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무서워서 잠 못 드는 공학 이야기
션 코널리 지음 | 생각의길
너무 무서워서 잠 못 드는 공학 이야기
션 코널리 지음
생각의길 / 2018년 7월 / 252쪽 / 15,000원
로도스 섬 거상의 불가사의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리스 로도스 섬은 지중해 동쪽 끝 터키 앞바다에 위치하고 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332년 이 섬을 정복했을 때 로도스 섬 원주민들은 그리스 통치와 생활 방식을 기꺼이 받아들였다고 한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뒤에는 그의 휘하에 있던 장군 출신으로 이집트 왕조를 세운 프톨레마이오스 편에 섰다.
기원전 305년 프톨레마이오스의 숙적 안티고노스가 아들 데메트리오스와 4만 군사를 로도스로 출격시켰다. 그들은 로도스 성벽을 함락시키기 위한 거대한 탑 형태의 공성 무기까지 갖추었으나 갑작스레 폭풍우가 몰아닥쳐 무기가 망가지고 말았다. 게다가 로도스 섬 원주민들이 길을 침수시켜서 두 번째 탑도 쓰러져 진흙탕에 처박히고 말았다.
이집트에서 원군은 도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던 터라 데메트리오스는 철수를 결정했다. 로도스 섬 원주민들은 이 승리가 수호신인 태양신 헬리오스 덕분이라 여겼고, 헬리오스의 거상을 섬 항구 어귀에 세워 승리를 기념하기로 했다.
기원전 292년 이 거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해 이후 12년간 작업이 계속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철근으로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수많은 동판을 피부처럼 덮었다. 폭이 18미터에 달하는 받침대는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넓이가 약 0.5제곱미터에 달하는 동판은 모서리를 안쪽으로 말아서 서로 이을 수 있게 설계했다. 완성된 거상은 현대의 자유의 여신상이 뉴욕 항을 지키고 있듯 로도스 항구 옆에 우뚝 솟아 있었다.
수 세기는 거뜬히 버틸 수 있을 줄 알았던 거상은 지진이 일어났던 기원전 227년 속절없이 무너졌다. 당시 수많은 건물과 신전이 자취를 감췄고, 기록에 따르면 거상은 무릎이 꺾여 땅으로 넘어지면서 산산조각이 났다고 한다. 지금은 일부 파편만 남아 있을 뿐이다.
시간을 거슬러
2000년 전에 세운 구조물에 현대 공학기술의 잣대를 그대로 들이댈 수는 없다. 어쨌거나 고대에는 전기가 없었고 따라서 전동 기구를 사용할 수도 없었으니까 불공평하다. 다만 ‘역공학(이미 만들어진 시스템을 역추적하여 최초의 설계기법을 추정해내는 기법)’을 이용하여 엄지손가락 및 코 파편의 크기를 바탕으로 거상이 그야말로 거대했다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 거상이 쓰러진 원인은 한 가지, 바로 지진이었다. 겨우 몇 분간 지속된 지진으로 인해 거상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대대로 그 지역에 살았던 로도스 섬 원주민들이 지진에 대해 몰랐을 리 없는데, 지진의 진동을 견딜 수 없는 구조물을 지은 것이다.
도쿄나 샌프란시스코 등 대표적인 지진 지역에서는 건물이 지진의 진동을 이겨낼 수 있도록 설계한다. 지진의 피해는 주로 횡파(땅이 전파 전달 방향과 수직으로 움직이는 것)에서 발생한다. 따라서 건축가들은 건물에 횡파 에너지를 흡수할 수 있는 장치를 설치한다. 또 새 건물을 지을 때 특히 지붕 등에 경량 자재를 사용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언제 지진이 날지 모르는 곳에서 콘크리트 지붕을 이고 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고대 기술자들이 지진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할 정도로 정말 그렇게 자연재해에 무심했을까?
다른 고대 조각상들을 한번 살펴보자. 이집트의 스핑크스는 오랜 세월 무탈하게 살아남았다. 그리스 올림피아의 제우스 상은 1,000년 동안 수차례 거듭된 지진을 무사히 견뎌냈으나 목조였던 탓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연소되고 말았다. 이 두 조각상의 공통점은 모두 앉아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어 무게가 너른 면적에 걸쳐 분산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반면 로도스 섬의 거상은 두 다리로 온 무게를 지탱해야 했다.
피사의 기울어진 탑
무엇이 문제였을까?
피사는 이탈리아 서해안 아르노 강 어귀에 있는 도시다. 12세기까지 무역과 예술의 중심지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르네상스가 꽃피우기 몇 세기 전이었던 당시에는 피사, 피렌체, 베네치아 같은 도시들이 웅장한 종교 건축을 통해 힘을 과시했다.
