이다.

하지만 우리 집 커피머신은 이런 요술을 부릴지도 모르고 평범한 커피조차 만들어내지 못한다. 나는 수동으로 준비한 커피 필터에 물을 부었다. 물이 필터를 통과하면서 내는 소리는 예전부터 익숙하다. 처음에 물은 재빨리 흘러들지만 이내 점점 느려지고, 마침내 물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물에 젖은 커피가 필터를 통과해 흘러나온다. 이때 커피는 꽃을 재배하는 축축한 옥토(沃土)처럼 보인다.

그런데 전자동 커피머신의 경우는 커피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잘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언뜻 떠올랐다. 원두를 갈고, 물을 데우고, 일정한 양을 필터로 거르는 이 모든 과정이 우리에겐 보이지 않게 작동한다. 내가 아는 것은 오로지 마지막에 나오는 결과물일 뿐이다. 아무튼 커피머신은 지극히 편리한 물건임에도 나는 옛날부터 해오던 방식이 더 좋다. 직접 커피를 내리는 핸드드립을 해보면, 커피를 만드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하지만 커피머신의 경우는 그냥 버튼만 누르면 그만이다.

주체와 객체라는 질서가 문득 떠오른다. 즉, 전자동 커피머신이 명령을 내리고, 나는 복종해야만 한다. 기계는 물을 더 채우라는 요구를 할 때도 많다. 그런 요구야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지만, 녹색 디스플레이에 이런 문구가 뜰 때면 슬프다. ‘찌꺼기를 비우시오.’

전자동 커피머신은 점점 과도한 기술에 포위당하고 있는 우리의 세계를 보여주는 단순한 예에 불과하다. 오늘날의 자동차 엔진은 나사를 풀 수 없는 케이스에 담겨 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동차 수리업체에 가야 한다. 스마트폰 역시 나사 같은 것을 아무리 찾아봐도 없다. 기술 발전이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 수리를 할 필요도 없다. 플라스틱 부분이 깨지거나 막이 찢어져도 수리하기 힘들다. 우리 소비자는 진보가 일어나는 내면의 세계로부터 배제되어 있으며, 버튼을 누르거나 마우스를 사용하는 사람으로 전락했다. 이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생겨난다.

우리는 그야말로 1세대 혹은 2세대 만에 독자적이고 자급자족에 능한 사람에서 종속적인 소비자가 되고 말았다. 이것이 바로 진보가 보여주는 하나의 특징이며, 세계는 지금처럼 빠른 속도로 심도 있게 발전한 경험이 지금껏 없었다. 우리의 어머니, 할머니, 증조할머니는 미래를 천천히 진행되는 과정으로 체험했다. 그들의 세상은 과거에 뿌리를 두었고, 현재와 미래는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부터 성장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적응할 시간이 충분했다. 그런데 어제만 하더라도 우리의 그리움과 희망을 투시하던 미래로부터 그사이 ‘파괴적’ 변화가 생겨났고, 이 과정에서 혁신이라는 것이 현실을 그야말로 급격하게 몰아내고 있다. 그 누구도 이런 변화를 인지하지 못한다. 어느 날 갑자기 마른하늘에 번개가 치듯 우리의 현실을 때릴 때에야 비로소 인식한다.

우리는 이처럼 어제와 내일 사이에서, 견해의 고수와 갱신 사이에서,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서 끔찍한 불협화음을 경험하고 있다. 오래된 규칙과 관례는 사회적 토론을 거치지 않은 채 타당성을 잃어간다. 우리는 수많은 전통과 관습으로 이뤄진 믿음직한 집에서 쫓겨나 갑자기 방향을 잃고 진보라는 거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새로운 인류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피카소), 많은 사람은 그와 같은 모순적 요구를 감당할 수 없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자유라는 공간은 점점 좁아지고, 노동 과정 또한 점점 양적으로 계산 및 평가를 받는다. 한편으로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경쟁을 펼치는 가운데 점점 통제권을 양보하고 있다. 우리는 획일적이고 융통성 없이 일해야만 하고, 철저한 투명성을 지향하는 까닭에 우리와 기계를 구분해주던 마지막 특징마저 사라질 지경이다. 우리는 자유가 중요하다는 계몽도 그만두고, 개인에게 변화를 창조할 힘이 있다고 계몽하는 노력도 그만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그와 같은 계몽이 자체의 법칙을 주장하며 우리를 훨씬 차원 높은 논리의 포로로 만들까?

