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늑대
라스 브라운워스 지음 | 에코리브르
바다의 늑대
라스 브라운워스 지음
에코리브르 / 2018년 7월 / 352쪽 / 17,000원
침략자
본국의 바이킹
8세기 바이킹들의 본국은 개화한 로마 제국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춥고 살기 힘든 장소였는데, 오늘날 노르웨이ㆍ스웨덴ㆍ덴마크로 나뉜 당시의 스칸디나비아는 극한의 땅이었다. 세 나라(바이킹 시대 초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가운데 기후가 가장 좋은 나라는 유틀란트반도와 500개가 넘는 작은 섬들을 아우르는 덴마크였다. 덴마크는 서부 연안을 독일과 공유하고 있었던지라 그 나라 젊은이들은 서쪽 방향으로 탐험에 나섰다. 덴마크 바이킹은 저지대 국가와 프랑스 각지로 퍼져나갔고, 마침내 영국해협을 건너 영국으로까지 진출했다. 또 거기에서부터 에스파냐ㆍ이탈리아도 공략했다.
참고로 잉글랜드를 처음 공격한 것은 오늘날 노르웨이 지역의 침략자들이었다. 그런데도 너무나 많은 ‘데인인(덴마크 사람)’이 연안에 들끓었던 까닭에 앵글로색슨족의 자료를 보면 바이킹은 대체로 어디서 왔느냐와 무관하게 모두 데인인으로 불렸다. 한편 오늘날 노르웨이ㆍ스웨덴 이 두 현대 국가가 자리한 스칸디나비아반도는 덴마크보다 기후가 한층 더 험악하다.
두 지역 가운데는 현재의 스웨덴 쪽 농경지가 더 나았다. 그 지역의 동부 해안은 러시아 쪽을 바라보고 있어서 스웨덴 바이킹은 대부분 러시아 쪽으로 항해했다. 물론 침략이 아니라 통상을 위해서였지만 말이다. 이들의 공훈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지만, 키예프에 최초의 러시아 국가를 세웠으므로 그 공훈 중 몇 가지는 꽤나 오래도록 전해지고 있는 셈이다. 바이킹의 땅에서 가장 험준한 곳은 영토의 약 3분의 1이 북극권보다 더 높은 지역에 위치한 노르웨이다. 노르웨이 바이킹은 북해로 모험을 나설 때면 서쪽을 택했다. 이들은 때로 침략을 하기도 하고, 때로 식민지 지배를 실시하기도 했는데, 이들 집단은 그린란드에 정착지를 건설했으며 1000년경 신세계에 도착했다.
바이킹 시대에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만한 형편이 못 되었다. 경작 가능한 농경지는 길고 좁다란 피오르들에 의해 동강이 나 있었고, 미리 월동 준비를 해두지 않은 이들에게 기나긴 겨울은 혹독했다. 이러한 식량난 탓인지 그들은 손님 접대의 가치를 대단히 높게 쳤다. 따라서 주인으로서 손님 접대를 소홀히 하면 수 대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반목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은 심심풀이 삼아 다양한 게임을 고안해냈는데, 이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활동은 대체로 레슬링ㆍ칼싸움ㆍ상대를 물속에 빠뜨리는 놀이 등 힘을 겨루거나, 피오르 등반ㆍ스키 타기ㆍ스케이트 타기ㆍ장거리 수영 등 지구력을 시험하거나, 한 번에 두 손으로 창던지기, 혹은 노를 저으면서 배의 난간 밖 이쪽 노에서 저쪽 노로 뛰기 등 민첩성을 다투는 것이었다.