1100년대 중반 피사에 종교 건축물 세 개가 한꺼번에 지어졌는데 모두 새하얀 대리석으로 겉면을 덮었다. 그중 가장 규모가 큰 건축물이 성당이었고, 그 옆에 세례당과 종탑이 배치됐다. 훗날 세 건물 중 가장 유명해진 종탑 건축은 1173년 시작됐다. 당시는 곡선형 아치가 돋보이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간결한 기둥이 하늘을 향해 치솟은 고딕 양식으로 옮겨가던 시기였고, 이 종탑도 나머지 두 건물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과도기를 대표하는 건축물이었다.
그런데 종탑이 하늘을 향하지 않고 땅을 향해 내려앉기 시작했다. 심지어 똑바로 내려앉지도 않고 한쪽으로 기우는 것이 아닌가? 건축가들은 이미 기울기 시작한 건물이 똑바로 서 있는 듯 보이게 하려고 건물의 수평과 좌우 대칭을 포기한 채 불균형하게 설계를 바꿨다. 그러자 이번엔 반대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건축가들은 이번에도 같은 수를 써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14세기에 이르러 피사의 종탑에 중대한 결함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됐다. 이미 ‘기운 탑’(사탑)이라는 별명까지 생겼다. 그럼에도 공사를 강행하여 1370년 애초 설계대로 8층 높이까지 도달했다. 건물은 완성됐지만 여전히 수직에서 3도가량 기운 상태였다. 그렇게 ‘기운 탑’은 미국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인도의 타지마할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됐고, 매년 수많은 관광객들이 이 건물을 찾아 사진을 숱하게 찍어댄다(건물을 밀어 똑바로 세우는 듯한 포즈가 가장 인기다). 만약 이 탑이 똑바로 지어졌다면 지금과 같은 명성을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쓰러진다, 쓰러진다, 쓰러진다
피사에서 북쪽으로 200킬로미터 떨어진 소도시 파비아의 주민들은 탑이 무너지는 문제와 관련해 피사 사람들보다 할 말이 더 많을 것이다. 1989년 3월 18일 아침 이 도시의 높이 72미터 탑에서 벽돌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불과 몇 분 만에 완전히 무너져 네 명이 숨지고 열다섯 명이 다쳤다. 이 탑은 1060년부터 그 자리에 서 있었고 한쪽으로 기운 적도 없었다. 붕괴 원인은 지금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시간을 거슬러
피사의 사탑이 한쪽으로 쏠린 요인은 크게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바로 불안정한 토양과 부적절한 기초다. 1173년 이 탑을 짓기 시작할 때 그 땅에 이미 대형 성당과 세례당이 세워져 있었던 점을 감안하면, 건축가들이 둘 중 하나를 소홀히 다뤘음이 분명하다. 성당과 세례당 모두 거대한 구조물인데 기운 정도는 육안으로 식별할 수 없을 만큼 미미하다. 반면 종탑은 전체 8층 가운데 3층까지 올렸을 때 이미 북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후 잦은 전쟁으로 여러 번 공사가 중단됐지만 840년에 걸쳐 이 탑을 구하기 위한 작업이 지속적으로 시도되었다. 처음에는 착시효과를 활용했다. 북쪽에 면한 3층 기둥들을 더 길게 만들어 탑이 똑바로 서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 했다. 그러자 1272년 무렵 탑은 지금과 같은 방향인 남쪽으로 기울어졌고, 건축가들은 다시 탑 상층부의 남쪽 기둥들을 더 길게 만들기 시작했다.
20세기에 와서야 탑이 기우는 현상 자체를 바로잡으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최소한 무너지지는 않게 해야 했다. 1911년 과학자들이 측량을 통해 탑 꼭대기가 1년에 0.1센티미터씩 기운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기우는 정도는 갈수록 커지고 있었다.
1989년 파비아에서 비슷한 탑이 무너지자 피사의 사탑 출입이 금지됐다. 세계 각지에서 과학자와 공학자들이 모여들어 이 탑을 구하기 위한 장기 계획을 수립했다. 그렇게 1990년부터 기운 방향과 반대쪽의 건물 밑부분 흙을 조금씩 파내기 시작했다. 무게중심이라는 아주 기본적인 원리에 기초한 작업이었다. 탑은 2001년 다시 공개됐다. 당시 공학자들은 향후 300년 동안 안전하리라 장담했는데, 과연 정말인지는 오직 시간이 말해줄 것이다.
침몰하지 않는 배, 타이타닉 호
무엇이 문제였을까?