디지털 혁명: 빅 데이터의 시대가 열렸다. 그런데 21세기의 빅 데이터는 18세기의 증기 기관이나 19세기의 전기와 그 의미가 같다. 요컨대 근본적 혁명이라는 얘기다. 현재 우리는 시대가 바뀌는 시점을 경험하고 있다. 한때 중세 시대가 르네상스로 인해 해체되고, 모던하다고 부르던 시대가 사회를 뒤흔들어 놓았듯 말이다. 이처럼 역사적인 시대에는 새로운 기술이 사회를 바꾸고, 또한 우리가 스스로에 대해 갖는 견해, 곧 자화상이라는 것도 바꾼다. 디지털 혁명은 우리 자신도 바꾼다. 이런 진보를 수동적으로 맞이하느냐, 아니면 능동적으로 참여해 함께 만들어나가느냐는 우리 스스로에게 달려 있다. 어쩌면 우리의 후세는 이런 변혁의 시기를 경험한 우리를 부러워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르네상스를 떠올리면서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을 경탄해마지 않듯이 말이다.



마법 : 디지털 마법에 대하여



인간과 컴퓨터 - 누가 누구를 프로그래밍하는가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생겨나기 전에 사람들은 여행을 가면 다른 방식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바로 편지를 썼다. 이런 방식의 대화는 지금의 방식과는 어느 정도 차원이 달랐다. 다시 말해, 편지를 쓰면 사람들은 평범하고 세속적인 일은 표현하지 않고 한층 심오한 생각과 감정에 집중했다. 여행을 떠나면 집에 남아 있는 사람들로부터 해방되고, 낯선 곳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할 기회도 생긴다. 모든 여행은 그 자체로 선택한 고독이자 자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처럼 침묵하던 시대는 이제 지나갔다. 우리는 결코 완전히 여행을 떠날 수 없게 되었다. 내 아내는 어디에 있든 늘 4명의 아이들과 왓츠앱을 통해 대화를 나눈다. 온갖 장점에도 언제 어디서든 대화가 가능한 이런 삶은, 다른 사람과 떨어져서 나 스스로를 경험하는 일을 방해한다. 즉,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받는 인상, 나에게 생긴 일을 직접 이해하는 작업, 대화를 나누지 않고 기다리는 동안 생기는 긴장감 등은 흔히 내적으로 성숙해지는 원동력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소외된 채 이루어지는 깊은 사고는 순간순간의 인상을 필터로 거르지 않고 그대로 표현하는 대화의 물결에 밀려나고 말았다. 개인적 체험은 집단에 소식을 전달하고자 하는 과정으로 인해 멀어졌고, 각자가 겪는 현실은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체험하는 가상현실이라는 냄비에 통합된다. 따라서 우리는 체험하는 순간 다른 사람을 위한 현실을 생산해내는 셈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가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혹은 무슨 옷을 입고 있는지 전한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멀리 떠났다가 친구들을 다시 만나면, 그들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할까? 모든 사연을 이미 교환하지 않았던가?

가상 세계와 지속적으로 교환함으로써 일상의 질서가 무너졌다. 언제라도 연락할 수 있으므로 일과 여가 사이를 구분하기도 힘들어졌다. 우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늘 ‘on’ 상태에 있다. 여가 시간인지 휴가 중인지도 무시하고 우편물 또한 끊임없이 온다. 일에 휴식이 없다면, 도대체 휴가의 의미가 뭐란 말인가? 그래서 나는 매우 극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휴가 중에 이메일이 오면 다음과 같은 답장을 하도록 자동으로 설정해둔 것이다.