한편 무례한 야만인과 관련하여 일반적으로 굳어진 통념과 달리 바이킹은 외모에 무척이나 신경을 썼으며 위생 관념도 철저했는데, 이들은 몸을 단장하는 데 한껏 공을 들였고, 일반적으로 적어도 하루에 한 번은 목욕을 했다. 그리고 아동의 절반이 열 살도 되기 전에 사망했음에도 끝내 살아남은 자들의 기대 수명은 쉰 살이 넘었다. 한편 평균 신장은 남성이 173센티미터, 여성이 160센티미터 정도였다. 대단히 큰 키는 아니지만 그들이 접촉한 남방인보다는 컸음에 틀림없다. 한편 바이킹 문화에서는 여성도, 물론 남성과 결코 동등하다고는 볼 수 없으나, 서구 기독교 사회의 그 어느 곳보다 많은 권리를 누렸다. 많은 소녀가 열두 살이라는 이른 나이에 혼례를 치렀지만, 남편이 없을 적에는 부인이 가정의 대소사를 모두 챙기고 온갖 중대사를 직접 결정했다. 또 유럽의 나머지 지역에서와 달리 아내는 재산을 상속받고, 남편과 이혼하고, 파경을 맞았을 때 결혼 지참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었다. 사회 질서는 혹독한 처벌을 통해 유지했다. 간통을 저지르다 걸린 남성에게는 거꾸로 매달아놓거나 말에게 짓밟히는 형벌을 내렸으며, 방화범은 화형에 처했다.
그런가 하면 바이킹은 모름지기 문화인이라면 응당 음악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고 믿었고, 바이킹 축하연은 유럽의 어느 곳보다 시끌벅적했다. 그리고 바이킹은 신을 모시기는 하나 ‘종교’라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예배를 올리는 ‘공식적’ 방법도 보편적 교리도 중앙 교회도 따로 없었다. 대신 이들은 지역에 따라 편차가 크기는 하지만 일련의 일반적인 믿음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얼음에 뒤덮인 대재앙으로부터 몸을 피할 곳은 없었지만, 그럼에도 바이킹은 끊임없이 신들, 특히 바다의 신들에게 도움을 호소했다. 어쨌든 간에 바이킹의 세계는 육지만큼이나 바다의 세계였다. 이들은 사냥감을 구경하기 어렵게 되자 바다의 선물, 즉 바다표범ㆍ고래ㆍ바다코끼리 고기를 먹으며 목숨을 이어갔다.
아무튼 바이킹은 바다를 중시한 덕택에 남쪽으로 가는 세계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로마인과 접촉했던 초기 몇백 년 동안 ‘이상하게 생긴 배’가 내려온 이유는 약탈이 아니라 통상을 위해서였다. 그들이 팔려고 내놓은 상품, 특히 멋진 말과 검은 여우 모피는 로마 시장에서 값어치가 높았다.
한편 최초의 ‘바이킹’ 침략은 육상을 통해 이루어졌고 수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이주의 시대’라고 알려진 이 초기에 고트족은 스웨덴 남부에서 흑해로 이주했으며, 3세기에 로마 영토로 넘어왔다. 이들은 378년 아드리아노플에서 로마 황제 바렌스를 살해하며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채 150년도 되지 않아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 에스파냐 대부분의 지역을 정복했다. 참고로 대대적인 바이킹의 침략이 가능했던 것은 8세기 말엽 조선술이 혁신적으로 발달했기 때문이다.
초기의 바이킹 선박은 로마와 켈트족의 디자인을 본뜬 것이었고, ‘통상적인 노(paddle)’가 아니라 ‘선체에 붙어 있는 노(oar)’를 저어 움직였는데, 당시의 다른 선박과 마찬가지로 바이킹의 배도 속도가 느렸고 거친 바다에서 잘 뒤집어졌다. 따라서 해안 가까이에서 단거리를 항해하는 데 알맞았다. 그러나 8세기쯤 그들은 용골을 창안해냈는데, 이 단순한 구조물을 추가한 것이야말로 항해술의 발전에서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였다. 용골은 배를 안정화하여 큰 바다에서도 문제가 없게 도와주었을 뿐 아니라, 돛대를 고정하는 기단 노릇을 하기도 했다. 또 경우에 따라서는 75제곱미터나 될 때도 있는 거대한 돛을 달아서 추진력을 키우는 장치로 활용할 수도 있었고, 그 파급력은 즉각적이고 놀라웠다.