당시 선박에는 레이더, 인터넷 연결망, 위성항법장치 등 오늘날 충돌의 위험을 막기 위해 필수적으로 갖추는 기술 장비가 전혀 없었다. 에드워드 스미스 선장과 선원 885명은 맨눈과 인근 배들이 전보로 보내주는 정보에 의존해야 했다. 4월 14일 오후 11시 40분, 드디어 올 것이 왔다. 타이타닉 호가 21노트(시속 38킬로미터)로 캐나다 뉴펀들랜드 남동쪽 640킬로미터 해역을 지나고 있을 때 약 400미터 전방에 빙하가 나타난 것이다. 피하기에는 이미 늦었다. 빙하는 뱃머리 옆 부분과 충돌했다. 이 충격으로 타이타닉호의 우현에 많은 구멍이 생겼다.
열여섯 개 수밀구획(배가 충돌이나 좌초 따위로 침수하는 것을 부분적으로 막아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구획) 중 여섯 개에 물이 밀려들어 왔다. 배는 잠수함처럼 서서히 앞으로 기울며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경보음이 울렸고, 오전 0시 40분부터 승객들이 구명정에 탑승하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여자와 아이 먼저!”라는 외침이 울려 퍼졌다. 갑판 밑에선 선박 내부 각 구역에 물이 밀려들고 있었다. 선체가 무거워지면서 뱃머리가 갈수록 앞으로 기울었다. 일등석을 제외하고 모든 객실이 갑판 아래쪽에 있었다. 출입구와 계단에 찬 물 때문에 빠져나오지 못한 채 배와 함께 가라앉은 승객들이 많았다.
타이타닉 호는 끊임없이 구조요청 전보를 발송하며 인근을 지나는 배가 볼 수 있도록 조명탄을 쏘아 올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배는 계속 기울다가 오전 2시 20분, 마침내 두 동강이 나면서 가라앉았다. 오전 4시, 여객선 카파시아 호가 현장에 도착해 생존자 710명을 구조했다. 거친 물살과 뇌우, 빙하로 인해 타이타닉 호의 목적지였던 뉴욕에 도착하는 데 예상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리하여 참사 나흘 뒤 생존자들이 항구에 도착했고, 무려 4만 명의 인파가 그들을 맞이했다.
시간을 거슬러
타이타닉 호에 적용된 설계 대부분이 공학적 실수를 토대로 결정됐다. 설계자들은 이 배를 열여섯 개 ‘수밀구획’으로 나누고 격벽이라 불린 수직 벽을 각 구역 사이에 설치했다. 배가 무엇인가와 충돌해서 선체에 구멍이 뚫려 물이 들어오면 격벽이 일제히 닫힌다. 물이 들어온 구역은 저수지처럼 차단되는 것이다. 설계자들은 네 개 구역까지 물이 차올라도 배가 계속 떠 있을 수 있으며, 나머지 구역이 물에 잠기지 않도록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론에 따르면 타이타닉 호는 충돌 후에도 며칠 동안 가라앉지 않고 버티다 가까운 항구로 비상 입항할 수 있었다. 선주는 이 수밀구획 설계에 의존하여 임의로 구명정 수를 줄였다. 구명정이 일등석 객실의 전망을 해친다는 이유였다! 타이타닉 호가 싣고 있던 구명정 스무 척은 겨우 1,178명을 태울 수 있었는데, 승객은 전부 2,223명이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명백한 불법행위였다.
타이타닉 호가 물에 뜰 수 있었던 원리를 파악해야 침몰의 원인을 알 수 있다. 타이타닉 호의 길이 268미터, 높이 53미터, 무게 4만 6,000톤에 달하는 거대한 철제 선박이었다. 이렇게 거대한 배가 물에 뜰 수 있었던 이유는 부력 때문이었다. 수밀기획은 배의 밀도를 낮추고 부력을 유지해준다. 하지만 한 구역에 차오른 물이 넘쳐 옆 구역으로 넘어갈 경우 배 안에 머물며 부력을 만들어내던 공기가 밖으로 밀려나가고, 이 때문에 배가 오히려 더 빨리 침몰하게 된다.
바로 이 최악의 시나리오가 타이타닉 호에서 전개되었다. 각 격벽의 높이가 충분하지 않아서 물이 새어 들어온 뒤 옆 구역으로 흘러넘쳤다. 네 개 구역이 물에 잠겨도 버틸 수 있도록 설계됐는데, 여섯 개 구역에 물이 차오른 것이다. 결국 설계자의 의도대로 인근 항구에 닿기까지 버티지 못하고 곧바로 침몰하고 말았다.
부력의 기본 원리
특정 물체의 밀도가 물보다 낮으면 물에 뜬다. 밀도가 부피와 무게에 의해 좌우된다. 타이타닉 호는 엄청나게 무거웠지만 동시에 거대했고, 객실, 연회장, 복도 등 곳곳에 공기가 차 있었다. 그러나 물이 밀려들어오면서 부력을 잃어 가라앉고 말았다.
