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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전, 그 법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다나카 이치로 지음 | 사람과나무사이
400년 전, 그 법정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나?



다나카 이치로 지음

사람과나무사이 / 2018년 8월 / 270쪽 / 16,000원





갈릴레오를 사랑했던 나폴레옹



1798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로마를 침공했다. 나폴레옹은 교황 비오 6세의 퇴위를 촉구하고 로마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후에도 프랑스군의 로마 점령은 간헐적으로 되풀이되었다. 급기야 1810년에 나폴레옹은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던 모든 문서를 몰수해 프랑스로 이송하라고 명령했다. 프랑스에 도착한 문서의 양은 총 3,239상자, 책으로는 10만 2,435권에 달했다. 당시 특히 중요하게 여겨진 갈릴레오 재판 기록은 별도로 운송되었고, 나폴레옹은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책으로 엮어 출간하려고 했는데, 그는 과학적인 진보를 저해한 가톨릭교회의 무지몽매함을 대중에게 낱낱이 알리기 위한 도구로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활용할 속셈이었다.

바티칸 문서의 매각: 1811년 3월 바비에르는 파리에 도착한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프랑스어로 번역해 출간하기 위한 7,000프랑의 예산안을 나폴레옹에게 제출했고, 나폴레옹은 승인했다. 이후 본격적인 번역ㆍ출판 작업이 시작되었고, 아홉 개의 문서가 프랑스어로 번역되었다. 그중 하나가 교황과 이단 심문소의 추기경을 위해 작성한 1615년부터 1633년 5월까지의 재판 기록을 요약한 문서인데, 이는 이 책에서 주로 다루는 1633년 재판 당시 사무관이 작성한 문서다. 그런데 프랑스어 번역은 마무리되지 못했고, 결국 출간은 좌절되었다. 1814년에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엘바 섬으로 유배당했을 뿐 아니라 번역을 가로막는 또 다른 걸림돌(난해한 줄임말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 프랑스에서 왕정복고가 이루어지고, 1814년 4월 루이 8세는 바티칸 문서를 모조리 돌려주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는 부분적으로밖에 성공하지 못했다. 가장 큰 이유는 프랑스 정부가 운송에 드는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지 않으려고 꼼수를 부렸기 때문이다. 바티칸 문서 중 이단 심문소의 집회 의사록, 이단 심문소에서 위탁한 도서 검열 판정, 금서목록은 모두 로마로 돌아갔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그 이외의 문서 중 상당수는 운송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폐지업자에게 헐값에 팔아치웠다.

갈릴레오 재판 기록의 행방: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문서는 갈릴레오 재판 기록이다. 1814년 11월 바티칸 비밀 문서 보관소 소장 가에타노 마리니는 왕실 담당 대신인 피에르 루이 장 카지미르 드 블라카스 백작에게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 블라카스 백작은 당시 프랑스 왕립 도서관장이던 바비에르에게 문의했고, 얼마 후 관련 문서를 소장하고 있다는 답장이 왔다. 이에 블라카스 백작은 마리니에게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발견해 반환할 준비가 되었다는 답장을 보냈고, 마리니는 부랴부랴 백작의 저택을 방문했지만 만나지 못했다. 1815년 2월, 편지 왕래를 거듭하고 마리니를 몇 번이나 헛걸음치게 한 블라카스 백작은 마리니에게 편지를 보냈다. 편지에 따르면, 국왕 루이 18세가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읽고 싶어 하여 문서는 지금 국왕의 서재에 있고, 국왕이 다 읽고 나면 즉시 반환하겠다는 약속도 언급돼 있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1815년 3월 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해 파리로 입성했고,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마리니는 새롭게 왕실 담당 대신으로 취임한 프라델 백작에게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돌려달라고 또 한 번 편지를 썼다. 11월이 되어서야 프라델로부터 서고를 이 잡듯 뒤졌으나 찾지 못했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로마 교황청은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교황은 마리니를 파리로 다시 파견해 수색 활동을 재개하도록 지시했다. 1817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마리니의 모든 노력은 헛수고로 끝났다. 하는 수 없이 마리니는 모든 걸 포기하고 빈손으로 로마로 돌아가야 했다.

