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정진석
허영엽 지음 | 가톨릭출판사
추기경 정진석
허영엽 지음
가톨릭출판사 / 2018년 8월 / 427쪽 / 22,000원
어머니, 그리고 유년 시절
꿈나라의 노랫소리처럼 들리던 저녁 기도
추기경 정진석은 1931년 12월 2일 서울 수표동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태어난 지 나흘 만인 12월 6일 명동 성당에서 ‘니콜라오’라는 세례명으로 유아 세례를 받았다. 진석이 태어나서 줄곧 지낸 곳은 수표교 근처에 있었던 외할아버지 집이었다. 명동 성당 회장을 지낼 정도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한 외할아버지는 장롱을 만드는 공장을 운영했다. 진석은 어머니 이복순의 품에서 건강하게 무럭무럭 자라났다.
책에 빠져 살던 소년, 보미사를 꿈꾸다
진석은 8살 되던 해 명동 성당에 있는 계성보통학교(현 계성초등학교)에 입학했고, 3학년 때부터 방과 후면 어김없이 소공동에 있는 일본인 어린이들을 위한 ‘어린이 도서관’으로 가서 매일 책을 한 권씩 읽었다. 처음에는 어떤 책이든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러다 얼마 안 가 위인전에 푹 빠지게 되었다. 참고로 이때의 책 읽는 습관은 성인이 되어서까지 이어졌다. 진석이 또 하나 관심을 보인 것은 바로 보미사가 되는 것이었는데, 결국 어머니의 동의와 신부님의 허락을 받아 보미사가 되었고, 그 역할을 매우 열심히 잘 수행했다.
주교 흉내를 내며 명동 성당을 드나들던 꼬마 보미사
훗날 진석이 사제의 길을 걷기로 결정한 데는 보미사를 했던 체험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던 1942년 12월, 첫 한국인 주교가 나왔다. 명동 성당에서 매일같이 보던 노기남 신부가 주교로 임명된 것이다. 노 주교는 진석의 첫 교리 문답 교사이기도 했는데, 진석은 계성보통학교에서 수업 후에 천주교 교리 문답을 배웠는데, 노 주교가 교사였고, 다음으로 조인환 신부, 박귀훈 신부가 학교의 교리 수업을 담당했다. 세 분이 진석의 교리 선생님인 셈이다.
질풍노도의 시기, 흔들리는 신앙
진석은 계성보통학교를 마치고 1944년 중앙중학교에 입학했다. 밝고 겸손한 성품을 지닌 진석은 공부도 잘했지만 친구들도 많았으며, 친구들 사이에서 굉장한 효자로 유명했다. 진석은 중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하루에 한 권씩 책 읽기를 계속했는데, 중학생 때부터는 주로 과학 책을 읽었다. 한편 진석은 중앙중학교 독서 동아리에 가입했는데, 당시에는 많은 학생이 독서 동아리를 중심으로 학생 운동에 참가했다. 이때 진석은 신앙적으로 힘든 시기를 겪었다. 당시에는 학생들 사이에 사회주의 이론과 무신론이 유행했다. 유물사관에 입각한 여러 책이나 학교 수업에서 ‘하느님은 없다.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학습을 받고 나니 신앙이 흔들렸다. 어려서부터 아무런 의심 없이 지녔던 믿음이 흔들리면서 교리에 의혹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갈등이 생겼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신앙의 위기가 닥쳤던 것이다.
그즈음 진석은 명동 성당에서 윤형중 신부의 사순 특강이 열린다는 소식을 접하고 홀로 성당을 찾아 강연을 들었는데, 윤 신부는 해박한 신학과 철학을 바탕으로 교리와 성경을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이해하기 쉬운 이론으로 교리를 설명하니 재미도 있고 가슴 깊이 감동도 생겨났다. 그제야 진석은 모든 의문이 풀렸다. 가슴 한구석에서 느끼던 갑갑함이 점차 사라짐을 느낄 수 있었다. 특강이 끝날 때 성가로 다 함께 ‘한 많은 슬픔에’를 불렀는데, 진석은 이 성가를 부르며 많이 울었다. 윤 신부의 강의에 감화된 진석은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했다. 믿음을 다시 굳건히 하니 학문에 정진하는 데도 거침이 없었다. 당시 중앙중학교에는 훌륭한 교사들이 많았다. 특히, 윤리를 가르쳤던 철학자 김형석 선생은 진석의 미래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한편 진석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일까’를 생각한 끝에 발명가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1950년 5월 서울대학교 공과 대학(화학 공학과)에 진학했다. 6ㆍ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6ㆍ25 전쟁의 혼란 속에서 보낸 청년 시절
6ㆍ25 전쟁과 명동 성당
서울교구는 6ㆍ25 전쟁 발발 다음 날인 6월 26일 긴급 교구 참사회를 열어 차후 교회의 행보에 대해 논의했고 빠른 결론을 내 전쟁에 대처했다. 회의 결과 본당 주임 신부는 신자들과 함께 성당에 남고, 그 외 보좌 신부와 특수 사목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가능한 한 피란을 떠나도록 권유하기로 했다. 한편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얼마 후 서울 지역의 젊은이들을 인민군으로 강제 징집했다. 진석은 집에 머물던 중 강제 징집 소문을 듣고는 삼선교 친척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 은신처를 만들어 육촌 동생과 함께 숨어 지내게 됐다.