육지를 벗어나 멀리까지 모험을 나서는 유럽인이 거의 없던 시절에 바이킹은 목재ㆍ동물ㆍ식량 따위의 화물을 싣고 대서양을 종횡무진하면서 거의 6,500킬로미터를 누비고 다닌 것이다. 바이킹은 이처럼 머나먼 항해를 떠날 때면 운항을 돕기 위해 ‘조종 노’라 불리는 특수한 노를 사용했다. 이는 선원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존재에 대한 경의의 표시로, 배를 한층 통제하기 쉽도록 만들고자 배 오른편 옆 선미 부근에 두었는데, 여기서 배의 오른쪽을 지칭하는 ‘우현’이라는 항해 용어가 생겨났다. 반대 개념인 좌현 역시 비록 좀 더 간접적이기는 하나 그 기원을 바이킹에 빚지고 있다. 배는 항구에 도착하면 대체로 오른쪽에 놔둔 ‘조종 노’가 망가지지 않도록 좌측을 붙여서 정박시키는데, 시간이 가면서 ‘좌현’은 ‘왼쪽(left)’이라는 의미로 굳어졌다. 아무튼 화물선ㆍ연락선ㆍ어선 등 수많은 배가 앞다퉈 개발되었다. 특히 군함, 즉 롱십(longship, 좁고 긴 모양의 바이킹 배)은 힘ㆍ유연성ㆍ속도가 기막히게 어우러진 결과물이었다. 바이킹의 롱십은 해양을 횡단하는 큰 배에 달린 용골이 없었으며, 상대적으로 홀수(draft, 선박이 수중에 떠 있을 때 물속에 잠기는 부분의 깊이)가 얕아서 배를 댈 때 깊은 항구가 필요한 다른 선박들과 달리 사실상 어느 뭍에든 댈 수 있었다. 따라서 롱십은 강 위쪽까지 항해하는 것이 가능했다. 게다가 일부 롱십은 강들 사이에서 들고 나를 수 있을 만큼 가볍기까지 했다.
바이킹 시인들은 롱십을 ‘파도 타는 준마’라고 불렀지만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늑대’라고 표현하는 게 더 알맞았다. 바이킹의 공격을 받은 불운한 피해자들은, 날이 저물면 인간 거주지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포식 동물을 떠올리면서, 이 북방인들을 ‘바다 늑대(sea-wolves)’라 부르기 시작했다. 롱십은 최대 100명까지 수용할 수 있었지만, 외해에서는 15명이 고작이었다. 이 배는 연안 경비대의 눈길을 슬쩍 피해갈 수 있을 정도로 기민했고, 몇 주 동안 빼앗은 장물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널찍했으며, 폭풍우가 몰아치는 대서양을 무사히 건널 수 있을 정도로 튼튼했고, 강들 사이에서 끌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가벼웠다. 하지만 롱십과 관련하여 가장 놀라운 점은 뭐니 뭐니 해도 속도였다. 이들은 평균적으로 4노트까지 달렸으며, 바람이나 해류가 순조로우면 최대 8~10노트까지 속도를 낼 수 있었고, 이 덕택에 바이킹은 거의 실패 없이 기습 공격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바이킹의 공격이 그토록 치명적이었던 이유는 바로 이 속도 때문이었다. 적보다 최대 다섯 배까지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역량 말이다. 다리 아래로 통과할 수 있고 수심이 깊지 않은 강의 상류까지 오를 수 있게 해주는 얕은 홀수, 사납게 보이는 용 모양의 이물, 밝게 칠해서 반짝이는 비늘처럼 배 측면에 걸어놓은 방패 따위에 힘입어 이들은 심리적으로 상대를 주눅 들도록 만든 게 분명하고, 바이킹은 단 한 차례의 기습 공격을 통해 여러 마을을 덮친 다음 적이 채 군대를 들판에 소집하기도 전에 내뺄 수 있었다. 9세기에 접어들자 바이킹의 시대가 모든 면에서 자리를 잡아갔다. 스칸디나비아인은 해상에서 누구도 넘보지 못할 독보적 지위를 누렸으며, 주요 교역로도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다.