그 후 블라카스 백작의 미망인이 빈에 있던 교황 사절에게 전갈을 넣었다. 서신에는 깜짝 놀랄 내용이 담겨 있었다. 세상을 떠난 남편의 서재에서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발견했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1843년의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갈릴레오 재판 기록은 바티칸 문서고로 돌아왔다. 루이 18세는 정말로 갈릴레오 재판 기록을 읽고 싶어 했을까? 블라카스 백작은 또 무슨 목적으로 문서 반환을 거절했을까? 이 점에 대해서는 자세한 사정을 알 길이 없다.

1811~1814년 사이에 갈릴레오 재판 기록에 접근할 수 있었던 소수의 사람이 있었다. 덕분에 완결되지는 못했으나 프랑스어 번역이 이루어졌고, 그 시대에 갈릴레오를 가톨릭교회와 맞서 싸운 ‘영웅’으로 간주하는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즉 그때 ‘감옥에서 신음하는 영웅적 과학자 갈릴레오’라는 선명한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날조’된 종교재판이라는 신화가 18세기에 완성되었다. 나폴레옹은 그 신화의 열렬한 신봉자 중 하나였고, 그 신화는 현대인의 고정관념을 형성하며 ‘갈릴레오와 기톨릭교회와의 대립’, 혹은 ‘과학과 종교의 투쟁’이라는 이미지로 이어졌다고 추정된다.



은밀하게 다가오는 위기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564년 2월 15일 토스카나 대공국의 피사에서 태어났다. 그는 1581년 피사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했으나 3년 반 만에 중퇴하고 피렌체로 돌아와 아르키메데스의 저서에 의지해 역학 연구에 전념했다. 그리고 독학한 성과를 책으로 펴냈다. 1586년에 『작은 천칭』을, 이듬해에는 『고체의 중심에 관하여』를 출간했다. 갈릴레오는 이러한 역학 연구를 인정받아 1589년 피사 대학교의 수학 교수로 취임했고, 1592년 파도바 대학교로 이적한 후 위대한 발견을 이룩하게 된다.

천문 관측을 시작하다: 1609년 말 즈음, 갈릴레오는 달에 있는 산과 골짜기를 발견했다. 그리고 1610년 갈릴레오의 망원경은 목성으로 향했고, 목성에 위성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는데,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라는 책에서 관측 결과를 발표했다. 갈릴레오는 목성의 위성에 ‘메디치의 별’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시데레우스 눈치우스』를 출간한 직후 이 발견을 메디치 가문의 영광으로 돌렸다. 그 덕분에 그는 토스카나 대공 직속 수석 수학자 겸 철학자로 고향인 토스카나 대공국에 금의환향했다.

피렌체 시절, 갈릴레오는 더욱 중요한 발견을 했다. 1610년 12월, 금성이 달과 마찬가지로 차고 이지러짐을 반복한다는 금성의 위상 변화를 발견한 것이었다. 게다가 관측을 계속하면서 금성이 차오르며 작아지고 이지러지며 커진다는 사실도 추가로 밝혀냈다. 이 현상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에서 움직이지 않고 태양을 포함한 모든 천체가 그 주위를 돈다고 생각하는 천동설로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한편 태양이 우주 중심에 있다고 생각하는 지동설에서는 금성은 지구에서 보면 태양 너머로 움직이면서 점점 멀어지고 작아지며 차오른다. 반대로 태양과 지구 사이에 오면, 크기는 커지지만 차츰 이지러진다.

갈릴레오는 프라하에 머물던 토스카나 대사 줄리아노 데 메디치에게 “금성은 필연적으로 태양 주위를 돌고 수성과 다른 행성도 마찬가지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관측을 바탕으로 금성의 위상 변화는 지동설을 뒷받침하는 탄탄한 증거라고 믿게 되었다. 1611년 3월, 갈릴레오는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짐을 꾸려 로마로 출발했다. 예수회가 설립한 로마 기숙학교는 갈릴레오를 받아주었고, 흔쾌히 망원경으로 천문 관측을 실연할 기회까지 주었다. 예수회 측에서도 비록 해석은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지만, 그가 발견한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인정해주었다.

지동설을 확신한 갈릴레오 / 『성서』와의 모순: 갈릴레오는 예수회 신부들뿐 아니라 로마의 유력자들까지 자신의 발견을 인정하자 크게 고무되었다. 그런 배경 속에서 그는 점점 더 지동설에 대한 확신을 굳혀갔다.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성서』에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구절이 있었기 때문이다. 갈릴레오 역시 『성서』의 해석에 감히 도전했을 때 생기는 위험성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갈릴레오가 아무리 신중하게 처신해도 그의 천문학상 발견이 알려지며 온갖 반론이 들끓었다.