“나는 휴가 중이며 이메일을 일부러 ‘오프라인’으로 설정해두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메일도 읽지 않을 테니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도착한 메일은 모두 삭제합니다! 중요한 일이라면, 당신의 메일을 xx년 yy월 zz일 이후에 보내주십시오. 그때부터 내 전자메일은 다시 정상으로 가동될 것입니다. 이런 행동이 당신에게 극단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하는 시대에 나도 집중을 하고 거리를 두는 게 정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기계와 맺은 협정은 결코 일방통행이 아니다. 지속적으로 최적화하다보면 직선이 아니라 우회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삶의 흥분을 무시할 것이고, 우리의 다양성은 적절한 단일성으로 축소되고 말 것이다. 우리 모두가 과소평가하고 있는 것은 이런 과정이 지닌 규범적 힘이다. 컴퓨터와 인간 중 결국 누가 누구를 프로그래밍할지는 우리가 인간으로 남아 있고 인간이 지닌 부족함을 수용하고 그 안에서 알고리즘이 결코 알 수 없을 모든 아름다움을 파악할 수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다.



지식 : 교육과 문화의 역사



더 많이 이해하고자 하는 우리의 노력

내 아이들은 그야말로 ‘디지털 원어민’ 세대에 속한다. 그들은 디지털 세계가 제공하는 온갖 편리함을 누리며 자랐다. 인터넷, 내비게이션, 스마트폰 그리고 인터넷에서 무슨 질문이든 하면 답을 해줄 앱이 있다는 독특한 상상을 하는 세대다. 이들은 휴대전화를 많이 사용하는 이른바 ‘엄지족’에 속하며, 궁금한 것은 물론 친구들과의 대화도 휴대전화로 해결한다. 그들의 세계는 스카이프, 페이스북, 왓츠앱, 유튜브, 위키피디아 혹은 스포티파이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세계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그러니까 겨우 20년 되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이 세대들이 늘 이용하는 기술처럼 놀라운 발전을 한 분야는 없다. 새로운 것이 오래된 것을 대체하고, 출시한 지 몇 년밖에 안 되었음에도 새로운 소프트웨어가 등장하면 성능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그 컴퓨터를 폐기하곤 한다. 우리의 과거도 미래와 비교해보면 성능이 떨어지는 것일까? 인식이란 오랜 기간에 걸쳐 흥분되고도 힘든 과정을 거친 뒤 얻는 결과다. 우리의 과거를 살펴보면, 조상 세대들이 오늘날 우리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다.

박물관과 문서 보관실에 들어가면 우리는 늘 현재로 끝나는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독일 드레스덴의 츠빙거 박물관에 있는 ‘수학-물리학 살롱’의 전시물을 근거로 나는 어떻게 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 설명해주고 싶다. 번쩍번쩍 빛나는 아스트롤라베(Astrolabe), 혼천의, 화려하기 짝이 없는 천구와 오래되었으나 경탄을 자아낼 정도로 아름다운 황동 시계는 우리에게 과거의 역사를 이야기해준다. 이런 진열품은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발명품이고 세부적인 것까지 신경을 쓴 흔적이 담겨 있다. 이런 진열품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하는 사람은 그 천재성을 알아차릴 수 있다. 이는 우리 조상의 열정적인 지식욕을 보여준다.

이 시기에는 사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었고, 지식에 대한 욕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를 측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아우구스트 선제후와 그 후계자들이 1560년부터 과학 기구, 천문 관련 도구와 정교하게 만든 기계를 예술품으로 수집했고, 그 후 1728년 드레스덴의 츠빙거에서 아우구스트 2세(1670~1733) 집권 때 ‘수학 및 물리 도구를 모아두는 왕실의 전시실’이 독자적인 박물관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 덕분에 우리는 이런 발전 과정을 추적할 수 있다. 선제후는 1587년까지 수십만 개의 물품을 수집했고, 그중 450여 개가 과학 도구였다.

이런 전시품 가운데 하나가 특히 내 마음에 든다. 13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으며, 가장 오래 보존되어 있는 천구 중 하나다. 이것은 오늘날 이란 북부에 위치한 마라가 천문대에서 나온 것 같다. 이 천구에는 48개의 별자리와 1000개의 별이 그려져 있다. 황동으로 된 천구 표면에는 천문학자 무하마드의 아들 무아이야드 알딘 알우르디라는 이름이 있다. 우르디는 당시 통용되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에서보다 행성의 궤도를 훨씬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수학 모델을 개발했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우르디는 지리적 모델에서 출발했지만, 그가 내린 해석은 가히 근본을 흔드는 파괴력이 있었다는 것이다. 수학적으로 봤을 때 그의 계산은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저서를 발표함으로써 천체학의 전환기를 이끈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에 상응했다.