보스턴 당밀 홍수
무엇이 문제였을까?
수요일 정오를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당시 보스턴 전역은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두 달 전 끝났고, 젊은 베이브 루스가 이끌던 메이저리그 레드삭스팀이 3년 만에 두 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무엇보다 아직 겨울인 1월에도 화창한 날씨가 며칠째 이어지며 따사로운 봄의 기운을 전하고 있었다.
한편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산업지구 노스엔드는 그날도 바삐 돌아가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일부 근로자들은 야외로 나와 미국 인더스트리얼알코올컴퍼니의 당밀 탱크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곡선 형태 판금으로 제작된 이 탱크는 높이가 15미터에 달했고 액상 설탕인 당밀로 가득 차 있었다.
오후 12시 40분, 탱크에서 우르릉 하는 굉음이 들렸다. 이어 무슨 소리인지 추측해볼 겨를도 없이 2.5미터에서 7.5미터 높이의 당밀 파도가 탱크에서 솟구쳐 나와 거리를 뒤덮였다. 당밀은 시속 56킬로미터라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시가지를 휩쓸었다. 당시 보스턴 거리에 이보다 빠른 차는 없었다.
《보스턴이브닝글로브》 지는 현장을 이렇게 묘사했다. “거대한 탱크의 파편이 허공을 날아다녔고, 주변 건물들은 받침대를 뽑아버린 듯 구겨지기 시작했으며, 무너진 건물 잔해에 수십 명이 매몰됐다.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사람들은 이 당밀 홍수를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했다. 쓰나미에 비유하는 이들도 있었다. 당밀 파도가 지나간 자리에는 무너진 고가철도와 구겨진 건물, 전복된 차량 잔해가 끈적거리는 액체와 뒤엉켜 나뒹굴었다. 현장에 도착한 의료진은 부상자들에게 접근하기 위해 허리까지 차오른 당밀 바다를 헤치며 이동해야 했다. 뒷수습에 수개월이 소요됐고, 당밀을 씻어내고 흡수하기 위해 엄청난 소금물과 모래가 투입됐다.
시간을 거슬러
당시 공학자들은 탱크의 구조적 결합과 겨울답지 않게 따뜻했던 날씨가 복합적으로 작용해 폭발로 이어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하지만 피해자와 유족들은 미국 인더스트리얼알코올컴퍼니를 고소했다. 그러자 이 당밀 회사는 곧바로 정치적 극단주의자들이 탱크에 폭탄을 설치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당밀 홍수에 철로를 잃은 보스턴고가철도 역시 고소 대열에 합류했다. 이 철도회사는 탱크 폭발이 당밀 회사의 과실 때문임을 입증하기 위해 찰스 스포퍼드 교수 등 저명한 공학자들을 기용했다. 스포퍼드는 탱크의 잔해를 케임브리지에 있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 연구실로 가져갔다.
정밀 검사와 실험을 거친 뒤 스포퍼드는 탱크를 만드는 데 사용한 금속판이 너무 얇아 내부에 담겨 있던 당밀의 압력을 견디지 못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더욱이 금속판을 이어 붙이는 데 쓰인 리벳(대갈못)의 양이 충분하지 않아 압력이 커지면서 리벳이 버티지 못하고 튀어나왔던 것으로 유추되었다. 목격자 진술도 이런 결론을 뒷받침했다. 사람들은 “기관총을 쏘듯” 탱크에서 리벳이 튀어나와 여기저기 날아다녔다고 말했다.
결국 폭탄이 설치됐다는 주장은 입증되지 않았고, 탱크 설계에 문제가 있었음이 분명해졌다. 수사관들은 탱크 제조 과정을 점검해 더욱 확고한 증거를 찾아냈다. 1915년 탱크 제조를 감독했던 이는 건축가도 공학자도 아니었다. 심지어 설계도도 읽을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지역 주민들은 탱크가 가동된 첫날부터 액체가 새어 나왔다고 지적했다. 회사는 이런 문제를 바로 잡기는커녕 탱크 전면에 갈색 페인트를 칠해 눈속임을 하려 했다.
액체가 액체 상태를 벗어날 때?
당밀 홍수가 더욱 괴상했던 이유 중 하나는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당밀은 과학자들이 ‘비뉴턴 유체’라고 부르는 흥미로운 물질이다. 케첩, 치약, 생크림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데, 비뉴턴 유체는 힘을 가하면 점도(끈적거림)에 변화가 생긴다. 케첩병을 그냥 기울이고 있으며 케첩이 잘 나오지 않지만 힘껏 흔들면 내용물이 일시에 쏟아져 내린다. 탱크 안의 당밀도 높은 압력을 받고 있었다. 그러다 탱크가 폭발하면서 그 힘이 작용해 기관총알처럼 사방으로 분출한 것이다.