카스텔리 앞으로 보낸 편지: 갈릴레오에게 서서히 불운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했다. 사건의 발단은 갈릴레오 자신이 아니라 엉뚱하게도 1613년 12월 12일에 그의 제자이자 피사 대학교 교수였던 베네데토 카스텔리가 제공했다. 어느 날 카스텔리는 토스카나 궁전에서 열린 조찬회에 초대받아 참석하게 되었다. 식사를 마치고 담소를 즐기던 자리에서 어쩌다 메디치의 이름을 붙인 별 이야기가 나왔다. 카스텔리 딴에는 스승인 갈릴레오의 업적을 알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동석한 피사 대학교 교수였던 코시모 보스칼리아가 지구의 운동은 『성서』의 말씀에 반한다고 지적하고 나섰다.

이 토론은 독실한 신자였던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2세의 어머니인 크리스티나 부인의 관심을 끌었고, 그녀는 카스텔리에게 질문했다. 카스텔리는 스승의 의견을 대변해 크리스티나 부인을 설득하려고 애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제자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갈릴레오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먼저 대단히 신중하게 건넨 크리스티나 부인의 질문에 대해서는…… 『성서』에는 거짓이나 실수가 없다고 하더라도 『성서』를 해석하는 사람이나 설명하는 사람 중에는 때로 실수를 저지르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하며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성서』를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데 집착해 이런저런 모순뿐 아니라 중대한 이단이나 모욕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갈릴레오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로 해석했을 때 생기는 오류의 한 예로 「여호수아기」를 다음과 같이 든다. ‘ 「여호수아」의 구절을 고찰해보기로 합시다. ……즉 여호수아의 기도로 하느님이 태양을 멈추고 낮을 길게 하셨기에 그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가정하고 적대자들에게 양보하기로 합시다. ……이 구절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세계관이 틀렸으며,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다시 말해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옳았음을 명명백백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갈릴레오는 천동설을 채용하더라도 「여호수아기」와 같은 상황에서는 지구는 자전하지 않기 때문에 태양을 포함한 평소 천체 운행은 천구 전체의 일주운동에 따르며, 태양의 독자적인 움직임과는 무관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태양 그 자체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1년에 걸쳐 12개의 별자리를 따라 이동한다. 그러므로 태양의 움직임을 멈추면 도리어 일몰 시간이 빨라진다. 이런 맥락에서 『성서』는 천동설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논리적으로는 그의 말이 옳다.

그러나 갈릴레오는 이 편지로 금단의 영역에 들어서고 말았다.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되는 『성서』의 해석이라는 위험한 영역에 발을 들인 갈릴레오에게 위기가 닥쳤다. 그는 한술 더 떠서 코페르니쿠스 지동설 지지를 확실하게 표명했다. 갈릴레오도 자신의 편지가 남의 손에 넘어가리라는 상황 정도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 터라 편지 사본이 공공연히 나돌자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갈릴레오는 이단죄로 검사성성에 기소된 이듬해인 1616년 6월 같은 취지의 편지를 크리스티나 부인에게 보내는데, 이 편지는 ‘크리스티나 대공비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제목으로 갈릴레오 갈릴레이 연구자들에게 알려졌다. 이 편지에서 갈릴레오는 제자인 카스텔리에게 보낸 편지보다 상세하게 “감각적 경험 또는 필연적 증거가 우리의 눈과 지성 앞에 제시해주는 자연학상의 결론이 『성서』에 아주 단편적으로만 기술되어 있는 경우, 그 결론이 『성서』의 기술과 다르기에 감각과 이성을 부정해야 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라고 단호한 어조로 주장을 펼치고 있다.



서막 - 1616년 종교재판



고발: 1615년 2월 7일, 니콜로 로리니 신부가 「카스텔리에게 보내는 편지」 사본을 로마로 보내고, 갈릴레오가 이단 사상을 신봉하고 있다고 검사성성에 고발했다. 3월 19일, 예전부터 갈릴레오 비난 선봉에 섰던 카치니가 검사성성에 증인이 되겠다고 신청했다. 이튿날 증언대에 선 카치니는 “코페르니쿠스의 지구는 움직이고 일주운동도 한다. 그리고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는 두 가지 명제는 교황들이 설명하는 『성서』와 신앙과 모순된다. 우리는 신앙에 따라 『성서』에 포함된 말씀은 진실이라고 믿어야 한다고 배워왔다. ……피렌체에서 널리 퍼진 세간의 의견에 따르면 갈릴레오는 『성서』에 반하는 코페르니쿠스의 의견을 믿으며 옹호한다”라고 고발했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인으로 페르디난도 히메네스 신부와 갈릴레오의 제자이자 피렌체 유지인 지아노초 아타반티의 이름을 거론했다.