오늘날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 간의 심각한 갈등으로 인해 ‘악의 축’ 같은 표현이 나돌고 있지만, 사실 별을 정확하게 살펴보면 정반대의 현상을 관찰할 수 있다. 그리스-라틴어 이름이 붙은 오리온자리(Orion), 백조자리(Cygnus), 큰곰자리(Ursa Major) 혹은 독수리자리(Aquila) 같은 별이 빛나는 가운데, 아랍 이름을 가진 밝은 별들도 빛나고 있다. 알데바란(Aldebaran), 알골(Algol), 알타이르(Altair), 데네브(Deneb) 혹은 리겔(Rigel)처럼. 이렇듯 오래된 천체 지도와 천구가 전하는 메시지는 우리에게 희망을 선물하며 모범을 보여준다. 하늘에서는 2개의 문화가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르디의 천체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또 다른 천체의가 있는데, 1515년 밤베르크 출신의 요한 쇠너가 완성한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사는 지구, 아니 좀 더 자세히 표현하면 그 당시 알고 있던 지구가 그려져 있다. 이로부터 4년 후 페르디난트 마젤란은 다섯 척의 배와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춘 함대를 이끌고 세비야를 출발했다. 향료 생산지를 찾기 위해서였는데, 이로써 그는 태평양에 발을 내디딘 최초의 유럽인이자 지구를 한 바퀴 돌아본 사람이 되었지만, 요한 쇠너의 천체의는 이와 같은 역사적 발견 여행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태평양을 여행해본 사람이 없어 미국 서부 해안은 완전히 미지의 장소였다. 천체의를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대단한 발견에 동참한다. 그리고 그 작은 표시 하나하나는 인류가 인식의 길로 나아가는 중요한 단계였음을 의미한다.

1568년 뉘른베르크에서 완성된 요하네스 프레토리우스의 천체의에는 경도의 기준인 본초자오선이 마드리드를 통과하고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권력의 중심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체험할 수 있다. 1718년에는 파리가 세계의 배꼽이었지만, 1738년부터는 그리니치가 본초자오선이 지나가는 중심이었다.

세계를 측량하는 것은 국가의 권력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과학 도구는 어두운 세계에 빛을 가져다줄 뿐 아니라 부와 명예도 안겨준다.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한때 나침반을 통해 막강한 제국이 되었듯, 오늘날에는 디지털 서버와 플랫폼이 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이렇게 오래된 물건이 우리에게 보내는 핵심 메시지는 본질적 성격을 띤다. 즉, 오늘날의 세계 질서 역시 변화를 거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위대한 제국도 결국은 멸망해 다른 나라에 자리를 내주었기 때문이다. 천체의를 전시한 방 옆에는 피스톤 진공 펌프들이 있다. 오래된 도시 마그데부르크의 시장 4명 중 한 명이던 오토 폰 게리케는 펌프의 새로운 역사에 몰두했다. 1649년 피스톤 진공 펌프를 발명한 그는 이때부터 진공 기술이 창시자로 여겨졌다.

놓쳐버린 기회: 전 세계가 뛰어들어 펼치는 경쟁에서 혁신이 일어나는 장소에 대한 의문 역시 새로운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오토 폰 게리케는 진공 펌프를 발명함으로써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이상 기체 법칙을 연구하고 확립하는 실험에 근접했다고 볼 수 있다. 압력, 가스의 부피와 온도 사이의 확고한 관계를 연구하는 것 말이다. 이는 기술적으로 당시의 도구들로 가능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요소의 근본적 관계를 알아낸 사람은 1662년 아일랜드 사람 로버트 보일이었고, 이는 오늘날까지 보일-마리오트의 법칙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왜 작센 출신의 남자 게리케가 아니었을까? 작센에는 당시 상당히 현대적인 도구가 많았지만, 계속 연구하고자 하는 의지가 부족했다.

전문 열람 제한

미가입 상태이므로 요약본의 일부만 제공됩니다.
더 깊이 있는 내일의 통찰력과 지식 에너지를
프리미엄 무제한 이용권으로 충전해 보세요!

멤버십 가입 / 결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