수많은 젊음에 빚지며 / 하느님이 덤으로 주신 삶
6ㆍ25 전쟁의 참상은 이 땅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이 땅의 수없이 많은 젊은이가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Tm러져 갔다. 목숨을 건진 진석과 남은 이들에겐 먼저 떠난 젊은 목숨이 평생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 삼선교 은신처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어느 날 밤이었다. 동생과 나란히 누운 진석은 초조한 마음을 누르고 간신히 잠을 청했다. 그 순간 “쾅!” 갑자기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굉음이 났다. 포탄 하나가 진석이 은신한 집 위로 떨어진 것이다. 폭음과 함께 잠시 정신을 잃었던 진석이 정신을 차려 보니 지붕은 뻥 뚫려 있었고, 서까래는 무너져 있었다. 그런데 좀 전까지 옆에 있던 육촌 동생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동생 쪽으로 간신히 몸을 돌려 살펴보니 그는 복부에 큰 상처를 입고 피를 흘린 채 숨져 있었다. 진석이 눈앞에서 본 첫 죽음이었다. 동생과 자리가 바뀌었다면 분명히 진석이 죽었을 것이다. 열아홉 살 청년 진석은 그날 깨달았다. 생명은 내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것임을 말이다.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시간이 지날수록 동생의 몫까지 잘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그리고 왜 하느님이 자신을 살려 두셨는가 하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 뒤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이 있었고, 연합군이 서울에 들어왔다는 소식에 진석은 걸음을 재촉해 집으로 돌아왔다.
눈물로 어머니를 보내며 전장 속으로 / 두 생명을 살린 어머니의 재봉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다시 불리해지면서 연합군은 주력의 철수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오산과 삼척까지 후퇴하기로 결정했다. 한국 정부도 부산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진석은 어머니를 설득해 먼저 부산으로 피란 보냈다. 또다시 혼자가 된 진석은 스스로 강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을 되뇌었다. 그러는 사이 1950년 12월 16일 ‘국민 방위군 설치법’이 국회에서 통과돼 12월 17일 ‘제2국민병 소집령’이 발동됐다. 진석도 제2국민병 소집 명령을 받았다. 소집일인 12월 20일 아침, 진석은 두꺼운 옷을 껴입고 집을 나섰다. 다음 날인 21일, 간단한 점호와 함께 청년들은 열을 지어 출발했다.
국민병들은 여주에서 충주로 계속 행군했다. 그리고 경상북도 의성을 지날 때였다. “쾅!” 갑자기 고막을 찢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목함 지뢰가 터지면서 앞서가던 장병들이 피투성이가 돼 쓰러졌다. 진석은 자신도 모르게 십자성호를 그으며 기도했다. “천주님! 살려 주세요. 우리 죄인들을 당신 품에 거두어 주세요!” 그 뒤 진석 일행은 마산에 도착했다. 그리고 다시 함안의 한 학교 건물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한편 당시 정부는 그들을 위한 군복은커녕 끼니조차도 제대로 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국민 방위군 사건이 터졌다. 그래서 1951년 1월 부산에서 열린 피란 국회는 첫날부터 이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책을 추궁했다. 이에 따라 정부는 2월 17일 36세 이상의 장정들을 귀향시켰다.