11월 13일이 되어서야 겨우 히메니스 신부가 피렌체의 이단 심문관에게 심문을 받았는데, 그는 갈릴레오의 학생들이 코페르니쿠스 명제와 하느님의 본성을 논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그들의 의견인지 갈릴레오 자신의 의견인지 알 길이 없다”고 말했다. 자신도 같은 주제로 아타반티와 토론한 적이 있지만, “모든 것은 토론을 위한 토론이었다”라고 진술했다.

다음 날, 아타반티가 심문을 받았다. 그는 “나는 갈릴레오의 제자가 아니다. 갈릴레오가 코페르니쿠스 학설에 따라 지구는 그 중심 주위를 돌고 전체로서도 움직인다. 태양도 그 중심 주위를 움직이지 전진하지는 않는다고 말한 걸 들은 적이 있다. 이는 로마에서 출간된 「태양흑점론」이라는 제목의 편지에도 있다”라고 진술했다. 또 하느님의 본성에 대해서는 “내가 히메네스 신부님과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지만, 이 논의는 어디까지나 토론형식으로 이루어졌고 공부를 위한 과정이었다.” 라고 말했다.

이렇게 하여 카치니의 증언은 전해들은 이야기를 짜깁기한 데 불과하다는 결론으로 사태는 일단락되는 듯했다.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믿는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모두 오해에서 빚어진 고발임이 증언으로 밝혀졌다. 오늘날이었다면 재판을 지속할 이유조차 없겠지만, 불행히도 재판은 끝나지 않았다.

지동설 검열: 모든 절차는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하지만 갈릴레오는 로마에서 자신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는 중임을 전해 들었던 모양이다. 그는 로마로 가서 자신의 이단 혐의를 풀고 코페르니쿠스의 정당성을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11월 말, 갈릴레오는 로마로 출발했다. 갈릴레오는 집필 중이던 「조수 간만에 대한 논의」라는 지구의 운동을 긍정하는 논고를 로마에서 탈고해 갓 추기경 자리에 오른 오르시니에게 바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안토니오 케렌고가 알레산드로 데스테 추기경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갈릴레오는 “그를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열다섯 명에서 스무 명의 적들과 맞서 싸우며” 논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갈릴레오의 행동과는 별개로 종교재판은 진행되고 있었다.

1615년 말, 검사성성은 심의를 계속 진행한다. 모두 열한 명의 신학자로 이루어진 고문단으로 특별위원회가 꾸려졌고, 다음과 같은 답신이 1616년 2월 24일에 제출된다. ‘검열되어야 할 명제 - 첫째 태양은 세상의 중심이며,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다. 검열 전원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명제에 대한 발언은 모두 철학적으로 무지하고, 부조리하며,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간주된다. 둘째 지구는 세상의 중심이 아니며, 움직이지 않고, 전체로 일주운동을 한다. 검열 전원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명제는 철학적으로는 같은 판정을 받아, 신학상의 진리에 관해서는 적어도 신앙상 오류가 있다.’

훈고(訓告): 1616년 2월, 교황 비오 5세는 특별위원회의 답신을 받아 검사성성 집회에 갈릴레오를 소환한다는 결정을 알리고 집행을 명령했는데, 바티칸 비밀문서고에 소장된 문서에는 사건의 경위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었다. ‘벨라르미누스 추기경 예하께서 갈릴레오를 소환해 상기 추기경 예하, 도미니코회 검사성성 총주임인 로디의 세기치 신부 앞에서, 갈릴레오와 교황 성하와 전(全) 검사성성의 이름으로, 태양이 세상의 중심에서 움직이지 않고, 지구가 움직인다는 상기 의견을 전면적으로 포기하고, 앞으로는 구두로든 문서로든, 어떠한 형태로도, 그러한 생각을 품거나 가르치거나 옹호해서는 안 된다고 명하셨다. 만약 명령에 따르지 않는다면 검사성성은 갈릴레오를 재판에 세울 것이라고 엄중히 경고하셨다.’ 이 금지 명령에 상기 갈릴레오는 동의하고 기꺼이 따르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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