탐험가
아이슬란드
바이킹의 발견은 대체로 이 섬 저 섬 돌아다니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8세기 말 무렵 바이킹은 스코틀랜드 북쪽에서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셰틀랜드제도(Shetlands)를 발견했다. 바위섬 300여 개로 이루어진 이 인적 없는 군도는 노르웨이에서 가장 큰 서부 항구 베르헌의 거의 정서쪽에 위치해 있어서 아마도 노르웨이 바이킹이 찾아냈을 것인데, 노르웨이 바이킹은 남쪽으로 길을 나서는 배에 공급할 양이나 소 같은 가축을 기르는 데 그 섬을 주로 사용했다. 셰틀랜드제도를 발견하고 50년쯤 지나, 바이킹 탐험가들은 북서쪽으로 270킬로미터쯤 떨어진 페로제도(Faroe Islands)를 만났다.
이들은 계속 서쪽으로 가야 할 의미를 못 찾았다. 따라서 최초의 바이킹이 아이슬란드에 닿은 것은 순전히 우연의 결과였다. 9세기 중엽, 나도드라는 노르웨이인이 페로제도를 찾아가는 도중 목적지를 650킬로미터나 더 지나치는 바람에 길을 잃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육지를 발견했을 때 그는 선원들을 사방으로 풀어서 인간의 정착지를 찾아보도록 시켰는데, 그들은 결국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다. 나도드는 배로 돌아갔다. 그때 마침 폭설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 새로운 나라에 이름을 지어주어야 마땅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도드는 그곳의 주된 특징에 착안해 ‘눈의 나라(Snowland)’라는 이름으로 정했다.
노르웨이로 돌아온 나도드와 선원들은 사람들에게 북서쪽에 취득하기 좋은 땅이 있다고 알렸다. 이 말은 마침내 스웨덴에까지 전해졌고, 가서라는 상인은 직접 그 땅을 찾아 나서기로 결심했다. 운이 좋게도 가서는 용케 나도드가 간 길을 되밟을 수 있었고 그 새로운 나라의 동쪽 연안에 다다랐다. 하지만 그는 상륙하는 대신 그 땅이 얼마나 큰지 알아보려고 연안을 따라 항해를 했다. 그가 그 땅은 섬이라고 결론을 내렸을 때 날씨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와 선원들은 배를 해변으로 끌어다 놓고 북쪽 해안에 집을 한 채 지었다. 일행은 거기서 갈매기의 알 같은 바다 동식물을 주워다 먹으며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살아남았다. 약탈자가 없었던 데다 무인도처럼 보였으므로, 가서는 자기 이름을 따서 그 섬에 ‘가서스홀미(Gartharsholmi)’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고, 결국 스칸디나비아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의 부하 가운데 적어도 한 명은 그냥 눌러앉기를 원할 정도로 그곳이 마음에 들었다.
나트파리라는 이름의 자유인은 남자 노예 한 명, 여자 노예 한 명과 함께 그 집에 남았다. 그들이 그 섬에 정착한 최초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곧 함께할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플로키라는 노르웨이인이 9세기 말 새로운 땅에 정착하겠다는 분명한 의도를 지닌 채 길을 나섰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가족과 소 떼와 다른 정착민들을 데리고 왔다. 그리고 큰까마귀 세 마리의 도움을 받으면서 항해했다. 그의 계획은 큰까마귀를 이따금 풀어주는 것이었는데, 만약 한 마리가 돌아오지 않으면 그쪽 방향으로는 육지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런 특이한 장난이 실제로 먹혀들자 그의 당대인들은 그를 ‘운 좋은 플로키’, 혹은 ‘큰까마귀 플로키’라고 불렀다.