미군 통역사가 되어 전장의 사내들과 함께
국민 방위군 사관학교가 막 세워지던 무렵, 진석은 국민 방위군 사관학교 3기생으로 입교해 후보생들과 한 달 반 정도 훈련과 교육을 받고 1951년 4월 15일 졸업 후, 국민 방위군 제3단 6지대 직속 제1구대 제2초대장으로 근무하게 됐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 방위군 간부들이 부식비를 횡령한 사실이 드러나며 국민 방위군이 해체됐다. 이후 진석은 미8군 제60병기단에서 통역관을 뽑는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응시해 통역관으로 채용됐다. 1951년 말, 첫 휴가를 얻자마자 진석이 향한 곳은 부산이었다. 이모와 단 둘이서 피란을 간 어머니를 찾기 위해서인데, 결국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한편 진석은 어머니를 찾다가 이덕만이라는 친구로부터 어떤 신부님이 전쟁고아들을 돌보고 있는데 통역할 사람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황해도 연백 성당 주임이었던 김영식 신부와의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된다.
“형! 우리, 인류를 위해 봉사하지 않겠소!”
김 신부는 황해도 연백에서 고아들을 데리고 부산까지 피란을 와 있었고, 곧 부평에 있는 병참 기지 근처로 이사할 것이라 귀띔했다. 당시에는 다들 하루 한 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굶주리기가 일쑤였기에 고아들에게는 기댈 곳이 미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김 신부가 말했다, “미군들에게 밥을 얻어먹기 위해서도 그렇고, 영어를 잘하는 통역이 필요해.” “제가 돕겠습니다, 신부님!” “나는 돈을 줄 형편이 못 되는데.” “돈 걱정은 하지 마세요. 제가 하는 일을 정리하고 8월 15일 성모 몽소 승천 축일에 찾아뵙겠습니다.” 진석은 인사를 드리고 떠났다.
영적 아버지와 함께 전쟁 고아들을 위해
강원도에 있는 부대에 복귀하는 길에 서울을 지나게 된 진석은 어머니의 흔적이 묻어 있는 집에 들르고 싶었다. 그렇게 동네 어귀에 들어서던 진석은 입구에 선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거짓말처럼 어머니가 거기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부산에서 머물던 어머니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울 집 근처에 들른 참이었다. 한강에서 기약 없이 헤어진 지 3년 만에 길 위에서 모자 상봉이라니, 정말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 순간 진석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과 성모님이 돌봐 주신다는 믿음을 굳게 가지게 됐다. 한편 진석은 강원도 미군 부대에서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했다. 1951년 5월부터 1년 넘게 통역 일을 하면서 미군과 생활하다 보니 영어도 자연스럽게 많이 늘었다. 시간이 흘러 1952년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에 진석은 약속대로 김영식 신부를 찾아갔고, 김 신부와 진석은 일주일에 한 번 정기적으로 미군 부대를 방문해 미사를 드리고 식량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렇게 한 주일 식량을 사용하고 나면 식량이 조금 남아 비축할 수 있었다.
신학교, 사제 서품, 그리고 로마로
마리아 고레티 성녀가 이끌어 준 사제 성소
김영식 신부가 운영하던 보육원인 연백 성모원에는 김 신부의 조카인 김영일 예비 신학생도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1953년 봄 진석은 부산에 있는 대신학교로 향하는 그와 동행하게 됐다. 그를 배웅하고 자신도 당시 부산에 있었던 서울대 복학에 대해 알아볼 계획이었다. 그런데 김영일을 바래다주고 오는 길에 진석의 손에는 책 한 권이 들려 있었다. 김 신부를 도와 통역하다가 미군 군종 신부 사무실 책장에 꽂혀 있던 책 가운데 눈길이 가던 책으로 제목은『성녀 마리아 고레티』였다. 진석은 기차 안에서 별생각 없이 영문판인 그 책의 첫장을 넘겼다. 책은 마치 소설처럼 시작되었다. 진석은 책을 읽으면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고 책을 덮었을 때 가슴이 먹먹해졌다. 마리아 고레티 성녀의 마음과 성녀의 백옥같이 순수한 믿음, 하느님에 대한 큰 사랑이 진석의 온몸에 전달됐다. 진석은 사제가 되기로 결심했다.
진석이 신학교를 가기로 결정한 뒤 유일하게 마음에 걸린 것은 어머니였다. 하지만 어머니는 오히려 담담하게 아들의 결정을 존중했고, 곧장 노기남 주교에게 입학 허락을 받으러 갔다. 노 주교는 진석이 외아들이라 안 된다고 거절했지만, 어머니의 완고함에 이내 그 뜻을 받아들였다. 어머니와 주교님이 끝끝내 반대했다면 신학교에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진석은 생각했고, 그것도 주님의 뜻이라 믿었다. 그러나 두 분의 허락을 얻은 진석은 1954년 봄, 혜화동에서 다시 문을 연 대신학교의 입학생이 됐다.
“네, 여기 있습니다!”
혜화동 신학교에 들어온 지 7년, 진석은 신학교 과정을 마치고 드디어 1961년 3월 18일 사제품을 받게 됐다. 그리고 사제 서품식 후, 진석은 역사가 깊은 약현 성당(현 중림동 약현 성당) 보좌 신부로 발령받았다. 모든 것이 처음 겪는 일이었다. 하지만 주임인 신인식 신부와 신자들이 잘 대해 주어 진석은 생활에 불편 없이 나날이 행복하게 지냈다.
행복했던 첫 사목 생활, 그리고 영적 아버지의 선종
새 사제로서 약현 성당의 신자들과 함께한 지 두 달째 되던 날, 갑자기 교구청에서 소신학교로 가라는 인사 발령이 났다. 당시 소신학교 부교장 김정진 신부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졌기 때문이다. 결국 그는 토요일이면 본당에 와서 주일까지 미사 주례와 본당 사목을 하고, 월요일 아침에 다시 소신학교로 돌아가서 강의했다. 그리고 임태경 신부가 보좌 후임으로 부임한 1961년 9월까지 그는 그렇게 본당 보좌와 소신학교 교사를 오가며 소임을 다했다. 이후에야 비로소 소신학교에 상주하게 됐다. 1963년 1월 7일 김영식 신부의 부고가 날아들었다. 정 신부는 자신을 사제의 길로 이끌어 준 영적 아버지와의 이별이 몹시 슬펐다.
교사, 방송 진행자, 법원 서기로 동분서주한 나날들
당시 정 신부는 소신학교에서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 외에, 1962년부터 1965년까지 국립 서울 중앙 방송국(KBS)에서 천주교 방송을 진행했다. 그리고 정 신부는 서울대교구 법원 서기로도 일했다. 아울러 1964년 1월부터는 한국 천주교 중앙 협의회 총무 겸 제7대 《경향잡지》 주필을 맡았다.
교구장 비서로서 마주한 냉엄한 현실
정 신부는 1965년 교구청으로 부름을 받고 1967년까지 서울대교구의 상서국장을 맡았는데, 상서국장은 교구 공문서를 책임지는 오늘날의 사무처장 역할을 했고, 교구장을 보좌하는 비서도 겸하는 자리였다. 어린 시절 보미사를 서며 보필한 노기남 대주교를 사제가 되어 더 가까이에서 모시게 됐으니 참 신비한 인연이었다. 정 신부가 정성을 다해 보좌할 당시, 노 대주교는 요한 23세 교황이 소집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매년 참석했다. 4년에 걸쳐 진행된 이 공의회가 1965년 말 종료된 뒤, 노 대주교는 1966년 2월 귀국해 델 주디체 주한 교황 대사를 통해 교황청에 사의를 표명했다. 정 신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 대사관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됐다.
노기남 대주교를 떠나보내며 / 혼란의 시간을 넘어 새로운 길을 찾아
노 대주교가 사임을 표하고 한 달 뒤인 3월 24일 교황청은 이를 수락한다고 통보해 왔다. 그리고 1967년 3월 27일 노 대주교는 교구장직을 비롯한 교회의 모든 공직을 공식적으로 사임했다. 그리고 은퇴 후 머물 곳으로 나환자 정착촌인 경기도 의왕의 성 라자로 마을을 택했다. 1942년 1월 18일 한국인 최초 주교로 서임돼 서울교구장으로 취임한 이래 25년간 한국 교회를 대표해 온 대주교는 그렇게 돌연 사퇴했다. 노 대주교의 후임으로 수원교구장이던 윤공희 주교가 서울대교구장 서리를 맡았다. 한편 윤 주교는 정 신부의 그간 고생을 잘 알았기에 그해 11월 정 신부를 인사 발령해 소신학교 부교장을 맡겼다. 동시에 정 신부에게 로마 유학을 권고했다. 정 신부는 권고에 따라 로마에 유학 신청서를 보내고 소신학교에서 로마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다음 해인 1968년 5월 서울대교구장의 정식 인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