이들 소규모 집단은 바튼스피오르두르라 불린 장소의 서쪽 해안에 텐트를 치고 농장을 지었다. 큰까마귀 플로키의 가축들이 풀을 뜯어 먹을 만한 땅은 얼마든지 있었다. 하지만 정착민들로서는 안타깝게도 겨울철이 무자비했다. 미리 충분한 건초를 마련해두는 일을 소홀히 한 탓에 가축이 모두 숨졌다. 그리고 이주하려고 시도했을 때 이들은 피오르에 빙상과 해빙이 가득 차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직 여름이 시작되어 그 얼음이 충분히 녹아야만 떠날 수 있었던 것이다. 환멸을 느낀 플로키는 선원들 대부분을 남겨두고 여건이 되자마자 배를 타고 떠나버렸다. 노르웨이로 돌아온 그는 그 땅이 가치 없다고 전하면서 그곳을 ‘아이슬란드(Iceland, 얼음의 땅)’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의 실패한 정착 시도와 기를 죽이는 전언도 누군가는 말리지 못한 모양이다. 그가 돌아오고 1~2년 되었을 무렵 잉골푸르 아르나르손이라는 노르웨이인이 그 시도를 되풀이했고, 이번에는 드디어 성공을 거두었다.
아이슬란드의 서부, 남서부, 그리고 북서부 연안은 온화한 북대서양 해류의 바닷물 덕분에 살기에 알맞았다. 하지만 연중 상당 기간 동안 피오르의 대부분과 연안 지방은 빙산과 부빙에 가로막혀 있었다. 빙산 탓에 그 섬에 접근하는 일은 위험천만했다. 게다가 어찌어찌 상륙을 한다 해도 배를 수리할 목재조차 없었다. 넓이가 약 10만 3,000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섬은 잉글랜드, 웨일스, 스코틀랜드의 일부를 합한 것보다 더 컸지만, 대부분의 지역에서 나무가 자라지 않았다. 그래서 이곳 생활은 정착한 모든 사람의 적극적인 협조를 요구했고 약한 자들은 무자비하게 도태시켰다.
바이킹이 아이슬란드를 찾아온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대체로 두 가지 범주로 대별된다. 이들은 고향에서의 탄압을 피해 달아나는 중이거나, 혹은 자유로운 땅에 대한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니, 보통은 그 두 가지 다였다. 최초의 영구 정착지를 건설한 잉골푸르 아르나르손은 어쩌다 유혈의 복수를 되풀이하는 싸움(바이킹 사이에서는 비참할 정도로 흔했다)에 휘말리게 되었고, 좀 더 푸른 목초지로 도망칠 계획이었다. 큰까마귀 플로키가 다녀왔다는 섬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그는 자신의 의붓형제와 아내를 비롯해 가족 전체를 이끌고 항해에 나섰다. 잉골푸르의 의붓형제 효를레이푸르 역시 파란만장한 과거의 소유자였다.
한편 아이슬란드의 정착민인 아우드는 그 사회에서 여성이 지닐 수 있는 힘이 어느 정도인지 잘 보여주었다. 그녀는 무골 이바르와 함께 더블린을 지배한 백색 올라프의 아내였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이 죽자 20명을 모아 배에 태우고 직접 선장 역할을 하면서 선원과 화물을 무사히 상륙시키는 놀라운 위업을 이루어내 크게 칭송받았다. 아이슬란드에 도착한 아우드는 드넓은 땅을 달라고 요구하고, 노예를 풀어주고, 본인의 재산을 그들과 고루 나누어 가졌다.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회의를 주재하거나 연회를 베푸는 등 씨족장 같은 역할을 했다.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존경받았는지 드러내주는 것으로, 그녀는 죽고 나서 완전한 바이킹 배와 함께 묻혔다. 당시 유럽에서는 그 어느 곳에서도 여성에게 땅을 지배하는 것은 고사하고 소유하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